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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현자들이 계산하기로 창조 후 3790년(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 제16년) 봄에,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마음에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의 거리와 광장에서 군중을 통제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들이 있었다. 로마, 곧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참된 거룩한 도시는 지금 마르쿠스 빈시우스(Marcus Vincius)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sius Cassius Longinus)가 집정관으로 있었는데, "새로운 인간"의 시대가 마침내 분명히 시작되었다. 직업군인으로서 프래토리아 총독을 역임했던 루시우스 앨리우스 세야누스(Lucius Aelius Sejanus)는 제국 경비대의 사령관이며 제국의 모든 보안 문제를 감독하던 인물로서, 황제의 완전한 신임을 얻었다. 나이 많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제국의 일상적인 업무를 주로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고작 기병대 장교 계급인 세야누스가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만일 세야누스와 같은 기병대 장교조차 황제가 될 수 있다면, 제국의 수많은 신실한 관리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역시 야심이 있으며 헌신적이지만, 이 변방에서 특히 생색도 나지 않고 골치만 아픈 지역에서 총독직을 수행하는 그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20여 년 전, 헤롯 대왕의 후계자 아켈라오가 치욕스럽게 유배당한 이래로, 유대는 황제의 사적인 소유로 간주되어 여러 식민지 관리들이 다스렸는데, 그 관리들은 폭동, 반란, 계속적인 재정적자는 자신들의 경력에 매우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원후 26년경부터 그 후 4년 동안 빌라도는 그의 두 가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했는데, 그 두 가지 책임이란 작고한 헤롯 대왕의 왕국 가운데 이 메마른 궁둥이를 길들이고 친로마적으로 만드는 책임과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자신의 공적인 면모를 통해 로마에 충성을 다 바치는 인물임을 과시할 책임이었다. 왜냐하면 본디오 빌라도는 다른 모든 민간인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광장으로 되돌아가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의 후견인 세야누스의 오른편에 앉게 될 야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데, 세야누스는 어쩌면 황제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유대, 유대인들, 예루살렘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영광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서만 중요했던 것이다. 빌라도는 일찍부터 자신의 야심을 성취하는 데 열쇠가 되는 일은 재정적자를 내지 않고, 공공질서를 유지하며, 로마의 지휘 계통의 잠재적인 변화 가능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나중에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 이야기에서 중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그의 출신과 마지막 운명은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10년 동안 유대의 총독으로 복무한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고고학적 유물은 몇 가지 청동 동전들(종교적 상징들과 제국의 상징들이 혼합된 동전들)과 1960년대 초기에 가이사랴에서 발견된 라틴어 명각이 전부인데, 그 명각은 매우 훼손된 것으로서 유대의 중요한 항구 도시에서 "티베리움" 혹은 황제숭배의 신전을 봉헌한 명각이다. 이것은 우리가 타키투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요세푸스 등의 기록 속에 나타난 빌라도에 대한 간략한 언급들과 일치한다. 빌라도는 분명히 로마의 권력과 황제숭배를 강력하게 밀어붙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총독 취임 초기에 그의 군대를 가이사랴의 겨울 주둔지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도록 하면서, 군기(軍旗)를 휘날리고 그 황금빛 독수리상과 그밖에 제국의 휘장이 햇빛에 번쩍이도록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거의 모든 총독들은 유대인들이 모든 형상들, 곧 신들이나 인간, 혹은 동물들의 형상을 혐오하기 때문에, 제국의 군기를 보면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소란을 피하기 위해 모든 우상적인 형상들을 제거한 특별한 군기를 갖고 진입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런 양보를 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난 유대인들이 가이사랴로 몰려와, 로마 군인들이 칼을 뽑아들어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그런 형상들이 들어오도록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각오한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빌라도는 자신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유대인들을 성나게 만든 군기들을 철수시켰다.
