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 장의 제목인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는 것은 바울에게서 비롯된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으로서, 바울이 복음을 간결하게 표현한 또 다른 말이다. 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말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으로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외쳤던 주장들 가운데 하나다. 즉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s) 구원받는다는 주장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또한 칼뱅의 종교개혁에서도 핵심적인 것이다. 즉 구원은 인간의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라는 말이다.
종교개혁의 바울이 아니라 로마서의 바울
바울은 갈라디아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 관해 말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로마서에 초점을 맞출 것인데,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로마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로마서는 바울의 편지들 가운데서 가장 긴 편지로서, 고린도전서만이 그에 버금간다. 또한 로마서는 바울 자신이 방문했던 적이 없어 그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공동체에게 썼던 유일한 편지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울이 예수의 의미와 복음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유일한 편지이다. 로마서의 목적은 자신이 방문할 계획을 세웠던 공동체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전하려는 것이었다.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로마서 첫째 부분의 정점이다.
급진적인 바울이 이 말을 통해 무엇을 뜻했는지를 우리가 살펴보기 전에, 우선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겠다. 첫째로, 이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내세(next life)로서, 우리가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기초가 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행위"(works)와 율법(the law), 즉 우리들의 행동을 기초로 해서 심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은총" (grace)과 "신앙"(faith), 흔히 "우리가 믿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에 기초해서 심판을 받을 것인가? 하나님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행동인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인가? 종교개혁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그 대답은 믿음으로서의 신앙(faith as beliefs)과 더불어 물론 선한 행동을 하려는 노력이 덧붙여진 것이었다.
둘째로, 앞의 질문이 함축하고 있듯이, "행위"와 "율법"은 "은총"과 "신앙"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 핵심적인 문제는 흔히 신앙 대 행위(faith versus works)가 되어버렸다. 셋째로, 이런 이해는 흔히 함축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반(反)유대교적인 것으로 이해되는데, 왜냐하면 이런 이해는 "행위"와 "율법"을 유대교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마치 "율법"은 일차적으로 "유대교 율법"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지난 몇 백 년 동안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에 맞서왔던 논쟁에서, 개신교는 은총과 신앙의 종교인 반면에, 가톨릭은 흔히 "행위"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이 의미했던 것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바울이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어떻게 천당에 가는가에 관해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신앙과 행위를 대조시켰을 때, 그는 "행위 없는 신앙"(faith-without-works)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신앙에는 항상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신앙 없는 행위"(works-without-faith)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불행하게도 너무 자주 존재하는 것이다. 즉 때로는 습관이나 죄의식 때문에, 때로는 생각 없는 반복으로, 혹은 계산된 위선으로 인해, 신앙 없는 행위 속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 이 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오해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오해되고 있는 방식들에 관해 자주 언급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과거와 현재의 다른 사람들보다 바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가 바울을 해석하는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즉 바울과 그의 로마서를 16세기의 논쟁적인 종교개혁의 세계로부터 끌어내어, 다시 1세기의 로마제국의 세계 속으로 정위치시킨다는 해석 원칙 때문이다. 바울을, 바울이 아닌 사람을 위해 읽는다는 것은 잘못이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바울은 루터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는 루터교 신자로 읽거나, 더욱 잘못된 것은 유대교를 비판하는 기독교인으로 본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바울을 바울답게 읽는 것이 올바른 것이며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즉 바울은 로마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언약의 유대교 속에 있는 기독교적 유대인(a Christian Jew within covenantal Judaism criticizing Roman imperialism)이었다.
로마서에 대한 주석들과 논의들은 작은 도서관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으며, 그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오늘날 일반 독자들이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서의 신학이 아무리 심오하다 할지라도, 로마서 자체는 당시 그 수신인이었던 로마의 기술자 공동체들과 상점 교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음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우리가 2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로마서를 전달한 것은 뵈뵈(Phoebe)라는 이름의 여자 집사였다. 그녀는 이 편지를 들고, 로마의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 찾아다니면서, 읽어주고, 설명해주고, 질문에 대답해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만일에 로마서 주석자들이 지난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매우 난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로마서가 정말로 난해한 것이었다면, 뵈뵈는 아마도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루터나 칼뱅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신학자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뵈뵈에게 무례하게 굴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당시 그 공동체들에게는 틀림없이 이해될 수 있었던 편지를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편지로 만들어버린 것인가?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은,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심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언제나 그랬으며, 바울 역시 그랬다. 특히 로마의 기독교인 공동체들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랬다.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2장에서, 기독교인들 서로 간의 평등성은 로마제국의 규범이었던 위계질서, 즉 자유인들 밑에 노예들이 있고, 남성들 밑에 여성들이 있었던 위계질서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또한 4장에서는 갈라디아서 3:27-29에 인용된 기독교인들의 세례식에서의 결단이, 당시의 민족, 계급, 성별의 규범적인 분열에 맞서서 철저한 평등성에 대한 비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들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작은 공동체들 바깥에 있는 보다 큰 세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주제다. 로마서는 갈라진 세상을 치유하며, 폭력에 근거한 불의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세상을 종식시키며, 하나가 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열정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이 편지의 구조적인 순서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
로마서의 서론부(1:1-15)와 결론부(15:22-16:27)를 따로 떼어놓으면, 나머지는 당시 바울의 세계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세 가지 커다란 분열을 하나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첫째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1:16-8:39)? 둘째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9:1-11:36)? 셋째로, 기독교적인 유대인들과 기독교적인 이방인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12:1-15:21)? 바울은 우선 초점을 가장 넓게 잡아 시작한 후에 점차적으로 그 초점을 좁혀나감으로써, 인간의 문명 세상이 어떻게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인지를 심사숙고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롬 1:16-8:39)
2.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롬 9:1-11:36)
3. 기독교적 유대인들과 기독교적 이방인들 (롬 12:1-15:21)
여기서 간단히 장 수만 비교한다 해도, 첫 부분이 둘째와 셋째 부분보다 배 이상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논의는 바울의 이런 강조를 따를 것이며 심지어 더욱 확대시킬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4장의 내용을 기억할 때, 바울이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정확히 로마에 살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지상의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지시하고 있는 역설적인 부적절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즉 로마제국은 주피터 신의 천상의 명령을 받았으며, 신성이 황제 안에 성육신했으며, 민족적인 다양성이 제국의 단결 속에 흡수됨으로써, 이미 지상의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버질이 그의 {애네이드}에서 밝힌 선언에서처럼, 승리에 의한 평화(peace-by-victory)였지, 그 선언에 대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맞받아 치고 있는 정의에 의한 평화(peace-by-justice)가 아니었다.
