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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예수살기(상임대표 박철 목사)는 김준우 박사(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를 모시고 “피눈물로 기록된 성서”라는 제목으로 믿음교회에서 신앙 강좌를 열었다. 시작을 알리는 기도시간에 부산예수살기 공동대표인 오흥숙(부산 생명의 전화 원장)은 오늘의 고난이 너무 많다면서, 이 고난이 디딤돌이 되어 개인의 영달을 위한 욕망이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나눔의 연대를 통한 화톳불이 되기를 두 손 모았다.
김준우 박사는 한국교회는 신앙과 정치가 따로 놀고 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성서는 철저한 정치적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보면 신앙은 교회에서 정치는 조중동에서 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인 4대강의 정치적 입장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4대강에 대한 성서적 판단과 하느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보다는 조중동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면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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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성서의 피눈물 나는 기록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는 급속히 몰락하는 시대다. 영국은 70%가 믿는 자이다. 그러나 18세의 선에서 보면 77%가 믿는 자가 아니라고 한다. 유럽은 어떠한가. 현재 30년을 단위로 믿는 자의 수가 절반으로 줄고 있다. 미국은 30년 후면 역시 절반으로 준다고 한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먼저 돈과 즐기는 생활에 있다. 돈이 풍족하니 고민이 없고, 엔터테이먼트가 생활 깊숙이 들어와 즐김으로 마음의 고요가 없기 때문이다. 외적인 요인으로는 과학주의가 있다. 과학주의가 무엇인가? “하느님 증거가 있느나? 없다. 그러면 하느님이 없다는 증거다.”고 하는 것이다. 과학주의는 눈으로, 망원경으로,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없음’이면 “없다”는 세속주의이다.
교회 내적인 문제를 복음주의자 로날드사이드는 “복음주의자들의 양심의 스캔들”이라는 책에서 거듭난 자의 이혼율이 일반인들 보다 훨씬 높다. 또한 폭력과 성적문제도 일반인에 비해 높으며 수입에 따른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없다. 성경을 많이 보고 기도를 많이 하는데 왜 도덕적으로 살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은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복음주의자인 이분의 한계는 분명하다. 이분은 성서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파악하지 못했다. 성서의 하느님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한가! 성서를 비판적으로 보지를 않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기에 마침내 이들은 폭력적이 된다. 우리의 역대 장로 대통령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잔인했던가.
성서내의 폭력 중에 일례로 새생명의 탄생은 여자의 아이다. 그러나 성서는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다”고 가르친다. 왜 그럴까? 고대사회의 가부장제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사회다. 여성이 문제를 제기할 때 “창조의 뜻”으로 들이밀면 논쟁은 끝나게 된다. 이는 지배자의 논리이다. 그러니 성서를 비판적으로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폭력적이 된다. 기독교의 행태 중에 신앙과 정치가 따로 노는 이유는 다음처럼 설명이 된다.
1. 천당목회
천당목회의 문제는 죽음에 대한 공포, 죄의식이 주가 된다. 이들의 하느님상은 죽은 다음 심판하는 하느님으로 죄인은 지옥으로 보내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벌주신다. 그리고 이들의 예수상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세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목회자는 구세주를 믿으면 천당 간다는 가르침, 설교, 전도 등이 역할이며 목회자는 곧 예수처럼 살 필요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신앙의 본을 보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2. 축복목회
현세적 축복을 주로 하는 목회의 문제는 경쟁에서 승리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축복목회에서의 하느님은 우리를 경쟁으로 내몰고, 최선을 다했을 때 축복을 주는 삼박자 축복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는 불과 몇%뿐이다. 그 외의 다수의 탈락자에겐 마음의 평화를 주는 하느님이다. 이들의 특이한 축복은 다름아닌 경쟁축복과 마음평화인 양수겹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수는 오로지 축복해주는 주술적(마술적)인 축복의 은사를 주는 자이다. 이일에 종사하는 목회자는 잘사는 본을 보여야 한다. 이를 대표하는 미국의 대형교회들 오순절교회, 침례교회들이 있다. 이들은 천당과 축복을 주된 무기로 하여 교회성장신학을 핵심으로 복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의 신학은 파산을 당한 현실일 뿐이다.
