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운동이 유대 지방으로부터 로마제국의 먼 곳으로 줄기차게 확산되는 과정에 대한 그 이야기에서, 사도행전은 예수운동이 갈릴리인들과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모여든 순례자들에게도 즉각적이며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해가 지날수록 예수운동이 유대 지역 바깥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게 된 것은 그 운동의 독자적 발전 과정에서 점차 더욱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 이후 첫 번째 오순절에서 성령이 강림한 것과 제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방언을 말하게" 된 것에 대해 사도행전은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예수의 메시지를 갑자기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었다. 즉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그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이었다(2:9-11). 갈릴리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예루살렘 공동체는 곧이어 먼 곳에서 온 새로운 멤버들을 얻게 되었는데 이들은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키프로스 출신의 바나바, 안디옥 출신의 니골라,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스, 니가노르, 디몬 등 사도행전에서 "그리스어 사용자들"(Hellenists)로 알려진 중요한 파벌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약성서 학자들과 주석가들 사이에서는 이들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유대인들이었는지, 유대인 개종자들이었는지, 개종하지 않은 동조자들이었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잠시 방문한 이교도들이었는지에 대해 오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신약성서 학자 마틴 헹엘(Martin Hengel)은 이 헬라주의자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아람어를 사용하던 갈릴리인들과 유대지방인들과 구분되는)로서 여러 이유들 때문에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출신지에 근거한 별도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계속해서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던 사람들이라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스어 사용자들"이라는 용어 자체가 반드시 성전과 율법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태도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집단 응집력의 문제였다. 사도행전은 유대인들 가운데 외국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 정착하고 그들 스스로 구별되는 공동체들을 조직한 많은 집단들 가운데 몇몇 집단들을 열거한다. 즉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Freedmen) 회당(synagoge)에 소속된 사람들"(6:9)이 그들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는 그처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거주자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즉 예루살렘의 저지대 경사면에서 발굴된 석회암에 그리스어로 새겨진 글씨에는 베테누스(로마 출신을 시사하는 라틴어 이름)의 아들 테오도투스가 "율법을 읽고 계명을 가르치는 회당과 또한 해외에서 온 손님들의 숙소, 상수도 시설"을 위해 기부금을 낸 것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유대인들의 자선행위만이 아니라 시온(Zion)으로 오게 되는 동기들은 여러 가지로서, 명성, 자존심, 가족관계, 종교적 헌신 등이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디아스포라에서 적극적인 반 유대인 박해에 대한 압박감과 영원히 소수자의 지위로 살아야만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한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이다. 많은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루살렘에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 존재하게 된 이런 정치적 동기를 간과했으며, 또한 예루살렘의 예수 공동체의 초기 그리스어 사용자들의 정치적 입장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ioudaismos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선언하고 실천하며 지지하며 설교하기 위해서였다. 이 그리스어는 보통 "유대교" 혹은 "유대성"(율법 준수, 음식법, 그리고 순전히 종교적인 제의와 연관된 많은 현대적 의미들과 더불어)으로 번역되지만, 로마시대에는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 공동체들의 정치적 연대성과 문화적 자율성을 찾기 위한 새로운 전투적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유대인들, 갈릴리인들, 그리고 기타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 용병, 전쟁포로, 혹은 자발적인 이주를 통해 외국으로 나가 어느 곳에 정착했던지 간에 자신들의 관습과 계약전통의 요체를 보존하기 위해 지역 공동체들을 형성했다. 이집트, 키레나이카(리비아), 소아시아, 그리스 등지에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 있었다는 매우 다양한 고고학적 및 비문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공동체 회의와 공부 및 기도 모임들은 주로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마카베오 반란처럼 유대에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한 경우에는, 많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들도 동시에 활동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을 도왔다. 그리스 왕국들의 지배 아래 점차 지중해가 통일되고 그로 인해 언어 소통의 보다 보편적인 수단이 확립되자,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일반적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처음에는 디아스포라와 이스라엘 땅 모두에서 유대인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위협했던 그리스(hellenismos) 방식과 논리와 경제에 맞서 투쟁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런 일반적 의식은 그 이후 지중해 전역에 걸친 로마제국의 확대로 인해 ioudaismos의 실천적 목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과 왕국들에 살던 유대인들 공동체들이 단 하나의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경제적 생존, 시민의 권리, 공동체의 안전이 가장 절박한 문제들이 되었다. 비록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같은 로마의 지도자들은 유대인 공동체들이 독립적 민족으로서의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해주었지만, 중요 도시들의 고위 관리들은 아마도 로마의 패권 주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독립성을 빼앗기게 된 것에 분개하여, 자신들의 도시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었고 때때로 유대인들의 공동체 권리를 박탈하려고 했다. 이집트, 키레나이카,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에서 반셈족주의 운동이 진행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즉 "유대인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며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는 야비한 비난에서 시작된 반셈족주의 운동은 점차 공식적인 차별로 이어졌고, 마침내 유대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군중 폭력으로 나타났다.
