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부 ◈
기억과 구전
과거의 "위대한 사건들"로 지명된 것은 대부분 그 지역 사회, 특히 모든 농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지명된 사건들이다... 역사가들이 나폴레옹을 기억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는 인물로 간주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더군다나 어떤 위대한 사건들을 기념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농민들과 관련해서는 분명히 사실이다. 왜냐하면 ... 그들은 국가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저항은 위대한 사건들의 역사에 끼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런 선택들이 중요한 보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즉 그런 선택들은 이런 기념의 차이가 문학이나 학교교육 혹은 미디어 등을 통해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내적인 것임을 보여주며, 문학이나 학교교육, 혹은 미디어 등은 모두 기억들을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게 마련이며, 혁명과 나폴레옹을 강조하게 마련이다. 이런 일은 흔히 반복되기 마련이다. 즉 개인이 기억하고 있거나 사회적 집단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소설이나 학교 선생의 이야기가 아무리 그 기억의 내용에 영향을 끼친다 해도, 그 사회적 집단이 특징적으로 어떤 종류의 사건들을 기념하기로 선택하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영향을 덜 끼치는데, 그런 종류의 사건들을 기념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보다 깊은 정체성의 패턴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불행하게도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키는 데에 자신들의 대부분의 시간, 혹은 훨씬 많은 시간을 쏟지 않는다. 그러나 폭동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유용한데, 그것은 폭동이 아니라면 외부적 관찰자들이 (특히 20세기 이전에는) 농민들의 실제 발언에 대해 기록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농민들이 과거에 대해 말한 것들은 크게 몇 가지 형태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과거의 지역적 저항 자체, 특히 국가에 대항했던 저항 자체를 기념하는 것이다 (지주들에 대항했던 폭동들은 비교적 그 규모도 작고 일시적인 경우들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 사회에서 국가에 대항했던 저항처럼 장기적인 메아리와 이야기로서의 힘을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또 다른 하나는 황금시대, 즉 그 국가 전역에 걸친 공정한 왕의 통치를 기억하는 것인데, 이를 명분으로 농민들은 현재의 덜 공정한 통치자들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셋째는 보다 전설적인 귀족들을 기억함으로써 ...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정의의 이미지로 내세우는 것이다. 넷째는 더욱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천년왕국적 이미지, 즉 태초의 신의 정의가 확립된 천년왕국의 이미지로서, 이것에 비추어보면 어느 사회든 전적으로 적법한 사회일 수가 없게 된다.
James Fentress and Chris Wickham, Social Memory, pp. 96, 108-109.
제2부와 제3부는 제1부에 이어 그 순서상 나란히 놓여진 짝(set)이며, 또한 또 다른 짝인 제4부와 제5부를 준비하고 있다. 앞의 제1부에서는 내가 재구성하고자 하는 최초의 계속성, 즉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사이의 최초의 계속성,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처형 이전부터의 동행자들이 그의 처형 이후에도 계속 동행하였음을 설명했다. 또한 그 모든 분명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왜 그 계속성에 초점을 맞추는지, 내가 왜 그 연구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설명했다. 왜(why) 다음에는 어떻게(how)가 오지만, 그 사이에는 어디에서(where)가 있다. 어떻게는 방법론의 문제, 즉 나의 방법의 논리, 내가 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서 그런 재료를 얻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제1부의 왜에서 출발하여 제2부와 제3부의 어디에서를 거쳐 제4부와 제5부의 어떻게로 나아갈 것이다.
그 재료들 혹은 자료들은 구전전승의 기억들이거나, 아니면 필사자들이 전달한 본문들일 것으로 보이며, 이 두 가지가 제2부와 제3부로 나뉘어 논의될 것이다. 제2부는 기억, 구전, 그리고 전근대적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구전과 문헌 기록 사이에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상호작용(delicate interaction between orality and literacy)에 관한 것인데, 이보다 천 년 이상 떨어진 과거에는 보편적으로 구전만 있었으며, 또한 이보다 천 년 이후부터는 보편적으로 문헌 기록만 있게 된다.
