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두 교수의 이야기

밀만 패리(Milman Parry)가 하버드대학에서 고전을 가르치는 동안(1902- 1935), 내가 그와 함께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너무 짧게 끝나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특전이었다... 패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예민한 파악 능력을 잊지 않으며, 그의 세계시민적 심성의 깊이와 넓이를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한 탁월한 고고학자는 그를 구전문학의 다윈(Darwin)이라고 적절하게 칭찬했다.
Harry Levin, in the Preface to Albert B. Lord, The Singer of Tales, n.p.

바트렛(Sir Frederic C. Bartlett) 경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기억에 관해 확립된 이론에 대해 겁 없이 도전한 것은 케임브릿지 대학에서였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기억의 목적이나 특성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험실의 표준적 절차들 자체가 기억의 실제 특성을 흐리게 만든다고 확신했다. 그의 도전은 {기억력}(Remembering, 1932)이 출판된 후 오늘날[1970년대]까지 40년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Ulric Neisser, Memory Observed, pp. 3-4

이 장에서는 1930년대 초에 기억, 구전, 문헌기록의 교차점에 관해 매우 중요한 연구결과를 출판한 두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패리의 이론과 실험은 처음부터 중요한 학문적 찬사를 불러일으켰지만, 바트렛의 이론과 실험은 최근까지도 거의 무시되었다. 그러나 내가 이 두 학자를 여기서 함께 다루는 것은 기억, 구전, 문헌기록 사이의 교차점의 변수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발칸반도 커피집의 호머(Homer)

긴 말(문장)[50개 단어 이상]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기록된 문서에 적응하느라 생기는 것이지, 문서가 없는 문화적 상황에서는 생기지 않는 능력이다. 문자가 없는 문화가 긴 말을 외우도록 부추긴다는 생각은 문서에 의존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투사이다.
Ian M. L. Hunter, in Progress in the Psychology of Language, p. 207

내가 호머의 작품들을 처음 읽은 것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아일랜드의 고전적 고등학교에서였다. 우리는 그 작품들을 그리스어로 읽었으며, 영어로 된 자습서를 참조하여 게일어(Gaelic)로 번역했다(게일어로 된 자습서는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번역한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리스어인지 아니면 게일어인지 선생님들이 헷갈리도록 만드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구절들은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게일어로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일부는 그리스어로 기억하지만, 영어로는 전부 기억한다. 아마도 그 구절들을 그리스어나 게일어로 기억하는 것이 덜 생소하고 기억하기 쉬웠을 것이지만, 그리스어나 게일어는 어쨌건 우리에게는 생소한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로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영웅들은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그리스인들"이었으며, 아침은 "장미빛 손가락으로 빚은 새벽"이었고, 에게해는 "포도주처럼 짙은 바다"였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의 전사들은 청동 정강이받이를 착용하여 언제나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의 한겨울 아침이 언제나 "장미빛 손가락으로 빚은 새벽"은 아니며, 그리스의 한여름 바다도 언제나 "포도주처럼 짙은 바다"는 아니다. 그런데 왜 호머의 시에서는 이런 전형적 구절들이 반복되는 것인가?
이 물음이 바로 밀만 패리의 1923년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의 석사 학위 논문과 1928년 파리대학(소르본느)에서의 박사학위 논문의 초점이었다. 패리는 그런 구절들을 "전통적 형용구" 혹은 "상투적 표현"으로 보고, 호머의 운율과 문체의 관점에서 연구했다. 또한 1928년에는 마티자 무르코(Matija Murko)가 소르본느 슬라브학 연구소에서 현대 유고슬라비아의 서사시(敍事詩)에 관해 세 차례 강의를 했다. 패리의 아들 아담은 1971년에 자기 아버지의 모든 연구를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면서, "아버지가 살아 있는 시 속에서 호머의 시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은 아마도 무르코와 그의 연구였을지도 모른다"(xxiv)는 점을 지적했다. 어쨌건 간에, 바로 이처럼 고대 호머의 문체와 현대 발칸반도의 문학적 기교를 창조적으로 병치시킨 것이, 패리로 하여금 그 두 현상 모두가 전통적인 "이야기 노래꾼"(singer of tales)이 구두로 표현한 대중적 서사시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들었다. 패리는 1934-35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현장조사를 통해 하바드대학에 12,500개 이상의 본문들을 갖고 돌아왔는데, 그 본문들은 가수들의 노래들과 가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받아적은 것이거나 3,500개 이상의 12인치 알루미늄 축음기 레코드판이었다. 그는 {이야기 노래꾼}(The Singer of Tales)이라는 책을 막 쓰기 시작했을 무렵 총기사고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연구도 끝나게 되었다.
알버트 베이츠 로드(Albert Bates Lord)는 하버드대학에서 패리와 함께 연구하였으며 1934-35년에 유고슬라비아에 동행하였는데, 1949년 하버드대학 비교문학과에서 썼던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1960년에 출판하면서 똑같은 제목 {이야기 노래꾼}을 책 제목으로 삼았다. 그는 발칸반도의 현장조사를 확대하여 1937년에는 알바니아에서, 1950-51년에는 다시 유고슬라비아에서, 1958-59년에는 불가리아에서 했다. 패리-로드가 고대 호머의 시적 전통과 현대 슬라브 문학전통을 비교하여 주장한 것은, 로드가 자신의 책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구전 시(oral poetry)에 대한 이해는 그 시가 만들어진 방식을 잘 알 때만 가능하다. 또한 시의 작성(composition)에 대한 이론은 다른 이론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시의 암송(practice)에 관한 사실들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특히 세르비아-코로아티아의 문자를 읽지 못하는 노래꾼들(performers)이 서사시적인 노래를 읊조리는 전통이 1920년대와 1930년대까지 여전히 살아 있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패리와 로드가 그 노래꾼들의 노래를 문자로 기록했을 때, 그 작업은 오래 전 옛날에 누군가가 호머를 위해 했던 작업과 같은 작업이었는가? 보다 일반적으로, 문자를 읽거나 쓰지 못하는 시인들이 어떻게 요청받는 대로 그토록 수많은 시를 창작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들은 수많은 시들을 글짜 그대로 틀림없이 기억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시를 작성하는가?

