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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유명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처음에 "열두 제자"로 불려진(마가 3:14-19) 가까운 집단이 예수의 목회에서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했다.복음서의 여러 전승들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와 치유와 귀신축출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사역을 많은 사람들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름이 기억된 제자들, 곧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등의 제자들은 예수가 처형된 이후 그 운동에서 중요한 지도력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수의 갈릴리 목회 기간 동안에, 예수 자신이 방문하지 못했던 마을들과 성읍들에서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한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중심적인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을 열둘로 부르게 된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킨 것이었지만, 그 숫자는 단순히 상징적인 숫자였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제자들"과 "사도들"이라는 덜 구체적인 용어들도 사용한 것을 보면, 예수를 자신들의 선생으로 삼아 이스라엘의 마을들과 성읍들에 그 말씀을 전파했던 훨씬 더 큰 집단의 설교자들과 치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집단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자들도 포함된 집단이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열두 제자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또한 개인들로서 복음서들에서 특별히 두드러진 역할을 맡고 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자주 예수와 사적인 대화에 등장하여, 질문을 하고 꾸지람도 듣고 가르침도 받으며, 예수의 변모(transfiguration)도 목격하며,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도 한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는 예수를 배신한 사람으로 나온다. 예수가 체포될 때, 열두 제자 모두는 도망간 것으로 나온다. 이런 사건들과 묘사들의 역사적 신빙성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이 경우에 고고학과 사회사는 이 개인들의 구체적 행동을 증명하기에는 서투른 도구들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1세기 맥락 속에서 폭넓은 마을 갱신운동에 관해서나 로마제국 안에서 폭력적인 억압이 가져온 사회적 영향에 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 예언자-지도자가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권력에 의해 잔인하게 처형될 때, 그 특정한 개인들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열두 제자로 알려진 예수의 초기 갈릴리 추종자 집단이, 십자가 처형 이후에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한 운동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건들이 복음서들 속에 묘사된 것처럼 정확히 그렇게 펼쳐졌던지 아니던지 간에,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은 열두 제자들에게 독특한 권위를 갖게 해주었다.
후대의 기독교 전승은 열두 제자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로 인정했다. 비록 그 만남의 정확한 세부 사항들과 심지어 일반적인 성격은 서로 다르게 전해졌지만 말이다. 마가복음 16:1-7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무덤 속에 흰옷을 입고 앉아 있던 신비한 청년으로부터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마태복음 28장 역시 여인들이(여기서는 단지 두 명의 마리아뿐이다) 주일날 빈 무덤에 찾아가 지시를 받는 것(여기서는 청년이 아니라 천사로부터)에 관해 말해준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16절에는 "열한 제자"(배반자 가롯 유다를 빼고)에게 예수가 직접 나타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위임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누가복음 24장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자 둘이 엠마오라는 유대 마을로 가는 길에 어떻게 예수가 나타났으며, 베드로에게 나타났으며, 예루살렘에서 열한 제자가 있는 중에 나타났는지를 말해준다. 한편 복음서들 가운데 가장 정교한 부활 이야기가 나오는 요한복음에는,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고, 예루살렘에서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또 다시 여드레 후에 예루살렘에 나타나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는지를 말해준다.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똑같은 사건들에 대한 서로 다른 판본들로 조화되든지 간에(학자들은 영적인 현현, 환상, 혹은 영적인 사로잡힘으로 설명한다), 20년 정도 지나서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에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즉 30년대 중엽에 이르면, 예루살렘 안에 예수의 갈릴리 추종자들 집단이 하나 생겨났는데, 이 집단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억에 헌신하며, 예수가 죽은 후에도 예수와 직접 접촉했던 것으로 유명한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십자가 처형 이후에 예수와 접촉했다는 것이 이 예루살렘 공동체로 하여금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독특하며 신적인 명령을 지녔다고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북쪽에 흩어져서 예언자 예수에 대한 전승을 계속 이어가면서도 예수의 죽음이나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켰던 Q 마을 공동체들로서는 동의하지 않았거나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실제로, 만일 예수가 이스라엘의 마을 농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평등주의적인 계약전통에 헌신하도록 만들어 마을 공동체들을 새롭게 갱신하는 실천적 이상에만 몰두했었다면, 도대체 왜 어부들과 농부들로 이루어진 그 핵심 집단이 언덕과 호숫가, 골짜기들을 떠나서 예루살렘이라는 복잡하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도시로 갈 마음을 먹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당연히 묻게 된다. 만일 예수가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이 단지 그 통치자들을 단죄하고 헤롯 왕족들과 성전 관료체제의 지도자들이 지녔던 메시아적인 열망에 대해 예언자적인 단죄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도대체 왜 예수의 핵심 제자들 모두가 갈릴리로 되돌아가서 예수가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계속 수행하지 않았는가?