만일 우리에게 여기서 충분한 시간적 및 공간적 여유가 있다면, 2장에서 빌레몬서를 샅샅이 살펴본 것처럼 로마서를 살펴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로마서를 손에 펼쳐들고 우리와 함께 해당 본문들을 샅샅이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하다면, 본문 전체를 읽기를 바란다.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로마서 전체의 구조적인 순서와 더불어 매우 중요하지만 너무나 자주 오해되는 신학적 용어들, 즉 "의로움"과 "의롭다고 인정하심," "은총"과 "신앙," "율법"과 "죄," "제물"과 "죽음" 등의 용어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하나됨
이처럼 중요하지만 흔히 오해되는 용어들 가운데 첫 번째는 "정의"(righteousness)라는 말로서, 로마서 1-8장의 중심 주제를 소개하는 바울의 논제 선언에서 나오는 말이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The one who is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한 것과 같습니다.(롬 1:16-17)
바울의 편지들과 성서 전체에서 일반적으로 "의"(righteousness)와 "의로운"(righteous)이라는 말은 흔히 "정의"(justice)와 "공정한"(just)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모스 5:24, 즉 "너희는, 다만 공의(justice)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righteousness)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에서, 상반절과 하반절은 똑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공의"와 "정의"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라는 말은 "하나님의 정의"(the justice of God)로 번역해도 좋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 속에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 루터를 고뇌에 빠트렸으며,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복음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방아쇠 역할을 하게 된 본문이 바로 이것이다. 즉 루터는 “하나님의 의”는 이미 “율법”에 충분히 나타났기 때문에 “복음”에까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면, 우리가 구원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절망했던 것이다. - 옮긴이.)
그러면 이 구절에서 "정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정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정의는 바울을 크게 오해하도록 이끈다. 일반적인 용법과 신학의 역사에서도 흔히, 정의는 일차적으로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즉 처벌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중세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능동적인 의”(active justice)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그것에 의해 믿는 자가 의로운 자로 인정받아 살게 되는(롬 1:17b) “수동적인 의”(passive justice)라는 것을 깨닫고, “내 앞에 낙원에 이르는 문이 열렸다”고 환호했다. - 옮긴이.)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보복을 뜻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뜻했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의 보복적 정의, 즉 하나님의 처벌하는 정의가 어떻게 "복음"이며 "기쁜 소식"일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종류의 정의가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분배적 정의" (distributive justice)라 부른다. 분배적 정의는 공정한 처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정한 분배에 관한 것이다. 경제 영역에서, 분배적 정의는 생필품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을 뜻한다. 성서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땅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경제정의만이 아니라 그 "이상"(more)이다.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이 그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는, 하나님은 모두가 똑같이 접근할 수 있는 분(God is equally available to all)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들 각자에게 값없이 분배되어 하나님의 세상을 그와 똑같은 정의의 세상으로 바꾸도록 하신다는 뜻이다. 분배적 정의는 하나님의 본성이며 본질이며 성격이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자면, 바울의 복음의 중심에 있으며 로마서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는 성령 이식(a Spirit transplant)이 모두에게, 즉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끝으로,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를 이 장의 제목인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와 연결시키기 위해, 우리는 "정의"나 "의"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또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번역된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곧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르게 하시고 이 세상을 정의롭게 하시는 방식을 뜻한다.
다시 바울의 논제 선언으로 되돌아가자. 바울은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바울과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구원"은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지 내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구원이 우선은 "유대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 곳에서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을 뜻하지만, 분명히 적대감을 담고 있는 말이다. 즉 "그리스 사람"이나 "이방인"이 예를 들어 켈트족이나 중국 사람을 가리킬 때와는 달리, 유대인들이 과거에 지배를 받았거나 현재에도 억압을 당하고 있는 대제국들의 민족들(라틴어 gentes)을 가리킬 때는 그 어감이 훨씬 달랐던 것이다. 그들 모두를 "그리스 사람"으로 뭉뚱그릴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기원전 4세기 이래로, 알렉산더 대왕의 군사력에 기초한 문화적 제국주의가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전통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는 물론 그리스 제국의 칼날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로마인들의 칼날이 여전히 그리스인들의 칼집에 담겨 있었다.
먼저 유대인부터 그러나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열정은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1:16; 2:9-10). 그러나 미래에 하나님께서 하나로 만들기 이전에, 지금 당장 인간의 차원에서는 불행하게 하나가 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보편적인 실패를 책망하고 있는데,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3:9; 3:22-23).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 즉 모든 세상 사람들이 이미 하나가 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들 모두가 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처럼 전 세계적인 비판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가 시작했던 순서를 뒤집어서, 먼저 그리스 사람들을 비판하고(1:16-2:16), 이어서 동료 유대인들을 비판한다(2:17-3:18). 독자들은 이 성경본문들을 자세히 읽어주기 바란다. 그의 기본적인 전제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하나님의 법(a common divine law for all humanity)이 있다는 것인데, 그 한 판본은 유대인들의 약속과 전통 속에 기록된 것이며, 다른 판본은 이방인들의 가슴과 양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법을 주신 분은 똑같은 하나님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언약을 통해서 알려졌으며, 이방인들에게는 피조물을 통해서 알려진 분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righteous)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justified) 것"(2:13)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이 구절은 "의로운"(righteous)과 "정의로운"(just), 혹은 "의로움"(righteousness)과 "정의"(justice)가 성경 전체에서, 특히 바울에게서 정확히 똑같은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다. "의로운"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적 의미에서, 남들 앞에서는 경건한 척하지만 아마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종교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울에게는 정의로운(just) 행동이 올바른(right) 행동이며, 올바른 행동이 정의로운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참된 것이다.