경제성장의 결론은 소득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용이 늘지 않는 구조와 지구적조 현상은 풍요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뒤바뀌어 그렇게 신봉하는 자본주의의 경제학이 파산에 이르렀다.
3. 예수목회
예수목회의 문제는 이 세상에서 돈, 권력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목회의 하느님은 예수정신에 따라 살도록 힘주시는 예언자이다. 이들의 예수는 다름 아닌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고, 목회자는 교회를 잔치 집으로 생각한다. 돈은 자유를 주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이해하면서도 행복한 삶은 예수의 자유에서 찾는다.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격려 받는 기쁨공동체를 지향한다.
신앙과 정치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다. 천당목회와 축복목회의 현장에는 이 둘이 분리된다. 그러나 예수목회는 신앙과 정치가 하나로 같이 나아간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보면 ‘천지창조’가 나온다. 그 중에 태양은 4일째 창조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태양은 4일째에 창조되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왜? 거기에는 모든 종교는 두 가지로 나뉜다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억압의 신’과 ‘해방의 신’이 그것이다. 성서의 하느님은 해방의 신이다.
왜 태양이 4일째 창조되었을까? 고대근동지방의 강대국인 에집트, 바빌로니아 등은 태양신을 주신으로 섬겼다. 이들은 ‘폭력’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무력을 통한 평화가 목표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피눈물 나는 경험이 여기에 담겨있다. 피눈물 속에서 두 눈 부릅뜨고 강대국의 신화에 담긴 이념과 가치관을 한마디로 꺾어버린 것이다. 여러 창조신화들에는 신족보가 나오고 신들의 전쟁이 나온다. 그러나 성서는 말씀 한마디로 창조를 한다. “너희들의 태양신? 하느님이 4일째 창조한 하급신일 뿐이다.”
밟히면 밟히지만 정신 하나로 산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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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피눈물로 기록된 성서
우리 민족은 일제의 36년간 압제를 받았다. 극복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부터 1948년 독립하기 까지 2,000년 외세 지배를 받았다. 이들은 어떻게 이천년이란 긴 세월을 참아왔을까?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섬겼던 신은 해방의 신이다. 반제국주의 하느님은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파괴와 죽임으로 제국을 유지한다. 성서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반제국주의 역사이다. 시청 앞에서 제국주의의 국기를 흔들며 그들을 찬양하는 기독교를 본다. 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성서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인간을 말씀으로 하느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의미를 예로 들어본다. 나는 24살에 준위 장교로 입대하였다. 추운 겨울에 단체기합을 받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는 모두 기합을 받았다. 기합을 받으면서 드는 생각이 만약에 내 아버지가 군대생활을 했고 그 때도 이런 모욕적인 기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아들도 군대를 가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섰다. 기합을 거부했다. 대들었다. 그 후 나는 무척 고된 과정을 거쳤다. 이처럼 고대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의 신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제국의 태양신은 지배이데올로기이다. 창조신화에서 사람을 왜 만들었느냐면 신들이 야만인을 만들자고 한다. 천상회의에서 ‘신의 노예’를 만들자고 한다. 당시는 제정일치시대다. 태양신의 창조신화는 곧 ‘지배자들의 노예’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주의 창조원리가 이러한데 반란을 일으켜? 여자가 불만을 품어? 가당찮은 것이다.
왕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든다. 나일강 상류에서 2.5ton되는 돌을 채석하여 200만개를 나일강 하류로 옮긴다. 20년간 혹사를 당한다. 평생을 혹사당하고 세대를 이어서 노예생활을 한다. 성서의 ‘아담’은 보통명사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신의 형상’으로”로 읽을 수 있다. 제국주의의 창조신화는 신들의 전쟁으로 태초부터 폭력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였다.