제2부는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3장은 최초의 예수 전승 속의 농민들의 기억과 구전전승에 대한 최근의 주장들을 살펴보고, 함축적인 전제들, 즉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지도 않고 방법론적으로도 검증되지 않은 함축적 전제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제4장은 기억 자체를 특히 실험 심리학의 관점에서 고찰할 것이다. 기억은 회상인가, 아니면 재구성인가? 기억은 실제 사실들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 욕망, 혹은 사회적 패턴에 근거한 것인가? 기억이 가장 확실할 때, 시각적 이미지들이 함께 떠오를 때, 그 전반적인 시나리오를 메워줄 보다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억할 수 있을 때가 가장 정확한 것인가? 다시 말해서, 만일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이 기억되었다고 당신이 주장하면, 당신은 어떤 기억 이론을 전제하는가? 제5장은 1930년대의 고전적 연구에 기초해서, 기억으로부터 구전(orality)과 문헌 기록(literacy)으로 나아간다. 한편으로는, 서사시(敍事詩)에 대한 기억이 문맹의 전통적 시인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짧은 이야기에 대한 기억이 오늘날 글을 읽을 줄 아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끝으로 제6장은 짧은 결론으로서, 인구의 3% 내지 5%만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회에서 구전과 문헌 사이의 틈을 벌리기보다는 그 접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전체 역사에서 보면, 문헌 기록이 없는 인간 사회들은 있었지만, 구전이 없는 사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구전 혹은 문헌 기록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문헌 기록 없는 구전인지, 아니면 문헌 기록이 있는 구전인지 사이의 선택이다.
▣ 제3장 ▣
구전전승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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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특히 좋은 기억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맹인들이 특히 청각이나 촉각이 예민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주장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글을 배우고 학교교육을 받는 것이 기억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와 반대로 문화교차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에 따르면, 학교교육과 기억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적극적인 관계가 있다... 구전 시인들에 의한 탁월한 시 낭송은 오직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시라는 개념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짜 한 자 틀리지 않고 암송하는 것은 가능하다. 암송하는 것이 특정한 본문을 충실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런 암송이 나타난다.
Ulric Neisser, Memory Observed, pp. 241-242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70년대에 마가복음이 기록될 때까지의 40년 동안 예수에 관한 재료들은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또한 그 재료들은 그 후 2세기 중엽 이후 보편적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 안에서 네 개의 정경복음서들이 규범적인 것이 될 때까지 어떻게 계속 전달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모범적 대답은 구전전승이며, 이런 구전전승의 존재와 영향, 그 가능성과 정확성을 확증하기 위해 서로를 비교하는 사례들을 인용하곤 한다. 그 대답의 최근 사례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토마스 라이트에 따르면, "예수가 말한 것들은 그가 두 번 말한 것이 아니라 (물론) 무수하게 많이 다른 형태로 2백 번이 넘도록 말했을 개연성이 훨씬 크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며 예외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라이트는 계속해서 "예수의 가르침이 여러 갈래의 구전 흐름을 타고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는 강력한 주장에 대한 유일한 장애물은 편견이다"(1992: 423)라고 말한다. 그는 나중에 이 주제를 확대해서, "이것은 한 세계에 대한 창문을 제공하는데, 크로산이 이 세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에 대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농민 계급 출신이라는 점뿐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비공식적이지만 통제되는 구전전승의 세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공관복음서의 관계, 혹은 자유롭게 확장되는 전승에 관한 복잡한 이론에 아직은 의존하지 않은 채, 특정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약간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말씀들은 다소간 똑같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아이러니칼하게도 예수를 지중해 지역의 농민 문화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는 점에서 크로산과 동의하지만, 우리는 크로산 자신의 역사적 재구성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결론에 도달했다"(1996:134-136)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만일 한 경구가 네 개의 정경복음서들 속에서 서로 다른 판본(version)으로 나타날 경우, 이것은 예수의 똑같은 말씀에 대한 네 개의 서로 다른 예수 이야기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단 하나의 의존적이며 발전하는 전승 흐름에서 생겨났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르코를 발전시킨 마태오와 루가, 그리고 그 세 공관전승을 더욱 발전시킨 요한에서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후자의 설명을 편견이라고 불러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기록자들의 의존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고 논증되어 대다수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 반대론자들이 그것을 단순히 무시하거나 비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그들은 그것을 정면으로 논박해야 마땅하다. 