첫째로, 로마서 1:16-2:16에서 바울은 도대체 이방인들에게 잘못된 것이 무엇이라고 지적하는가? 바울은 두 가지 실패를 인용하는데, 그 두 가지 모두가 이방인들에 대해 반대하는 회당의 표준적인 비판 논리에서 온 것으로서, 이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반대하는 논리처럼 부정확한 것이었다.
첫 번째 실패는 우상숭배(idolatry)다. "그들은 썩지 않는(immortal)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mortal)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1:23). 그 다음에, 우상숭배로부터 나오는 것(1:24, 26, 28)이 난잡함(immorality)이다. 바울은 난잡함에 대해 긴 목록을 제시하는데(1:26-31), 그 첫째가 동성애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natural) 관계를 바르지 못한(unnatural)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1:26-27).
바울은 그의 고발에서, 당시의 다른 유대인 도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가 나쁜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연스럽지 못한" (unnatural)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전통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전통에서도, 성적인 본성은 생물학, 몸, 생식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적인 본성이 화학, 두뇌, 호르몬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대답해야 하는 질문에 대해 결코 직면했던 적이 없었다. 물론 성적인 행동은 성적인 본성을 따르지만, 무엇에 의해 그리고 누구에 의해 성적인 본성이 결정되는가? 그리고 만일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물론 바울과 그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고린도전서 11:14-15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남자가 머리를 길게 하고 여자가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이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판단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서, 지역적으로 문화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것이지, 보편적으로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서 2:17-3:18에서 동료 유대인들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가? (성경본문을 자세히 읽어주기 바란다.) 바울이 인간의 보편적인 죄를 고발하는 것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비판을 받고 있는가? 바울의 기본적인 고발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이나 이상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2:21-23)
이것은 실제로 좀 무리한 고발이다. 예컨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비난할 때는 그들이 율법의 가르침에 충성하지 않는 위선을 비난하기보다는, 이방인들이 미신으로 간주하는 언약의 법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 드러내는 비합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2:29)라고 말할 때,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같은 당시의 유대인은, "물론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두 가지 할례 모두를 받아야 합니다. 내면은 외면으로 나타나야 하니까요"라고 응답했을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1:16-3:18의 본문 전체는 보편적인 인간의 죄에 대한 고발로는 그다지 깊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피상적인 것이라고 간단히 처리하기보다는, 이 전체 본문의 보다 깊은 정확성을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의 보편적인 죄를 고발한 바울의 본문에는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되고 심각하게 뒤틀린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인간의 본성에 그런 근본적인 잘못이 없다면, 적어도 인간의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바울과 우리가 "이 세상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키지 않는 법들과 선언들이 있으며, 이런 것들은 우리의 위선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불성실함을 증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만민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선서하는 미국이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니면 그보다 더욱 나쁜 사례로서, 인류가 어떻게 끔찍한 진화를 통해, 19세기의 제국주의에서부터, 20세기의 전체주의를 거쳐, 21세기의 테러리즘으로 발전해왔는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제 인류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런 현실은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전 세계적인 죄에 대해 고발했던 것보다 오늘날에는 더욱 깊은 차원에서 그의 고발을 다시 읽도록 만든다. 물론,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전 지구적인 결함을 보았을 수도 있지만, 그의 과거와 당시의 전통에서 그가 찾을 수 있었던 언어로만 표현했던 반면에,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훨씬 더 급진적인 언어로 그것을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처럼 전 지구적인 실패, 보편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는 세상, 사람들이 선언했던 이상과 실제로 성취한 것 사이의 깊은 단절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그의 세 가지 기초적인 용어들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제물(sacrifice)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도록(justification)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심(righteousness)이 주어진다는 것이다(3:25-26). 그동안 이 각각의 용어들이 심각하게 오해되어 왔기 때문에, 바울의 신학을 난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하나님의 의: 보복이 아니라 분배 (Righteousness of God: distribution, not retribution).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하나님의 정의와 정확히 똑같은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정의가 일차적으로 보복적인 정의 곧 처벌을 뜻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 사실에서 바울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시작된 것이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정의는 첫째로, 보복적 정의라기보다는 분배적 정의이며, 둘째로, 분배적 정의는 하나님의 본성, 본질, 성격이며, 셋째로,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값없이 분배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상을 그와 똑같은 분배적 정의의 세상으로 변화시키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바울을 잘못 오해하여, 바울이 하나님을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일 수 있는지, 특별히 로마서 1-3장에서 묘사된 인간의 보편적인 죄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복음"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신학적인 억지를 부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실제적인 복음은, 분배적 정의라는 하나님 자신의 성격이,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아무런 사전의 조건이나 공적 없이도,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의롭게 됨: 전가(轉嫁)가 아니라 변화(Justification: transforma- tion, not imputation). 당신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복적 정의로 잘못 읽었다면, 유일하게 기쁜 소식은 우리가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의로운(just)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장하시고(pretend),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정의(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해주실 것이라는 소식이다.
