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수산나 헤셸


헤셸은 민권운동을 위해 1963년 6월 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내일 오후 4시 모임에 참석하게 될 특전을 기대합니다. 흑인 문제는 날씨와 비슷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 말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관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단지 엄숙한 성명서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개입하도록 요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흑인들의 권리를 계속해서 무시하는 한, 우리는 하느님을 예배할 권리를 잃게 됩니다. 교회들과 회당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해야만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국가적 회개와 개인적 희생을 요청하도록 요구하십시오. 종교 지도자들이 흑인들의 주택과 교육을 위해 한 달치 월급을 기부하도록 하십시오. 나는 대통령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를 제안합니다. 흑인들을 위한 마샬플랜은 필수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높은 도덕적 숭고함과 영적인 담대함이 요청되는 시간입니다.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도덕적인 숭고함과 영적인 담대함" ― 나는 나의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말을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의 학문적 논설과 대중 강연에서 추려낸 것으로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위의 전보처럼, 항상 그의 사상 속에 하느님과 인간 모두를 붙잡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 및 사회 문제들은 그의 중요한 관심사항들이었으며, 그의 글에 그런 힘을 준 것은 그의 종교적 통찰력이었다. 그에게는 정치와 신학이 항상 서로 얽혀있는 것이었다. 그는 앨라바마 주 셀마에서 흑인 민권운동을 위한 거리행진을 한 후에, "나의 다리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저항이 그에게 종교적 체험이었던 것처럼, 정치적인 악에 대한 의분이 없는 종교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느님에 관해 말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고 그는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 안에서 선한 것을 보는, 자비와 연민의 하시디즘의 목소리와, 위선과 자기중심성과 무관심을 질타하는 예언자들의 정의의 목소리가 독특하게 결합된 분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남을 비난하거나 자신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경처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논쟁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유대 종교사상에 뿌리를 내린 영감을 받은 목소리였다. 그가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에 관해 말한 것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데, "유대 정신은 열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의 조직을 휘젓는 수액에 있었다. 그 토양의 적막 속에서 자라난 유대 정신은 잎사귀들로 올라가 열매 안에서 풍요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대 정신은 나무의 수액처럼 나의 아버지 속에 들어왔고, 그의 풍요로움은 그의 깊은 신앙과 학문의 열매였다.
나의 아버지를 자신의 선생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즉 가톨릭 신자, 유대인, 개신교인, 백인과 흑인,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신앙인과 무종교인, 미국인, 유럽인, 이스라엘인 등 매우 다양하다. 그의 생애는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에 대해 도전한다. 그의 책들에 대해, 교황 바오로 6세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라고 칭찬했다. 흰 턱수염을 기르고 작은 모자를 쓰는 이 정통파 유대인은 흑인들의 시민권을 위해 거리행진을 했으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이 폴란드 출신의 이민자의 작품이 영어 산문 선집에 포함되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나찌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불과 6주 전에 미국 비자를 받아 구출되어, 자신을 가리켜 "유럽의 불구덩이에서 타다 남은 막대기"라고 말했다. 그의 생존은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분석에 따르면, 종교가 큰 위험에 처한 시대에 그는 독특한 종교적 목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장한 동부유럽의 유대인 하시디즘 세계는 미국에서 그가 글을 쓰고 가르쳤던 환경과는 매우 다른 세계였다. 그는 폴란드의 랍비 가족 출신이었으며, 그의 생애 중반에 독일인들에 의해 갑자기 뿌리뽑힌 유대인 문명 출신으로서, 그 문명의 대학들에서 공부했으며 유대인 종교사상에 관해 유대인 언어로 글을 썼다. 그가 겪었던 참극들, 즉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과 친구들 그리고 그의 친척들이 살해당하고 자신을 키워준 세상이 파괴되는 참극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는 계속해서 거룩한 차원들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 그 자신의 독특한 언어로 일깨울 수 있었다.
