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한, 세례요한은 치유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의 스타일은 고대 예언자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불같은 복수(復讐)가 임박했음을 경고하여, 조만간 이 세상에서 악을 쓸어버리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쓸모 없는 가라지처럼 날려버리실 것이라고 선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비록 예수 역시 그의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마가 1:15)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요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대개 친절하며 유머를 섞어 말했으며, 때로는 자신에 대해 비판하거나 의심하는 자들에 맞서서 도전적인 비유들과 가시가 박힌 말씀을 재미있게 하셨다. 동시에 예수는 귀신축출과 치유에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어서, 많은 군중들이 그 주변에 몰려와 기적적으로 낫게 되기를 바랬다. 복음서들에는 예수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귀신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고생하던 폭력적인 젊은이들을 어떻게 고쳐주었는가 하는 강력한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온몸이 마비되어 걸을 수 없게 된 이웃 사람이 다시 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를 둘러메고 예수가 머물던 곳까지 먼 길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회당장이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에게 찾아온 이야기, 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의 옷만이라도 만지기 위해 군중을 뚫고 나왔던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비록 우리는 오늘날의 신앙의 치유자들과 갑자기 지팡이를 내던지게 되어 성경 구절을 외치면서 기뻐 춤추는 그 제자들의 이야기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지만, 예수의 귀신축출과 치유를 단순히 보다 깊은 영적인 치유를 보여주는 은유로 축소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세기에는 귀신축출과 즉각적 치유 자체를 불가능하거나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컨대 우리는 당시의 비의종교(秘義宗敎)와 주술적 본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선한 귀신과 악한 귀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행동, 안녕은 어둠과 빛 사이에 계속되는 보이지 않는 투쟁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을 보류하시는 한, 천사들과 악마들 모두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돕거나 해칠 것이다. 그런 귀신들은 행운과 불운의 숨겨진 원인으로 작용하여,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갑자기 해방되는 것은 보통 "기적"이라기보다는 테크닉의 문제였다. 많은 경우에 질병의 고통스런 증상이 낫게 되는 것은 개인의 속죄,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기도, 예루살렘 성전에 자유의지로 바치는 헌금을 통해 가능했다. 때로 악마에 휘둘리는 것은 다루기가 힘들었고, 오직 탁월한 기술을 가진 전문 치유자들―그의 부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나 그의 여러 천사들의 능력을 불러낸다―만이 그 귀신들을 도망가게 할 수 있었다. 가장 힘든 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집단적인 죄, 곧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온 것으로 믿었던 악령들이었다. 그런 악령들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고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시작할 때까지 계속 이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저 체념한 채, 아무도 고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즉 무서운 눈빛으로 떠돌아다니며 불법자처럼 살았던 청년, 마을에 살면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광인들, 갑작스런 발진과 치명적인 고열에 시달리던 무기력한 아이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눈이 멀거나 불구자가 된 농부들과 어부들,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의 어머니가 될 십대 소녀들이지만 사춘기에 극심한 출혈로 인해 임신을 할 수 없게 된 소녀들이 바로 그 끔찍한 모습들이었다.
오늘날 의학 역사가와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그처럼 심각한 정신적 및 신체적 장애에 대해 정확한 임상적 진단을 내릴 수 있는데, 그런 질병들은 오늘날에도 개발도상국의 빈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질병은 위생상태가 불결한 상황에서 감염이나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지만, 그 증상과 영향이 덜 심각한 질병은 극심한 심리적 갈등, 만성적 우울증, 스트레스 등과 관련된 신체적 무질서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고통이 덜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와는 매우 다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당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던 지역에 살던 사람들, 그들의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급격하게 해체되고 다른 치료 수단이 없었던 사람들의 속수무책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시대와 장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주 노동자들과 소작농들이 손과 팔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결리고 멍이 든 것이 어떻게 점차 손과 팔을 못쓰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영양실조와 미래에 대한 불안, 잔인한 노동조건 등이 결합해서 스스로를 전혀 쓸데없는 존재라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과 같다. 복음서에서 자주 듣게 되는 귀머거리와 귀신들린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노숙자들," 곧 자기 주변의 현실을 헤쳐나가지 못하여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남들의 자선에 의탁해서 먹고살며 자신들의 고통과 불만을 아무렇게나 발산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사렛 예수가 이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치유했던 방식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임상적 정보는 없지만, 예수가 갈릴리에 나타났을 때 뭔가 분명히 강력한 어떤 일이 벌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예수는 자신의 스승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단순히 반복했던 제자들과는 달리, 독특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예수의 치유력은 당시의 관찰자들, 곧 그의 제자들과 그를 무시했던 사람들 모두가 보기에도 일반적인 규범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만일 예수의 귀신축출과 치유가 단순히 개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우연한 기적이었다면, 예수는 결코 그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나사렛의 고향집으로 되돌아왔거나 갑자기 가버나움에 나타나, 또 한 사람의 갈릴리 무당(shaman)이나 민속 의사로서 개업을 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마을의 치유사로부터 반갑지 않은 경쟁자로 간주되었을 것이며, 조만간 그 마을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치유 행동은 복음서들에 나타난 것처럼 단순히 보통의 마술이나 민속 의술이 아니었다. 