기록자들의 의존성이 틀린 이론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반대로 구전의 독립성도 틀린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로부터 최초의 기독교로의 이행(移行)에 대한 모든 연구는 이 구전전승의 문제를 직면해야 하며, 나는 이 문제에서부터 나의 재구성을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구전전승(oral tradition), 구두 전달(oral transmission), 구전 감각(oral sensibility) 사이의 구별에 관한 전제들부터 논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선 나의 자서전적 배경을 통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승, 전달, 감각
구전전승은 함께 놀기에는 변덕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의 "환상적 기억들"이 매우 "잘 입증된" 것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들은 한 본문이 변경되지 않은 채 한 세대로부터 그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거나, 단지 사소한 기억 착오로 변경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신화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매우 강하게 남아 있다. 이런 학자들의 이론에서 혼돈의 요점은 ... 구전전승에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변화 없이 전달되는 확정된 본문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Albert Bates Lord, The Singer of Tales, pp. 9-10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나의 가족은 더블린에서 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나스에 살았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 휘발유는 직업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곳에만 제한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자동차는 6년 동안 바퀴를 떼어낸 채 그 차축은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내가 아홉 살 혹은 열 살이었던 그 차가 없던 시절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더블린의 중심가를 마냥 걸어다녔다. 아버지는 내게 시를 암송해주었고 나는 그것들을 외우게 되었다. 그것들은 위대한 시는 아니었지만, 키플링의 시("Gunga Din") 전체를 정확하게 외우면 6펜스를 상으로 받았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그 잔돈들도 사라졌고, 내가 걸었던 나스와 더블린 사이의 길도 옛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시의 상당 부분을 외우고 있으며, 그 시를 암송하노라면 당시에 걷던 길, 집들과 들판,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 웃음, 지팡이도 되살아난다.
비록 그 시는 여전히 나와 더불어 있지만, 내가 그 길을 걸으며 경험했던 것은 그러나 구전전승(oral tradition)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구두 전달(oral transmission)이었다. 나의 아버지와 나는 모두 기록된 본문, 즉 문헌전승(scribal tradition)을 상정했다. 그것은 집에 있는 책 속에 들어 있었으며, 아버지의 암송과 나의 암송은 모두 그 원형에 비추어 확인되었다. 어떤 논쟁이 벌어지든 그 불변하는 원본에 비추어 점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문헌전승이 입으로 전달되고 귀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나와 아버지는 모두 구전 감각(oral sensibility)이 아니라 문자 감각(scribal sensibility)을 갖고 암송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전감각을 갖고 본문을 암송하는 식이었다면, 우리는 그 기록된 판본이 우리들 자신의 암송(결코 규범적인 것일 수는 없는)과 견줄 수 있는 또 다른 암송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페이지에 인쇄된 단어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기억과 암송을 통제했다. 그것은 문헌전승이 본문 감각 속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귀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내가 열 한 살이 되었을 때, 나의 아버지는 밸리보피 히버니안 은행(이것 역시 사라졌다)의 지점장이 되어, 우리 가족은 도네갈로 이사했다. 나는 레터케니에 있는 세인트 유난스 칼리지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학교에는 상당수가 아일랜드어(Irish)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영어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이 아일랜드어를 사용했기에, 나처럼 아일랜드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은 어학 실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도네갈 서쪽 해안의 지역으로 가서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당시만 해도 아일랜드어와 영어 모두를 읽을 줄 모르면서도 아일랜드의 고대 서사적 이야기(epic tales)를 구전으로 배워 전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이야말로 말 그대로 구전전승이었다. 이 전승은 그들이 그 기술을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부터 도제로 배워 창조적인 암송을 통해 반복하는 전승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원형적 혹은 불변의 판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이야기 모체로부터 파생된 여러 형태의 언어운용(performance)이 있었다.