그런데 하느님이 ‘후회’를 하신다. 그래서 홍수로 재창조를 의도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하다. 생명체를 다 쓸어버렸지만, 하느님은 원했지만 못하신 것이다. 홍수설화는 슈메르의 ‘길가메쉬 서사시’와 똑같다. 원본이 ‘길가메쉬 서사시’이고 이를 각색한 것이 ‘노아 홍수’이다. 각색은 모든 내용은 똑 같으나 몇 개만 바꾸었다. 1) 죄가 많아, 2) 의로운 사람, 3) 하느님이 문을 닫음, 4) 무지개 약속 등이다. 새로운 인간세상을 원했지만 달라진게 없었다. 하느님의 마지막 카드가 먹히지 않은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온 세상이 시체더미인 것을 보고 주인공은 대성통곡을 한다. 그러나 각색에서는 이를 삭제했다. 왜 그랬을까? 폭력으로는 개벽이 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노아의 실패와 아브라함의 마음이 등장한다. 노아는 시체더미를 보고도 통곡하지 않았다. 여기에 노아홍수의 실패가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든다. 곧 아브라함을 부각시키는 장치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비극의 현실에서 피눈물 흘리는 마음으로 성서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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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피눈물로 기록된 성서
모든 창조신화는 억압의 신과 해방의 신으로 나뉜다. 왜 예수를 죽이는데 제사장과 율법학자가 앞장섰을까? 지옥의 공포는 억압의 신을 폭력은 심판의 하느님에서 나온다. 폭력의 신을 믿는 자는 현실에서 폭력을 행한다. 신과의 직접체험에서 종교가 탄생했다. 직접종교이다. 여기에는 브로커가 없다. 그러나 종교경험이 교육이나 전도처럼 인식일, 제사장, 경전, 교리, 등이 필요했다. 이를 제도화라고 한다. 곧 “성전중보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안식일이나 경전이나 교리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화되고 목표가 되고 하느님 뜻의 유일한 통로가 될 때 문제가 된다. 이들은 안과 밖을 구별하게 된다. 그래서 밖의 존재들은 저주를 받는다. 여기에 브로커가 존재한다. 하느님의 두려운 요청을 잠재우고 대신 행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판을 예수가 뒤집어엎었다.
복음에는 ‘예수에 관한 복음’이 있고 ‘예수의 복음’이 있다. ‘관한’의 복음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 성육신, 부활, 승천, 재림 등이다. ‘의’복음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하느님의 은총이 무차별적이라는 내용이다. 유대인의 하느님 이해는 억압의 신으로 율법에 따른 축복과 벌이 첨가된다. 예수는 어릴 때부터 “쉐마”를 즐겼을 것이다. 예수의 하느님 이해는 아빠 하느님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엄마 하느님”이다. 몬난 자식놈을 향하여 피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모습이다.
내가 학교에서 짤린 이유는 저들과 ‘다른 하느님 이해’ 때문이다. 일명 ‘관한’의 복음의 입장에서 나를 처단한 것이다. 동정녀 탄생을 산부인과 사건으로 이해하면 믿기 힘들다. 이는 종교적 진리이다. 만약 예수가 육신의 아버지가 없다면 ‘Y'염색체가 없어서 남자가 아니다. 또한 마리아는 단성생식을 한 것이다. 이러한데 문자적으로 믿으라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믿을 수 없기에 그에 따른 믿음이 필요하다.
성서에서 예수는 거룩하고 하느님 영에 사로잡힌 보통 인간이 아니다. 이러한 구원의 성품이 언제 예수에게 들어갔는가? 50년대의 로마서는 ‘부활 때 지명’되었다고 한다. 70년대 마르코는 세례 때라 말한다. 80년대 마태와 누가는 잉태 때라 하고, 90년대 요한은 태초로 소급한다. 결론은 “마지막으로 하느님 자신이 오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의 부활은 인간의 ‘몸’이 거룩한 그릇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교 입장은 “육신이 말씀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성육신’은 신앙공동체 중심으로 연약하고, 가난하고, 부족한 자를 위해서 하느님이 오셨다고 한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제자를 찾아와서 고기 구워놓고 기다리는 예수의 눈빛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옴을 말한다. 참혹한 유대전쟁 이전부터 로마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의 아들, 구세주, 주님이라 불렀고 그에게서 복음을 만났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마르코는 “우리주예수그리스도”를 말한다. 피눈물 속에서 참기쁨이 담긴 복음을 말했으며 여기에 인생의 의미가 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드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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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우 박사 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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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대 영문과 감신대 학부
* Drew대학 기독교윤리로 박사학위(졸업시 드류대학 그 해의 우수논문상 수상)
*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국내에 소개
*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로버트 펑크의 예수에게 솔직히 등의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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