| 저자 |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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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 김준우 |
| 출판일 | 2011-11-15 |
| 가격 | 14,000원 |
| ISBN | ISBN 978-89-97339-00-6 94230 |
첫 번째 크리스마스
복음서들은 예수의 탄생에 관해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336쪽
오늘날 최고의 예수 전문가 두 사람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의미들을 당시의 역사적 및 종교적 상황과 연관시켜 밝혀준다
예수 탄생 이야기들은 사실들인가, 우화들인가, 아니면 비유들인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문자적/생물학적 진리인가, 종교적 진리인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 어디서, 왜 생겨났는가?
예수의 족보들은 왜 서로 다르며, 당시에 왜 반드시 필요했는가?
마태는 왜 요셉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간음을 의심하게 만들었는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탄생 장소는 구약성서에 미리 예언되었는가?
어둔 세상의 빛은 누구인가? 빛의 신 아폴로인가, 아니면 예수인가?
1%가 99%를 지배하는 세상의 희망은 무엇인가? 제국인가, 예수인가?
"예수의 두 가지 족보들에 대해, 구약성서를 예언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주님"과 "메시아"와 같은 칭호들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리고 빛과 어둠의 대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서 밝혀준다. 명저일 뿐 아니라 흥미진진하다."
- The Dallas Morning News
"보그와 크로산은 예수 탄생 이야기를 새롭게 보도록 도와주며, 그 의미를 1세기와 21세기의 맥락 모두에서 찾아내고 있다."
- The Times-Picayune
"이 책은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요롭게 해준다. 독자들은 여기서 예수의 탄생과 그의 생애가 처음 교회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통찰력을 발견할 것이며 또한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의미를 분별하도록 도전받을 것이다."
- Brian McLaren, A New Kind of Christian의 저자
"보그와 크로산이 새롭게 들려주는 예수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생각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 Walter Brueggemann, {예언자적 상상력}의 저자
ISBN 978-89-97339-00-6 94230
값 14,000원
예수 탄생 이야기에 대한 정치-사회학적인 해석은 리차드 호슬리가 {크리스마스의 해방}(E. 1989, 손성현 역, 2000)에서 이미 방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매우 탁월하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유대인들의 저항운동들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과 복음서 본문의 정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느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와 그의 족보들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 또한 요셉이 마리아의 간음을 의심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던 이야기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못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에 대해 문자적-사실적 접근방식이 아니라 은유적-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처녀를 통한 신적인 잉태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유대인 전승과 그리스-로마 전승을 자세히 분석한다. 저자들은 로마제국과 하나님의 제국 사이의 대충돌이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모체라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예수와 모세의 관계, 구약의 예언서들에 언급된 메시아 예언들과 그 약속의 성취의 문제를 해명할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제국신학"의 토대가 무엇이었으며, 복음서 기자들은 어떻게 그 제국신학을 한 방에 날려버렸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즉 예수 당시에 이미 "신의 아들"이며 "주님"과 "구세주"로 숭배되고 있었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아폴로 신의 아들로서 기적적으로 출생한 이야기와 더불어 천 년 넘게 이어진 그의 족보에 맞서서, 복음서 기자들은 어떻게 예수의 기적적인 동정녀 탄생 이야기들과 그의 족보들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가져다 준 "지상의 평화"와 나사렛 예수가 가져다 준 "지상의 평화"는 어떻게 서로 다르며, 또한 황제가 선포한 "복음"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복음"은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밝혀준다. 저자들은 예수 탄생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결국 예수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1%가 99%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를 "주님"으로 섬기고 있는가? 세계 금융과 정치와 군사력, 학문과 예술과 매스컴까지 장악한 "유대인 파워"와 그 제국에 빌붙어 부스러기를 챙기며 민중을 외면하는 껍데기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세계 대청소"라는 종말론에 적극 참여하는 사랑의 촛불이 될 것인가?
