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30년 유월절기를 맞아 예수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운명적인 여행은 항상 기독교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해되어 왔다. 전 세계 기독교 교회에서 매년 상징적으로 재연되는 거룩한 주간(Holy Week)의 사건들은 예수가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메시아로서 입성한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로 시작되어, 성전 뜰에서 환전상들을 쫓아낸 사건을 기억하고, 성 목요일에 마지막 만찬, 성 금요일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 그리고 부활주일 아침에 무덤에서 부활한 사건과 관련된 엄숙한 종교의례들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복음서들 속의 수난 이야기들은 해마다 지키는 수난절기의 중요한 이야기 자료로서 그 세부적인 이야기들이 서로 상충되며, 날짜별로 일어난 사건들도 서로 어긋나며, 신학적 해석들도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진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 확정적인 판단을 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현대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예수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사실, 그가 성전에서 어떤 소란을 일으키는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그가 제사장들에 의해 신성모독과 선동죄로 고발당했다는 사실, 그리고 제국 질서에 대항했던 반란자로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사건들은 1세기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요세푸스가 때로 무심한 태도로 묘사했던 것처럼, 축제기간에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군중들을 흥분시켰던 민중 예언자들, 자칭 메시아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모두 처형당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항문화적(counter- cultural) 인물들과 나사렛 예수가 달랐던 점은 무엇인가? 예수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건에 대해 그토록 자세하게 전승이 발전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 세부적인 묘사들 속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은 {메시아의 죽음}(The Death of the Messiah)이라는 방대하고도 철저하게 증거자료를 제시한 책에서, 그 수난 이야기들 속의 구체적 사건들의 상당수는 역사적 기초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복음서 이야기들은 "기억된 역사"(history remembered)로서, 어떤 경우에는 희미하게 기억되고 아마도 부정확하게 기억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라고 본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마지막 한 주간의 이야기는 신앙심이 낳은 창작(pious fiction)으로서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감동적이며 가슴에 깊이 와 닿는 이야기지만, 여전히 창작이라고 간주한다. 그들에게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선봉장인 존 도미닉 크로산의 용어를 따르자면, "예언의 역사화"(prophecy historicized)이다. 크로산에 의하면, 예수의 후대 추종자들은 그가 메시아라고 굳게 믿어, 히브리 성서에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의 주제와 암시들을 샅샅이 뒤져, 그것들을 바탕으로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해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로 엮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창작한 의도는 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는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예수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은 일반 범죄자의 경우와 그토록 달랐는지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언의 성취(prophetic fulfillment)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복음서 저자들은 각기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어떤 대목에서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의 본문을 매우 분명하게 인용함으로써, 어떻게 옛 예언들이 예수의 죽음 사건들에서 정확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먼저인가? 그 사건인가 아니면 해석인가? 많은 경우에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 아니라, 역사라는 것이 학자들이 개념화하듯이 "기억된 역사"와 "예언의 역사화"처럼 진실과 거짓, 혹은 흑백논리로 가려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수난 사건들의 의미는 그 목격자들에 의해서조차 많은 논쟁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헤롯 왕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과 같은 왕적인 메시아 전통에 대한 희망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의 특정한 예언들을 이용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왕에 반대하는 이상적 메시아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예언들을 인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와 그에 대적하는 헤롯 왕족들과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문화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전통적인 "대본"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 뜰과 도시 광장에서 그들의 의도적으로 상징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 공개적으로 서로 상충되는 예언적 기대들을 실현하려고 이미 노력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누가복음만이 그 해 유월절에 안티파스가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23:6-16), 유월절이라는 순례절기는 헤롯 왕족의 위세와 권력을 드러내기 알맞은 절기였으며, 헤롯 왕족들이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 예루살렘 자체가 헤롯 왕조의 기념비처럼 되었는데, 그 성벽에는 헤롯 왕조의 역사가 새겨졌으며, 그 성벽 망대 이름들 역시 헤롯 대왕의 형, 친구, 아내의 이름을 따라 파사엘, 히피쿠스, 마리암네라고 불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헤롯 왕족의 위세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로마 총독의 저택이 된 왕궁과 다윗의 무덤인데, 이 무덤은 헤롯 대왕 자신이 사치스럽게 장식을 했다. 