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헤롯 왕이 통치하던 갈릴리와 유대의 많은 평민들과 그 다음 세대들에게, 헤롯은 말년의 파라오처럼 보였을 것이 틀림없었는데, 그가 자신의 왕국의 도시들을 화려하게 꾸민 일에서도 그랬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외국의 신들을 예배한 것에서도 그랬다. 그의 후계자들이 죽거나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헤롯은 그의 대규모 기념물들과 외국풍의 건축물들로 인해 기억되었다. 예전에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그는 신전을 세워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봉헌하고, 새롭게 변모시킨 그 도시를 '세바스테'(Sebaste)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 이름은 "위엄 있는"(august)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였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스트라토의 탑'(Strato's Tower)이 있는 페니키아인들이 만든 작은 항구를 분주한 항구도시로 탈바꿈시키고, 창고와 극장, 광장, 왕궁,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예배하는 데 봉헌된 웅장한 신전 등이 있는 넓은 항구를 내려다보면서 '카이사리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라고 이름지었다. 헤롯 왕은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도 똑같이 인상적인 외국풍의 기념물들을 건축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유대 왕이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가 페니키아와 시리아의 도시들에 극장과 공공건물들을 기증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그는 그리스풍의 도시 니고볼리, 곧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악티움 근처에 세운 이 도시를 새롭게 단장하는 데 막대한 돈을 댔으며, 아테네와 로데스, 그리고 스파르타의 시민들을 위해 기부금을 냈고, 개인적으로 올림픽 게임의 후원자가 된 것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심지어 국내에서도 그는 마사다, 마캐루스, 헤로디움, 여리고, 예루살렘 등에 자신의 궁궐이자 왕궁 수비대가 주둔하는 요새를 화려하게 건설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헤롯 왕이 이처럼 돈을 낭비한 데에는 물론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의 건설 계획들을 뒷받침하고, 사치스런 궁정생활, 황제 가족들에 대한 선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헤롯 왕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야 했고, 백성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허리띠를 더욱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위협적인 요새들과 잔인한 비밀경찰 조직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의 왕국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기원전 20년경, 전반적인 로마화 정책을 20년 동안 추구한 후, 헤롯은 자신에 대한 종교적 반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전통에 대해 최소한 입에 발린 존중이라도 하는 척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전통적 가치들"로 되돌아가는 것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는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오랜 희망에 호소하고, 예루살렘이라는 국가적 수도를 물리적으로 회복할 것에 대한 희망에 호소했는데, 이것은 원래 하늘이 보낸 구세주-왕의 행동을 통해 성취될 희망이었다.
새로운 솔로몬 왕의 자세를 취하기 위해 헤롯 왕은 예루살렘 성전(Jerusalem Temple)을 매우 웅장하게 재건하고 화려하게 장식하여, 고대세계의 경이 가운데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 장엄한 입구, 코린트식 장식 기둥으로 높이 솟아오른 호화로운 열주(列柱), 출입문, 중앙의 지성소의 구조 등과 더불어, 헤롯 성전은 예전의 예루살렘 성전들이 마치 조잡한 신당(神堂)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헤롯 왕의 천재성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전통과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데 있었다. 그의 후견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황제는 종교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로마의 신전들을 재건하면서, 로마제국의 평화와 안보 아래 새로운 풍요의 시대가 동터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무성한 꽃무늬 장식과 새로운 코린트식 기둥 장식, 기하학적 장식 기법을 창안했었다. 요세푸스가 묘사한 헤롯 성전의 정교한 꽃무늬 장식과 기하학적 장식들은 최근 고고학자들이 성전 언덕에서 찾아낸 기둥 파편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황제의 메시지가 예루살렘에서도 똑같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는 틀림없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지성소의 정면에 장식된 황금빛 포도넝쿨과 커다란 황금빛 포도송이, 혹은 성전구역의 중앙 문에 붙여진 날아오르는 황금 독수리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질서와 풍요가 신적인 섭리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마태와 누가가 예수의 출생,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메시아-왕(messiah-king)으로서 태어난 분을 자리매김한 바로 그 때(기원전 4년 - 옮긴이), 왕위 계승의 문제가 헤롯 왕조의 최고의 관심사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이하며 의미심장한가! 헤롯 왕은 36년 간의 통치기간 동안에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왕자들의 음모와 궁정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세 명의 그의 후계자들을 차례로 처형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헤롯이 자신의 가족 안에서조차 잠재적 적수에 대한 피해망상증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시리아 총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는 그리스어로 자신은 헤롯의 아들(huios)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돼지(hus)가 되겠노라고 빈정거렸다. 헤롯 왕은 말년에 그의 유언을 계속 변경하여, 마침내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은 스무 살의 그의 아들 아켈라오(Archelaus)를 자신이 죽은 다음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 결정은 서투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켈라오는 후대 세대들에게 거의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서에도 단 한 번 언급될 따름이다(마태 2:22).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즉위한 후, 그 백성들의 전통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사건들에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헤롯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을 때, 유대의 분위기는 폭발 직전이었다. 