말 자체는 신성한 것이라고 그는 자주 말했다. 말은 우주를 창조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였으며, 또한 우리가 이 세상 속에 거룩함(혹은 악)을 가져오는 도구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에게 유대인 대학살이 포로수용소에 가스실을 만든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 히틀러가 탱크와 총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곤 하셨다. 그 모든 것은 악한 말을 내뱉는 것에서, 중상모략에서, 말과 정치선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곤 했다. 말은 세상을 창조한다고, 어린 나에게 일러주곤 하셨다. 말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만 한다. 어떤 말은 일단 발설하고 나면 영원한 것이 되어 결코 무를 수 없다. 잠언서는 사망과 생명이 혀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그는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1907년 1월 11일, 바르샤바에서 모쉐 모르드개와 라이젤 (펄로우) 헤셸의 막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각 유명한 하시디즘 랍비의 자손들로서, 유대인 세계에서는 고귀한 가문이었다. 동부 유럽의 거의 모든 위대한 하시디즘 지도자들은 18세기에 시작된 경건운동에 영감을 불어넣고 지도했던 사람들로서, 나의 아버지의 조상들이었다. 그는 그분들을 깊이 흠모했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는 자주 그의 서가에서 작은 책들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며 몇 군데를 읽어주시고, 그 책들을 쓰신 조상들에 관해 흠모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이것이 네가 물려받은 유산이란다" 하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런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기보다는, 조상들에 대한 감사함과 겸손함과 존경심을 지니셨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어린 시절에 존경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았고, 내면 생활의 문제와 영성과 성실함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어서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깊은 연민과 이해를 보여준 분들이었지요"라고 말했다.
어린 소년으로서 그는 하시디즘 랍비 가족에게 주어지는 왕자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즉 그가 어렸을 때조차도 그가 방에 들어가면, 어른들이 일어나서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해주곤 했다. 사람들은 그를 안아 테이블 위에 올려 세우고는 히브리 본문에 대한 해설을 들려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천재로 간주되었다. 그의 세계는 열정적인 신앙과 종교적인 준수의 세계였는데, 자신이 영적으로 숭고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성장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 가족의 막내로서 누이들, 사라, 드보라, 미리암, 에스더 시마, 지텔과 그의 형 야곱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대가족의 막내처럼 놀림도 당하고 응석도 부렸다. 그가 세 살 되었을 때 그의 첫째 누이 사라가 카피쉬니처의 랍비와 결혼했는데, 그는 자신이 그 결혼잔치에서 어른들 사이에서 신나게 뛰어다닌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그는 종교적 의무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다섯 살 때 옆집의 여자에게 심부름을 가곤 했었는데, 자기가 빌리러 간 물건을 테이블에 놓아달라고 부탁하곤 했다는 말을 나에게 들려주면서 부끄러워하는 듯 했다. 극단적인 정통주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남자는 여자의 손에 직접 물건을 주거나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바르샤바에서 살았던 노보민스커 랍비 알터 이스라엘 시몬 펄로우의 쌍둥이 여동생이었고, 바르샤바에는 그녀의 사촌들과 질녀들, 조카들이 많이 있었다. 그 가족의 비극은 1916년에, 나의 아버지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가 독감으로 사망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가족들 모두에게 끔찍한 일이었다. 나 자신도 아홉 살이 되기 전에 똑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나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 속에서 살아남았는지를 되묻곤 했다. 그는 단지 다시 한번만이라도, 단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랬다고 말하곤 했는데, 나로서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슬퍼졌다.