분명히 예루살렘에 갱신운동을 위한 영구적인 공동체가 확립되었다는 점은 예수운동이 농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으로부터 극적으로 결별하게 되었음을 뜻했다. 지난 세기 마지막 25년 동안에 걸쳐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골목길, 대문들, 공공장소들에서 드러난 도시 풍경이란 1세기 갈릴리 풍경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었다. 셉포리스와 티베리아스는 헤롯 안티파스의 겉치레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지역을 위한 작은 행정 센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로마제국 전역에 그 명성이 자자했던 도시였다. 우리는 예루살렘 고지대를 점유하고 있었던 화려한 주거지역에 관해 이미 언급했는데, 그 지역에는 제사장들과 귀족들이 호화로운 빌라들을 짓고, 성전구역과 광장, 성전 입구, 당당한 주랑들,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스탠드를 놓고 줄지어 늘어서 떼를 지어 몰려드는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던 성전 바깥뜰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또한 성전 업무가 하루도 쉬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만들었던 대규모 수공업과 공급시설들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성전의 회계를 맡은 큰 부서는 십일조와 기부금을 계속 확인했으며, 도시 전역의 숙박업소들은 일년에 세 차례씩 밀려드는 순례자들의 요구를 채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1세기 예루살렘에는 이런 제사 및 성전과 관련된 사업들보다 더욱 많은 것들이 있었다.
고대의 문헌들과 현대의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 전역에 걸친 시장의 노점들엔 수많은 노동자들과 상인들의 수고의 열매들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귀금속, 철물, 면직물, 신발, 샌들, 향료, 빵, 떡, 오일, 비누, 정육, 닭고기, 향수, 돌그릇, 유리그릇 등은 단지 예루살렘의 노점상들이 소리치며 팔고 있었던 상품들 가운데 단지 몇 종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저지대(Lower City, 성전의 남남서 지역)의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면서 자리잡고 있는 좁은 구릉지대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도시의 중심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이제 인구가 밀집한 거주지역이며 생산 활동지역이 되어 별별 것들을 다 만들어냈다. 다윗성(City of David, 성전 구역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기혼 샘 서남부 지역)에 대한 최근의 발굴을 통해서 예수 당시의 빽빽하게 들어섰던 집들과 저수조, 의례용 욕조 등 매우 훼손된 유적들만 발굴했지만, 우리는 요세푸스와 후대의 랍비 문헌을 통해서 이 지역과 그 옆의 티로페온 계곡, 혹은 "치즈 제조인들" 골짜기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상인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의 주요 거주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로서, 시골에서 살다가 가족의 유산을 잃고 예루살렘의 공사장 일이나 잡부로 날품을 팔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도시로 밀려든 사람들이었다. 토지가 없는 농민들로서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장기간 고용될 수 있다는 전망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며, 훗날 요세푸스는 "누구든 하루에 한 시간만 일을 해도 곧바로 그 노임을 받았다"고 썼다. 또한 랍비 문헌에 많이 나오는 벌목공, 짐꾼, 경비원, 목욕탕 일꾼, 가죽 무두질꾼, 똥 푸는 사람, 배달부, 푸주간 일꾼, 마부, 이발사, 염색공 등에 대한 언급들은 임금노동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암시한다. 실제로 예수가 갈릴리에서 맞부딪쳤던 농민들의 부채와 소작농의 문제들은 예루살렘의 길거리와 노점상들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도시인구가 불어난 것은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 전역에 확산된 제국의 상업경제로 변화된 것의 한 부분이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무슨 일을 해야 했는가?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일당 노임을 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완전히 의존해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계약에 따른 나눔과 협동이라는 이상적인 마을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공동체를 세운 것이 그런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최초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성격과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증거라고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 속에 나오는 몇 가지 간단한 언급들뿐이다. 그러나 이 조직이 순전히 시골에서 진행되었던 운동에서부터 서서히 하나님 나라가 은유가 된 운동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분명한 암시가 있다.