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들의 사명은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타나는 혁명을 통해 기존질서를 전복시키려는 거창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단순히 영적인 회심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며, 소외된 젊은 이상주의자들이 낙후된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선행을 베풀고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일부 신약성서 학자들, 특히 예수 세미나와 관련된 학자들의 주장, 곧 역사적 예수는 비정치적이며 반문화적인 지혜(countercultural wisdom)를 가르친 갈릴리의 구루(guru)였으며, 또한 그의 유랑하던 추종자들은 단순히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떠돌아다니던 견유철학자들(고대 헬레니즘 도시들의 길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가치들과 그리스-로마 문화의 점잔 빼는 인습들을 포기하라고 촉구했던)과 꼭닮은 농민 견유철학자의 모습이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의 교차문화적 비교는 오직 일반적 의미에서만 타당할 뿐이다. 만일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보내면서 가르친 구체적 내용들(마가 6:8-11; 마태 10:9-10; 누가 10:4) 속에는 그 당시에는 의미가 있었을 테지만 후대의 교회의 편집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을 물질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이 들어 있다는 점을 우리가 조심스럽게 상정해본다면, 그 제자들은 결코 당시 사람들로부터 견유철학적 설교자로 간주되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헬레니즘의 도시들에서 견유철학파의 설교자는 그의 누더기 옷과 지팡이, 동냥을 넣는 주머니로 알아볼 수 있지만,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면서 전대나 신발, 자루를 지니지 말라고 분명히 지시했으며, 가는 도중에 사람들과 이야기하지도 말라고 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거지들처럼 돌아다니며, 메시지를 들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중대한 말씀을 던져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한 마을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일하면서 한 집에 머물고, 그 집주인이 내놓는 것은 무엇이든 먹으라고 가르쳤다. 이 제자들은 "예언자의 아들들"처럼, 하나님의 영에 가득 차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영의 매개자로서 지역의 연대성을 키우고 공동체의 갱신을 도모했다. 개인적인 도덕적 진보라는 순전히 영적인 사명을 지닌 집단과는 다르게, 이 제자들은 갈릴리 전역의 마을들의 갱신을 위해 공동체를 지향하는 정치적 및 종교적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갈릴리의 모든 마을들이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운동에 열광적으로 응답했던 것은 아니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활동에 대해 신약성서 이외의 문헌들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예수의 활동이 극히 지역적인 현상이었으며, 다른 외부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당시 헤롯 궁정의 공식적 역사가들이나 서기관들로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복음서 전승 안에서조차(예수에 대한 반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파"에 집중되었다), 우리는 예수가 직면했던 일반인들의 적대감과 의심을 볼 수 있다. 사는 것이 힘겹고 긴장이 많은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주의적이며 환상적인 것에 자신들과 가족의 삶을 내맡기기를 꺼리기 때문에, 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피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이 자기 마을에 머물기 때문에 당국이 자신들에게 억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또한 안티파스의 관료주의에 직접 의존해서 살아가거나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십일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의 설교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며,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를 깎아 내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언약에 따른 회개를 요청했던 세례요한을 "귀신이 들렸다"고 비웃었던 것처럼(마태 11:18; 누가 7:33), 이제는 예수가 궁핍한 소작농들과 냄새나는 어부들과 어울려 "잔치"를 벌이면서 하나님 나라를 경축하는 것에 대해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태 11:19; 누가 7:34) 하며 비웃었다.
예수가 노골적으로 직면했던 또 다른 위협은 그 자신이 악한 귀신들린 사람이라는 비난이었다.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가 3:22). 한편 여전히 세례요한에게 충실한 추종자들 중에는 예수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 참 예언자가 감옥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마당에 예수가 무대 전면에 나서 인기를 독차지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체 마을들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수의 소식에 대해 차가운 무관심을 보인 채, 어려운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 자신도 모두가 이스라엘의 언약을 갱신하는 일에 기쁘게 가담하리라는 환상을 갖지는 않았으며, 때때로 그가 치유의 영에 넘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예언자적인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22; 누가 10:13- 14). 심지어 예수가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던 마을조차도 그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 11:23; 누가 10:15).