(이것이 루터의 구원론의 핵심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의"가 마치 부부간에 서로 가진 것을 공유하듯이, 죄인인 우리들에게 전가됨으로써,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그는 바울의 구원론을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롭게 변화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 옮긴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마치 그런 것처럼"(as if) 다루신다는 것에 대해 바울은 경악했을 것이다. 예컨대,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주장 속에는, 가상적인 정의의 전가와 같은 것은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이 정의에 의한 사실적인 변화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3:18).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4:16)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5:17)
이것은 전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희생제물: 대신이 아니라 참여(Sacrifice: participation, not substitution). 우리는 5장에서, 희생제물을 통한 속죄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안셀무스가 그것을 대속, 즉 대신 희생을 통한 속죄(substitutionary sacrificial atonement)로 해석한 것과 확실하게 구분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처형에 대한 바울 자신의 해석은 참여하는 희생을 통한 속죄(participatory sacrificial atonement)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3:25)라고, 단지 한 절로만 말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것(participa- tion in Christ)에 관해서는 한 장 전체(6:1-23)를 할애했던 것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죄는,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해 열거했던 전통적인 악의 목록보다 지금은 훨씬 더 나빠진 상태다. 즉 우리는 폭력을 문명이 선택할 수 있는 마약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마약에 중독된 것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의 피조물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비폭력적인 하나님을 성육신으로 계시한 것이었으며, 그가 비폭력적으로 정당하게 맞섰던 폭력적인 불의가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의 생애는 완성되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신성하게 만들어진" 희생제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증언이었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와 더불어 참여하도록 하는 궁극적인 초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문명이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에 대해, 은유적으로 또한 실제로, 죽음으로써 참여하거나, 또는 우리가 반대하는 똑같은 지배체제의 악에 의해, 은유적으로 또한 실제로, 죽임을 당함으로써(불행하지만 여전히 필요하다) 참여한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은총에 의해 의롭게 된다
은총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Grace as free gift).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3:24). 이것은 무슨 뜻인가? 로마서에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카리스'(charis)는 보통 "은혜"로 번역되며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free gift)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3: 24),
(위에 인용한 표준새번역 개정판(2003)은 새번역(2001)을 따라, justified를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로 번역함으로써, 개신교 성서들 가운데 루터의 칭의론(의인론)의 법적인(재판정) 논리를 가장 확실히 드러낸다. 즉 개역한글성서(1964)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표준새번역(1993)에는"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개역개정판(1998)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나 공동번역(1977)과 공동번역 개정판(1999)에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5:15)에 관해 말하며, 마치 북을 두드리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 선물...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5:15-17)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다. 거저 주시는 선물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거저 제공하시는 것(free offer)만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때 거저 주시는 선물(free gift)이 된다.
물리적인 유비를 들자면,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생각해보자. 공기는 정상적인 장소나 시간에서는, 항상 누구나 똑같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기를 얻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으며, 수고할 필요도 없다. 공기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무조건적으로 제공된다. 한편으로 공기는 우리가 전적으로 공기에 의존해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기가 우리의 안과 밖에, 우리 둘레에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무슨 호흡기병이 생기거나 아니면 공기가 오염되기 전에는, 공기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기는 거저 제공된 것(free offer)으로서, 우리가 공기를 받아들이고 공기와 협력할 때 비로소 거저 받는 선물(free gift)이 된다. 우리는 항상 공기를 너무 조금 들이쉬어 질식하거나, 너무 많이 들이쉬어 호흡항진(呼吸亢進, hyperventilation)을 일으키거나 할 자유가 있다. 더군다나 만일 우리가 질식이나 호흡항진을 선택했다고 해서, 공기가 우리를 벌주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항상 이미 어느 곳에나 있는 것과의 협력과 참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기쁜 소식(복음)은 하나님의 정의, 즉 하나님의 성격으로서의 분배적 정의가, 우리의 의롭게 됨(justification, 루터처럼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 옮긴이)을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또한 무조건적으로 제공된 은총이며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소식이다. 여기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협력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차적인 분배는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며, 하나님 자신의 존재이며, 하나님 자신의 성격이며, 혹은 바울이 좋아하는 말로는, 하나님 자신의 성령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일차적인 분배적 정의,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물로 주시는 정의로부터, 이차적인 분배적 정의가 나와야만 하는데, 이차적인 분배적 정의는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신앙은 전적인 헌신(Faith as total commitment). 무엇이든 값없이 거저 제공하는 것은 거저 받아들일 때만 비로소 선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물로 주시는 것, 하나님께서 성령 이식을 누구에게나 제공하시는 은총 역시 신앙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가 사용했던 유비를 계속하자면, 은총과 믿음의 관계는 공기와 숨쉬는 것의 관계와 같다. 여기서도 오해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신앙은 어떤 명제에 대한 이론적인 동의(assent)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대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것(vital commitment to a program)이다. 물론 어떤 프로그램을 명제로 요약할 수도 있고 그 명제를 믿을 수도 있지만, 신앙은 결코 사실적인 동의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그리스어로 pistis)은 생활방식 전체를 헌신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헌신으로서의 신앙은 항상 상호적인 과정으로서, 양쪽 모두가 물론 각자 고유한 차별성과 특성을 갖지만, 양쪽 모두가 신실할 것을 가정하는 양자간의 계약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대해 신실하시며, 따라서 신앙적인 응답으로서 이 세상 역시 그분들에게 신실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는 신실하게 한결같기 때문에, 기독교인들 역시 은총의 선물에 대해 한결같이 신실하게 응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해 전적인 헌신으로 신앙적인 응답을 한 위대한 모델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들의 조상으로서, 유대인들은 신앙으로 할례를 받아 살아왔던 반면에, 이방인들에게도 공통의 조상으로서, 이방인들은 신앙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3:29).