거대한 성전은 물론 헤롯 대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헤롯 대왕 자신이 성전의 기본 개념, 건축, 유지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헤롯 성전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거의 헤롯 왕족의 가족 성소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를 갈릴리로 국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유월절 절기에 그가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데는 그만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즉 최근에 민중들이 많이 따르던 예언자 세례요한을 참수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성전의 관대한 후견인이며 유대인 세계의 수호자로서의 경건한 공식적인 이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그가 적법한 왕으로서의 장엄한 의식을 갖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절차에는 왕의 측근들과 성전체제에 의존해서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환호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헤롯 왕들이 공개적인 장관을 연출하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요세푸스가 반복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경축하는 것은 헤롯 왕족이 뻔뻔스럽게 제국의 방식으로 벌였던 메시아주의(Herodian messianism)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헤롯 대왕은 자기가 방문하는 도시에 입성할 때 요란스럽게 치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8년이 지난 38년에는 헤롯의 손자(안티파스의 조카) 아그립바가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필로의 설명에 따르면, "은과 금으로 빛나는 무기를 지닌 경비병들을 대동했다"고 한다. 이런 구경거리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점차 유대인 혐오증이 심해지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일부 젊은 그리스인들은 그 도시의 한 바보에게 왕관을 씌우고는 아람어로 '마린'(marin), 즉 "우리의 주님"이라고 큰 소리로 놀려댔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당시 왕족의 거창한 퍼레이드를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퍼레이드가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처럼 왕을 조롱하는 퍼레이드 흉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심지어 오늘날에도, 종려주일의 장엄한 행렬은 올리브 산(감람산)에서 시작되어 구부러진 길을 따라 성벽이 쌓인 예루살렘의 옛 시가지로 향해 가는데, 여러 종파들과 고대 교회 전통의 고위 성직자들이 무늬를 넣은 예복을 입고 금빛 관(冠)을 쓴 채, 예수가 거룩한 도성에 입성한 것을 온갖 왕권 상징물들로 기념한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개선 행진"에서 보여준 "예언의 역사화"는 의도적이며 재치 있는 정치적 패러디(희롱)로 보였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건에서 교회 전통의 전승층을 벗겨버리고 1세기 당시 예루살렘의 상황을 재구성해본다면, 예수는 자신의 왕적인 명예를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헤롯 왕가의 자칭 메시아 주장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몇 세기 전에 유대의 예언자 스가랴는 다윗 왕조의 허풍, 즉 그 마지막 왕자들은 힘이 없으며 고아들임을 폭로하면서 패러디를 위한 적절한 "대본"을 썼는데 그 패러디를 예수가 지금 연기한 것이다. 즉 현실의 왕들이 오만을 떨면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멋진 군마(軍馬)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할 때,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자를 훨씬 온건한 모습으로 의인화했다.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들은 스가랴의 예언이 지닌 아이러니나 그 예언을 예수가 길거리에서 실연한 아이러니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즉 복음서 기자들과 후대의 기독교 주석가들은 모두 예언자 예수가 나귀를 타고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군중들이 환호한 것에 대해 단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후대의 기독교 주석가들은 군중들이 나사렛 예수를 참된 다윗 왕조의 왕으로 받아들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가 나귀를 타고 누더기 농민 복장으로 입성한 것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익숙했던 행렬을 조롱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농민 예언자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군중들이 환호했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과 순례자들에게는 그런 왕적인 상징들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비록 마태복음 기자는 그의 독자들이 그 예언의 원천을 놓치지 않도록 스가랴의 본문을 인용하고 있지만(마태 21:4-5), 예수가 벌인 시위의 참된 위력은, 그가 목회를 시작한 이후 벌인 다른 많은 공적인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스가랴의 본문을 인용한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상징의 형태로 스가랴의 요점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에 대해 예수의 추종자들이 "왕"이라고 외치면서 길바닥에 종려나무 가지, 곧 헤롯 안티파스가 메시아를 상징하여 자신의 동전들 속에 뚜렷하게 새겨 넣은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다는 것은 안티파스를 조롱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군중들 속에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 몇이 예수에게 다가가서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누가 19:39)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선동한 것 때문에 책망을 받아야 했는가, 아니면 조롱한 것 때문인가? 재물과 왕권의 악에 대해 끊임없이 설교한 예수가 스스로 다윗 왕조의 의복과 말 장식으로 치장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예수는 갈릴리의 마을들과 성읍들에서 바로 그런 왕들의 생각에 맞서서 싸웠던 것이다. 또한 예수가 왕이 없는 나라(kingless Kingdom)에 대한 비전을 갑자기 포기했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 이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인 예언자적인 행동들과 예루살렘의 지배체제에 맞서 벌인 행동들은 모두 새로워진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커다란 비전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