그러나 예수의 가장 위험한 반대자들은 소심한 마을 사람들이나 하급 관리들이 아니라, 정부의 고급 관리들이었다. 헤롯 안티파스와 그의 신하들은 티베리아스에 있는 그의 궁궐에서 주변 마을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으며, 선동이나 소요사태의 낌새만 보여도 재빨리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록 복음서들은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태들에 대한 헤롯 안티파스의 역할에 관해 모두 망각해버리고 말았지만, 안티파스는 예수가 갈릴리 농민들 사이에서 일으키고 있었던 소동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며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지역마다 밀고자들의 연락망을 둘 필요성을 배웠던 것이 분명하며, 실제로 헤롯 왕조는 안보 체계를 매우 잘 발전시켰기 때문에 요세푸스가 다음과 같이 기록할 정도였다. "도시에서건 길에서건 간에 사람들이 함께 만나는 것을 정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헤롯 왕 자신도 그 일에 가담하여 때로 밤에 민간인 옷을 입고 군중들 틈에 끼어 군중들이 자신의 통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곤 했다고 한다."
이로써 헤롯당은 잠재적인 소요사태에 대해 즉각적으로 막강한 권력과 군사적인 강압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조치가 지나칠 수 있었다. 세례요한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의 메시지는 심지어 그가 체포된 이후에도 계속 전파되었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베레아의 마캐루스 요새에서 갇혀 있던 상황과 처형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단지 세례요한의 "달변"에 의해 그 지역에 불안상태가 조성된 것에 대해 헤롯 안티파스가 두려워했다는 사실과 "요한은 사슬에 묶여 마캐루스로 끌려왔으며, 거기서 처형되었다"고만 기록했기 때문이다. 마가 6:17-29과 마태 14:3-12는 훨씬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안티파스의 아내 헤로디아가 자신의 혼인을 세례요한이 공개적으로 단죄한 것 때문에 세례요한이 처형되기를 바랬으며, 그녀의 딸 살로메가 안티파스의 생일 잔치에서 춤을 추어 결국 안티파스를 설득하여 세례요한을 처형했다고 전한다. 역사적 관점에서는 살로메가 요청한 것처럼 실제로 세례요한의 머리를 큰 접시에 담아 안티파스 앞에 가져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요청과 춤, 접시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그에 관한 그림과 문헌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만일 안티파스가 마침내 성가신 예언자 한 사람을 마캐루스에서 제거해버렸다고 생각했다면, 이제 또 한 사람이 갈릴리에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 사건들의 연대 순서는 단지 대략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세례요한이 처형되기 전에 감옥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혹은 예수의 공적인 활동 기간 중에 언제 그 처형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멀리 떨어진 마캐루스 요새에서 처형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티파스는 그의 밀고자들을 통해 갈릴리 마을에서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가 6:14-16에 보존된 전승(마태 14:1-2; 누가 9:7-9)에 따르면, 안티파스는 예수의 치유활동과 설교활동에 관해 서로 다른 보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안티파스는 그 자신이 왕적인 메시아로서의 열망을 갖고 있었는데, 예수를 위험 인물로 지목할 만큼 충분히 이스라엘 전통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보고를 듣고 안티파스가 보인 반응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논쟁을 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안티파스가 예수에게서 단지 시골 촌뜨기며 신앙의 치유자로서 조만간 그 사기꾼의 모습이 드러나 사라져버릴 인물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점이다. 즉 예수의 치유와 귀신축출, 노천에서 벌이는 "잔치"와 예언적인 선포는 안티파스 자신이 겨우 쌓아올린 새로운 질서와 권력, 재정수입을 허물어버리는 매우 위험한 도발행위였던 것이다. 세례요한에게서 시작된 선동의 물결이 계속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안티파스의 말, 곧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마가 6:16)라는 말에는 세례요한의 환생에 대한 믿음보다는 아이러니한 정치적 유머가 들어 있는 셈이었다.

