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오늘날처럼 자기 표현의 욕구가 강조되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자기 표현을 이루어내기 어려운 때도 없었다. 오늘날에는 우리 자신을 상투적 표현, 인습, 유행과 표준에 맞추도록 엄청난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는 침묵하며 언어는 죽었고 기도는 잊혀진 언어가 되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진공 속에 쏟아낼 수 없다. 만일에 언어가 인위적인 기호들이라면, 만일에 의미가 단지 꾸며낸 것이라면, 만일에 고문을 당하고 있는 세상의 고통에 대한 반향이 없다면, 만일에 사람이 혼자라면, 만일에 세상이 진공 속에서 돌아간다면, 모든 표현들이란 도대체 무슨 궁극적인 가치가 있겠는가?
사람은 잊혀진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사람의 욕망, 변덕, 결점을 알고 있지만, 사람의 궁극적인 헌신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사람이 하는 일은 이해하지만,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 놀라지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표현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진정한 자기 표현이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궁극적인 질문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의 최고의 관심에 대한 이해를 상실해버렸다. 왜냐하면 그런 이해는 자기 점검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는 그분을 사모함으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 질문에 예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기를 뛰어넘을 능력, 자기가 자기 이상이라는 것을 아는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의 최고의 관심이 우리 자신이 지닌 관심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최고 표준은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자기를 초월할 능력을 박탈당하고 있어서, 마음을 뛰어넘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지금 여기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고, 지닌 것과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우리가 손으로 만든 것, 우리 마음의 산물일 따름이며,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부적절한 공상이라고 간주된다. 우리에게 세상은 도구들과 기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의 사상들은 단지 상징들일 따름이다. 하느님은 이름일 뿐 실재가 아니다. 행동의 기준은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것이며, 하느님 역시 우리의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
이제 하느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 중대한 관심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실 지도 모르지만, 사람은 하느님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궁극적인 길, 예배의 길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느님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며 세상을 보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것은 존재의 보다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며, 하느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궁극적인 길이 하나의 상징을 갖는 길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되는 길이며, 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궁극적인 길은 생각을 거룩하게 하며, 시간을 신성하게 하며, 말을 성별하며 행동을 정화하는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생각을 거룩하게 하는 좋은 본보기이며, 제7일은 시간을 신성하게 하는 본보기이며, 기도는 말을 성별하는 본보기이며, 계율을 지키는 것은 행동을 정화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힘을 상실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실재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상징들을 통해서 할 뿐이다. 우리는 도구들을 위해 살고 있으며, 기호들로 생각한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일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징들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최고로 중요한 분이 아니라면 중요하지 않다. 종교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종교의 풍부한 의미를 한 문장 속에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히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종교는 사적인 이익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에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어떻게 나의 개인적인 이익을 최대로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한 가지 관심에 의해서만 이끌려진다면, 우리가 섬기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참으로 자기는 그 나름의 적절한 주장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자기를 한결같이 부정하고 행복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을 위한 사랑임을 기억하는 것,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다.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은 자기를 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분의 상징으로서 행동하는 것은 바로 이런 예배의 순간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 기도는 가장 적게 사적인 이익을 남겨주는 것이며, 가장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며, 가장 실천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도는 자기를 정화하는 행동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도는 존재론적인 필연이다.
우리는 역사의 위대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를 지나고 있다. 거짓 신들은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사람들의 가슴은 하느님의 음성에 굶주려 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질식당해 왔다. 그 울림소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정직하게 귀담아들으려 해야 하며, 우리가 이해할 준비를 하는 데 편견이 없어야만 한다.
우리의 삶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국제적인 상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다른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권력 때문에 피폐해질 위협을 받고 있다. 권력은 타락하며, 우리를 구원하는 것, 재앙을 막는 것, 몸과 영혼 모두를 고상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는 길 뿐이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은 기도이다. 기도는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통찰의 길이다. 기도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수 있지만 기도는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든다.
모든 신성한 행동들 중에서 첫 번째가 기도다. 종교는 "사람이 고독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사람이 하느님의 현존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가 그 영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 때는 언제나 현존한다. 참으로 하느님은 우리 시대에 그 얼굴을 감추고 계시지만, 그분이 숨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피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