나의 아버지는 십대에 탈무드 문학에 대한 그의 첫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글들은 바르샤바에서 랍비문학 연구서 {샤레 토라}(Sha'are Torah)에 1922년과 1923년에 실렸다. 그는 점차 탈무드 연구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책들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동안 게마라(Gemara, 탈무드 2부)의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어머니가 자신이 읽어서는 아니 되는 책들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여 걱정하셨다고 말했다. 마침내 그는 가족의 허락을 받아 빌나(리투아니아의 수도로서 바르샤바와 모스크바 중간에 있다)로 가서 김나지움에서 공부했다. 그는 1927년 6월 24일에 수학-자연과학 김나지움에서 그의 시험들을 끝마쳤다. 그는 또한 이디쉬어(Yiddish, 히브리어 철자법으로 표기된 동부 유럽 유대인들의 독일어) 시 동인그룹 [젊은 빌나](Jung Vilna)와 관련을 맺게 되었고 빌나에서 지내는 동안에 쓴 시들을 모아 그의 첫 번째 시집(Der Shem Hamefoyrosh: Mentsch)을 바르샤바에서 출판했는데(1933년), 그의 기억 속에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헌정했다. 그의 시는 이디쉬어와 히브리 명작 세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이스라엘의 카임 나흐만 비아릭은 그에게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구들 가운데 같은 고향 바르샤바 출신의 생존자는 별로 없다. 한 사람 이디쉬어 작가 예치엘 호퍼는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자서전적인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에서 나의 아버지는 청년으로 나온다. 또 한 사람은 잘만 샤자르인데 그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된 시온주의자 작가였다. 그들은 평생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샤자르 대통령이 나의 아버지에게 히브리어로 써보낸 편지 첫머리에서 그는, "내 영혼의 친구, 환희의 명인, 거룩한 백성의 아들에게"라고 썼다. 1970년에 샤자르 대통령의 80회 생일 잔치 축사를 통해 나의 아버지는 이디쉬어로 "그는 비전을 갖고 사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노래를 지닌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또한 샤자르 대통령에게, 동부 유럽의 작은 마을 메지비츠에 있었던,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셈 토브 회당의 문설주에 있던 메주자(신 6:9의 계명에 따라 쉐마 곧 신 6:4-5 말씀을 문설주에 붙이는 것)를 선물로 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1927년에 빌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공부하러 갔는데, 그는 베를린이 유럽의 지적인 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 학문 대학(Hochschule f r die Wissenschaft des Judentums)과 오늘날의 훔볼트 대학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 등록했다. 1929년 4월 29일, 그는 베를린 대학교가 외국인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시험들, 곧 독일어와 문학, 라틴어, 수학, 독일 역사, 지리 시험에 통과하여 정규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미술사와 셈족 언어학을 부전공으로 했다. 유대 학문 대학에서는 유대 문헌과 역사를 현대의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의 선생들은 독일의 유명한 유대인 학자들, 챠녹 알벡, 이스말 엘보겐, 율리우스 구트만, 레오 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 학문 대학의 아래쪽에는, 에스리엘 힐데샤이머가 설립한 정통 랍비 신학교가 있었다. 두 신학교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났다. 그 두 신학교가 "포병대" 거리 양쪽 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두 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은 거의 접촉하지 않고 지냈지만, 나의 아버지는 양쪽을 쉽게 오가면서 양쪽 모두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29년 12월에 나의 아버지는 유대 학문 대학에서 히브리어, 성서와 탈무드, 미드라쉬, 예배학, 종교철학, 유대인 역사와 문학 시험을 통과했으며, 1930년 5월에는 "성서의 비전"에 관한 논문으로 상을 받았다. 그는 강사로 임명되어 고급반 학생들에게 탈무드 주석을 강의했다. 1934년 7월 16일에 그는 구술시험을 통과하여 유대 학문 대학에서 랍비 학위를 받았으며 논문 제목은 "외경, 위경과 할라카"였다.
내가 성장하면서 나의 아버지에게 젊었을 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그는 베를린에서 그의 모든 교수들이 각각 자신의 지도를 받아 박사 논문을 쓰도록 확신시키려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나의 아버지가 매우 뛰어난 학생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대학 교수들로부터 받았던 후원은 1933년 이후에 바뀌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3주 전, 곧 1933년 2월 23일에, 나의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구술 시험을 치렀다. 그 교수들 가운데는 막스 데소이르(철학), 하인리히 마이에르(철학), 알버트 에리히 브링크만(미술사), 오이겐 미트보흐(셈족 언어학)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광범위한 주제들에 관해 질문을 받았다. 데소이르와 아이에르 교수는 나의 아버지에게 데카르트, 라이프니즈, 칸트, 후셀, 유물론, 형이상학에 관해 질문했다. 브링크만은 이탈리아 미술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미트보흐는 예언자 아모스, 특히 4장과 호세아에 관해 물었다. 데소이르는 나의 아버지가 다소 불안해 보였다고 했다. 그의 불안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현실에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논문 "예언자의 의식"(Das prophetische Bewusstsein)은 1932년 12월에 제출되었고, 논문 주심은 데소이르와 신학부의 버트홀렛이었는데, 버트홀렛 교수는 구약학과 과장으로서 종교현상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두 분 교수는 모두 1935년에 대학에서 직위해제 당했는데 그것은 나찌가 대학교수들 가운데 유대인들을 숙청한 결과였다. 버트홀렛은 1937년에 은퇴했고, 그 자리를 요하네스 헴펠이 차지했는데 그는 친(親) 나찌 독일 기독교 운동의 적극적인 회원이었다.