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갈릴리로 되돌아갔다는 언급은 없지만,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1:8)라는 명백한 지시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가롯 유다를 대신해서 열둘의 새로운 사도를 선택한 것, 베드로의 뚜렷한 지도력, 오순절에 모인 공동체에 주어진 불같은 성령의 선물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사도행전 2:44-47은 이 제자 집단이 예루살렘에 세운 공동체의 대안적 성격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다. 즉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런 모습은 4:34-35에서 좀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런 묘사가 나중에 초기 예수운동을 회고하면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린 것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즉 몇 십 년 뒤에 그리스어를 사용한 복음서 기자, 곧 이스라엘 계약의 평등주의적인 율법보다는 공동체 생활이라는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이상에 더 익숙한 복음서 기자가 회고하면서 그린 모습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원시 공산주의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 사적인 재산을 이기심 없이 서로 나누려는 사람들에 대한 칭찬과 비교하려 함으로써, 그들은 신약성서 학자 브라이언 카퍼(Brian Capper)가 지적했듯이, 사해 두루마리에 문헌으로 분명하게 나와 있는 것처럼 개인들의 모든 재산과 소유물을 공동체 금고에 기부했던 독특한 유대인들의 실천을 간과한 주장이다. 똑같은 시기에 유대라는 작은 지역에서 로마 사회의 악행을 단죄하고 성전 제사장들의 지도력에 반대했던 또 다른 집단도 공동체를 조직했는데, 그 공동체에 완전한 회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모든 수입과 사적인 재산을 넘겨야만 했었다.
요세푸스가 당시 널리 퍼져 있었던 에세네 공동체들에 대해 묘사한 것(에세네 공동체들과 사해 두루마리 공동체의 연관성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은 그들의 이상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부자를 경멸하고 그들의 생활 공동체는 참으로 감탄할 만하다. 그들 가운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부유한 사람이 없었다. 그 종파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종단에서 넘겨받는 법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비천한 가난이나 지나친 부유함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개인의 소유물은 공동 재산이 되어 모두가 형제들처럼 하나의 세습재산을 누린다." 이것은 모두 사도행전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묘사한 것을 상기시켜준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즉 그 공동체에 가입했지만 자신들의 재산 일부를 몰래 빼돌렸다가 죽은 부부의 이야기는 후대의 도덕주의적 전설로 이해한다 해도, 당시에 재산을 공유했던 현상은 1세기 유대 지방의 상황에서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이웃들 간에 경제적인 협동과 나눔이라는 창조적인 원리는 단순히 하나의 윤리적 미덕이 아니라 생존의 실제적 기술로서, 예수가 가르쳤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생활방식의 주춧돌 가운데 하나였다.
Q 공동체의 전승이 예수의 말씀, 곧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우며 자신의 소유물을 전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로마 경제의 불의로부터 벗어나며 이스라엘의 씨족 마을에 근거한 이상으로 되돌아가는 핵심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공동체의 재산 공유 역시 그 도시의 길거리와 빈민가에서 "마을"을 만들려는 의식적인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토지에서 쫓겨난 수많은 농민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각박한 사회현실에 봉착해서,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집단―이들은 그 추종자들 가운데 예수운동의 가장 모범적이거나 가장 자연적인 계승자들이라고 간주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은 예수의 메시지를 이처럼 폭넓은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복음서들과 후대의 기독교 전승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그밖에 아홉 사도를 예수운동의 핵심이며 지도자들이라고 밝혔지만, 우리는 예수가 설교했던 갱신 프로그램이 어떤 형태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 판단할 때, 나중에 회고하는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만 한다. 농촌에서 시작된 운동으로서, 그 언어가 곳간, 황소, 타작마당, 새들의 둥지, 겨자씨, 들의 백합에 관한 간결한 말들로 표현된 어부들, 농민들, 빚진 사람들의 언어였던 것이,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섬김의 운동이 되었다. 예수운동이 발전하는 이 역사적 단계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창설자들이 왕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필요성에 대한 열렬한 믿음 이외에 정확히 무엇을 믿었으며, 어떤 종교제의를 실천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비록 많은 주석가들은 사도행전 2:46에서 그 공동체가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성만찬 의식에 대한 초기 언급으로 이해했지만, 이것을 예수의 갈릴리 목회의 중요한 부분, 곧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 습관을 계속했던 것 이상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생존하기 힘들도록 로마제국이 야기한 문제들은 소작농, 과다한 세금, 헤롯 왕족들의 오만함보다 훨씬 더 전면적인 것이었다. 