목차
서문
1부. 비유, 전주곡, 그리고 상황
1장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들 … 15
2장 전주곡으로서의 비유들 … 41
3장 크리스마스 이야기들의 상황 … 79
2부. 족보, 잉태, 그리고 탄생
4장 족보와 운명 … 111
5장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다 … 135
6장 다윗의 도성 베들레헴에서 … 173
3부. 빛, 성취, 그리고 기쁨
7장 어둠 속에 비친 빛 … 227
8장 예수는 예언의 성취 … 261
9장 온 세상에 기쁨이 … 295
부록 1.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예수 족보 … 318
부록 2. 누가복음에서 예수와 세례 요한 사이의 병행구 … 323
부록 3.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소년 시절 … 325
옮긴이의 말 ...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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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수 ‘666’과 로마의 제국주의(묵 13:15-18)
-이병학·한신대 신학과 교수 (한미 FTA 국회 비준 반대를 신학적으로 지지하는 한신대 이병학 교수가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수 ‘육백육십육’을 중심으로, 제3세계 신학자로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시장 경제적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성서해석에 관한 기고글을 보내와 전문을 싣는다) I. 서론적 성찰 요즈음 한미 FTA 국회 비준을 반대하는 대중적 집회들이 연일 긴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무역조약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치명적인 위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경제적 세계화와 경제적 블록화는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실직자들과 희생자들을 생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세계화는 제삼세계의 힘없는 정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이다. 국제 금융 기구들로부터 여러 해에 걸쳐서 단기 융자와 장기 융자를 받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채무국들은 시장 개방의 결과로 인한 지역 경제의 황폐화와 엄청난 부채의 증가가 야기한 1980년대의 외환 위기의 해결책으로 지역경제를 완전히 황폐화시키는 “구조 조정 프로그램”과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라는 용어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그리고 지구적 기업들의 욕구에 일치하게 지역 경제를 완전히 개편하는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한국 정부가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과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이후 한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또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조기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해 전에 해고된 한 여성 노동자는 동료들의 정리 해고를 결정한 회사의 방침을 철회시키기 위해서 조선소의 35 미터 높이의 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오늘로 300일째를 넘기면서 아직도 항의하고 있다. 경제적 세계화는 국제 금융 기구들과 무역조약을 통해서 민족 국가의 정부들의 고유의 주권을 지구적 기업들에게로 점진적으로 이동시켜왔다.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 협정의 발효에 따라서 1945년에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이 설립되었으며, 1948년에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 설립되었다. GATT의 권력의 핵심은 가맹국들에게 자국의 법률, 규정, 그리고 행정적 절차를 GATT의 본문에 일치시키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다. 1986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우루과이 라운드(Uruguay Round) 협정에 의해서 1995년에 GATT를 대체하여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는 GATT의 권위를 훨씬 더 강화시킨 제도적 장치이다. 세계무역기구는 지역 경제의 독립을 국내법으로 보호하는 체제를 지구적 자본에 의해서 명령된 체제로 변경시키기 위한 구조를 만들었다. 따라서 지구적 기업들은 기업의 이익에 장애가 되는 국내법들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서 민족 국가의 정부들을 국제무역기구에 제소할 수 있다. 한미 FTA는 역시 투자자 국가 소송제도(ISD)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한번 개방된 수준은 어떠한 경우에도 예전 상태로 되돌려질 수 없게 하는 이 무역 조약의 역진방지 조항(=래칫 조항)은 한국에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세계화의 주창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도그마처럼 신봉하면서 전파하는 지배적인 담론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총생산에 의해 측량되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인간의 진보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② 정부의 규제가 철폐된 자유 시장이 가장 효율적이고 사회적으로 최적의 자원 분배를 초래한다. ③ 경제적 세계화는 경쟁을 자극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소비자 가격을 하락시키고,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히며,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혜택을 제공한다. ④ 역할과 자산을 정부로부터 개인적인 분야로 이동시키는 사유화가 효율성을 증진시킨다. 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소유권과 계약을 보호하고 상업의 추진에 필요한 하부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깊숙이 침투한 이 신자유주의적 담론은 기만적이다. 아담 스미스(1723-1790)는 자유 무역을 식민지 인민들이 반항하는 제국의 독점가들의 요새로 보았기 때문에 자유 무역을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그가 실제로 구상하였던 경제적 환상은 규제가 완전히 철폐된 자유 시장 혹은 자유 무역이 아니라, 구매자와 매매자가 가까운 범위에서 거래하는 지역 시장이었다. 