나의 아버지의 박사학위는 몇 달 후에 받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어려움이 있었다. 그가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학위논문이 출판되어야만 했지만, 그는 출판할 돈이 없었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유대인이 학술서적을 출판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된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몇 달마다 학장에게 출판 기일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고, 학장은 그의 요청을 승인하면서 "히틀러 만세"를 덧붙였다. 마침내 1936년 봄에 그의 책 {예언자들}(Die Prophetie)이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코우에 있는 폴란드 학술원에서 출판되었고, 그 비용은 베를린에 있는 에리히 라이스 출판사가 보증했다. 이런 도움이 없었다면, 나의 아버지는 전쟁 후에 폴란드에 대해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지만, 학술원의 출판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대학으로부터 공식적인 학위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면 그는 유럽에서 탈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폴란드 학술원은 이 유대인 저자의 책을 독일의 서점에 배본하기 위해 폴란드 영사가 독일 정부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기꺼이 개입하려 했었다. 베를린 대학교는 특별한 허락을 통해 해외에서 출판된 학위 논문을 인정했고, 나의 아버지는 마침내 1935년 12월 11일, 즉 논문을 제출한 지 3년 만에 학위를 받았다.
마침내 {예언자들}이 출판되었을 때, 그 책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즉 독일과 다른 나라들에서도 기독교와 유대교의 일반 잡지들과 학술 잡지들이 그 책을 주목했다. 저명한 구약학자 오토 아이스펠트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잡지에 서평을 쓰면서, 그 책의 하느님 이해는 "정확하며 중요하다"고 칭찬하면서, "구약성서 학자들과 일반 신학자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출판된 {철학 리뷰}는 그 책이 "지난 몇 년 동안 발표된 책들 가운데 종교철학 분야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책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적극적인 반응이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제3 제국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기독교 성경에서 구약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들 일부 개신교인들은 나찌즘에 대한 자신들의 헌신을 입증하기 위해 유대교적인 것들을 모두 숙청할 것을 요구하면서, 심지어 예수조차도 지상에서 유대교를 박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아리안족이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책으로서 기독교 성경 안에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나찌가 유대인 없는 독일을 원했다면, 유대교 색채가 없는 기독교를 만들려 했으며, 그들은 예수의 진정한 추종자들이 되는 것은 반셈족주의자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구약성경과 예수의 유대성에 대한 공격들은 이미 독일에서 19세기에 시작되었지만,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동안에 소위 독일 기독교 운동, 즉 감독, 목사, 신학교수들과 평신도들이 포함된 친(親) 나찌 개신교 집단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강력해졌다. 이 세력은 재빨리 교회 안에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1965년에 나의 아버지는 유니온 신학대학 취임강연에서, 나찌는 유대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공격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두 공동체가 연합해서 그 위협에 대처할 것을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나찌즘은 패배했지만, 성경을 서구 세계의 의식으로부터 제거하려는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함께 노력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히브리 성서의 광채를 구원하는 문제에 관해서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일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반셈족주의는 반기독교이며, 반기독교는 반셈족주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계속 베를린에서 살았다. 그는 베를린의 유대인 학교(J disches Lehrhaus)와 유대 학문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에리히 라이스 출판사를 위해 <유대교의 역사와 현재>라는 시지즈의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권력자로 등극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3월에는 국회가 불태워진 것, 4월에는 베를린대학교 한복판의 커다란 노천광장에서 책들이 불태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목격한 것에 대한 역겨움은 익명으로 발표한 이디쉬어 시 "증오의 날"에 표현되었는데, 이 시는 바르샤바 신문에 실렸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이 어느 날 저녁 베를린에서 참석했던 음악회에 갑자기 히틀러가 도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야 했다. 