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인 회의에 시달리다가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먼 길을 걸어오신 여러분들이 앞으로 더욱 진실을 통해 자유롭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신앙에 많은 충격을 받기 쉽습니다.
영혼이 성숙하는 길이란 항상 낡은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는 일이기에
남들이 가르쳐준 진실을 때로 벗어버려야 하며 스스로 새로운 옷을 만들어야 하는 일처럼
또는 그동안 익숙하던 지도를 고쳐가면서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는 일처럼
진리에 헌신한다는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해 씨름해야 하는 과정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격을 덜 받으면서 책을 읽는 순서를 현재까지 저희 연구소가 발행한 책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단계별로 추천합니다. 

I. 내 영혼의 성숙을 위한 여행을 하기 위해 마음 준비하는 단계

1. 존 디어 신부의 <예수의 평화영성>과 윌리엄 슬로언 코핀 목사의 <나는 믿나이다>,

그리고 홍정수 박사의 <베짜는 하느님><사도신경 살아내기>,

레슬리 웨더헤드 목사의 <하나님의 뜻>은 교회에서 잘 듣지 못했던 참신한 해석을 접할 수 있습니다.
2. 존 캅의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교회 다시 살리기>

II.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내가 가진 지도가 틀림없고 쓸만한지를 확인하는 단계 

1.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 <새로 만난 하느님> <예수의 의미>
2. 월터 윙크의 <예수와 비폭력 저항>

3. 존 도미닉 크로산 & 조나단 리드의 <예수의 역사: 고고학과 주석학의 통합>

III. 나에게 익숙했던 옛 지도를 수정하기 위해 대가들에게서 한 수 배우는 단계 

1.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첫번째 크리스마스>와 <첫번째 바울의 복음>(마커스 보그와 공저), <가장 위대한 기도>
2. 존 쉘비 스퐁 & 잭 스피로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와 날개>
3. 로버트 펑크의 <예수에게 솔직히>
4. 리처드 호슬리의 <예수와 제국>와 버튼 맥의 <잃어버린 복음서 Q>
5. 존 쉘비 스퐁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성경을 해방시켜라> <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
                                 <예수를 해방시켜라> <성경과 폭력>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6. 로이드 기링의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
7. 리처드 루벤슈타인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IV. 고쳐진 지도가 현실과 나에게 잘 맞는지를 확인하며 더욱 넓은 신앙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단계

1. 버나드 브랜든 스캇의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2.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3. 그레고리 라일리의 <하느님의 강>
4. 돈 큐핏의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떠나보낸 하느님>

V.  개인주의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과 열정에 철저하게 헌신했던 예수의 삶과 정신을 오늘의 현실에서 계승하기 위한 단계 

1. 토마스 베리 신부의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2. 샐리 맥페이그의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3. 김준우,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


그리고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책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누가 사람이냐>, 토마스 핸드의 <동양적 그리스도교 영성>, 존 웰치의 <영혼의 순례자들>을 추천합니다. 

 

 

역사적 예수, 아직도 충분히 알 수 없는가?

   
김준우 교수

1.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동안 많은 학문적 결실을 내었지만, 아직도 역사적 예수를 “충분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예수가 살았던 시대상황, 예수가 대결해야 했던 문제들, 예수의 믿음, 예수의 전략 등등에 관해 이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지혜의 아들로 고백되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2. 우리가 예수에 대해 더 이상 무엇을 알아야만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예수가 정말로 요셉의 아들인지 아니면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사생아인지, 목수 일을 했는지 아니면 농사일을 했는지, 세포리스나 티베리아스에서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을 했는지, 인도에 갔었는지, 결혼을 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학자들이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밝힐 수 있다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도대체 이런 문제들이 우리의 삶과 관련해서 무엇이 그리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3. 그런 문제들이 매우 중요하기에, 혹은 결정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에 아직 풀리지 않아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실제로는 “역사적 예수를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4. 내 생각에는 역사적 예수를 알게 되면 될수록, 나에게 개인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혼자서 다 감당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생각되거나, 혹은 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완성을 위한 요구이지만, 역사적 예수는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 예수의 제자로서 살기를 요구한다. 그 요구에 따르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핑계로 내세우는 것은 아닐까?

5. 예수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나사렛 촌놈이라고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권력을 가진 부자들과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위험인물로 보고 잡아 죽일 생각만 했다. 세 번째로 열심당이나 시카리파와 같은 반제국주의, 반귀족주의 폭력혁명가들 역시 예수를 혁명에 대한 훼방꾼으로 간주하여 제거할 수만 있다면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새로운 세상이 오지 않으면 아무런 삶의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인간의 존재방식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구현한 그를 구원자로 믿고 따랐다.

6. 그래서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성경 말씀을 영적인 해석이나 도덕적인 해석으로 국한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마태복음 1장 첫머리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다윗 가문 출신의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huios theou)임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를 영적인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분이지,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는 해석이 정말로 옳은 해석인가? 아니면 이런 영적인 해석은 권력의 시녀가 된 서구 부르주아 신학자들의 해석일 따름인가?


7.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이 쓴 <첫 번째 크리스마스>(2007)를 보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신의 아들(huios theou), 구세주, 평화의 왕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였다. 14년에 죽은 그는 로마제국 원로원에 의해 승천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1세기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족보는 천 년이 넘는 세대들에 걸친 족보였다. 그 족보는 쥬피터 신에서부터 출발하여, 그의 딸 비너스와 트로이의 영웅 안치세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애네아스였으며, 그의 아들이 율루스로서 율리우스 가문으로 이어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예수의 족보는 바로 로마제국의 신학이 만든 이 찬란한 족보를 정확하게 겨냥하여 한 방에 날려버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성경 전체와 마찬가지로 복음서들 역시 인간의 구원, 그 온전함과 평화를 위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인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정치적인 저항, 특별히 제국에 대한 저항과 뗄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8. 성경을 탈정치화시키고 영적인 의미로만 축소시키는 이유는 성경 해석자들이 결국 권력자들의 하수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