행위는 불공정한 비판(Works as unfair polemic). "행위"라는 말은 두 가지 점에서 크게 오해할 수 있다. 바울이 신앙과 행위를 대조시킬 때, 그것은 "신앙과 더불어 행위"(faith-with-works)와 "신앙 없는 행위" (works-without-faith)를 줄임말로 대조시키는 것이며, 항상 그렇게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서도 일상적인 문제를 예로 들어 유비로 설명하면, 바울의 신학을 올바로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로 이주한 어느 외국인 가족이 식당을 개업하여, 매우 열심히 일해서, 상당히 부유하게 되었고,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감사하는 마음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에서, 그들은 매일 아침 자신들의 식당 앞에 국기를 게양한다. 애국심에서 우러난 국기는 신앙에서 우러난 행위와 같다. 그러나 같은 구역 안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다른 가족은 새 손님들이 없어서 장사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국기를 거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애국심 없는 국기는 신앙 없는 행위인 셈이다. 이것은 매우 타당한 구별이며, 정치나 종교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당신이 그 구역을 지나간다면, 국기를 내걸은 두 식당들을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 그 식당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 식당 주인들의 의도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두 식당 모두가 "신앙과 더불어 행위"라고 판단할 수도 있으며, 두 식당 모두가 "신앙 없는 행위"라고 판단할 수도 있으며, 하나는 전자인 반면에 다른 하나는 후자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논쟁과 갈등 속에서 얼마나 쉽게 값싼 비판과 속좁은 비난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개인적인 사례. 우리는 책을 집필하고 그 책에서 인세를 받는다. 아마존 서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우리의 신학을 싫어하는 독자들이 우리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우리의 책들은 "신앙과 더불어 행위"가 아니라 "신앙 없는 행위"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런 비난을 완전히 입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물론 바울을 포함해서 "신앙 없는 행위"라는 비난을 읽을 때마다, 독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지적이며, 그것이 얼마나 대답할 수 없는 비판인지를 평가하는 데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부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하나됨에 관한 다음 부분으로 넘어갈 때도, 계속되는 문제이다.
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행위와 법(Works and law). 우선, 바울의 그리스어는 "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7:8)로 되어 있어, 그 법이 이스라엘의 "율법"이나 토라가 아니라 모든 "법"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도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바울은 "신앙과 더불어 행위"의 줄임말로 "신앙"과 "신앙 없는 행위"의 줄임말로 "행위"를 대조시킬 뿐만 아니라, "신앙"과 "법"을 대조시키기도 하며, 매우 자주 그것들을 결합시켜 "신앙" 대 "법을 지키는 행위"(works of the law)로 대조시킨다. 그는 갈라디아서 2:16에서 그렇게 결합시켜 대조시킨다. 즉 우리는 "사람이 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 그것을 반복한다. "사람이 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 신학자라면, 바울에게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바울 선생, 물론이지요. 우리도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은총에 의해 의롭게 되는데, 율법은 그 언약 관계의 외적인 표지, 공개적인 나타남, 눈에 보이는 헌신이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이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법"(갈 6:2), "믿음의 법"(롬 3:2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롬 8:2)에 대해 말한다. 그는 또한 "모든 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 5:14)라고 말하며, 로마서 13:8-10에서 "사랑은 법의 완성"이라는 말을 두 차례나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법"은 나쁜 것인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법"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에서, 법의 지배를 받는 생활이 정치적 생활을 위해서 그처럼 좋은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종교적 생활을 위해서는 그처럼 나쁜 것일 수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바울이 보기에 도대체 법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인가? 일상 속에서 "신앙과 더불어 법을 지키는 행위"가 "신앙 없이 법을 지키는 행위"로 전락할 위험성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법에 잘못된 것이 있겠는가? (우리의 유비에서는, "애국심에서 우러나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애국심 없이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법에 잘못된 것이 있겠는가?)
바울이 보기에는, 법에는 두 가지 상호작용하는 문제가 있다. 하나의 문제는 법이 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알려주며 그 법에 복종할 책임감을 준다는 점이다. 즉 법이 정한 것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법적으로 규정한 것이 그 법을 지키도록 하는 내면적인 힘을 불어넣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제한속도 100km라는 표지판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확실히 알려주지만, 틀림없이 그 제한속도를 지키도록 우리에게 내면적인 힘을 불어넣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법과 죄(Law and sin). 바울이 말하는 "법"은 모든 법을 뜻한다. 단지 유대인들의 법만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법도, 인간의 법만이 아니라 신의 법도, 기록된 언약의 법만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양심의 법도 뜻한다. 그렇다면 바울에게는 도대체 모든 법과 심지어 신적인 법에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인가? 법에 대한 바울의 구체적인 비판은 이렇다. "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4:15), "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7:8).
그렇다면 바울이 뜻하는 것이, 예를 들어, 살인은 살인을 금지한 법 때문에, 혹은 그 법에 대한 반발로만, 발생한다는 것인가? 바울은 법이 죄를 유발하며, 명령은 불복종을 유발한다는 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히 법은 지식을 확실하게 해주며, 우리는 이제 이것 혹은 저것은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이것 혹은 저것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만일 사람들이 모두가 평등하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선언하면, 그들은 이미 이런 상황이 우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이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이후에 그들이 그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들의 법이 자신들을 단죄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속도제한 100km 표지판은 당신을 시속 140km로 주행하도록 부추기지는 않지만, 100km를 초과해서 주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준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법을 어길 수는 없다는 말이다.
법은 (우리가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식이라는 힘을 주지만, 그 지식과 함께 본래적으로 복종할 힘(우리는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바울은 법의 이름으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7:15)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유대교 율법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부족함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그 최상의 법과 가장 진지한 이상 앞에서 하는 구조적인 혹은 체제적인 고백이다. 그것은 지식과 의지 사이, 혹은 양심과 행동 사이의 깊은 균열이다.
법은 정보를 확실히 알려주지만, 변혁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법은 바깥에서 양심에 정보를 주지만, 신앙은 안에서 그 법에 따를 힘을 불러일으킨다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앞의 2장에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기억하는가? 빌레몬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헌신이 동기로 작용하여,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꺼이 오네시모를 해방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가 단지 바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니면 기독교인의 법에 복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네시모를 해방시킬 것인가? 그는 신앙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법을 지키는 행위로 인해 행동할 것인가?
죄와 죽음(Sin and death).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5:12)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전에 주장했던 것,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므로 "맨 마지막으로 멸망시킬 원수는 죽음"이며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법"(고전 15:22, 26, 56)이라는 주장을 요약한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게 분명하지만, 옳은 말인가?