사람들 앞에서 전통을 노래하는 일
처음에는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은 그 노래꾼들에게 세 가지 구조적 요소를 제공해줌으로써 그들이 창조적으로, 역동적으로, 또한 맞물려가며 노래하도록 해준다. 첫째로, 전통은 일반적 이야기들(stories), 전반적인 설화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의 이슬람들은 "술레지만 대제가 제국을 장악했을 당시 양편의 영웅들과 위인들의 행적에 관해 이야기한다. 당시는 투르크 제국이 가장 번창했을 때였다. 그 제국에는 360개의 지방이 있었으며, 보스니아가 그 자물쇠이며 황금 열쇠로서, 원수들이 탐내는 모든 신뢰의 장소였다고 말한다"(Parry 1974:13). 둘째로, 전통은 주제(themes)를 제공하는데, 이 주제는 그 이야기의 틀 속에 섞이거나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표준적인 주제는 통치자의 신하들, 군대의 소집, 혹은 혼인잔치의 손님들 같은 것이다. 끝으로, 전통은 특별히 노래꾼들에게 수백 개의 상투적 구절(formulae)을 제공하는데, 이런 고정된 구절들은 그 주제를 형성하고 나아가 그 이야기를 꾸미는 데 섞이거나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다. 상투적 구절이란 패리의 정의에 따르면, "어떤 본질적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똑같은 운율 아래서 규칙적으로 이용되는 일정한 말들"이다(Lord 30). 그러나 이런 정의가 기계적이며 자동적인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은 "말을 올라타는 것"에 관한 상투적 구절에 대한 변형들을 여러 곳에서 발췌한 것들이다(52-53).  

그러자 그는 자기의 날개 달린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베두인 암말에 올라탔다.
자, 그녀는 이제 자기의 백마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들은 궁정에 매어둔 자기 말들에 올라탔다.
그들은 두 마리의 역마에 올라탔다.
알라 신을 외치면서 그는 말에 올라타 부딤으로 떠났다.
둘릭은 그의 갈색 말에 올라탔다.
그들은 준비하고 있던 말들에 올라탔다.

이런 상투적 구절은 의식적인 기억 밑에 깊이 새겨진 그 리듬과 더불어 전통적인 구전 서사시(oral epic)의 심장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것이 창조적인 묘기라기보다 기계적인 나열처럼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은 한 노래꾼이 동일한 이야기 속의 동일한 순간에 대해 15년 간격으로 서로 다르게 전한 두 가지 판본이다(Lord 62).