일부 유대인들과 유대인 공동체들로서는 이런 위협에 대한 대책이 헤롯 왕족들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유대에서의 헤롯 왕족의 권력과 로마사회의 고위층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통해 자신들이 정치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헤롯 대왕과 그 아들들이 지중해 지역 도시들에 공공건물과 기념비들을 세우는 데 아낌없이 기부한다는 명성을 얻게 되고, 또한 그 도시들에 세워져 눈에 잘 보이는 건물들과 기념비들의 기부자가 유대의 왕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유대인 공동체들도 덩달아 기운을 얻게 되자,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 간에 유대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속수무책이었던 사람들이 아니며, 잃어버린 고향을 슬픈 눈으로 되돌아보는 망명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이 더 이상 고향 이스라엘 땅에 사는 데 달려 있지 않은 코스모폴리탄 사람들이다. 그러나 헤롯 왕족들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과 성전에 대한 애착만이 유대 전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디아스포라에는 또한 왕위 계승의 관점이 아니라 예언자적인 관점에서 고향 시온을 갈망하던 수많은 가난한 노동자들, 기술자들, 퇴역군인들, 예전의 농민들,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들도 있었다. 비록 우리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태도와 정치적 태도를 일률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예루살렘에 돌아와 잠시 동안 혹은 좀더 오랜 기간 동안 머문 사람들이, 마치 테오도투스의 비문에 언급된 "궁핍한" 사람들처럼, 헤롯 왕족들과 로마가 통치하던 유대 지방의 경제적 불의와 성전 귀족들의 자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한 강제징수에 대해 상당히 원한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당시의 문헌전통에서 우리는 급진적인 디아스포라 전통, 곧 후견인 왕에 호소하거나 지배권력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급진적 전통이 투쟁과 순교의 문헌 속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ioudaismos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사실상 기원전 160년대에 벌어진 마카베오 반란의 역사 속에 나오는데, 이것은 북아프리카 키레네의 야손이 그리스어로 쓴 역사책으로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폭넓게 읽혀진 책으로서, 후대에는 간추린 형태로 마카베오 제2서로 알려진 책이다. 이 책과 그 기본 주제와 이야기들을 확대한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해 순교한다는 이상이 일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볼 수 있다. 셀류코스 제국에 맞서서 유다 마카베오가 이끌었던 이 성공적인 반란 이야기에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로운 유대인들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 이 순교자들이 정치적 억압과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에 확고하게 순종한 빛나는 사례들은 적들에게 포위된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을 방어하고 지역의 박해들에 저항하고 자치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위한 본보기가 되었다. 가장 탁월한 인물들은 나이가 많고 의로운 현자 엘르아잘과 그의 일곱 형제들로서, 이들은 제국의 장교가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명령했지만, 계약법을 위반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치욕을 당하고 마침내 고문을 받아 죽었다. 순교자들은 모두 자기 동족들의 불행이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설명하면서 강조했던 것처럼, 그 "죄들"은 자의적이며 개인적인 윤리적 실수가 아니라 계약법에 대한 구체적인 위반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례들, 사회적 책임들, 공동체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은 결국 그로 인해 의로운 사람들까지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사람들은 확실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들이 겪는 고문, 고통, 순교는 적극적인 영적 가치를 지녔다. 한편으로 순교자는 유대인들이 배교(背敎)와 죽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할 때 역할 모델이 되었다. 노인 엘르아잘은 고문당하는 것을 선택하였는데,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율법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고상하고 훌륭한 죽음을 택하여 젊은이들에게 좋은 표본을 남기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마카베오하 6:28). 순교자의 또 다른 역할은 마카베오 4서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책은 기원후 1세기 초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또 다른 유대인이 기록한 책이다. 여기서 순교자의 죽음은 모든 백성들의 회개와 갱신을 요청하는 나팔 소리로 울린다. 왜냐하면 만일 이스라엘의 불행이 민족의 죄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면, 즉 그들이 안식일법과 축일들, 사회 복지, 도덕법, 평등주의적 사회관계에 대한 계약법을 무시한 때문이라면, 그런 불행은 율법을 준수할 때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카베오 4서 18:3-4에 표현되어 있듯이,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몸을 고난에 맡기는 사람들은 인류의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상속을 받은 가치가 있는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우리 백성은 평화를 누렸다. 그들은 그들의 땅에 율법 준수를 되살렸고 원수들의 포위를 물리쳤다." 그러므로 마카베오 형제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둔 것은 그들의 용기나 훌륭한 지휘 때문만이 아니라 백성 전체가 깨달은 것, 즉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해 자신들이 율법을 성실하게 준수하는 것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기도 했다.

호슬리 & 실버만, 5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