또한 성전 금고(聖殿 金庫) 사건이 있었는데, 빌라도가 보기에 성전금고는 값비싼 자원들이 집중되었지만 쓸데없이 낭비되는 것일 따름이었다. 예루살렘 도성은 헤롯 대왕의 대규모 재건축과 확장을 통해 계속 커졌기 때문에 새로운 물 공급이 절실했다. 예루살렘은 호수나 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고 단지 빗물 저수지와 샘물이 한 곳뿐이어서 조만간 공중위생에 재앙이 닥칠 판국이었다. 로마의 선진적인 수도교(水道橋) 기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성전에는 기금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로부터 십일조와 헌금을 받아 관장하는 제사장들은 로마당국에 한 푼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이 직접 해결하기로 작정하고 유대인들이 상식대로 처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성전구역에 군인들을 보내 문제의 성전기금을 몰수하여 수도교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하여 이에 항의하자, 빌라도는 군인들에게 곤봉을 지니고 민간 복장을 입혀 그 시위군중들 속에 투입시켰다. 미리 약속된 신호에 따라 그들은 폭력적으로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빌라도 덕택에 예루살렘에는 현대식 물 공급 체계를 갖추었다. 빌라도가 그 주민들을 투쟁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아둔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비록 그는 군기 사건에서 자신의 뜻을 굽혀야 했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예루살렘 관저에 장식용 방패들로 치장하면서 형상이 아니라 황제의 신적인 지위를 보여주는 라틴어 명각들이 새겨진 방패들을 사용하려 했다가 또 다시 뜻을 굽혀야만 했지만, 그는 자신이 유대 총독으로 장기간 복무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비록 몇 가지 곤란한 일들이 있기는 했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속국 왕들의 독특한 지위 문제였는데, 그들 속국 왕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그 지위가 격하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폐위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 성가신 헤롯 왕족들은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으며 로마의 권세가들과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야심만만한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이 빌라도 총독보다 훨씬 더 평화롭게 유대를 통치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 어느 곳에서든 민간인들의 소요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만 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총독 수행 능력에 대해 불미스러운 소문이 헤롯 왕족 지지자들에 의해 로마의 지배층에 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 축제절기에 군중 소요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때였다. 매년 세 차례의 중요한 순례 절기에 수만 명이 모여드는 때는 무질서와 폭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축하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고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절기들이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 모여든 농민들은 공동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불만들을 터뜨릴 가능성이 높은 때라는 사실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었다. 전국 각처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디아스포라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자유의 공기를 숨쉬며, 한바탕 즐기고, 소란을 피우고, 자신들의 비좁은 삶의 고통에 대해 숨통을 트고 싶어했다. 물론 순례자들 중에는 부자들과 존경받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 축제절기의 핵심에는 성전에서의 엄숙한 종교행사들, 곧 아마포 옷을 입은 제사장들이 바치는 정화와 헌신의 예식들, 첫 열매를 바치고 자유롭게 헌물을 바치며, 속죄예물, 화목제, 그리고 희생제사 등의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축제절기들은 가장 비천한 순례자들에게조차 그들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망각하도록 만들었다.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은 며칠 동안 지주와 귀족들의 등쌀에서 벗어났으며, 빚더미와 약탈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잠시 동안이라도 잊어버리고,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이야기들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 해에도 예루살렘은 유월절 순례자들을 대규모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수만 명의 농민들이 예루살렘과 인근 마을들의 여관들과 안뜰에 차고 넘치며, 자신들의 영적인 불결과 종교의례상의 불결을 씻어내기 위한 목욕을 하기 위해 동전을 지불하고, 성전에 바치기 위해 양과 희생제사용 새들을 사기 위해 공식 판매원들에게 돈을 내고 야단법석을 떠는 동안, 빌라도 휘하의 수백 명의 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술주정꾼의 난동이나 낯선 사람들끼리의 주먹다툼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군인들이 죽게 되거나 제국의 재산을 파괴시키는 일을 막는 일, 그래서 그런 나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지 않도록 막는 일뿐이었다. 만일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빌라도의 상관이 그의 기록을 검토하여 그의 승진을 추천할 때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에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게 될 경우, 빌라도는 지체 없이 그의 군대를 투입하여 난동자를 잡아들이고, 그가 갈릴리의 순례자들을 학살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누가 13:1). 빌라도는 유대 총독으로서 자신의 두 가지 목표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을 평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빌라도가 동전에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겨 넣거나, 수로와 같은 기술을 도입하거나, 소요사태를 평정하거나 간에, 그는 유대를 현대적 지방으로 바꾸어나가고, 또한 그 자신이 보기에 고집스럽게 미개한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무뢰한 군중들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 했다.