예수 자신은 비록 처음에는 헤롯 안티파스와의 대결을 피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불가피한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수가 그의 목회 처음 시기 동안에 흔히 그의 추종자들을 외딴 광야에서 만나곤 했다는 사실, 곧 감시가 심한 마을들과 성읍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에는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해방 이전에 출애굽과 광야의 유랑이라는 전통적인 상징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운동이 확산되면서 더 이상 비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복음서들 속에서 서기관, 바리새인, 헤롯당원들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이 누구였던지 간에, 그들은 예수를 "덫에 걸리도록" 음모를 꾸몄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에 관해 충분히 알게 되었으며, 세례요한을 처치하듯 예수를 처치할 작정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13:31에는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안티파스가 그를 죽일 계획을 갖고 있다는 말을 전하면서 마치 일반 범죄자처럼 그 지역을 떠나도록 충고하자, 예수는 그것을 무시하면서,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고 지시했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며, 세례요한이 보여준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예언적 시위를 드러낼 판이었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에 앞서 몇 달 동안 공동체 갱신운동을 시작하여,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따라 서로 돕고 협동하는(reciprocity and cooperation) 정신을 되살리는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마을의 생활을 되살리는 그의 운동은 또 하나의 분리주의 운동일 수가 없었다. 즉 권력자들과의 대결을 피한 채, 갈릴리의 외딴 계곡이나 멀리 떨어진 산악지역에 은둔하면서 진행하는 운동일 수가 없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대해 때때로 어떤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다 할지라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수도였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이후로 중요한 장소가 되었으며, 통일 이스라엘의 첫 수도였으며, 솔로몬 성전이 있는 곳이었다. 예루살렘 거리와 광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치사, 곧 아브라함에서 다윗, 에스라를 거쳐 마카비까지의 역사가 재연되었다. 성전 뜰에서는 축하행사와 희생제사를 드려 이스라엘의 평화를 빌었다. 그러나 더 이상 십일조와 헌물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릴리에서는 속국 왕의 학정에 시달리고 유대에서는 로마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유월절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에서의 갱신운동은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가까이 온 것임을 뜻한다고 확신한 채, 새로운 파라오 왕의 통치 아래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구원하시는 현실을 선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유월절 순례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엘리야처럼 예수도 정치 지도자들과 지배체제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것이다. 예레미야처럼 예수도,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바로 성전 뜰 안에서 보여줄 것인데, 그러면 그곳에 모인 순례자들은 예수의 해방의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며, 그 해방의 메시지를 전국 방방곡곡에 전할 뿐 아니라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파할 것이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여행에 대한 전승은 후대 기독교 역사의 모든 전승에서 핵심적일 뿐만 아니라, 예수에 관한 비기독교적 문헌들에서도 핵심적이기 때문에, 그의 갈릴리 목회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예언자 역할이 갈릴리 지역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민족 전체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이러니지만, 예수의 행동을 자극한 것은 헤롯 안티파스가 점차 성전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안티파스가 왕으로서 자신의 큰 야심을 주장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적법성은 결국 그의 아버지가 건설한 웅장한 성전에 대한 후견인으로서의 권리뿐이었다. 헤롯 안티파스의 하스몬 가문 출신의 아내 헤로디아는 성전의 큰 제단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속에, 토라에 규정된 제사들의 예물들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거룩한 도성으로 순례하는 행렬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심과 선행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며 동시에, 로마제국에게는 그 자신이 백성들을 다스려 영원히 로마에 충성하고 복종하도록 만들 적임자라고 확신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헤롯 안티파스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독립적인 이스라엘의 전통을 따르도록 만들려했는데, 이런 점에서 복음서 전승이 제자들의 숫자로 "열 둘"을 강조한 것과, 예수가 그의 열 두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위한 정의 확립을 위임했다는 것(마태 19:28; 누가 22:29-30)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야곱의 열 두 아들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약속하셨던 땅의 모든 지역에 예수의 메시지가 전파된다는 뜻이었다. 곧 약속의 땅 모든 마을들 속에 갱신의 메시지가 전파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식의 영토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포함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마을 공동체나 도시의 회당들에 모여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활동을 기억하고, 연례 절기들을 축하하고, 모세의 언약에 대한 의무에 귀를 기울이는 곳이면 어디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700년 전 앗시리아가 정복한 이후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당수가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져 살아왔다. 심지어 예수 당시에도 갈릴리 마을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먼 곳에 노예로 끌려갔으며, 마을 사람들 가운데 피폐해진 고향을 버리고 지중해 지역의 다른 곳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수 자신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이스라엘의 잃은 양"이었고 조만간 해방되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비록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나 광산, 노동자 수용소에 살았지만, 그들 역시 갱신된 이스라엘의 잠재적인 멤버들이었다. 안티파스가 비록 그들의 공적인 보호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예수는 그와 다른 현실을 내다보고 있었다. 즉 예수는 이스라엘의 흩어지고 고통 당하는 백성들이 헤롯 왕 스타일의 왕적인 메시아에 대한 선동적 호소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누가 13:29)이라는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고 기도했던 이스라엘의 갱신의 때가 드디어 도달했다.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작정한 일의 역사적 결과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며 치명적인 것이었다. 평생 갈릴리에서만 살았던 예수는 또 다른 파라오의 권력, 헤롯 왕가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권력을 분명히 과소평가했다. 헤롯 안티파스는 언젠가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날을 기대했을 테지만, 당시는 로마인들이 거기에 있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언자의 도전을 드러내려고 결심한 것은 결과적으로 예상치 못했던 폭력을 초래할 것이었다. 그 비극적이며 폭력적인 결과로 인해, 애당초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녔던 제자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가는 길로 이끌었다.

호슬리 & 실버만, 3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