예수는 결코 마술이나 상징적인 부적을 사용하거나, 복잡한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에 관한 기록 어디에도, 혹은 그를 고발한 사람들의 고발 내용 어디에서도, 그가 무당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거나, 고쳐준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예수는 강력한 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창조적인 에너지―그의 많은 추종자들은 그것이 신적인 에너지라고 믿었다―는 단순히 개인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공동체 생활 전체를 변혁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과 행동이 두드러지게 세례요한의 말씀과 행동과 같은 선상에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갈릴리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설교했던 하나님 나라가 단지 임박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병이 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틀림없는 징조였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묘사하면서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오실 날을 예상하면서,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35:5-6)고 예언했다. 시편 146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력이 회복되고 심지어 가장 심하게 다리를 저는 사람도 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8절). 엘리야는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릴 수 있게 되었으며(왕상 17:17- 23), 그의 제자 엘리사는 나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왕하 5:10-14). 훨씬 더 예수 당시로 내려오면, 사해두루마리 문서들 가운데 하나―학자들이 4Q521, 혹은 "메시아적 묵시"(The Messianic Apocalypse)라 부르는 문서―는 기적적인 치유에 관한 매우 친숙한 성경의 여러 기대들을 하나의 시로 묶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개입에 관해 쓰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를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포로들을 풀어주고, 눈먼 자를 보게 하며, 억눌린 자를 일으키실" 것이라 했다. 그는 또한 "병자를 낫게 하며 죽은 자를 부활시키며,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것이다. 갈릴리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는 세례요한이 선포했던 유황불과는 다른 종류의 것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는 악한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복수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교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이스라엘 땅에서 오랫동안 억압받던 농촌 주민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질 것이라는 놀라운 증거도 보여주었다.

예수 이후에도 갈릴리 지역에는 수많은 예언자들과 치유자들이 거쳐갔을 것이지만, 아무도 나사렛 예수만큼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을의 인구 가운데 실제로 어느 정도나 예수의 메시지와 활동에 응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응답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삶이 뒤바뀌는 영원한 변화를 경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공생애에서 갈릴리 활동 단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가설의 핵심은 예수가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를 받고 있던 농민들의 구체적인 곤경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하여, 그의 청중들에게 단지 일반적인 약속이나 위협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그 농민들이 단순히 무기력한 희생자의 운명에 처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공공연하게 반정부 연설을 하거나 비밀리에 무장반란을 도모하는 식의 정치적 항거는 아니었지만, 훨씬 더 강력한 방식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즉 예전에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힘들에 의해 마비되거나 불구가 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삶을 추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들에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과 새로운 개인적 확신 모두를 주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이 그의 "선동적인" 설교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의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동안, 나사렛 예수는 갈릴리로 되돌아와 그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의 상당부분은 그 새로운 통치자의 권력과 경제정책에 체념하고 수동적으로 묵종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예수의 치유와 귀신축출은 사실상 보다 큰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예언자 엘리야가 정치적 및 경제적 갱신운동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비구름을 불러왔고(왕상 18:41-45), 굶주린 과부가 지닌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이 떨어지지 않게 했고(왕상 17:12- 15), 요르단 강물을 기적적으로 갈랐던 것처럼(왕하 2:7-8), 예수라는 이름의 이 새로운 예언자 역시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마을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으며,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만들었으며, 적은 분량의 빵과 생선으로 수많은 굶주린 군중들을 배불리 먹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예수의 기적들은 기이한 자연적 호기심의 사건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다시 개입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예수는 주장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사해두루마리의 "메시아 묵시"에 나오는 기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이 세상이 끝나고 메시아의 새로운 세상이 올 때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해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이야기에 따르면,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예수가 하나님께서 메시아 시대를 시작하도록 보내신 예언자인지를 물어보도록 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직접 대답하는 대신에 단순히 갈릴리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가리켰다. 즉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4-5; 누가 7:22). 