호슬리 & 실버만, 4장에서
20여 년 전, 헤롯 대왕의 후계자 아켈라오가 치욕스럽게 유배당한 이래로, 유대는 황제의 사적인 소유로 간주되어 여러 식민지 관리들이 다스렸는데, 그 관리들은 폭동, 반란, 계속적인 재정적자는 자신들의 경력에 매우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원후 26년경부터 그 후 4년 동안 빌라도는 그의 두 가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했는데, 그 두 가지 책임이란 작고한 헤롯 대왕의 왕국 가운데 이 메마른 궁둥이를 길들이고 친로마적으로 만드는 책임과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자신의 공적인 면모를 통해 로마에 충성을 다 바치는 인물임을 과시할 책임이었다. 왜냐하면 본디오 빌라도는 다른 모든 민간인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광장으로 되돌아가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의 후견인 세야누스의 오른편에 앉게 될 야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데, 세야누스는 어쩌면 황제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유대, 유대인들, 예루살렘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영광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서만 중요했던 것이다. 빌라도는 일찍부터 자신의 야심을 성취하는 데 열쇠가 되는 일은 재정적자를 내지 않고, 공공질서를 유지하며, 로마의 지휘 계통의 잠재적인 변화 가능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나중에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 이야기에서 중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그의 출신과 마지막 운명은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10년 동안 유대의 총독으로 복무한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고고학적 유물은 몇 가지 청동 동전들(종교적 상징들과 제국의 상징들이 혼합된 동전들)과 1960년대 초기에 가이사랴에서 발견된 라틴어 명각이 전부인데, 그 명각은 매우 훼손된 것으로서 유대의 중요한 항구 도시에서 "티베리움" 혹은 황제숭배의 신전을 봉헌한 명각이다. 이것은 우리가 타키투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요세푸스 등의 기록 속에 나타난 빌라도에 대한 간략한 언급들과 일치한다. 빌라도는 분명히 로마의 권력과 황제숭배를 강력하게 밀어붙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총독 취임 초기에 그의 군대를 가이사랴의 겨울 주둔지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도록 하면서, 군기(軍旗)를 휘날리고 그 황금빛 독수리상과 그밖에 제국의 휘장이 햇빛에 번쩍이도록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거의 모든 총독들은 유대인들이 모든 형상들, 곧 신들이나 인간, 혹은 동물들의 형상을 혐오하기 때문에, 제국의 군기를 보면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소란을 피하기 위해 모든 우상적인 형상들을 제거한 특별한 군기를 갖고 진입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런 양보를 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난 유대인들이 가이사랴로 몰려와, 로마 군인들이 칼을 뽑아들어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그런 형상들이 들어오도록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각오한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빌라도는 자신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유대인들을 성나게 만든 군기들을 철수시켰다.