첫째로, 산업사회 이전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6살이 되기 전에 1/3이 죽었으며, 16살이 되기 전에 2/3가 죽었으며, 26살이 되기 전에 3/4이 죽었다. 고대세계와 현대세계에서도 여전히 고대적인 지역에서는, 죽음이 생애를 다 누린 후에 마지막으로 맞게 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에 곁에서 겪게 되는 현실이다. 기근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질병, 영양실조, 불의로 인한 탈진 때문에 죽게 되는 일들이 빈번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울에게 언제나 부당한 처형, 수치스런 십자가 처형의 끔찍한 죽음을 뜻했다. 죽음이 인생의 정상적인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신학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의 고향집에서 죽었다가 그곳에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의와 폭력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2천 년이 지난 후, 특히 21세기의 테러리즘이 20세기의 전체주의를 대체한 현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마지막 원수는 죽음인가, 아니면 폭력인가?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마지막 원수는 부당하며 폭력적인 죽음인가?
피조물의 신음
로마서 1-8장 속에 나오는 바울의 비전은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의 하나됨, 즉 모든 사람들이 전 지구적으로 평화가 정착된 변혁된 세상 속에서 하나됨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비전 역시 모든 사람들이 전 지구적으로 변혁된 세상에서 하나됨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둘이 서로 대결하는 것은 목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수단에 관한 것이다. 즉 그 최종적인 완성은 폭력적인 승리와 군사적 평정을 통한 평화로 올 것인가, 아니면 비폭력적인 정의와 의롭게 됨을 통한 평화로 올 것인가?
우리들 자신은 아마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구별을 세계 가족의 가장 큰 분열 혹은 중요한 분열로 간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세계를 가장 크게 분열시키고 있는 것은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 제1세계와 제3세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자들과 생존조차 하기 힘든 자들 사이의 분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분열이 항상 세상의 현실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단지 우리의 자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의 세상 자체에 대한 장엄한 찬송으로 이 부분을 마무리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 8:19-23)
바울은 이 다섯 절에서 "피조물"을 다섯 번이나 언급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성경, 예수와 바울이 한결같이 우리의 나르시즘적인 개인주의의 합창에 맞서서 속삭이는 음성들을 들어 보라. "멍청이들아, 문제는 세상이야. 세상이 문제란 말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하나됨
그 다음에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로 분열된 세상을 좀 더 좁혀 들어간다. 그는 유대교 안에, 비기독교적인 유대인들(non-Christian Jews)과 기독교적인 유대인들(Christian Jews), 즉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과 메시아로 받아들인 유대인들 사이의 분열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애당초 비기독교적인 유대인들과 기독교적인 유대인들이 하나를 이룬 공동체가 유대교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희망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9:24) 하나됨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10:12).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50년대 중엽에 이르면, 그런 하나됨을 기대하기에는 세상에 너무나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닫게 되었다. 그런 하나됨은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 울부짖는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9:2-3).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것이 단지 해결해야만 하는 인간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11:25)로서 숙고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 초점은 하나님에게 맞추어져,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문제와 씨름한다.
하나님의 목적(Divine purpose). 바울은 이런 현실에 대한 선례를 찾기 위해 유대인 성경을 뒤져서,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선택과 놀라운 역전의 많은 사례들을 찾아낸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 이삭이 하갈에게서 낳은 큰아들 이스마엘 대신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9:7-9). 그리고 이삭이 레베카와 결혼한 후, 그들의 작은 아들 야곱이 큰아들인 에서 대신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9:10- 13). 이것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9:19-21)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예언자들, 즉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 가운데서 "백성"을 선택하실 것이지만(9:24-26), 유대인들 가운데는 오직 "남은 사람"만이 선택될 것(9:27-29)이라고 말했던 예언자들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자신들이 기대해왔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은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심지어 자신에게 이처럼 통렬한 현실을 직면하고도, 그는 "이스라엘의 그들조차"(11:23) 하나님에 의해 잃어버리고 단죄받고 포기된 자들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감정에 복바친 그의 두 번째 울부짖음을 듣게 된다.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11:1-2). 그러면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청소하실 것에 대한 바울의 종말론적 비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의 궁극적인 공동체로 결합되는 것이며, 그 순서는 "유대 사람이 먼저이며 그리스인들까지도"(1:16; 2:9- 10)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바꾸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먼저이며, 그 다음에는 다음 메시지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이다. 즉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11:11). 다시 말해서,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11:25)이다.
이 부분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울이 그의 전체 설명 전체를 결론짓는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하는 경고다(11:13-36). 그는 이방인들에게 길고 엄중하게 경고하는데, 예를 들면, 그들의 자만심과 자신감에 맞서서, 이스라엘은 오래된 참 올리브 나무인 반면에, 이방인들은 그 나무에 새로 접붙여진 야생 가지라는 인상적인 이미지로 경고한다(11:17-24).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11:25)이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우리가 바울보다 이것에 대해 더욱 충분하게 말할 수 있으며 말해야 한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며 이스라엘 사람들[비기독교적 유대인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11:28-29)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제 바울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다. 즉 두 가지 언약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들의 언약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들의 언약으로서, 그 둘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그 둘 모두가 처음에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신앙으로 완전히 살아내졌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계속되는 역사를 직면하며 바울이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이라고 불렀던 것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의 문제(Human problem).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 문제를 바울이 하나님의 신비로 강조한 것(9:1-29; 11:1-36)이 의도적인 틀이 되어, 바울은 그 틀 속에서 이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설명한다(9:30-10:21).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신앙(과 더불어 행위) 대 (신앙 없는) 행위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바울은 지금 모든 비기독교적 유대인들을 외형주의(externalism)로 비난하고, 법적인 요구사항들을 단순히 이행함으로써 정의와 의롭게 됨이 가능하다고 기대하는 자들이라고 도맷값으로 매도하는 것인가?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단지 졸렬한 비난에 불과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바울의 논리에 반대하는 신학자들은 그에게, 정의와 의롭게 됨은 내면적인 언약 관계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법은 그것의 불가피한 외형적인 형태라고 응수했을 것이다. 그러면 9:30-10:21 부분을 단순한 일방적인 비난으로 무시해야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 3장에서 보았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방인들"에 관한 대목을 다시 기억할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3장에서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의 체험을 결국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들은 회당 예배에 참가하던 이방인 동조자들로서, 종교적으로는 완전한 유대인들과 순수한 이방인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회당이 이들을 받아들인 것은 의도적인 선교전략으로서, 그 개인들에게 완전한 개종을 요구하지 않은 채(예컨대, 남자들의 할례), 그들을 우상숭배와 난잡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매우 적절한 방법이었으며, 그 이방인들에게 완전한 개종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가족적 및 사회적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결코 선교전략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방인들은 두 세계 사이에서 잃어버린 자들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유대인들의 법적인 요구들 가운데 일부를 따르면서도 유대인들의 신앙은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절반은 유대인이며 절반은 이방인이 된다는 것을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신앙 없는 행위"의 고전적인 경우가 아니었는가? 그는 로마인들에게 또 다른 문제에 대해 경고했는데, 예컨대, "믿음에 근거해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라고 경고했다(14:23).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방인들은 유대인 회당에 참석함으로써, 유대교에 근본적으로 올바른 무엇인가가 있으며 자신들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죄" 안에 있으며, 그들이 하는 것은 신앙(과 더불어 행위)이 아니라 (신앙 없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은 바울과 그의 동료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그들 자신에게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그들 이방인 동조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기 위해, 한편으로 바울의 기독교 선교전략과 다른 한편에서 유대인 회당의 선교전략 사이의 충돌이었다. 바울은 그 이방인 회당 참가자들과 그들을 지지한 모든 유대인들이 법을 통해, 행위를 통해, 그리고 법의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려 한다고 책망한 것이다.