한편 학교에서는 매일같이 아일랜드 시의 최소한 10행과 영시, 혹은 셱스피어 작품에서 독백 10행을 외웠다. 암기는 토론의 전제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책으로부터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암기한 것으로부터 논증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주관하는 전국 규모의 고등학교 중간시험 혹은 기말시험을 볼 때, 우리는 시에 관한 명제들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논증을 펼쳐야했는데, 암기한 것을 "자유롭게 인용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것은 훌륭한 교육이었지만, 구전전승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기록된 본문을 암기한 것에 대해 구두로 암송해야 했으며, 시험시간에는 그 똑같은 암기를 문자로 표기해야 했다. 구전전승, 즉 한 전승이 창조적인 언어운용 훈련 속에서 (흔히 문맹자들에 의해) 구두로 받아들여지고 구두로 전달되는 구전전승은 (우리가 최선을 다 해) 정확히 암기하는 훈련 속에서 구두로 전달되는 문헌전승과는 다른 세계이다.
그런 경험은 나로 하여금 구전전승에 대해 매우 존경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그런 이야기꾼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했다. 그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일찍부터 구전전승과 구전전달, 그리고 문자감각과 구전감각 사이의 차이를 배웠다. 또한 전승이란 단순히 잡담이나 소문, 혹은 심지어 기억이 아니라는 사실도 배웠다. 즉 용어들은 정확하고 주의 깊게 사용되어야만 한다. 도네갈의 대서양 연안에 사는 토박이 게일어(Gaelic) 사용자들이 간직하고 암송했던 것들은 구전전승이었다. 독자들은 어떤 특정한 암송을 그 구전전승의 구전전달이라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외웠던 시들은 문헌전승의 구두 전달(oral transmission)이었다. 즉 아버지는 시집을 읽고 그 시들을 암기하여 나에게 구두로 반복해서 들려줌으로써 나는 그의 음성을 통해 그 시들을 외웠던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외웠던 시들과 독백들은 문헌전승의 문자적 전달(scribal transmission)이었다. 그 토박이 언어 사용자들은 구전 전승, 구두 전달, 구전 감각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나와 나의 아버지, 나의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정확한 것은 책에 쓰여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확한 것은 그 전승이 작용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누군가 문자 전승 속에서 활동하면서 구전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기록된 판본을 단지 그 시 혹은 이야기의 또 다른 언어운용으로 취급할 것이며, 심지어 그들이 그것을 암기하거나 베끼면서, 새롭게 고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에 관한 재료들의 최초의 전달을 구전 "전승"으로 묘사하는 것이 정확한가? 그런 전승이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었는가? 만일 구전 전승이라는 용어가 그 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명칭이 아니라면,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최초의 기독교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만일 실제로 그랬다면)?
구전의 증거
보다 최근의 학자들은 초기 기독교와 복음 전승들에 대해 그 전승이 원래는 구전 형태로 존재했으며, 공관복음서 혹은 정경복음서들은 그 구전 전승들을 모두 다 기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는 입장을 반영한다... 그런 주장의 문제점은 그 사실을 쉽게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구전전승은 기록된 형태로 우리 앞에 살아남아 있기 전에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어느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Dwight Moody Smith, "The Problem of John and the Synoptics," pp. 152-153
예수 전승과 복음서 본문들과 관련하여 기억(memory), 구전(orality), 문헌 기록(literacy)에 관한 현재의 전제들에 따라붙는 혼돈과 오해보다 더욱 심한 혼돈과 오해는 나로서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그런 전제들 몇 가지를 보여주기 위해 최근의 방대한 연구 {메시아의 죽음}(The Death of Messiah)에서 두 가지 사례만 제시하겠다.