갈릴리 사람들, 유다 지방인들, 그리고 지중해 전역의 유대인 공동체들로서는, 계약과 공동체에 대한 조상들의 신성한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그 전통이 간직한 독특한 사회적 비전을 살려나갈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제 급격한 경제적 변화와 로마제국에 정치적으로 굴복한 시대에, 강력하고 다양한 예언자 운동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한 예수의 계획에 대한 기억이 그의 어록에 수집되어 갈릴리 마을들과 그 주변 지역에 유포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는 그와 약간 다른 기억들과 이상들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 이후의 발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는 시골 농민들의 목가적인 꿈보다 훨씬 더 제사장 귀족들의 권위와 헤롯 왕족들의 야망에 위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만일에 이스라엘의 해방과 갱신이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 한복판에 "마을"을 세움으로써 한 걸음 더 진전될 수 있다면, 도시 속의 계약 마을(a covenantal village-in-the-city)이라는 이상은 제국 안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경제적 자립과 저항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에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첫 번째 갱신운동 공동체에 대해,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단적이거나 신성을 모독하는 공동체라고 간주했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 구성원들이 몸을 낮추고 그들의 작고한 예언자 예수처럼 불꽃같은 정열과 도덕적 분노를 드러냄으로써 공공질서를 방해하지 않는 한,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이 갖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스펙트럼 속에서 단지 또 하나의 색깔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34-39에 묘사된 것처럼, 유명한 바리새파 랍비 가말리엘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해서 개입했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것일 테지만(나중에 초기 랍비들과의 논쟁에 기초한 사건일 것이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십자가 처형 이후 3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튼튼했으며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도행전의 주장은 요세푸스도 확인해주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야고보, 곧 예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던 야고보가 나중에 법적으로 처형된 것이 "그 도시에서 가장 공정하며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예루살렘 공동체가 반율법적인 종교적 도그마 때문이 아니라 그 독특한 사회적 비전 때문에 유대교로부터 구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가 나중에 더 살펴보겠지만, 그 사회적 비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관심과 열심에 대해서도 강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비전이었다.
호슬리 & 실버만, 5장에서
열두 제자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또한 개인들로서 복음서들에서 특별히 두드러진 역할을 맡고 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자주 예수와 사적인 대화에 등장하여, 질문을 하고 꾸지람도 듣고 가르침도 받으며, 예수의 변모(transfiguration)도 목격하며,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도 한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는 예수를 배신한 사람으로 나온다. 예수가 체포될 때, 열두 제자 모두는 도망간 것으로 나온다. 이런 사건들과 묘사들의 역사적 신빙성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이 경우에 고고학과 사회사는 이 개인들의 구체적 행동을 증명하기에는 서투른 도구들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1세기 맥락 속에서 폭넓은 마을 갱신운동에 관해서나 로마제국 안에서 폭력적인 억압이 가져온 사회적 영향에 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 예언자-지도자가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권력에 의해 잔인하게 처형될 때, 그 특정한 개인들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열두 제자로 알려진 예수의 초기 갈릴리 추종자 집단이, 십자가 처형 이후에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한 운동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건들이 복음서들 속에 묘사된 것처럼 정확히 그렇게 펼쳐졌던지 아니던지 간에,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은 열두 제자들에게 독특한 권위를 갖게 해주었다.