 

또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서사시의 이런 유동적 형태는 구슬레(gusle)라는 악기, 즉 현이 하나인 만돌린 같은 악기로서 무릎에 올려놓고 활로 켜는 악기를 사용함으로써 뒷받침된다는 점도 기억하라. 이 악기는 1분에 10행 내지 20행을 노래할 때 그처럼 유동적인 구절들을 재빨리 부를 수 있는 10음절의 1행에 대한 리듬 박자를 제공한다. 다음 두 경우가 그 사례가 될 것이며, 문맹의 서사 음유시인들이 전통적인 구술을 보여줄 때 "1만 행을 글짜 그대로"(ten thousand lines verbatim)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첫 번째 경우
헤르체고비나 스톨락의 페타 비디치(Petar Vidi )는, 로드에 따르면, "평범한 노래꾼으로서 ... 예술적 예민성을 지녀야만 하는 노래꾼이었다"(Lord 113). 다시 말해서 그는 비범한 사례라기보다 전형적인 사례였다. 하버드대학의 패리 콜렉션(Parry Collection)에는 그로부터 채록한 [코스투르의 마르코와 니나](Marko and Nina of Kostur)에 대한 네 개의 완결 판본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71, 236-241). 

1. Parry no. 6: 1933년 8월에 받아 적은 것으로서, 모두 154행
2. Parry no. 805: 1934년 12월 7일 받아 적은 것으로서, 모두 234행
3. Parry no. 804: 1934년 12월 7일 녹음한 것으로서, 모두 279행
4. Parry no. 846: 1934년 12월 9일 녹음한 것으로서, 모두 344행

이처럼 전체 행의 숫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심지어 똑같은 노래꾼이 똑같은 이야기를 노래한다 할지라도 매번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준다. 그와 비교하기 위해서 다른 노래꾼 할릴 바이고리치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채록한 것은 다음과 같다.

5. Parry no. 6695: 1935년에 녹음(disc)한 것으로서, 모두 464행
6. Lord no 84: 1950년에 녹음(wire)한 것으로서, 모두 209행

세부적인 비교를 해보면 더욱 흥미롭다. 앞에 언급한 네 개의 완결판본 이외에도 페타 비디치는 Parry no. 804를 녹음하기 위한 예행연습으로 짧게 처음 20행을 녹음했었다(Parry nos. 803a, 803b). 그 이야기의 시작 부분인 첫 번째 연(stanza)에 대한 여섯 개의 판본은 다음 표와 같다.
첫 번째 연이 5행에서 9행까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그 상투적 구절들이 얼마나 창조적으로 나타나며 또다시 나타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심지어 804번의 예행연습으로 같은 날 녹음한 803a번과 803b번조차도 말 한 마디 빼지 않고 그대로 외우는 식(verbatim fashion)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경우
페타 비디치가 평범한 노래꾼이라면, 압둘라(혹은 압도) 메데도비치(Abdullah, 혹은 Avdo Me edovi )는 비범한 노래꾼이었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패리의 현장조사 조수였던 니콜라 이바노프 부지노비치는 1939년 그에 대해, "압도가 죽은 이후에는 그처럼 노래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메데도비치가 1955년에 85세로 사망한 후, 로드는 그 평가에 동의하여, "그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적 구전 이야기로 된 서사시의 가장 위대한 마지막 노래꾼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Parry 1974:11-12)라고 말했다. 만일 호머가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 노래꾼이었다면, 압도 메데도비치는 "우리 시대 발칸반도의 이야기 노래꾼이다"(Lord, 서문). 그는 1870년경에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도축작업을 했으며, 15세가 되었을 때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9년 동안 터키 군대에서 복무했지만, 어떤 언어도 읽거나 쓰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노래꾼으로서의 그의 탁월함은 그 양적인 측면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양적인 측면. 메데도비치의 레퍼토리는 58개의 서사시였다. 1935년에 그는 자신이 정상을 지났다고 간주하여, 9개의 서사시를 불러 패리와 로드에게 모두 44,902행을 녹음하도록 하고 33,653행을 받아 적도록 했다. 1950- 51년에 로드가 비젤로 폴제에 다시 돌아왔을 때, 메데도비치는 새로 3개의 서사시를 불러 모두 18,168행을 채록하도록 했다. 이로써 그의 노래를 채록한 것이 100,000행에 조금 미달되었다. 그뿐 아니라, 슬라브 구전 서사시의 가장 긴 두 개의 노래가 1935년에 그를 통해 채록되었는데, 하나는 12,323행이며, 다른 하나는 13,331행이었다. "압도는 호머의 {오딧세이}(Odyssey) 분량 정도를 노래할 수 있었다. 발칸반도 중부의 작은 마을 출신인 문맹의 도축업자가 적어도 노래의 길이에 관한 한 호머의 업적에 필적했다"(Parry 1974:8).
질적인 측면. 1935년에 로드는 의도적으로 메데도비치에 대해 실험을 준비했다. 즉 또 다른 노래꾼인 플레블제의 무민 블라호블작크로 하여금 메데도비치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2,294행짜리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던 것이다. 이어서 패리는 느닷없이 메데도비치에게 그 노래를 되풀이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정중하게 자신의 노래를 그 동료에게 바치는 것으로 했는데, 그가 즉석에서 따라 부른 노래는 6,313행에 달했다(Parry 1974:11). 이처럼 거의 세 배나 확대시킨 것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 베치라지치 메호에 대한 다음 두 가지 묘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것은 로드가 요약한 그 원래의 완결판본에서도 그 행수에 차이가 난다.