예수의 수난에 관해 현존하는 초기의 다섯 판본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그리고 베드로복음(Gospel of Peter)에 들어 있다. 처음 네 판본은 신약성서 안에서 완전한 형태로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었지만, 다섯 번째 것은 지난 100년 내에 이집트의 파피루스 단편들 속에서 발견되었다. 나의 사례는 그 다섯 본문들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기억, 구전, 문헌 기록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마태오와 루가가 마르코에 의존한 것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서 연구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마태오와 루가가 마르코를 자신들의 중요한 문헌 자료로 이용했으며, 그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그렇게 이용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마르코를 베꼈거나 표절했다는 말이다. 이런 학설은 그들의 이야기 순서가 왜 마르코의 사건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 내용은 왜 마르코의 판본을 발전시킨 내용들인지를 설명해준다. 다시 말해서, 이 가설은 그들이 왜, 언제, 어디에서 마르코와 일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함께 마르코와는 다르게 기록한 부분들은 왜 그런가? 또한 마태오와 루가가 마르코를 베낀 부분에서 그 내용 가운데 마르코에는 없는 요소들을 함께 포함한 경우들은 왜 그런가? 학자들은 이런 경우들을 마태오와 루가가 모두 마르코와는 달리 기록한 부분적 일치(minor agreements of Matthew and Luke against Mark)라고 부르며, 이런 부분적 일치들은 마태오와 루가가 마르코에 의존하였다는 일반적 이론에 대한 반대이다(그러나 극복할 수 없는 반대는 아니다). 다음은 예수가 유대 당국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은 이야기에 관한 부분적 일치의 두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는 예수에게 유죄가 선고된 후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모욕을 당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마태오와 루가는 각각 자신들의 마르코 자료를 나름대로 바꾼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이론상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위에서 고딕으로 표기된 부분("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즉 마르코에는 없지만 마태오와 루가 모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그 똑같은 그리스어 다섯 단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두 번째 경우는 베드로가 예수에 대해 세 번 부인한 후 예수의 예언을 상기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서도 마태오와 루가는 각기 자신들의 마르코 자료를 나름대로 바꾸었으며, 이것은 이론상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고딕으로 표기된 부분("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즉 마르코에는 없지만 마태오와 루가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도 그리스어로 똑같은 다섯 단어가 문제이다. 심지어 '울었다'는 단어는 위의 세 본문에 모두 나오지만, 마태오와 루가는 똑같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반면에, 마르코의 그 단어는 다른 단어이다.
나의 현재 관심은 일반적인 (혹은 위의 특정한 경우에서) 부분적 일치의 문제에 대해 해결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질문은 단지 구전 기억이 이 문제를 푸는 데 상관이 있는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해결을 주장하는 것이 기억, 구전, 문헌 기록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죽음}에서 브라운은 구전전승을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들을 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의 기록된 본문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그들은 자신들 앞에 그 본문을 갖고 있었다), 그 똑같은 사건에 대한 구전전승, 즉 위의 고딕으로 표기된 부분을 포함한 전승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다(44-45, 784, 857). 그러므로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해결은 "그 구전 방식이 ... 마태오와 루가 사이의 중요한 일치의 열쇠로 작용한 때문인데, 마태오와 루가는 이 이야기들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구전으로 이야기되어진 방식과 완전히 고립된 채 (마르코의 기록된) 본문에만 의존해서 작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579). 또한 이것은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에 대한 해결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이처럼 잘 알려진 이야기는 분명히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던 이야기로서 그 두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마르코에 의존한 후에도 구전전승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전승 안에는 이것처럼 감정적인 구절이 이미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609, 611 각주 43). 