후대의 기독교 전승은 열두 제자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로 인정했다. 비록 그 만남의 정확한 세부 사항들과 심지어 일반적인 성격은 서로 다르게 전해졌지만 말이다. 마가복음 16:1-7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무덤 속에 흰옷을 입고 앉아 있던 신비한 청년으로부터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마태복음 28장 역시 여인들이(여기서는 단지 두 명의 마리아뿐이다) 주일날 빈 무덤에 찾아가 지시를 받는 것(여기서는 청년이 아니라 천사로부터)에 관해 말해준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16절에는 "열한 제자"(배반자 가롯 유다를 빼고)에게 예수가 직접 나타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위임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누가복음 24장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자 둘이 엠마오라는 유대 마을로 가는 길에 어떻게 예수가 나타났으며, 베드로에게 나타났으며, 예루살렘에서 열한 제자가 있는 중에 나타났는지를 말해준다. 한편 복음서들 가운데 가장 정교한 부활 이야기가 나오는 요한복음에는,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고, 예루살렘에서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또 다시 여드레 후에 예루살렘에 나타나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는지를 말해준다.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똑같은 사건들에 대한 서로 다른 판본들로 조화되든지 간에(학자들은 영적인 현현, 환상, 혹은 영적인 사로잡힘으로 설명한다), 20년 정도 지나서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에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즉 30년대 중엽에 이르면, 예루살렘 안에 예수의 갈릴리 추종자들 집단이 하나 생겨났는데, 이 집단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억에 헌신하며, 예수가 죽은 후에도 예수와 직접 접촉했던 것으로 유명한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십자가 처형 이후에 예수와 접촉했다는 것이 이 예루살렘 공동체로 하여금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독특하며 신적인 명령을 지녔다고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북쪽에 흩어져서 예언자 예수에 대한 전승을 계속 이어가면서도 예수의 죽음이나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켰던 Q 마을 공동체들로서는 동의하지 않았거나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실제로, 만일 예수가 이스라엘의 마을 농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평등주의적인 계약전통에 헌신하도록 만들어 마을 공동체들을 새롭게 갱신하는 실천적 이상에만 몰두했었다면, 도대체 왜 어부들과 농부들로 이루어진 그 핵심 집단이 언덕과 호숫가, 골짜기들을 떠나서 예루살렘이라는 복잡하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도시로 갈 마음을 먹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당연히 묻게 된다. 만일 예수가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이 단지 그 통치자들을 단죄하고 헤롯 왕족들과 성전 관료체제의 지도자들이 지녔던 메시아적인 열망에 대해 예언자적인 단죄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도대체 왜 예수의 핵심 제자들 모두가 갈릴리로 되돌아가서 예수가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계속 수행하지 않았는가?
분명히 예루살렘에 갱신운동을 위한 영구적인 공동체가 확립되었다는 점은 예수운동이 농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으로부터 극적으로 결별하게 되었음을 뜻했다. 지난 세기 마지막 25년 동안에 걸쳐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골목길, 대문들, 공공장소들에서 드러난 도시 풍경이란 1세기 갈릴리 풍경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었다. 셉포리스와 티베리아스는 헤롯 안티파스의 겉치레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지역을 위한 작은 행정 센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로마제국 전역에 그 명성이 자자했던 도시였다. 우리는 예루살렘 고지대를 점유하고 있었던 화려한 주거지역에 관해 이미 언급했는데, 그 지역에는 제사장들과 귀족들이 호화로운 빌라들을 짓고, 성전구역과 광장, 성전 입구, 당당한 주랑들,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스탠드를 놓고 줄지어 늘어서 떼를 지어 몰려드는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던 성전 바깥뜰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또한 성전 업무가 하루도 쉬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만들었던 대규모 수공업과 공급시설들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성전의 회계를 맡은 큰 부서는 십일조와 기부금을 계속 확인했으며, 도시 전역의 숙박업소들은 일년에 세 차례씩 밀려드는 순례자들의 요구를 채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1세기 예루살렘에는 이런 제사 및 성전과 관련된 사업들보다 더욱 많은 것들이 있었다.