 

이와 비슷한 차이는 메데도비치 자신이 부른 [스마일라지치 메호의 혼인](The Wedding of Smailagi  Meho)을 부른 두 판본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노래는 처음에 1935년에 패리를 위해 채록되었으며, 1950년에는 로드를 위해 채록되었다. 스마일의 아들 메호의 이 이야기는 패리의 채록에서 12,323행에 달했으나, 로드의 채록에서는 8,488행뿐이었다. 1950년에 이르러서는 메데도비치가 매우 늙고, 병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가 지적한 것처럼, 그 노래의 길이는 "어떤 젊은이도 성취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작업이었다."(Parry 1974:11).
노래꾼이 기록자를 만나다
앞의 경우들을 통해서 호머와 메데도비치가 문자 기록자를 만나기 전에는 그들이 이야기, 주제, 상투적 구절, 그 구성에 있어서 구조적이며 리듬을 타는 데 있어서 전통적이며, 그 공연에 있어서 창조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갖는 방식으로 공연하였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 구전, 문헌 기록의 교차점에서 말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정확하게 그대로 반복했다는 점에 대한 흥미 있는 해설이 있다. 다음의 네 사례들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서기관과 문맹의 시인이 이 주제에 관해 어떻게 서로 대담하는지를 주목하라. 똑같다(same)는 말과 다르지 않다(not different)는 말이 어떻게 서로에게 똑같지 않고(not same) 서로 다른지(different)를 주목하라. 특히 노래꾼이 기록자와 씨름하면서 갖게 되는 어떤 신경과민, 혹은 심지어 답답함을 주목하라. 그는 자신이 망가짐을 인식한다.
첫 번째 경우
노래꾼 데모 조지치( em  Zogi )는 발칸반도에서 패리의 연구조수였던 니콜라 부지노비치(Nikola Vujnovi )에게 언젠가 라마단 기간 동안 또 다른 노래꾼 술레지만 마키치가 자신이 전에 들어본 적이 없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그 자신이 바로 그날 밤에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Lord 27).

N: 당신이 따라 부른 노래는 그 가사 그대로 똑같은 노래였는가?
 : 똑같은 노래로서, 가사도 말 그대로(word for word and line for line)     똑같았다. 나는 한 줄도 덧붙이지 않았으며, 한 군데도 틀리지 않았다.
N: 만일 두 노래꾼이 좀더 훌륭한 제3의 노래꾼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그 두 노래꾼 모두 자기들이 한번만 들으면 그 노래를 배울 수 있다고     자랑한다면, 그 두 노래꾼이 따라 부른 노래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두 노래꾼은 똑같은 노래를 똑같이 부르지   는 않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미 이 대화의 모순 속에서 구전적 상상력과 기록자의 상상력 사이의 충돌을 눈치챘을 것이다. 즉 문맹자 데모가 "말 그대로"라고 한 의미는 글짜를 아는 니콜라에게서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약간 거치게 들리는데, 마치 데모는 "똑같다"는 말이 서로에게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마키치가 부른 노래와 데모 조지치가 부른 노래를 패리가 채록했는데, 로드가 분명히 밝힌 것처럼, "그 노래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부른 노래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정확히 같은' 것으로 간주되기에는 충분히 가깝지는 않다"(28). 물론 아니다. 그러나 데모 조지치가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말 그대로"(verbatim)는 단순히 "전통적"(traditional)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글짜를 아는 배우는 서사시 수 천 행을 외워서 노래부를 수 있다. 글짜를 모르는 노래꾼 역시 서사시 수 천 행을 외워서 노래부를 수 있다. 그 두 사람 모두 정확하게 불렀다고, 심지어 말 그대로 충실하게 불렀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기록된 본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외우고 노래하고 정확하다는 것이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
이번에는 압도 메데도비치와 니콜라 부지노비치가 두 사람의 노래꾼, 즉 압도 메데도비치가 들었던 적이 있는, 똑같은 이야기를 노래한 두 사람의 노래꾼에 대해 토론했다(Parry 1974:73). 

