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처형되었다는 아찔한 소식은 북쪽 갈릴리와 그 주변 지역으로 신속하게 퍼졌을 것이며, 갱신운동의 가장 중요하며 가장 오래 계속된 형태가 살아남은 곳은 바로 예수의 고향 지역에서였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틀림없이 낙심하여 그 운동을 포기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헌신을 다시 확인했다. 실제로 갱신운동은 그 중요한 목표나 새로운 종교의례를 도입하지 않은 채 이전처럼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런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에 관한 최초의 전승들(우리가 증거를 갖고 있는 전승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부활, 혹은 신적인 지위에 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최초의 예수 전승들은 (부활한) 예수가 선택된 사도 집단 앞에 기적적으로 나타나,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고 말한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최초의 예수 전승들은 그 대신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간결하며 생기 있는 말씀들로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특수한 관심사항들을 자세히 다룬 전승들이다. 즉 시골 마을 공동체들에서 어떻게 계약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지, 어떻게 새로운 공동체들이 그 운동 속에 참여할 수 있는지, 개인들이 그 억압자들과 원수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사항들을 자세히 다룬 전승들이다.
이것이 유명한 "Q" 말씀 복음(Sayings Gospel)인데, Q는 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크벨레'(Quelle)에서 온 말이며, 19세기에 성서 신학자들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단락들 가운데 그 단어 사용이 거의 똑같은 구절들을 치밀하게 분류함으로써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자료다. 학자들은 성서 본문을 주의 깊게 비교한 결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모두 그 이전부터 있었던 예수의 어록(語錄)을 사용하여 마가복음의 이야기 자료와 함께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엮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처럼 예수의 전기(傳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없는  순전한 어록집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들 가운데서 그와 비슷한 "도마의 말씀 복음"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와 같은 명백한 자료로서, Q 자료는 훨씬 오래된 것이며 예수의 갈릴리 추종자들의 마음 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이들 갈릴리 추종자들은 복음서 이야기들 속에서 무리를 지어 예수에게 나와 치유를 받고 배고픔을 채우고 그의 설교를 들었지만,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떠난 다음에는 갑자기 복음서들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Q 복음 속의 말씀들은 예수의 처음 추종자들을 사로잡았던 문제들과 관심사항들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런 전승들이 수집되어 수십 년 동안 보존되고 누가와 마태에 의해 기록되기 전에 구전 전승으로서 상당 기간 동안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이 전승들이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은 신앙공동체들이 간직했던 믿음과 기억을 대표하는 것임을 뜻한다. 그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Q 복음을 보다 폭넓게 그리스-로마의 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연구한 일부 학자들은 Q 복음을 간직했던 사람들을 그리스 세계의 견유철학자들(Cynics)과 같은 사람들로 보았다. 견유철학자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인습적인 지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철저한 개인주의와 재산, 부모, 예절 등으로부터 해방되라는 대항문화적 생활태도를 설교하며 떠돌아다니는 자유 사상가들이었다. 이처럼 "견유학파"라는 관점에서 예수운동을 해석하는 오늘날의 학자들은 Q 복음을 구체적 맥락에 대한 언급 없이 개인주의적인 윤리 모음집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며, 예수의 가장 유명한 말씀들 가운데 일부는 예언자들보다 더 언어적인 유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는 도발적인 현자로서 재치 있는 말대꾸의 달인이었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마태 5:3; 누가 6:20)라는 선언에서, 예수는 지혜의 교사로서 그 추종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누가 6:27-28),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마태 7:1-2; 누가 6:37)고 가르친 스승으로 기억되었다. 이 역사적 관점에 따르면,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1세기의 히피족처럼,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누가 9:60; 마태 8:22) 하는 것이 사명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의 갈릴리 선교를 살펴보면서, 예수의 말씀들은 추상적인 윤리적 명령들이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가르침들로서, 갈릴리의 성읍들과 마을들에서 진행되던 정치 경제적 및 종교적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위한 필수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들이 구체적인 시공간에 뿌리박지 않은 채, 개인들 즉 고대의 견유철학자들처럼 지배문화로부터 소외되어 있지만 여전히 그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에게 매력적인 대항문화적 지혜를 고취시키는 것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들이 예수의 짧은 공적인 목회를 전후하여 갈릴리 마을들에 팽배했던 가난과 억압이라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강력한 공동체적 응답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수와 그의 처음 제자들을 "견유철학자들"로 규정하는 것은 예수운동을 개인주의적인 문화비판으로 축소시키는 것인데, 이런 문화비판은 지속적인 공동체나 집단 의식을 창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세기 갈릴리는 계급 구분이 분명하여 매우 고통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던 현장으로서, 엘리트 문화는 통제와 억압의 수단이었고, 전통적인 민족적 정체성은 아무리 희미하게 기억되고 정치적 경계선을 넘어 퍼져 있었다 할지라도 최소한이나마 자율성을 유지하려 애쓰던 공동체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오늘날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학자들은 그리스-로마 사회의 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근본적인 불평등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즉 그리스-로마 사회는 기술과 문화적 표현의 열매를 누리던 사람들과 그들의 행복을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원주민들 사이에 엄격한 구별이 존재했다. 