고대의 문헌들과 현대의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 전역에 걸친 시장의 노점들엔 수많은 노동자들과 상인들의 수고의 열매들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귀금속, 철물, 면직물, 신발, 샌들, 향료, 빵, 떡, 오일, 비누, 정육, 닭고기, 향수, 돌그릇, 유리그릇 등은 단지 예루살렘의 노점상들이 소리치며 팔고 있었던 상품들 가운데 단지 몇 종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저지대(Lower City, 성전의 남남서 지역)의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면서 자리잡고 있는 좁은 구릉지대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도시의 중심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이제 인구가 밀집한 거주지역이며 생산 활동지역이 되어 별별 것들을 다 만들어냈다. 다윗성(City of David, 성전 구역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기혼 샘 서남부 지역)에 대한 최근의 발굴을 통해서 예수 당시의 빽빽하게 들어섰던 집들과 저수조, 의례용 욕조 등 매우 훼손된 유적들만 발굴했지만, 우리는 요세푸스와 후대의 랍비 문헌을 통해서 이 지역과 그 옆의 티로페온 계곡, 혹은 "치즈 제조인들" 골짜기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상인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의 주요 거주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로서, 시골에서 살다가 가족의 유산을 잃고 예루살렘의 공사장 일이나 잡부로 날품을 팔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도시로 밀려든 사람들이었다. 토지가 없는 농민들로서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장기간 고용될 수 있다는 전망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며, 훗날 요세푸스는 "누구든 하루에 한 시간만 일을 해도 곧바로 그 노임을 받았다"고 썼다. 또한 랍비 문헌에 많이 나오는 벌목공, 짐꾼, 경비원, 목욕탕 일꾼, 가죽 무두질꾼, 똥 푸는 사람, 배달부, 푸주간 일꾼, 마부, 이발사, 염색공 등에 대한 언급들은 임금노동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암시한다. 실제로 예수가 갈릴리에서 맞부딪쳤던 농민들의 부채와 소작농의 문제들은 예루살렘의 길거리와 노점상들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도시인구가 불어난 것은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 전역에 확산된 제국의 상업경제로 변화된 것의 한 부분이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무슨 일을 해야 했는가?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일당 노임을 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완전히 의존해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계약에 따른 나눔과 협동이라는 이상적인 마을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공동체를 세운 것이 그런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최초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성격과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증거라고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 속에 나오는 몇 가지 간단한 언급들뿐이다. 그러나 이 조직이 순전히 시골에서 진행되었던 운동에서부터 서서히 하나님 나라가 은유가 된 운동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분명한 암시가 있다.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갈릴리로 되돌아갔다는 언급은 없지만,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1:8)라는 명백한 지시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가롯 유다를 대신해서 열둘의 새로운 사도를 선택한 것, 베드로의 뚜렷한 지도력, 오순절에 모인 공동체에 주어진 불같은 성령의 선물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사도행전 2:44-47은 이 제자 집단이 예루살렘에 세운 공동체의 대안적 성격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다. 즉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런 모습은 4:34-35에서 좀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런 묘사가 나중에 초기 예수운동을 회고하면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린 것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즉 몇 십 년 뒤에 그리스어를 사용한 복음서 기자, 곧 이스라엘 계약의 평등주의적인 율법보다는 공동체 생활이라는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이상에 더 익숙한 복음서 기자가 회고하면서 그린 모습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원시 공산주의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 사적인 재산을 이기심 없이 서로 나누려는 사람들에 대한 칭찬과 비교하려 함으로써, 그들은 신약성서 학자 브라이언 카퍼(Brian Capper)가 지적했듯이, 사해 두루마리에 문헌으로 분명하게 나와 있는 것처럼 개인들의 모든 재산과 소유물을 공동체 금고에 기부했던 독특한 유대인들의 실천을 간과한 주장이다. 똑같은 시기에 유대라는 작은 지역에서 로마 사회의 악행을 단죄하고 성전 제사장들의 지도력에 반대했던 또 다른 집단도 공동체를 조직했는데, 그 공동체에 완전한 회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모든 수입과 사적인 재산을 넘겨야만 했었다.
요세푸스가 당시 널리 퍼져 있었던 에세네 공동체들에 대해 묘사한 것(에세네 공동체들과 사해 두루마리 공동체의 연관성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은 그들의 이상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부자를 경멸하고 그들의 생활 공동체는 참으로 감탄할 만하다. 그들 가운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부유한 사람이 없었다. 그 종파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종단에서 넘겨받는 법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비천한 가난이나 지나친 부유함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개인의 소유물은 공동 재산이 되어 모두가 형제들처럼 하나의 세습재산을 누린다." 이것은 모두 사도행전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묘사한 것을 상기시켜준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즉 그 공동체에 가입했지만 자신들의 재산 일부를 몰래 빼돌렸다가 죽은 부부의 이야기는 후대의 도덕주의적 전설로 이해한다 해도, 당시에 재산을 공유했던 현상은 1세기 유대 지방의 상황에서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이웃들 간에 경제적인 협동과 나눔이라는 창조적인 원리는 단순히 하나의 윤리적 미덕이 아니라 생존의 실제적 기술로서, 예수가 가르쳤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생활방식의 주춧돌 가운데 하나였다.