오늘날 시장주의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이라는 용어를 자주 애용하고 있지만, 그 용어는 1776년 런던에서 초판으로 출판된 그의 방대한 저서인『국부론』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그는 그 책에서 한 개인이 자기 자본을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외국에 투자하지 않고 국내 상업에 투자하는 것이 본래 자기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취업의 기회와 소득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공익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기여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힘없는 정부들에게 강요된 규제가 없는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에서는 그러한 작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을 선전하는 제국의 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민주주의 사회에 부적합한 이단으로 내몰릴 수 있으며, 또한 이로 인해서 자신의 직업과 경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신학계에서도 예수가 로마의 제국주의에 의해서 처형된 희생자이지만, 반제국주의적 시각의 신약성서 연구는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연구는 불온한 것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심지어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을 섬기는 “기독교적”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있다. 요한묵시록 13:15-18은 1세기 말엽의 로마제국의 제국주의적 경제 체제에 대한 고발과 기독교적 공동체의 저항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이 본문을 주변화된 약자들과 희생자들의 눈으로 읽고 해석하고자 한다. 나는 이 작은 성서연구가 오늘의 남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의식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II. 로마의 제국주의의 상징으로서의 육백육십육 밧모 섬에 반란자로 유배된 요한은 두 짐승들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묵 13: 1-10)은 제국의 짐승으로서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를 관철하는 로마제국을 상징한다. 그 짐승의 모든 권력은 천상적 전투에서 패배하여 치명상을 입은 채로 하늘에서 추방당하여 지상으로 내려온 용으로부터 주어졌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묵 13:11-18)은 식민지의 짐승으로서 제국의 짐승으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부여받고 제국을 섬기고,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합법화하고 선전하는 식민지 본토의 토착 엘리트들을 상징한다. 식민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황제예배에 참여하고 제국의 담론을 수용한 것은 식민지의 짐승의 선전과 협박의 결과였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난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13:15-18). 땅에서 올라온 짐승, 곧 식민지의 짐승은 유혹과 압제를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예배하도록 설득하였다. 여기서 사람들의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가 찍혀 있다는 것은 동물들이나 노예들에게 찍힌 물리적 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짐승의 표가 찍힌 “오른 손”은 제국에 충성하는 우상 숭배자들의 행위를 의미하고, “이마”는 그들의 생각을 의미한다. 짐승의 표가 찍힌 사람들은 생각과 행위를 통해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곧 제국의 짐승을 예배하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짐승의 표는 제국의 담론을 의미하는 은유이다. 제국의 담론은 짐승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행위와 생각에서 식별된다. 제국의 담론은 짐승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시장에서 사고팔 수 없을 정도로 로마의 경제계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짐승의 추종자들은 제국의 권력구조에 순응하고, 또 스스로 협력한다. 그들은 매매가 이루어지는 제국의 시장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여 이익을 얻는다. 반면에 짐승의 표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에서 배제되어 사거나 팔 수 없었다. 이것은 그 당시의 경제적 활동은 지배적인 담론에 대한 순응과 동화를 통해서만 가능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예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간주되어 박해를 당하였고 심지어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짐승의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17절)이다. 요한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18절)고 말한다. 놀랍게도 그가 지금까지 짐승에 대해서 말해온 것은 자연의 동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 혹은 인간이 만든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런데 짐승의 수인 “육백육십육”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의 모든 서구 신학자들은 육백육십육이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네로 황제(Νερων Καισαρ)의 히브리어 음역인 רסק ןורג을 게마트리아(gematria) 방식으로 계산하면, 그 이름의 값이 육백육십육이 되기 때문이다. 게마트리아 방식은 고대인들이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의 알파벳 문자에 숫자적 값을 부여하여 어떤 단어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 방식은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의 처음 아홉 문자에 1부터 9까지의 수를 차례로 부여하고, 그 다음 아홉 문자에 10부터 90까지의 수를 부여하고, 그리고 그 다음 아홉 문자에 100부터 900까지의 수를 부여한다. 이 방식을 네로 황제에 적용하면 ג=50, ר=200, ו=6, ן=50, ק=100, ס=60, ר=200이다. 이 숫자들을 합하면 666이 된다. 