또한 성전 금고(聖殿 金庫) 사건이 있었는데, 빌라도가 보기에 성전금고는 값비싼 자원들이 집중되었지만 쓸데없이 낭비되는 것일 따름이었다. 예루살렘 도성은 헤롯 대왕의 대규모 재건축과 확장을 통해 계속 커졌기 때문에 새로운 물 공급이 절실했다. 예루살렘은 호수나 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고 단지 빗물 저수지와 샘물이 한 곳뿐이어서 조만간 공중위생에 재앙이 닥칠 판국이었다. 로마의 선진적인 수도교(水道橋) 기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성전에는 기금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로부터 십일조와 헌금을 받아 관장하는 제사장들은 로마당국에 한 푼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이 직접 해결하기로 작정하고 유대인들이 상식대로 처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성전구역에 군인들을 보내 문제의 성전기금을 몰수하여 수도교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하여 이에 항의하자, 빌라도는 군인들에게 곤봉을 지니고 민간 복장을 입혀 그 시위군중들 속에 투입시켰다. 미리 약속된 신호에 따라 그들은 폭력적으로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빌라도 덕택에 예루살렘에는 현대식 물 공급 체계를 갖추었다. 빌라도가 그 주민들을 투쟁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아둔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비록 그는 군기 사건에서 자신의 뜻을 굽혀야 했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예루살렘 관저에 장식용 방패들로 치장하면서 형상이 아니라 황제의 신적인 지위를 보여주는 라틴어 명각들이 새겨진 방패들을 사용하려 했다가 또 다시 뜻을 굽혀야만 했지만, 그는 자신이 유대 총독으로 장기간 복무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비록 몇 가지 곤란한 일들이 있기는 했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속국 왕들의 독특한 지위 문제였는데, 그들 속국 왕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그 지위가 격하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폐위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 성가신 헤롯 왕족들은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으며 로마의 권세가들과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야심만만한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이 빌라도 총독보다 훨씬 더 평화롭게 유대를 통치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 어느 곳에서든 민간인들의 소요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만 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총독 수행 능력에 대해 불미스러운 소문이 헤롯 왕족 지지자들에 의해 로마의 지배층에 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 축제절기에 군중 소요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때였다. 매년 세 차례의 중요한 순례 절기에 수만 명이 모여드는 때는 무질서와 폭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축하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고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절기들이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 모여든 농민들은 공동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불만들을 터뜨릴 가능성이 높은 때라는 사실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었다. 전국 각처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디아스포라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자유의 공기를 숨쉬며, 한바탕 즐기고, 소란을 피우고, 자신들의 비좁은 삶의 고통에 대해 숨통을 트고 싶어했다. 물론 순례자들 중에는 부자들과 존경받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 축제절기의 핵심에는 성전에서의 엄숙한 종교행사들, 곧 아마포 옷을 입은 제사장들이 바치는 정화와 헌신의 예식들, 첫 열매를 바치고 자유롭게 헌물을 바치며, 속죄예물, 화목제, 그리고 희생제사 등의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축제절기들은 가장 비천한 순례자들에게조차 그들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망각하도록 만들었다.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은 며칠 동안 지주와 귀족들의 등쌀에서 벗어났으며, 빚더미와 약탈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잠시 동안이라도 잊어버리고,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이야기들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 해에도 예루살렘은 유월절 순례자들을 대규모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수만 명의 농민들이 예루살렘과 인근 마을들의 여관들과 안뜰에 차고 넘치며, 자신들의 영적인 불결과 종교의례상의 불결을 씻어내기 위한 목욕을 하기 위해 동전을 지불하고, 성전에 바치기 위해 양과 희생제사용 새들을 사기 위해 공식 판매원들에게 돈을 내고 야단법석을 떠는 동안, 빌라도 휘하의 수백 명의 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술주정꾼의 난동이나 낯선 사람들끼리의 주먹다툼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군인들이 죽게 되거나 제국의 재산을 파괴시키는 일을 막는 일, 그래서 그런 나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지 않도록 막는 일뿐이었다. 만일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빌라도의 상관이 그의 기록을 검토하여 그의 승진을 추천할 때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에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게 될 경우, 빌라도는 지체 없이 그의 군대를 투입하여 난동자를 잡아들이고, 그가 갈릴리의 순례자들을 학살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누가 13:1). 빌라도는 유대 총독으로서 자신의 두 가지 목표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을 평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빌라도가 동전에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겨 넣거나, 수로와 같은 기술을 도입하거나, 소요사태를 평정하거나 간에, 그는 유대를 현대적 지방으로 바꾸어나가고, 또한 그 자신이 보기에 고집스럽게 미개한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무뢰한 군중들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 했다.
호슬리 & 실버만, 4장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