A: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N: 그들은 그 노래를 똑같이 불렀는가?
A: 그들은 정말 똑같이 불렀다.
N: 모든 것을 똑같이 불렀다는 뜻이냐?
A: 그렇다. 그 전체에서 열 마디 정도만 달랐다.
N: 그 노래의 꾸밈새는 달랐을 것이라고 본다. 그 노래를 장식한 것은    다르지 않았는가?
A: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다르지 않았다.
N: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는 말이냐?
A: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정말이다.
N: 당신이 그 노래를 그 사람들보다 좀더 자세하게 부를 수 있는가?
A: 아마도 내가 부르면, 좀더 잘 꾸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그 두 노래꾼이 부른 노래를 채록한 증거가 없다해도, 그 차이가 열 마디 이상일 것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토론에서, "어느 것이든 더 나은 것이 진짜"(Parry 1974:60)라는 메데도비치의 원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경우
비록 패리와 로드가 연구하던 당시, 발칸반도의 수많은 문맹 음유시인들이 순전히 구전전승에만 의존하고 있었지만, 글쓰기는 물론 그들 주변의 일상적 현실이었다. 로드는 이 문제에 대해 경고하면서, "심지어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나라에서도 노래 가사들을 모아 출판한 것들은 이미 한 세기 이상 동안 큰 관심을 끌었으며,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거의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가사 수집자(collector)는 신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가사집(collection)을 보고 노래를 외운 노래꾼들이 있기 때문이다"(Lord 14). (가사집처럼) 일단 기록된 본문을 통해 외우면, 그는 더 이상 구전 예술가(oral artist)가 아니라, 문헌 예술가(scribal artist)로서 단지 구두로 공연할 따름이다. 그러나 구전에 의한 것과 문헌에 의한 것 사이에는 매우 미묘한 접점이 있으며, 이로 인해 압도 메데도비치와 [스마일라지치 메호의 혼인]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처음에 어떻게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가? 즉 16세기 중엽에 터키제국의 이슬람 황제를 기독교인 장관이 배신한 이야기를 처음에 어떻게 듣게 되었는가? 여기서도 질문자는 니콜라 부지노비치이다(Parry 1974:74).

N: [스마일라지치 메호의 혼인]은 어땠는가?
A: 가만. 내가 그 가사를 노래책에서 들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했는가?
N: 노래책에서 들었다고?
A: 그렇다.
N: 당신이 내게 그 말을 했다. 누가 그 가사를 당신에게 읽어주었는가?
A: 히브조 드차피치였다. 이 도축장에서 일하던 젊은이였는데, 그는 그        노래책을 어디선가 얻어왔다.   
N: 그가 몇 번이나 그 가사를 당신에게 읽어주었는가?
A: 대여섯 번.
N: 누군가 구슬레 악기에 맞추어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나?
A: 없다.
N: 누군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정말로 없는가? 한번이라도    듣지 않았겠는가?
A: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메데도비치는 자신이 들은 가사를 마치 또 다른 구전 판본(oral version)으로 취급했다. 그는 질문자에게 자신의 공연이 "좀더, 최소한 두 배" 길다고 말했다. 로드는 그의 각색의 독창성을 칭찬하면서, 그 출판된 가사 본문을 "압도가 확장시킨 것의 기조(keynote)는 장엄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Parry 1974:13).
일주일 정도 지나, 1935년 8월에, 니콜라 부지노비치는 히브조 드차피치를 찾아가 그가 압도 메데도비치에게 읽어주었던 노래책에 관해 물었다. 여기서도 주제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인데, 대답자의 망설임을 주목하라 (Parry 1974:77).

N: 그[메데도비치]는 그 시에 나와 있는 그대로 노래했는가, 아니면 그것   보다 더 길게 노래했는가?
H: 아니,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책에 있는 대로 정확하게 노래했다.     내 말의 뜻은 그가 다 불렀을 때는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는데, 당신도    알다시피, 음-, 노래로 부르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