이런 주장은 어떤 사건에 대한 구전 판본(oral versions)이 이미 구문론적으로 분명히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구문론적으로 확정된 기록된 판본(written versions)을 고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구전 판본들이 언어적으로 매우 엄밀해서 그들은 그 원래의 내용을 훼손시키지 않은 채 필사자가 베낀 판본의 한 부분에 다섯 단어의 이어지는 말을 덧붙일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런 주장이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개연성이 없다고 보는데, 내가 여기서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다음에 나의 논제를 개진하기 위해서이다. 첫째로, 기억은 정확하게 회상하기보다는 창조적으로 재생산한다. 둘째로, 구전은 구문론적인 것이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이다. 주문(呪文)이나, 제의 혹은 운율에 따른 문장 속에 간직된 짧은 구문들을 제외하고, 구전이 기억하는 것은 세부적이며 특별하며 엄밀한 순서보다는 요점과 개요, 그리고 그 요소들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월터 옹(Wlater Ong)이 지적한 것처럼, "심지어 기록된 문헌을 알고 있으며 그것에 의존하지만 원래의 구전과 생생한 접촉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 즉 상당한 구전적 잔재를 간직하고 있는 문화에서조차도, 제의적 표현 자체는 흔히 글짜 그대로인 경우가 드물다." "초기 교회는 심지어 문서화된 제의[최후의 만찬의 표현들]에서조차, 심지어 가장 정성껏 기억하도록 명령받은 요점들에서조차도 문서화되기 이전의 구전 형태를 기억했다"(65). 그것은 매우 두드러진 사례이다. 즉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된 성만찬 제의의 말씀들도 신약성서 자체 안에서 똑같은 글짜들이 인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훨씬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조금 뒤에 설명하겠다. 우선 지금으로서는 레이몬드 브라운이 구전 기억에 대한 어떤 일반적 이론 혹은 경험적 연구에 근거했는지를 묻고 싶다. 브라운의 결론은 구전과 문헌기록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어떤 일반적 이론 혹은 경험적 연구에 근거한 것인가? 그 이론들과 연구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두 번째 사례는 이 물음들을 더욱 파고드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레이몬드 브라운이 주장한 것(1994)처럼, 베드로복음서가 정경 혹은 신약성서 복음서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25장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이것에 관한 네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을 인용하겠다. 첫 번째 예는 "베드로복음이 정경복음서들에 의존해 있다(반드시 그 기록된 본문을 베꼈다기보다는 종종 그 이야기들이 구두로 전해진 기억들에 의존해 있다)"(1001)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베드로복음이 마태오나 마르코의 독법(reading)을 들었을 것이며, 기록된 필사본을 베꼈다기보다는 구두 전달의 기억에 의거했을 것이다"(1057)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베드로복음서 기자가 정경복음서들을 알고 있었다(아마도 그 복음서들을 오래 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그 복음서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1306)는 주장이다. 네 번째는 "베드로복음서 기자는 자기 앞에 기록된 복음서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마태오복음을 주의 깊게 있었던 적이 있으며, 혹은 주일 공동체 예배에서 마태오복음을 읽는 것을 여러 차례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 아마도 그 특징적 이야기들을 약간 말을 바꾸어 전한 순회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복음서들의 내용들 일부는 알고 있었지만 그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베드로복음서 기자가 마르코의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베드로복음서 기자의 마음 속에는 수난 사건들에 관한 잘 알려진 이야기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은 훨씬 전에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를 작성하면서 참조했던 매우 잘 알려진 형태의 재료들이었다"(1334-1335)는 주장이다. 다섯 번째는 "베드로복음서는... 그 골격이 된 기록 자료를 지닌 사람이 책상에 앉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읽었고 들었던 것(정경 혹은 정경 밖의 재료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상력과 드라마 감각을 살려 작성한 것이다"(1334-1336)는 주장이다.
나는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주장을 이미 펼친 바 있기 때문에(1988, 1995), 여기서는 기억, 구전, 문헌기록에 관한 그 전제들만을 강조할 생각이다. 이것은 베드로복음서 기자가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을 듣거나 읽었지만 직접 베꼈다기보다는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려, 우리가 최근 발견한 그 본문을 작성했다는 주장이다.