물론 요한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그리스어 용어를 히브리어로 그리고 히브리어 용어를 그리스어로 음역할 정도로 두 언어에 익숙하다(9:1; 16: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게마트리아 방식으로 계산된 육백육십육이 네로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이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 사회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소수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요한의 수신자들이 게마트리아 방식에 익숙하였을 것으로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하느님이 칠일 동안에 창조를 완성한 것처럼(창 1장), 유대교적 전통에서 칠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반면에, 육이라는 숫자는 완전에 미달하는 불완전을 의미하기 때문에 육백육십육(666)은 요한이 짐승의 불완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육이라는 숫자를 세 번 겹쳐서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들이 학계에서 정설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제삼세계 신학자로서 육백육십육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거의 모든 숫자들은 구약과 연관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묵시록에서 자주 나오는 천이백육십일 혹은 “마흔 두 달”(=1260일)에서 마흔 둘이라는 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서 마흔 두 곳에 진을 친 후에(민 33장)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육백육십육”은 역시 구약성서로부터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육백육십육”이 구약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두 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그 외에 또 상인들과 무역하는 객상과 아라비아의 모든 왕들과 나라의 고관들에게서도 가져온지라”(왕상 10:14-15).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그 외에 또 무역상과 객상들이 가져온 것이 있고 아라비아 왕들과 그 나라 방백들도 금과 은을 솔로몬에게 가져온지라”(역하 9:13-14). 내용상 일치하는 이 두 인용문들에서 언급된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는 솔로몬이 그의 왕권의 번영기에 조세로 징수한 액수였다. 솔로몬 왕은 무거운 조세로 인민을 수탈하여 자신의 재산을 증가시켰고, 사치스러운 생활하였고, 무기를 만들고, 여러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고, 그리고 무역을 통해서 이교적 우상숭배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솔로몬 왕국의 분열의 원인들이 되었다.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의 무게는 20톤이 넘는다. 그가 그처럼 엄청난 양의 금을 조세로 징수하였다는 것은 솔로몬 왕국의 화려함의 이면에 인민의 피를 짜내는 경제적 착취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열왕기상과 역대기하에서 언급된 “육백육십육”은 솔로몬 왕권의 경제적 억압과 불의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상징적인 수로 억눌린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로마제국은 로마의 평화를 선전하였지만, 그것은 압제와 착취로 유지되는 거짓 평화였다. 요한묵시록이 작성되었을 당시의 지배자인 도미티안은 황제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들로 규정하고 그들을 세련된 방법으로 박해하였다. 그는 높은 조세와 재산 몰수와 배제를 통해서 그들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은 전 세계를 군사적으로 정복하고,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로마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제국의 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짐승의 수" 혹은 "짐승의 이름"을 “육백육십육”이라고 풍자적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요한은 그의 수신자들에게 짐승의 수를 알기 위해서 지혜를 가지라고 권고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이 짐승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는 짐승의 위장된 제국주의 체제가 구약성서에 언급된 육백육십육이라는 숫자로 풍자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지혜, 즉 영적 지각력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요한묵시록의 육백육십육은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인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로마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수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III. 맺는말 요한묵시록 13:15-18은 경제적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의 현실을 분석하고, 오늘의 짐승을 호명하고, 그를 이길 수 있는 영적 힘을 제공한다. 놀랍게도 요한묵시록이 집필된 1세기의 소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 오늘의 상황 사이에는 아주 비슷한 유사성들이 있다. 오늘의 짐승은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이다. 오늘날에도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의 표가 없는 사람들은 세계 시장에서 배제된다. 그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은 패배당하고, 배제당하고, 빈곤과 때 이른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다. 오늘의 짐승은 그 당시의 짐승보다 더 탐욕스럽고, 그리고 더 폭력적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짐승의 권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오늘의 짐승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을 거부할 것이며, 짐승에게 협력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하여 경제적 제국주의에 맞서면서 짐승에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증언의 힘으로 용과 그의 무리를 정복한 순교자들과 죽은 증인들이 하늘에서 하느님과 어린양을 예배하고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것을 듣는다면, 그리고 땅을 망하게 하였던 로마의 제국주의자들과 부역자들을 심판한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을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축하하는 탄성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은 미디어의 선전을 통해서 날마다 주입된 제국의 담론의 마취에서 풀려나서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에게 충성하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하느님과 어린양 예수에게만 충성하는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에서 경제적 제국주의의 희생자들은 망각되고 배제되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들의 고난과 투쟁과 희망을 기억하고, 그들과 정신적으로 연대하여 그들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는 지구적 자본과 시장의 제국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비폭력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짐승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말씀에 의지해서 불의에 저항하는 소박한 사람들이다. 기도하고, 노래하고, 항의하는 무력한 자들의 힘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