오늘날 많은 주석가들은 그리스어가 확산되고, "극장, 경기장, 학교를 포함하여 헬레니즘의 제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도시들이 확립되었다는 고고학적인 새로운 증거들은, 모든 사람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견유철학의 대항문화적인 경향들이 심지어 농민들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었던 통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처럼 사회적인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은 갈릴리 사람들의 반복적인 저항을 간과하는 생각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새로운 생활방식과 논리 속에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포함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빼앗아버리는 권력 지형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릴리의 평범한 농민들은 셉포리스와 티베리아스의 극장, 경기장, 혹은 견유철학을 배우고 가르쳤던 학교에서 부유하고 재치 있는 도시민들과 어울릴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Q 말씀복음은 실제로 예수가 죽은 이후 갈릴리에서의 갱신운동은 엿볼 수 있게 해주지만, 그 운동은 여전히 헤롯 왕가의 계속적인 위협과 싸우기 위해 계약과 공동체의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정체성에 깊이 뿌리내린 운동이었다. Q 복음의 말씀들에는 전혀 말장난이 아닌 정치적 주장들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그 말씀들에는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를 당한 세례요한의 불같은 설교에 대해 예수가 존경을 표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며(마태 11:9-11; 누가 7:26-28), 또한 벳새다, 고라진, 가버나움 등의 마을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가 나오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저항운동에 참가하기를 거절했으며(마태 11:21-24; 누가 10:13-15), 권력자들이 초라하게 되는 것이 시간 문제라는 예언(마태 8:11-12; 누가 13:28-30), 모세 율법의 능력에 대한 확인과 예수의 제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들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확인, 즉 기드온, 삼손, 드보라와 같은 성서의 영웅들을 따른 "판관들(사사들)"의 역할인데, 이들의 역할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에 대한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었다(마태 19:28; 누가 22:28-30). 어떤 학자들은 이처럼 보다 전투적이며 이스라엘의 전통 중심적인 말씀들이란 Q 안에서 보다 후대의 전승층에 속하는 것으로, 예수운동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변화로 인해 Q 공동체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태평한 견유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때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운동이 이처럼 본래의 대항문화적인 놀이꾼들의 이상으로부터 점차 전투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학설은 예수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순수한 문화비판이었다는 그 학설 자체의 선입견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편협한 지역주의에 대한 세계주의자들의 혐오감을 담고 있으며 자유로운 개인주의가 밀어붙인 학설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학설은 예수의 처음 추종자들에 대한 학자들의 생각을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갈릴리에서 진행되고 있던 예수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학설이다.
고고학적 발굴층의 연대측정을 10년 단위까지 정확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헤롯 안티파스가 만든 새로운 동전들이 자주 출토되는 것을 통해, 기원후 20년대 말과 30년대 초는 그의 통치지역에서 경제 및 정치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무렵에는 갈릴리 바닷가의 새로운 수도 티베리아스는 완전히 건설되어 시장과 행정 조직들이 충분히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안티파스는 요르단 강 동쪽지역에서도 많은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대 성읍 베다람프타 지역에 율리아스라는 새 도시를 세웠거나 확장했다. 이 사업은 기원후 29년 직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후 14년에 사망)의 미망인 리비아의 죽음과 신격화를 기념하기 위해 벌인 사업인데, 그녀의 이름은 그 왕조의 이름을 따라 율리아로 불려졌었다. 안티파스는 더 넓은 지중해 세계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쏟았으며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 대해 자신이 후견인 역할을 자임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헤롯 안티파스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을 언급한 헌정 비문들("헤롯 왕의 아들 헤롯"으로 표기된)이 에게해의 코스 섬에 있는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의 중앙에 있는 치유 센터와 델로스의 상업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두 장소 모두에는 헤롯 대왕이 후견인 역할을 했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들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또한 헤롯 안티파스가 해변 도시 두로에서 그의 가족들과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던 것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가 페니키아와 시리아의 헬레니즘 도시들에게 기부금을 댔던 그 아버지의 전통을 이어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기부 형태는 도로와 수도교, 인상적인 공공건물을 건설하는 비용을 대었으며, 물론 그 도시들을 직접 방문하여 자신이 완전히 로마 스타일의 왕이라는 것을 과시했다.