브라운은 처음에 이런 주장을 펼치면서 그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베드로복음서 속에 나타난 현상은 그 복음서가 정경복음서의 일부 혹은 전부에 구두로 의존되었다고 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만일 이런 주장이 의존성에 관한 논의에 통제불가능한 요소를 도입시킨다고 반대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학자들은 종종 자신들 책상 위에 골격이 되는 복음서 사본들을 갖고 있는 상황을 고대 교회에서도 그랬던 것으로 착각한다"(1987:335). 그러나 이런 주장, 즉 베드로복음서 기자가 정경복음서들에 의존했지만, 단지 "오래 전 기억"에 의존했다는 주장은 "통제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주장 배후에 예컨대 어떤 기억 이론이 놓여 있는지를 물을 수 있다. 기억은 흔히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보통은 나중에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의 본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베드로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그 본문들을) 기억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일반적으로, 왜 어떤 것은 간직하고, 다른 것은 삭제했으며, 또 다른 것은 바꾸었는가?
하나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나의 반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미국 상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가 열렸을 때, 존 딘은 워싱턴 디시의 메이플라워 호텔 커피숍에서 허버트 캄박을 만났으며 곧바로 그의 호텔 방으로 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호텔 숙박계에는 당일 캄박이 투숙했다는 기록이 없었다. 존 딘은 아마도 자신이 가명을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날 캄박은 워싱턴의 스타틀러 힐튼 호텔에 투숙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호텔의 커피숍 이름은 메이플라워 도넛 커피숍이었다(Loftus and Doyle 30). 이 경우처럼 비록 우리가 기억의 변덕을 항상 말끔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베드로복음서의 수난 이야기, 즉 과거에 듣거나 읽었던 수난 이야기가 약간 이상하고 심지어 잘못된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제임스 펜트리스와 크리스 위컴(James Fentress and Chris Wickham)의 {사회적 기억}(Social Memory)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기억은 그 나름의 뚜렷한 문법을 갖고 있으며 이야기로 분석되어야 한다. 또한 기억은 기능을 갖고 있어서, 기능주의적 방식에서, 사회적 정체성에 일치하거나 모순되거나 하는 길잡이로 분석되어야만 한다"(88). 그렇다면, 브라운의 가설에서 베드로복음서 기자가 기억한 것의 논리적 일관성, 이야기적인 문법과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브라운은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베드로복음서의 수난 이야기의 기원에 관한 그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현재적 비교"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리 시대에 수 년 전에 주일학교나 교회교육을 통해 마태오복음서를 읽었거나 공부했지만 그 이후에는 신약성서를 읽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을 상상해보자. 그러나 그들은 교회 예배 시간에 정경의 수난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혹은 연극이나 라디오를 통해 수난극을 보거나 들었다. 또한 설교자들이 수난 이야기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고 여러 복음서 구절들을 결합시키는 예배, 예를 들어, 성금요일의 세 시간 동안의 예배나 십자가상의 칠언 예배에도 참석했다. 만일 우리가 이런 기독교인들에게 수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구하면, 그들은 비록 특정한 복음서의 특정한 순서를 따라 이야기하지는 못할 테지만 일반적인 개요(outline)는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은 몇 개의 명언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한 두 마디 말씀... 보다 생생한 복음서의 일화들... 빌라도, 헤롯, 대제사장 같은 등장인물들도 기억할 것이다... 예수의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나쁘게 말할 것이다... 복음서들의 수난 이야기에 대한 기억 가운데는 복음서들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일화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오늘날의 이런 기독교인들로부터 베드로복음서와 유사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1336). 다시 말해서, 베드로복음서가 과거를 기억한 것은 오늘날 평범한 기독교인들을 다소간 임의로 선택하여 수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들이 들려줄 이야기와 매우 비슷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실험적 검증을 주창한다. 그렇다면, 우선 당신 자신이 수난 이야기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적어본 다음에 그것이 베드로복음과 비슷한지를 살펴 보라. 나는 언젠가 드폴대학교에서 교양 과목 학생들에게 예수의 수난 이야기, 즉 체포, 재판, 처형, 매장에 대한 학생 자신들의 기억을 적어보도록 시킨 적이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것이 실험으로서, 학생들이 그것을 다 제출한 다음에 설명해주겠노라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써도 학기말 점수에 5점을 더해 주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서도 안 되고 성경을 뒤져도 안 된다고 말했다. 