나의 아버지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는 또 기독교인 동료들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말하지 않을 때 느꼈던 버림받은 심정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더군다나 그가 예언자들에 관한 책을 발표한 후에, 개신교 구약학자들과 가톨릭 학자들이 기독교의 정경은 오직 신약성경만 포함해야 하는가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 쉽게 상상이 된다. 심지어  구약성경을 위해서 말했던 사람들조차도 구약성경은 실제로는 유대인의 책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가 성서 이후의 타락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반 나찌 퀘이커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그 지도자 루돌프 슐로서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1938년 2월 프랑크푸르트 퀘이커 모임에서, 나찌 독일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에 관해 "이 시대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강력한 강연을 했다. 슐로서와 그의 동료들은 나의 아버지가 미국 입국 비자를 신청한 것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영사에게 신원보증의 편지를 써주어 큰 도움을 주었다.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나의 아버지가 당시 나찌 독일에서 그 자신의 종교적 생활을 양육한 방식이다. 몇 달 동안 그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크푸르트의 정통 유대인 가족으로부터 셋방을 얻어 지냈는데, 최근에 그의 딸들을 통해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1937년에 나의 아버지는 결코 경건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기 위해 눈을 뜨자마자 손부터 씻는 습관을 계속했다고 한다.
1930년대를 통해 나의 아버지는 독일 바깥에서 일자리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 편지와 자신의 출판물들의 사본들을 보냈다. 그는 중세 유대교 철학에 관한 학술 논문들과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에 관한 책(1936년에 폴란드어로 출판되었다)과 아브라바넬(Abravanel)에 관한 책(1937년 폴란드어로 출판되었다)을 썼으며, 짧은 논문들을 발표했는데, 이런 글들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마이모니데스(1137-1204)에 관해 집필을 부탁받은 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1935년 그가 베를린에 있는 에리히 라이스 출판사의 사장을 방문하여 친구의 저술을 추천하려 했었다. 라이스 사장은 나의 아버지에 대해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당시 마이모니데스의 희년 축하가 열리던 때라 그에 관해 책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2주 동안 열성적으로 작업하여 원고를 끝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28세였다.
이 책은 독일 신문들에서 "이상적"이며 "풍부하며" "예술작품"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마이모니데스의 전기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및 정치적 상황과 아울러 그의 사상에 대한 간결한 요약을 보여주지만 또한 그의 개인적 갈등과 고민들이 어떻게 그의 사상에 반영되었는지를 이해하려 했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복잡하고 예민한 인간으로서 다른 연구서들에서 보여진 엄격한 모습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마이모니데스의 철학적 저술들과 할라카(법규) 저술들을 어떻게 조화시키거나 혹은 유대교에 대한 그의 합리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의 범위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생활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는 예를 들어, 마이모니데스의 형제의 급작스런 죽음이 악의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면서, 결론적으로 "마이모니데스는 우주의 정의롭고 의미있는 작동에 대한 그의 신앙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의 경험은 하느님께 등을 돌리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이 책은 또한 마이모니데스 자신이 예언자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했던 노력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는데, 이 논쟁적인 문제는 그가 1945년에 히브리어로 출판한 논문에서 훨씬 자세하게 다룬 주제였다. 궁극적으로 이 전기는 마이모니데스의 이미지를 엄격하게 합리적인 철학자의 이미지로부터 심원한 영적인 관심도 갖고 있었던 이미지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지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전기이다.
1930년대에 나의 아버지는 빈번하게 독일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유대인 집단에게 강연을 하였으며, 학자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개인적인 편지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작품을 쓴 사람들을 만날 때의 기쁨을 묘사했다. 1936년 3월에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루드비히 포이트방거, 마틴 부버, 에두아드 스트라우스 등과 교제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모두 예언자들에 관한 그의 책을 이미 읽었던 사람들이다.