이런 모든 활동들에는 재정적 자원이 필요했으며, 그가 재정을 조달할 수 있던 곳은 한 군데 뿐이었다. 시골 주민들에게 계속해서 더욱 많은 세금을 걷는 방법뿐이었다. 이 기간의 Q 공동체를 버튼 맥(Burton Mack)과 같은 신약학자들이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추던" 공동체라고 설명하는 것은 당시 계속된 실질적 곤경, 사회적 혼란, 가족들의 해체를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입장이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이 새로운 질서의 위협에 대응하는 길을 제시했으며, 또한 Q 복음에서 예언자적 연설들에 덧붙여서, 그 지역에서의 짧은 목회에 대한 기억들은 경구들과 생생한 상징적 이미지들로 표현되어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한 예수의 활발한 프로그램을 살아 있도록 만든 역할을 수행했다. 예수의 잘 알려진 말씀들을 집성하는 작업만이 아니라, 예수 전승의 전달자들은 예수의 권능이 드러난 예언자적인 행동들, 그의 치유와 귀신축출, 지배 당국자들과 두려움 없이 대결했던 예수의 이야기들을 반복적으로 들려주었다. 나중에 복음서들 속에 편입된 모든 본문전승 묶음들(cluster of textual tradition)이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서로 떨어진 개별적 집단이 예수가 누구였으며 그가 무엇을 의도했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러나 예수가 갈릴리 지역과 아마도 그 주변 지역들도 돌아다니면서 너무나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실제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과 아름답게 부풀려진 전설들, 시적인 묘사들이 계속 유포되면서 효과적인 저항의 안내자 역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산에 대한 강력한 표현으로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마가복음에 편입된 소위 "선언 이야기들"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의 잊을 수 없는 말씀들을 기억했는데,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가 10:25)와 같은 말씀이 그런 것이다. 예수와 그의 배고픈 제자들은 들판에서 이삭을 자름으로써 왜 안식일을 거스르는가 하는 질문을 받자,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라고 대꾸하신 것으로 기억되었다. 이처럼 기억하기 쉬운 말씀들이 어떻게 익숙한 속담이 되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 말씀들을 반복적으로 되새기게 되었는가 하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시기부터도 우리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이 퍼져나간 것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런 이야기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해방과 갱신의 기본적 메시지를 표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이야기, 폭풍을 잠재운 이야기, 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많은 무리를 먹인 이야기 등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은, 그런 예수 이야기들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위대한 출애굽 이야기를 반향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다. 갈릴리 바다의 파도는 홍해 바다의 파도와 똑같지 않을 것이며, 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정확히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지금 이스라엘을 또 다른 전제 군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새로운 출애굽으로 이끌고 있다는 요점을 분명히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귀중한 율법을 전달했던 것처럼,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서 계약의 본질을 회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출애굽의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가 엘리야처럼 치유한 이야기들과 결합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함께 뒤섞인 성경 은유들과 암시들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들과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점차 함께 수집함으로써, 예수가 그처럼 분명하게 선언한 강력하며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기억하는 수단이 되었는데, 그 강력한 메시지들이란 지상의 왕들에게 충성하지 말며,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손을 뻗어 돌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원한 계약을 새롭게 갱신하고 왕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는 메시지였다.
이런 메시지가 예수의 재치 있는 말씀들과 치유와 기적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전파하면서 얼마나 멀리 유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지대 갈릴리의 거친 구릉지대는 북쪽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남부 페니키아의 거친 구릉지대까지 뻗쳐 있었다. 안티파스의 영토에서 동쪽 호반지역은 그의 형 빌립의 영토로부터 걸어가거나 잠시 배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서부터 마을들은 북동쪽으로 뻗어나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로마지방으로 이어졌다. 예수가 촉발시킨 운동은 그가 처형된 이후 그의 이름으로 계속되어 분명히 이스라엘의 전통과 동일시되었지만, 이 농촌 지역과 이 시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이 때로 흐릿하며 분명치 않았다. 교육을 받은 서기관들은 족보와 문헌 전통을 참조하여 북쪽 지파 스불론, 잇사갈, 아셀, 단, 납달리가 지리적으로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자세하게 서술할 수 있었지만, 혼인 관계, 토지 소유, 인근 마을 사람들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 집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성서에 나타난 경계선을 훨씬 넘어서게 만들었다. 즉 친척관계는 공동체들과 전통들을, 이스라엘의 지리적 경계선이나 이스라엘 민족성의 일반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살아있는 공동체들 안에서 서로 연결시켜주었다. 이들이 공유한 과거 속에는 조상들과 서사시들이 간직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모든 마을들은 예수가 다루었던 경제적 및 사회적 압박을 똑같이 받고 있었다.
예수가 시작했던 운동의 멤버십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메시아에 대한 초월적 믿음으로 갑자기 회심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가 영감을 불어넣었던 신앙과 희망은 그런 초월적 믿음보다 훨씬 더 이 세상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하거나 상상했던 예수의 말씀들은, 이스라엘의 고대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공적인 관계와 사적으로 서로간에 대하는 방식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가르침들이었다. 어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조용히 사적으로 실천할 사회적 실험으로 생각했을 것이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헤롯 안티파스와 그 일당들의 통치에 도전하기 위한 직접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유월절 절기라는 특별한 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의 공공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지만,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했으며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가 처형된 직후 몇 년 동안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가 갈릴리 구릉지대 성읍들과 갈릴리 호수 주변 마을들에서 시작했던 운동의 충격이 확산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호슬리 & 실버만, 5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