즉 단순히 학생들이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대로 써내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서른 두 명이 제출했다. 흥미 있는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 관해 언급한 학생이 몇 명 있었고, 한 명은 "배신자 유다"를 언급했다. 한 학생은 "예수가 지옥에 내려가 살펴보았다는 것"을 기억한다고 했고, 또 다른 학생은 게쎄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하느님께 "이처럼 무서운 상황을 빠져나갈 길은 없는지를 물었는데, 전능하신 하느님의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고 썼다. 또한 몇몇 이해할 만한 도치도 있었다. 한 학생은 예수가 죽어가면서 "베드로에게 자기 어머니(마리아)의 아들이 되도록 요청했다"고 썼으며, 또 다른 학생은 "마리아가 그 시신을 씻어서 깨끗한 아마포로 쌌다"고 썼다. 다음은 한 학생이 쓴 것의 전부인데, 간략하고 몇 가지 흥미 있는 세부사항들 때문에 소개한다.
나는 비록 가톨릭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지금도 가톨릭계 대학에 다니지만, 솔직히 말해 별로 기억하는 것이 없다. 예수의 체포, 재판, 처형, 매장에 대해 내가 아는 한 자세하게 기억해보겠다.
예수의 체포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것은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어쨌거나 그를 배신했다. 그는 어느 날 예수가 설교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곳에 와서 , 많은 군중들 앞에서 그를 체포했다. 유다와 그 밖의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해서 재판정으로 끌고 갔다.
예수의 재판은 내가 기억하기에 매우 간단했다. 그들은 예수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정체성에 관해 질문했다. 몇몇 제사장들은 예수가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인지를 물었으며, 예수는 "그렇다"고 대답함으로써 재판은 끝났다. 군중들은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으며, 예수가 하느님을 모독한 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결정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었고, 이로써 그는 처형되었다.
예수의 처형은 매우 슬픈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배운 바로는 예수가 옷이 찢겨졌으며, 그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달렸다. 또한 사람들은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으며 그를 때렸다. 나는 누가 그를 고문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몹시 곤욕을 치렀다고 기억한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한 것은 하느님이 그의 아들을 구출할 것인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무덤에 묻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지켰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선포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는 다시 살아났으며, 도시 전체가 놀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요약에서건 다른 학생들의 요약에서건 베드로복음의 수난 이야기와 비슷한 것은 없었다. 본디오 빌라도보다는 헤롯 안티파스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것에 관해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로마 군인들보다는 유대인들에 의해 처형된 것에 관해 말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또한 아무도 부활이 유대 당국자들과 로마 군인들 앞에서 분명히 가시적으로 일어난 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브라운의 주장, 즉 그가 베드로복음의 이상한 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날의 수난에 대한 기억과 비교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도전한다. 이것은 나의 반론의 핵심에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즉 브라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억 이론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그의 주장은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매우 명백하지만, 그것은 성서 본문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의 예전의 방법, 즉 역사비평과 문학비평에 사회과학적 비평을 결합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방법이 이론적 기초 혹은 실험적 확인 없이 상식, 개인적 직관, 혹은 가설에 근거하여, 기억과 구전과 문헌기록 사이의 교차점에 관한 주장을 정립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귀납적으로 연구하는 구전 현장조사원, 혹은 실험적으로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로부터 우리는 기억, 구전, 문헌기록의 교차점에 관해 무엇을 배우는가? 이제는 실증적 경험과 통제된 실험을 통해 얻은 좀더 확실하고 귀납적인 자료에 비추어 예수에 대한 구전 전승의 비밀을 살펴볼 차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