1936년 11월에 부버는 나의 아버지에게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대인 성인 교육기관]의 소장을 맡을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고, 편지들을 교환한 후에 나의 아버지는 1937년 1월 22일, 그의 30회 생일을 지난 직후에 베를린에서 부버를 만나 그 제안을 수락했다. 1937년 3월 3일, 그는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했다. 며칠 후 그는 부버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으며, 거기서 그의 책 {예언자들}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다. 1937년 3월 26일자 편지에서 나의 아버지는 이렇게 썼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난 며칠은 멋진 시간들이었답니다. 독일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앙연구소 회의에 참석했지요. 매우 영적인 호이트방거와 저 사이에 교분을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매우 잘 이해했으며 며칠간 함께 지낼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언젠가는 뮈니히를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즐거웠던 것은 부버와의 토론이었는데, 저는 그에게 {회람}(Rundschreiben)에 쓴 저의 글을 읽으시도록 드렸었습니다. 그는 "이것은 너무 높은 수준의 글이네. 기도[본문]에 관한 부분은 훌륭한데, 기도하는 것[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은 {회람}에 속하지 않는 것이네"라고 말했고, 저는 "과제는 본문을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둘째가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지요. 우애가 넘치는 논쟁이었던 셈입니다. 부버는 에두아드 스트라우스에게 "헤셸은 사랑스런 청년이지만 고집이 무척 세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토론에 끌어들였습니다. 그 토론은 계속되었고 행복한 기분으로 다음 만남을 기다리게 됩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 나의 아버지는 부버와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결정적인 질문에서 나는 그에게 아니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성경을 신격화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거룩함은 그 기원 때문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직후에 나의 아버지는 아브라바넬에 관한 짧은 전기를 끝마쳤는데, 그는 15세기 말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될 당시에 살았던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였다. 이 책은 그의 출생(1437년, 리스본)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출판되었다. 그 추방의 역사적 경험과 나찌 독일에서의 유대인들의 상황 사이의 비슷함을 인식한 나의 아버지는 유럽의 동료 유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으로서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유대인들이 추방된 이후에 신세계에 대한 정복이 뒤따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 정복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만일에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었다면, 유대인들은 분명히 정복자들의 작전에 참여했을 것이다. 정복자들이 아이티 섬에 도착했을 때 그 섬의 인구는 110만 명이었지만, 20년 뒤에는 단지 1천 명만 남게 되었다."
마이모니데스와 예언자들에 관한 책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버지는 아브라바넬의 인격과 성품을 묘사하려고 애썼다. 아브라바넬은 그가 겪은 모든 비극 속에서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탄식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와 에스겔처럼 메시아의 구원에 대한 낙관적 약속을 믿었다. "오늘날과 같은 역사적 상황에서 이 문장을 읽으면서 감동받지 않을 유대인은 없을 것이다"라는 서평이 나왔다.
독일 유대인들을 위로하려는 그의 열망에는 그들에 대한 책망이 뒤따랐다. 1936년 9월 베를린 유대 공동체의 신문에 기고한 짧지만 놀라운 글 "오늘날의 은밀한 유대인들"에서, 나의 아버지는 독일 유대인들이 15세기의 은밀한 유대인들과는 정반대라고 지적했다. 즉 스페인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 세례를 받은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속으로는 유대인이었던 반면에, 오늘날 독일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유대인들이지만 속으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지적한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박해를 받기 때문에 그들은 유대교와 그 영적인 풍요함에 대해 무지하여, 그들의 내면 생활은 텅 비었다는 지적이었다. 포이트방거는 나의 아버지에게, 그 기고문은 "나의 영혼에 대고 말한" (war mir aus der Seele gesprochen) 글이라며, 자신이 편집하는 바바리아 유대인 신문에도 글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나의 아버지가 독일의 기독교 공동체들과 접촉했던 것은 한결같지 않았다. 그의 교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책을 환영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해 역겨워했다. 어느 예수회 사서는 나찌가 유대인들을 대하는 것에 관해 발언할 수 없는 이유가 나찌가 도서관을 폐쇄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태도를 생각하면, 나의 아버지가 나중에 종교인들이 사회적 불의에 맞서 발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글을 쓴 것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기독교인들 중에도 반셈족주의자들이 있었다. 나중에 그는 종교가 인종차별주의와는 공존할 수 없다고 썼다. 즉 "인종차별주의는 사탄숭배이며 완전한 악이다... 당신은 하느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마치 말(馬)처럼 바라볼 수는 없다."