<첫 번째 크리스마스>(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 서평
동정녀 탄생의 은유적이며 정치신학적인 의미
김준우(한국기독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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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까지 한 달 남짓 이어지는 대림절기는 매일 역사의 어둠 속에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새롭게 느끼면서 예수처럼 후천개벽을 꿈꾸는 절기인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다시 재림하실 구세주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절기인가? 1%가 99%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세상, 자본과 제국의 지배 아래 전혀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오늘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을 만큼 악마가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대림절기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김진숙 위원이나 안철수 교수처럼) 자기 비움을 통해 우리의 현실로 만들어나가려고 다짐하는 절기인가, 아니면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희망과 운명을 다시 내맡기는 절기인가? 하루 평균 마흔 세 명이 자살하는 생지옥과 같은 나라에서,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6백만 명인 나라에서, 북녘의 아이들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인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북한에 식량 원조는 중단한 반면에 미국의 무기 구입에 매년 수십 조원씩 쏟아 붓는 나라에서, 전시작전권은 미국이 돌려주겠다고 해도 마다하면서 중국의 코앞에 미군 핵잠수함 기지를 건설하는 나라에서, 또한 새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더 이상 친일파 청산 노력과 광주학살과 6월 항쟁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역사청산과 후천개벽은 세례 요한이 가르친 것처럼 하나님의 강권적이며 초자연적인 개입(미륵하생)을 통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한 분 하나님"(신 6:4)의 대자대비와 "아빠"라고 부를 만큼 친근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서로 사랑과 나눔과 섬김을 통해 만들어나가야 할 나라(미륵상생)인가? 대림절기는 산모 하나님(에카르트)의 비통한 눈물과 거룩한 분노를 헤아리며 예수처럼 현실을 박차고 일어서는 절기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다시 단단하게 붙잡는 절기인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외아들로 높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애당초 그분은 우리와 DNA가 다른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죄인들은 그분이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시는 좁은 십자가의 길, 자기 비움의 길을 따라갈 엄두조차 낼 수 없다는 우리의 핑계를 정당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온몸으로 살아낸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우리 마음과 생각과 생활의 초점을 맞추는 수행으로서의 찬양과 경배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질문들을 묻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복합적인 위기들, 즉 국제금융위기와 재정위기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에너지위기, 기후위기, 식량위기, 그리고 대멸종 위기는 예수와 바울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위기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아무리 막강하고 잔인했다 하더라도 예수와 바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견딜 수 있었다. 세례 요한조차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심판 이후의 세상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후대전"으로 인한 인류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자기파멸까지도 예상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이다. 더군다나 최근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5년뿐이며, 2017년 이후에는 온실가스 농도를 450ppm 이하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한겨레, 2011/11/11). 이것은 현재의 온실가스 방출 추세로 볼 때, 지구 평균기온이 2040년경에는 섭씨 2도가 상승할 것이며 2070년경에는 섭씨 4도가 상승하게 되어 북반구의 대도시들은 최소한 그 두 배 이상 상승하게 되며, 아마존 숲의 85%가 파괴될 것으로 예측해왔던 기후과학자들의 최후통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 방출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미국과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방출하는 국가들이 그 방출량의 정점을 2015년으로 정하고 그 후 연간 3%씩 감축한다면 섭씨 4도 상승 이내로 제한할 가능성이 반반이지만, 현재로서는 4도 상승 이내로 제한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결국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수십 억 명이 죽게 될 것이라는 기후과학자들의 악몽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행복과 생존문제와 직결된 위기들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위기들을 외면한다. 일차적으로는 정부와 기업과 대학과 종교가 이런 위기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설마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랴" 하는 안이함과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속성, 정부 같은 큰 기관의 주장을 믿고 싶어하는 심리, "남들도 똑같이 당하는 거면 괜찮다"는 생각(정태인, "기어이 난파선에 타려는가?," 한겨레 21, 882호: 2011년 10월 24일, 18)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대림절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2