바울의 책망과 주장은 타당했지만,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4세기 말엽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즉 "이제야 당신은 문제를 제대로 보십니까? 이방인들이 당신네 기독교에 밀어닥쳐서, 당신네 기독교를 덮어버렸지요. 당신은 당신네 기독교가 그들을 개종시켰다고 생각하지만, 그들 이방인들이 당신네 기독교를 개종시킨 거지요. 당신이 당신 스스로 생각하듯 훌륭하다면, 그냥 당신 모습 그대로 살아가서, 당신에게 매력을 느낀 사람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교는 성공하게 놔두고, 개종을 통한 선교는 실패하게 하시지요." 아니면,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하듯이,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11:33, 36)라고 말했을 것이다.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하나됨
우리는 마침내 로마서의 결론부분에 해당되는 장들에 이르렀지만, 다음 세 부분, 즉 12:14-13:10과 16:1-16은 앞에서 각각 4장과 2장에서 살펴보았으며, 15:22-33은 에필로그에서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제쳐놓도록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된 세상에 대해 바울이 초점을 좁혀 들어가는 것의 가장 안쪽에 있는 원, 즉 로마의 몇몇 기독교인 모임들 안에서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하나됨의 문제(12:1-15:21)에 초점을 맞추겠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기원후 54년에 죽고 이어서 십대의 네로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던 때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는 시인 칼푸르니우스 시쿨루스(Calpurnius Siculus)가 그의 로마인들에게, "흔들림 없는 평화 가운데 황금시대가 두 번째 시작을 이루었나니... 그분은 진정한 하나님이시지만 나라들을 다스릴 것"(Eclogues I.42,46)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때였다. 또한 당시는 바울이 그의 로마인들에게,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12:2)야 하지만, 여전히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if it is possible,)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12:18)라고 말할 수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은, 네로 황제 아래서는 실제로 매우 중요한 조건절(if)이었을 것이다.
로마서 12:1-15:21 전체에서 우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바울이 가르치는 것이 단지 외부적인 평화만이 아니라, 특별히 내부적인 평화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서로 한 마음이 되라"고 두 차례나 말한다(12:16; 15:5). 더 나아가 바울은 로마의 공동체들에게,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12:3)라고 말한다. 나중에 그는 그들에게,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14:22)라고 말한다. 공동체들 안에서 서로간에 화합이 필요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within) 다양성을 주셨거나, 기독교 신앙의(of) 다양성을 주셨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평화롭게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그처럼 긴 해명이 요구되었던 로마 기독교 공동체 안과 밖의 정확한 상황은 무엇이었는가?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The weak and the strong). 로마의 기독교인들 모임 안에는 분명히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관점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양편 지지자들을 하나의 전체적인 예배 공동체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서로간에 받아들여 환영하지 않는(15:7) 두 집단으로 만들고 있었는가?
바울은 한 집단을 약간 편향적으로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 부르고, 다른 집단을 "강한" 자들이라 부른다. "약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정결 음식법(kosher)과 종교적인 달력이 여전히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기독교적 유대인들일 수도 있었고, 기독교인 하나님 예배자들이었을 수도 있었다. 반면에 "강한" 사람들은 그런 유대인들의 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었다. 즉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14:2, 5).
바울은 자신의 이론과 입장과 관련해서 매우 분명하다. 즉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14:14).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강한" 자들에 속한다고 말한 것인데, 그들은 유대인들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 하나님 예배자들이나, 기독교적인 이방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15:1)라고 말한다.
또한 그 집단들 자체의 상황과 실천과 관련해서도 바울은 매우 분명하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면서,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14:3)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런 불일치 속에서도 하나됨을 위한 공통의 기초는 이것이다.
각기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4:5-6)
그러므로, 약한 사람들은 강한 사람에 대해 "비판하지 말고"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주장한다(14:4, 10, 13).
신념이 약한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바울은 결코 그들의 유대인 정결음식법과 절기 준수를 포기하라고 요청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실제로 바울이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의 전부는, 강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14:3, 4, 10, 13).