독일 바깥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친우회가 우드브룩에 있는 학교에서 가르쳐달라고 초청했지만, 그는 영국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1938년 2월에 그는 프라하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자신들이 설립하여 1938-39 학년에 시작하려는 랍비 신학교에서 가르쳐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1936년 4월에 에두아드 베네츠 대통령으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아냈으며, 카를로스 대학교는 그 신학교를 철학과 교수진이 담당하도록 동의했다. 예산도 확보되었고 교과과정도 만들어졌지만, 9월 말의 정치적 위기로 인해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8년 봄에 다시 접촉하면서 나의 아버지는 그 신학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38년 3월 17일자로 된 두 번째 편지는 나의 아버지에게 "협상할 의사가 있음을 표현해준 것에 대해" 감사했다.

나의 아버지가 독일에서 지내던 생활은 갑자기 끝나게 되었다. 1938년 10월 말에, 독일 안의 유대인들 가운데 폴란드 여권을 가진 사람들은 갑자기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당시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조용한 주거지역에서 아들러라는 이름의 유대인 가족으로부터 방을 세내어 머물고 있었다. 갑자기 한밤중에 게슈타포가 들이닥쳐, 한 시간 동안 옷가방 두 개만 챙기도록 했다. 그는 재빨리 원고들과 책들을 가방에 넣고 매우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거리를 지나 경찰서 본부로 갔는데, 거기에서 그는 작은 감방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그는 추방당하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기차에 실렸다. 그는 폴란드까지 가는 사흘 동안 서 있어야만 했었다. 폴란드 입국이 거절당하자, 유대인들은 국경에서 비참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몇 달 동안 그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 지방의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음식을 주기를 거부했다. 나의 아버지는 운이 좋았다. 그의 가족들이 곧 그가 석방되도록 주선했고, 그는 바르샤바에서 가족들과 만났다. 그 후 열 달 동안 그는 바르샤바 유대인 학문연구소에서 유대교 철학과 성경을 강의했는데, 그 흰 대리석 건물은 나의 아버지와 연관된 유럽의 건물들 가운데 아직도 남아 있는 불과 몇 개 중의 하나다.
나의 아버지에 따르면,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는데, 유명한 폴란드 기병대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유럽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는데, 마지막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불과 6주 전에 그는 바르샤바를 떠나 런던으로 갈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신시내티 히브리 연합대학의 총장이었던 줄리안 모겐스턴 덕택이었는데, 그는 유대인 학자들을 유럽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미국 국무부에 입국비자를 받아주려고 노력했다. 마이클 마이어는 모건스턴이 국무부에서 겪었던 온갖 장애물들과 그의 불굴의 의지를 묘사했다. 그는 마침내 입국비자 다섯 개를 받았다. 나의 아버지는 독일에서의 그의 출판물과 명성에 기초해서 여러 동료들이 추천했었다. 그가 미혼이었다는 사실도 도움이 되었다. 배우자와 자녀들이 있는 학자들의 입국비자는 받기가 훨씬 어려웠다. 왜냐하면 대학이 전 가족의 재정적 책임을 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모건스턴 총장이 공식적으로 나의 아버지를 초청한 것은 2년 동안 성경과 유대교 철학에 대한 연구 교수로서, 연봉 500달러에 기숙사에서의 숙식비를 대학 당국이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처음에 바르샤바에 있는 미국 영사로부터 입국비자 할당량에 따라 아홉 달을 기다려야 심사를 받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스투트가르트에 있는 미국 영사에게 청원하여, 마침내 1940년 1월에 미국 입국비자를 받았고, 3월에 뉴욕에 도착했다.