{첫번째 크리스마스}(2007)는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함께 쓴 세 권의 책들 가운데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이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2006)이며 마지막 책이 {첫 번째 바울의 복음}(2009)이다. (세 권 모두 번역이 되었지만, 현재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중심 출판사가 절판시켜 구할 수 없다. 조만간 한국기독교연구소가 다시 출판할 계획이다). 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주도하여 200명 남짓한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 세미나]를 결성한 이래로 보그와 크로산은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종교적 배경은 보그가 루터교 출신이며 크로산은 가톨릭 출신이다. 성격적으로는 보그가 훨씬 온화하며 글쓰기도 친절한 반면에, 크로산은 아일랜드 출신답게 제국의 지배 문제에 대해 훨씬 민감하며 역사-사회학적 분석에서 훨씬 치밀하다. 예수 이해에서는 보그가 기본적으로 예수를 "종교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반면에, 크로산은 예수를 "사회적 혁명가"로 이해한다. 이처럼 서로 관점을 보완할 수 있는 두 학자가 함께 쓴 이 책들은 최근의 대표적인 신약학자들의 예수 이해와 바울 이해의 핵심을 쉽게 정리한 결정체들이라 하겠다.
이 책은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풍부하며 도전적인 의미들을 밝힌 책이다. 예수 탄생 이야기들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석은 이미 리차드 호슬리가 {크리스마스의 해방}(손성현 역, 2000)에서 방대한 자료들을 검토하여 탁월하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유대인들의 저항운동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복음서 본문들의 정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느라, 동정녀 탄생 이야기와 예수의 족보들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 또한 마태가 요셉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간음을 의심하여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초대 교회 이래로 예수가 "사생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았다.
보그와 크로산은 우선 예수 탄생 이야기들에 대해 문자적-사실적 관점이 아니라 은유적-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 이야기들의 사실성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그 이야기들의 의미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고대의 본문들을 고대의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결론은 예수 탄생 이야기들은 "비유로 쓴 전주곡"으로서 각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전체의 내용과 형식의 "축소판"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문자적-사실적 관점에서 믿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입장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며, 원죄 없이 태어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흠없는 제물의 필수조건이라고 믿는다. 예수가 실제로 동정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보그와 크로산은 간단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과학적-산부인과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미신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둘째로, 저자들은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상황(context) 혹은 모체(matrix)가 로마제국과 하나님 나라의 대충돌이며, 예수 탄생 이야기들이 당시 세상을 뒤집어엎은 것은 제국신학의 핵심적인 토대를 붕괴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그리스-로마 문헌들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저자들은 우선 예수보다 먼저 어떻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신의 아들", "구세주", "주님", "평화를 주신 분", "온 세상의 빛"으로 숭배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당시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한 세기 동안 계속된 혼란과 내전을 종식시킨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이런 칭호들을 붙여 숭배한 것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이어서 저자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폴로 신의 아들로서 기적적으로 출생한 이야기와 비너스 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족보에 맞대응할 뿐 아니라,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나사렛 예수가 로마 황제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신의 아들", "구세주", "주님", "평화를 주신 분", "온 세상의 빛"이라는 점을 고백하고 변증하기 위해 처음 제자들은 동정녀 탄생 이야기들과 예수의 족보들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라와 한나의 임신처럼 단순히 신적인 잉태가 아니라 예수의 탄생이 반드시 "동정녀에 의한" 신적인 잉태여야만 했던 정치적-신학적인 이유를 밝힌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는 대응할 수 없었지만, 제국이 지배이데올로기로 선전한 제국신학에 대해서는 초기 크리스천들이 창조적인 신학으로 맞대응하고 자신들의 신앙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셋째로, 저자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해결책과 관련하여,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을 성서의 종말론과 연관시켜서 처음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한다. 예수의 처음 제자들은 다윗 가문의 (폭력적인 戰士 메시아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메시아로 고백함으로써, 1세기 유대교 안에서 메시아니즘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저자들은 "왜 유독 마태만 신에 의한 임신이라기보다는 간음에 의한 임신이라고 의심받을 수 있는 구절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집어넣었는가?"(141)라고 질문을 제기한 후, 그 해답을 모세의 잉태와 출생에 관한 당시의 미드라쉬들을 분석하여 명쾌하게 해명한다. 또한 저자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베들레헴 탄생, 이집트로의 탈출 등의 이야기들이 구약성서에 예언된 것인지에 관해 해명한다.