그가 치명적인 중병으로 고통스럽게 보내던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여러 명의 경건한 유대인 학자들과 저항운동의 지도자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는데, 그들은 헤롯 왕이 이미 죽었다고 잘못 알고 성전의 중앙 문에 붙어있던 황금 독수리 상을 떼어냈던 사람들이었다. 헤롯 왕이 죽자, 그들은 의로운 순교자로 간주되었으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 복수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아켈라오는 군중들의 격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공식적인 애도 기간을 보내고 선왕(先王)을 위한 대중 연회를 마친 후, 그는 성전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자신이 왕권을 맡기 전에 로마의 황제로부터 자신의 왕권에 대한 공식적 확인을 기다려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첫 행보부터 이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 대신에 로마황제에게 복종하는 모습에 군중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또한 유월절 축제절기를 위해 순례자들이 전국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자, 더욱 첨예한 정치적 반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헤롯 왕가의 통치에 대해 군중들이 갖고 있던 광범위한 분노가 더욱 명백하게 되었으며, 아켈라오는 그의 첫 번째 공식 출현에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가볍게 할 것과,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부담스럽던 판매세를 철폐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런 양보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아켈라오를 더욱 밀어붙일 수 있거나 아니면 심지어 왕위에서 축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군중들이 운집한 성전 뜰은 격화하는 반대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아켈라오는 군중들의 "광신으로 인해 어떤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반란자들이 전체 군중들에게 그 광증을 전염시키기 전에 폭력을 진압하도록 군단사령관 휘하의 한 보병부대를 파견했다"(요세푸스). 이로써 불꽃이 부싯돌에 붙었다. 격분한 군중들이 군인들을 공격하여 성전으로부터 몰아내자, 아켈라오는 자신의 기병대를 동원했고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수천 명의 순례자들을 살해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유대 시골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예루살렘에서의 폭동 소식이 이스라엘 전역에 전해지자, 모든 지역에서 자칭 메시아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각각 젊은 추종자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고, 자신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원자-왕(redeemer-king)으로 선포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이런 사태는 로마제국의 역사를 통해 여러 차례 더 발생할 사태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될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확립할 것에 대한 대중적 열광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당국은 항상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요르단 강 동쪽의 베레아 지역에서는 왕궁의 노예 출신인 시몬(Simon)이라는 사람이 그 지지자들로부터 왕으로 선포되자, 무리를 이끌고 헤롯의 왕궁들과 그 농토를 기습했다. 유대의 마을들에서는 목동 출신 아쓰롱게스(Athronges)가 새로운 다윗의 역할을 자임하고, 네 명의 형제들의 지원 아래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로마 군대를 공격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헤롯의 재산을 약탈하도록 선동했다. 갈릴리에서는 몇 해 전에 헤롯에 의해 처형된 유명한 갈릴리의 비적의 아들인 유다(Judah)라는 사람이 갈릴리의 행정수도였던 셉포리스에서 폭동을 일으켜 무기고를 강탈하고 총독 관저의 금고와 사치스런 가재도구들을 약탈했다.
로마인들은 당연히 분노로 대처했다. 시민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혁명은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이었다. 시리아의 총독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Varus)는 안디옥으로부터 즉각 두 개의 군단병력을 출병시켰는데, 그리스식 도시들에서 동원된 병력과 그 지역의 다른 속국 왕들의 병력도 가담했다. 가을이 되기까지 로마군대는 갈릴리의 상당히 많은 성읍들과 마을들을 휩쓸면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겁탈하고 파괴시켰다. 갈릴리에서 반역의 모든 중심지들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즉 반란자들이 숨어 있던 셉포리스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베레아에서도 반란자-왕 시몬은 결국 생포되어 헤롯의 병력에 의해 참수되었다. 유대에서 아쓰롱게스는 도피했고 수백 명에 이르는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바루스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그의 병력으로 하여금 그 도시의 질서를 다시 확립하고, 가능한 한 많은 반란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요세푸스는 "좀 덜 불온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투옥되었고, 거의 2천 명에 달하는 무도한 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썼다.(이 모든 사태가 기원전 4년, 예수가 출생한 해에 발생했다. - 옮긴이).
갈릴리와 이스라엘 땅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로마제국의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정복작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로마군대의 폭력이 아무리 막강했다 하더라도, 황제의 통치에 대한 지지자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너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이처럼 슬픔으로 마비되고 로마의 억압에 대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예수와 그의 세대가 성장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상―왕의 권력과 헤롯의 유산―이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승리하게 된 것은 헤롯의 아들 안티파스(Antipas)가 갈릴리의 통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있는 미래 동안에는 로마의 군대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예언자들의 예언과 신탁이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이스라엘의 지역 영웅들과 자칭 메시아들이 이끄는 농민군대의 오합지졸로는 결코 로마군대를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호슬리 & 실버만, 1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