Q 공동체의 전승이 예수의 말씀, 곧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우며 자신의 소유물을 전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로마 경제의 불의로부터 벗어나며 이스라엘의 씨족 마을에 근거한 이상으로 되돌아가는 핵심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공동체의 재산 공유 역시 그 도시의 길거리와 빈민가에서 "마을"을 만들려는 의식적인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토지에서 쫓겨난 수많은 농민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각박한 사회현실에 봉착해서,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집단―이들은 그 추종자들 가운데 예수운동의 가장 모범적이거나 가장 자연적인 계승자들이라고 간주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은 예수의 메시지를 이처럼 폭넓은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복음서들과 후대의 기독교 전승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그밖에 아홉 사도를 예수운동의 핵심이며 지도자들이라고 밝혔지만, 우리는 예수가 설교했던 갱신 프로그램이 어떤 형태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 판단할 때, 나중에 회고하는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만 한다. 농촌에서 시작된 운동으로서, 그 언어가 곳간, 황소, 타작마당, 새들의 둥지, 겨자씨, 들의 백합에 관한 간결한 말들로 표현된 어부들, 농민들, 빚진 사람들의 언어였던 것이,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섬김의 운동이 되었다. 예수운동이 발전하는 이 역사적 단계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창설자들이 왕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필요성에 대한 열렬한 믿음 이외에 정확히 무엇을 믿었으며, 어떤 종교제의를 실천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비록 많은 주석가들은 사도행전 2:46에서 그 공동체가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성만찬 의식에 대한 초기 언급으로 이해했지만, 이것을 예수의 갈릴리 목회의 중요한 부분, 곧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 습관을 계속했던 것 이상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생존하기 힘들도록 로마제국이 야기한 문제들은 소작농, 과다한 세금, 헤롯 왕족들의 오만함보다 훨씬 더 전면적인 것이었다. 갈릴리 사람들, 유다 지방인들, 그리고 지중해 전역의 유대인 공동체들로서는, 계약과 공동체에 대한 조상들의 신성한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그 전통이 간직한 독특한 사회적 비전을 살려나갈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제 급격한 경제적 변화와 로마제국에 정치적으로 굴복한 시대에, 강력하고 다양한 예언자 운동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한 예수의 계획에 대한 기억이 그의 어록에 수집되어 갈릴리 마을들과 그 주변 지역에 유포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는 그와 약간 다른 기억들과 이상들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 이후의 발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는 시골 농민들의 목가적인 꿈보다 훨씬 더 제사장 귀족들의 권위와 헤롯 왕족들의 야망에 위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만일에 이스라엘의 해방과 갱신이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 한복판에 "마을"을 세움으로써 한 걸음 더 진전될 수 있다면, 도시 속의 계약 마을(a covenantal village-in-the-city)이라는 이상은 제국 안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경제적 자립과 저항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에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첫 번째 갱신운동 공동체에 대해,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단적이거나 신성을 모독하는 공동체라고 간주했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 구성원들이 몸을 낮추고 그들의 작고한 예언자 예수처럼 불꽃같은 정열과 도덕적 분노를 드러냄으로써 공공질서를 방해하지 않는 한,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이 갖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스펙트럼 속에서 단지 또 하나의 색깔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34-39에 묘사된 것처럼, 유명한 바리새파 랍비 가말리엘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해서 개입했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것일 테지만(나중에 초기 랍비들과의 논쟁에 기초한 사건일 것이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십자가 처형 이후 3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튼튼했으며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도행전의 주장은 요세푸스도 확인해주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야고보, 곧 예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던 야고보가 나중에 법적으로 처형된 것이 "그 도시에서 가장 공정하며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예루살렘 공동체가 반율법적인 종교적 도그마 때문이 아니라 그 독특한 사회적 비전 때문에 유대교로부터 구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가 나중에 더 살펴보겠지만, 그 사회적 비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관심과 열심에 대해서도 강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비전이었다.
호슬리 & 실버만, 5장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