이것만으로도 어떤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려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회적이며 정치적 및 경제적 갱신의 시대만이 아니라 영적인 갱신의 시대가, 로마제국의 충실한 하수인 헤롯 안티파스의 눈앞에서 동터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 마을들과 이스라엘 전역에서 로마제국의 팽배한 영향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다음 단계는 치유와 기적을 베푸는 일을 넘어, 헤롯 안티파스 통치 아래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던 고통을 영원히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식을 제시하는 단계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갈릴리 마을에 되돌아온 후부터, 세례요한의 급박한 메시지, 곧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가 1:15)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선포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 지도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으로 설명해왔으며, 이 개념에 대한 예수의 이해가 어떻게 세례요한의 이해와 달랐는지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교회의 많은 전통들은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예수를 개인적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복을 받은 상태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악한 세상 속에 거룩하고 영원히 서 있는 참된 교회(True Church)의 신성한 영역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는 매우 다르게, 20세기 초의 중요한 신약학자 알버트 쉬바이쳐(Albert Schweitzer)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조만간 모든 피조물을 압도할 무서운 물리적 변화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이 두 학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를 (곧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세례요한의 불같은 설교처럼) 당시의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적 맥락, 곧 이 세상을 완전히 파괴하고 변혁시킬 "우주적 대격변"의 도래라는 맥락에서 해석했다. 그들은 예수를 올바른 역사적 맥락, 곧 당시의 유대교 제2 성전시대의 전통 속에 자리매김할 경우, 온화한 스승이나 치유자로 오해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세상이 곧 사라질 것이라 믿었던 파괴와 심판의 단호한 예언자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처럼 불길한 해석은 나사렛 목수 출신의 예언자의 기쁨에 넘치고 생명을 긍정하는 메시지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인 유대인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의 언어(복음서, 사해두루마리, 기타 유대인 묵시문학 본문,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처럼)는 이 세상과 그 주민들이 마치 핵무기에 의해 파괴되듯 문자적으로 파괴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극적인 역사적 변화에 대한 생생한 표현방식, 혹은 과장법의 표현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세례요한이나 예수가 기대했던 "격변"이란 지배층의 몰락, 곧 로마의 유혹적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고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가치를 저버린 헤롯 왕조의 지배층이 몰락해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세례요한과 예수의 설교 모두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대하는 방식상의 혁명과 인식의 혁명, 곧 이 세상에 자신들을 다스리는 창조주 한 분 하나님 이외에는 카이사르도 없고, 분봉왕도, 백부장도 없다는 인식의 혁명을 뜻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모든 권력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며, 순수한 언약 체계로 되돌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아래 형제자매로 간주되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의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혁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와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오랜 유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초기 예언자들처럼, 예수 역시도, 이스라엘의 왕의 지배가 없는 왕국이 이미 현존할 수 있으며 그 마을과 도시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성함을 깨닫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체 생활을 재편한다면 말이다.
예수의 능력을 통해 다리 저는 사람, 귀먹은 사람, 장님, 귀신 들린 사람이 낫게 되면서, 예수는 자신의 치유 속에 나타난 에너지와 이스라엘의 보다 큰 갱신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영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누가 11:20).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사건들을 통제하시지만, 그의 뜻을 펼치기 위해 군대나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 하늘에서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 사이의 임박한 전투를 열심히 기다리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또한 로마인들과 헤롯의 용병들에 맞서서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주장했던 사람들(오합지졸과 같은 게릴라들에게 또 한번의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초래할 길)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하나님께서 대안적 사회(an alternative society)를 창조하심으로써 그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그 사회는 어떤 종류의 사회였는가? 예수는 치유와 귀신축출 사건에 따른 메시지를 통해 사람들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대면했다. 헤롯 왕의 세금과 토지 박탈의 위협 아래, 사람들은 상호 협력이라는 전통적인 마을의 정신을 잃어버렸기에, 서로 분열되고 서로를 비난하는 태도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갈릴리 마을이 그리스 왕국이나 로마제국이 지배하기 이전에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던 소작농들의 삶이란 가뭄, 전쟁, 질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잉여 생산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율법에 깊이 새겨진 사회적 법규들과 공동체의 행동 기준을 항상 지켜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채와 세금의 압력을 받아, 더 이상 토라(Torah)가 아니라 로마의 법적인 기준이 우선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예전에는 이웃이 궁핍할 때 도와주어야 할 책임을 느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래야 할 법적인 의무가 없게 되었는데, 특히 그들 자신이 이제는 채무자가 되어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줄 식량조차 마련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동네 싸움도 평상시에는 쉽게 해결되었지만, 이제는 욕설, 주먹질, 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이어지곤 했다. 