바울은 대부분의 시간을 신념이 강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또한 강조해서 말한다. 즉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14:15; 14:20-21; 15: 1). 다시 말해서, 정결음식법과 절기 준수가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그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신에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만일 모든 음식이 좋다면, 정결음식도 좋은 것이다. 만일 매일마다 좋다면, 안식일도 좋은 날이다.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적응하고 극복하고 성장해야 할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기 때문이다(14:17). 바울은 그 두 집단 모두에게 상대방의 종교적인 차이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고 함께 주님의 만찬을 나눌 수 있도록 하라고 요청한다(15:6-7). 그러나 바울은 또한 그런 법들을 준수하는 것과 준수하지 않는 것 모두가 신앙에서 우러나와야지, 차별이나 멸시나 심판에서 비롯되면 아니 된다고 주장한다(14:22-23).
안디옥에서 로마로(From Antioch to Rome). 3장에서 한편에는 바울과, 다른 한편에는 야고보, 베드로 "심지어 바나바까지도"(갈 2:1-14) 양편으로 나뉘어 심하게 논쟁했던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3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40년대 말엽에 바울은 안디옥에서 그들 모두와 맞서서 논쟁했고 결국엔 졌는데, 로마에서도 정확히 그것과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기독교적 유대인들과 기독교적 이방인들이 함께 섞인 공동체에서 성찬음식은 모두에게 정결음식(kosher)이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정결음식일 필요는 없는가?
이전에 결정된 것은 아무에게도 정결음식일 필요는 없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형제인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모두에게 정결음식으로 바꾸도록 요구했다. 바울을 제외한 모든 지도자들이 이에 동의했는데, 바울은 베드로가 입장을 번복한 것에 대해 그를 "위선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바울에게 이 문제는 양보 없는 정책에 의해 해결되었기 때문에, 결국 바울 자신이 나머지 사람들과 심지어 바나바로부터도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갈 2:11-14). 우리는 3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절대로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신학적인 이유였다기보다는 논쟁적인 동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로마에서도 똑같은 식사 문제에 봉착하여 그가 다르게 반응한 것(롬 14장)을 설명해줄 것이라고 암시했었다.
로마서 14장에서는, 바울이 이전에 안디옥에서 논쟁했을 때보다 그 자신의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더욱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분명한 교훈을 준다. 즉 2천 년 전에, 기독교 안에서 유대인의 법을 지키는 문제를 놓고 "약한" 기독교인들과 "강한" 기독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매우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서는 그 문제들이 중요한 문제였으며,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수도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서로 간에 벌어지는 논쟁들 가운데 어떤 것이 후대에는, 마치 안디옥과 로마의 논쟁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오래되고 상관이 없는 문제처럼 보일 것인가? 그러나 여하튼, 바울이 그 옛날의 논쟁을 해결하고 했던 방식은, 여전히 기독교인들 서로 간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논쟁들에서,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반면에 "약한"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을 "비판"하는데, 그들 모두에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15:7)라고 말하며,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14:1)라고 당부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로마서에서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 자신, 곧 하나님의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사건의 공적이나 조건 없이 거저 주어졌지만, 우리 인간은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는 우리가 믿음에 의해 그것을 받아들일 은총으로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을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바울에게 매우 특별한 질문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왜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2:12b)라고 말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왜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앞에 놓아 하나님을 공포의 하나님으로 만들었는가?
우리는 이 본문의 전체 문장을 읽어 그 맥락에서 이 표현을 읽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말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12b-13)
이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두려움과 떨림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의 질문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염원하게 하시며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라면, 왜 우리가 굳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가? 만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실패한 것에 대해 어떻게 처벌을 받을 것인지를 알 수 있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고 계시다면, 왜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우선, 바울은 이 한 문장에서 "행위"라는 뜻의 단어(work)를 세 번 사용하는데, 첫 줄에 "이루어 나가십시오"(work out), 둘째 줄에 "활동하셔서"(work), 마지막에 "실천하게"(work)가 그것이다. 이것은 "행위 없는 신앙"(faith-without-works), 즉 "외적인 드러남이 없는 내적인 헌신"이 가능한가에 대한 논의를 이 한 문장으로 단번에 종결지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문제는 "행위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없는 행위"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드러내지 않을 수(love without show)는 없지만, 사랑 없이 겉치레(show without love)만 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의도와 실천 모두에 힘을 불어넣으시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의학기술의 사례로 되돌아가 보자. 심장이식 수술에서, 환자의 낡고 망가진 심장은 완전히 제거되고 새로 깨끗한 심장으로 대체된다. 그렇게 새로 이식된 기관을 몸이 거부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방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약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하시는 것은, 정체성의 변화이며, 성격을 대체하는 것이며, 성령이식(a Spirit transplant)이다.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 하나님 자신이며 본성이며 성격인 비폭력적인 분배적 정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무상으로 제공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카리스'(charis)라 부른 것이며 우리가 "은혜"라 번역하는 것이다. 이 은총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전의 어떤 조건도 없이, 우리에게 기대되는 사전의 어떤 공적도 없이, 거저 제공되는 선물이다. 실제로 그런 사전의 조건이나 공적을 어떻게 상상조차 할 수나 있겠는가? 또한 우리의 유비를 계속하자면, 하나님의 성령이식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약들은 기도, 명상, 예배와 예전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바울은 그런 성령이식의 과정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 구현" 혹은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이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식이 거저 제공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들에게도 똑같이,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도 똑같이 거저 제공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마 5:45).
이처럼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까지 제공되는 절대적 은총은 바울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것을 다마스쿠스에서 개인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빌립보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이 바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3:6). 그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고, 또 아주 없애버리려고 하였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식이 그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1:13). 그가 로마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5:10).
그 성령이식은 비록 하나님의 친구들과 원수들에게 똑같이 거저 제공된 것이지만,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간의 자유를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그 성령이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바울은 "신앙"이라 부르는데, 그 신앙은 물론 거저 주신다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 거저 주신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인식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 자신의 비폭력적인 분배적 정의라는 성령이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 복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협력하여 이 세상을 원상회복 시키기 위해 염원하고 실천하도록 의지와 능력을 갖도록 힘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는, 우리가 실패할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벌하실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성공할 경우 이 세상이 우리를 처벌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