넷째로, 저자들은 "미국은 새로운 로마제국"(309)라는 관점에서,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현재적인 의미를 밝힌다. 저자들은 특히 "대림절기와 크리스마스는 본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것이다"(312)라는 관점에서, 초자연적인 종말론, 혹은 개입적 종말론이 아니라 참여적 종말론 혹은 협력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세계 변혁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과 꿈에 기독교인들이 기쁨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3.
이 책을 번역하면서 분명해진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신약성서 안에 "평화"라는 단어는 100번 나오는 반면에 "화해"라는 단어는 고작 네 번 나온다는 사실(Willard Swartley, Covenant of Peace, x)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기독교 신학은 왜 예수, 하나님 나라, 구원, 교회의 사명, 종말론을 일차적으로 "평화"가 아니라 "화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왔는가? 또한 기독교가 이처럼 "화해"에 초점을 맞추었으면서도 줄곧 사람들 사이를 신자/불신자로 갈라놓고 의인/죄인으로 양분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종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같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도 교파들로 나뉘어져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종교재판과 종교전쟁과 같은 폭력도 불사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처럼 기독교 안에서조차 자신은 "구원받은 자"인 반면에 다른 교단들은 "잘못 믿는 사람들" 혹은 "저주받은 자"로 규정하여 서로 간에 "주님의 마지막 만찬"도 허락하지 않은 채, 같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서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는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더군다나 기독교가 이제까지 "화해"를 개인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과 이루는 "화해" 즉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심리적인 화해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성별과 사회계급들 사이 혹은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화해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생태학적인 화해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이처럼 심리적 차원의 화해, 즉 "마음의 평화"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 신학은 또한 "평화"를 미래 종말론의 차원에서 소망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원인은 무엇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학이 신약성서의 핵심을 외면해왔다는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서 기독교 교리와 신학 전체의 신빙성을 의심하도록 만든 결과를 초래한 신학적 원인들은 무엇인가?
기독교가 테리 이글턴의 지적대로 "예수가 가까이 했던 하층민과 반식민주의의 비밀투사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약속이 아니라 교외에서 안락하게 사는 부유층이 주축인 신앙이 되어버린"({신을 옹호하다}, 79쪽) 탓인가? 아니면 "정치권력에 맹종해왔던 중세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형성한 교회 전통"(Willard Swartley, x) 탓인가? 심지어 "교회가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는 복음서 해석을 제시한 적이 없다"(테리 이글턴, 132쪽)고 비판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의 권력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기는커녕 거짓말쟁이 정치인과 부패한 은행가들, 광적인 네오콘들의 혐오스러운 위선의 도구가 되었으며, 교회 자체도 엄청나게 돈을 버는 산업이 되었다"(테리 이글턴, 80쪽)고 비판을 받게 되었는가?
현재 우리가 봉착한 복합적인 위기들이 더욱 악화될수록, 기독교는 그 모든 재앙들의 책임과 해결책을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전가할 것인가? 결국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봉착한 위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기독교가 또 다시 비폭력적인 메시아를 거부하고 폭력적인 종교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난 4백여 년 동안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린 초자연적 유신론에 아직도 기초를 둔 기독교의 승리주의와 제국주의를 극복할 길은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전대미문의 집단적인 살육과 고통, 후천개벽을 향해 나아가는 연약한 자들의 저항 속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태어난 분"의 믿음(278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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