돈이나 식량을 꾸면서 담보로 잡히는 토지나 물건들도 원래는 안식년 법에 따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지만, 이제는 대도시의 채권자가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협력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간에 목을 조르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치유와 가르침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즉 놀라운 기적들 사이에 추상적인 영적인 진리를 가르친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 행동의 프로그램으로, 또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마을들을 완전히 해체하여 사람들을 외톨이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두려움에 떨게 만든 당시의 체제에 대해 실천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예수는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누가 6:27-29)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평화주의나 유순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화해와 갱신의 첫 걸음이었다. 이것은 레위기의 훈계, 곧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19:18)와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서기관들과 교사들은 언제나 식솔들 간에 서로 도우라는 전통적인 언약의 가르침과 안식년 율법을 강조했으며, 이자를 받거나 부채를 갚지 못해 노예로 삼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집회서]로 알려진 [시락의 책]은 "이웃에게 돈을 꾸어주는 사람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고 이웃을 도와주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다"(29:1)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 전통의 정수(精髓)는 공동체적 연대성임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예수는 이 전통을 다시 말하면서 확장시켰다. 즉 예수는 채무자가 대부를 받으면서 담보로 맡긴 겉옷에 대해 채권자가 법적으로 그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 채무자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그를 당황하게 만들라고 충고했다(누가 6:29; 마태 5:40).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 5:42). 이런 협동과 상호부조는 옛 언약 전통이 가르쳤던 것이며, 우리는 예수의 이런 가르침을 헤롯 왕의 통치 아래에서 신음하던 갈릴리 사람들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실천적 응답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당시 모두가 굶주렸고 서로 빚을 진 상태였기 때문에 서로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서로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던 상태에 맞서서, 예수는 언약을 갱신하기 위한 실제적 행동을 주장했으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회복하고자 했다. 주기도문의 언어도 우리에게는 영적이며 저 세상적인 것으로 친숙하지만, 당시 세금과 토지 박탈로 인해 굶주림과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갈릴리 농민들이 그 억압적인 체제를 뒤집어엎을 희망을 불러일으킨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없애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마태 6:9-13). 이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다스리는 지상의 나라, 폭력이나 경제적 불평등 없는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은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상적인 이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부채로 인해 토지를 잃고 절망하는 농민들에게 행동하도록 자극을 줄 수도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믿기만 한다면, 실제로 가까이 있었다. 꿈이 아니라, 하늘의 환상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변혁, 곧 그들이 매일 일하는 밭에서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변혁으로 믿는다면, 그들이 불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만 한다면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꿈, 곧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들이 마침내 지켜지고 정의가 구현될 때 이스라엘에는 평화, 번영, 안녕이 오게 된다는 꿈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의 굶주린 농민들과 토지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시대가 풍요와 잔치의 시대로 열리게 될 것을 기대했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익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25:6)고 약속했었다. 마치 구원의 영광스러운 때가 지금 시작되고 있다고 선포하듯이, 예수는 약간의 음식을 지닌 그의 추종자들을 갈릴리 바다 주변 공터에 불러모았다. 헤롯 왕의 관리들과 세금 징수원의 감시하는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말이다. 빵 몇 개와 생선 몇 마리를 갖고 수많은 사람들을 먹인 기적의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가리킨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잔치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굶주린 무리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수가 계속해서 혼인잔치와 "큰 잔치"의 이미지를 사용할 때는 거기에 어떤 암시가 있었다. 즉 예수는 헤롯 안티파스의 궁궐에서 열리는 사치스런 잔치를 우롱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는데, 그 잔치에서 고관대작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과 술은 바로 그 굶주린 무리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것들이었다.
이처럼 치유, 설교, 잔치를 통해서, 예수는 마을 공동체들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운동을 촉진시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성실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상속자들로서, 로마의 번영이라는 거대한 방앗간의 얼굴 없는 톱니바퀴가 되기를 거절할 자유가 있었다. 그들은 극장과 광장을 만드느라 짐승처럼 일하는 노예가 되기보다, 자신들의 마을 안에서 외지인들이 소유한 밭에서 농사지으며 자유롭게 서로 나누거나, 그 첫 수확물을 궁궐에 갖다 바치거나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강력한 설교였으며, 예수를 유명하게 만든 신적인 능력의 행동들을 통해 더욱 놀라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최고 수준의 선동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자신의 운동이 조만간 불러일으킬 강력한 반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헤롯 왕의 관리들은 예수가 주창한 대안 사회에 대해 단지 위협만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가르친 급진적 방식에 대해 가족 안에서조차 심각한 분열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예수는 그의 측근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누가 12:51-53).


호슬리 & 실버만, 3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