모건스턴 총장이 입국비자를 받으려고 애쓰던 중에 나의 아버지가 독일에서 추방됨으로써 그 과정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1939년 4월에 그는 바르샤바로부터 스투트가르트로 되돌아가 그곳 미국 영사에게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마침내 1939년 여름에 그는 폴란드를 떠나 영국으로 갈 수 있었고, 영국에는 그의 형제 제이콥이 유대교 정통파 회당의 랍비로 일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런던에서 여섯 달 동안 머물면서, 망명한 다른 유대인 학자들과 런던의 테오도르 허츨 협회의 도움으로, 1940년에 유대인 학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학생들은 망명한 사람들로서 상당수는 팔레스타인으로 가던 도중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런던에 머무는 동안에 아직 독일에 있던 친구들을 도우려했다. 그는 아써 스패니어와 긴밀하게 접촉했는데, 그는 1935년에 아리안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해고되기까지 프러시아 국가도서관의 유대학 책임자로 일했으며 그 후에는 베를린의 유대 학문 대학의 강사와 사서로 일했다. 1938년에 스패니어는 홀랜드로 탈출했으며, 나의 아버지는 그를 통해서 바르샤바에 있는 그의 어머니와 살아남은 누이 한 사람에게 돈과 식량을 보낼 수 있었다. 스패니어는 몇 년 동안 미국 입국비자를 받으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1942년에 체포되어 베르겐-벨센에서 죽었다.
나찌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 나의 아버지의 누나 에스터는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와 누나 기텔은 자신들의 아파트를 포기해야만 했었고 그들의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들은 엽서를 보내면서 나의 아버지의 안부를 염려하며 그가 안전하다는 소식을 간절히 바란다고 썼다. 기텔 누나는 "우리가 너로부터 편지를 받는 날이 우리에게는 거룩한 날이다"라고 썼다. 그의 어머니와 기텔 누나 모두 살해되었는데, 어머니는 바르샤바에서, 기텔 누나는 십중팔구 트레블링카에서 살해당했다. 또 다른 누나 드보라는 결혼해서 비엔나에 살고 있었는데, 결국 1942년 10월 2일에 테레지엔슈타트로 추방되었고, 다시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1944년 5월 16일에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다.
나의 아버지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혹은 폴란드에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만일 내가 폴란드나 독일에 가게 된다면, 모든 나무들과 돌마다 나에게 치욕과 증오, 살육을 생각나게 할 것이며, 죽어간 어린이들, 산 채로 불태워진 어머니, 질식사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라고 썼던 적이 있다.

미국 입국비자를 받은 후, 나의 아버지는 1940년 3월에 뉴욕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큰누나 집에서 지냈다. 큰누나 사라와 그의 남편과 대부분의 자녀들은 이미 비엔나로부터 뉴욕에 와 있었으며, 바르샤바에서 온 사촌들도 뉴욕에 살고 있었다. 신시내티에서의 그의 직위는 교수가 아니라 강사였다. 그에게는 학생 기숙사의 방 하나가 주어졌으며, 구내 식당의 음식이 유대인 정결음식(kosher)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음식을 기숙사 방에 보관했다. 학생들은 그를 실망시켰는데, 유대교 문헌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가 베를린 신학교 학생들보다 훨씬 떨어졌기 때문이다.
신시내티에서 지낸 날들은 그에게 외로움을 안겨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어머니와 누나를 바르샤바로부터 빼내려고 애를 썼으며, 또한 유럽에 남아 오도가도 못하던 다른 친구들과 동료들, 친척들을 구하려 했다. 그들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간청했다. 그는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가 사태의 절박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유럽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갔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어머니와 누나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며 입국비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신시내티에 있을 때였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탈출한 사람들뿐이었다. 즉 형 야곱은 그의 아내 수지와 딸 테나와 함께 1939년에 비엔나를 떠나 런던으로 갔으며, 또한 그의 큰누나 사라와 그의 남편 카피쉬니처 랍비와 그들의 자녀들은 1939년 2월에 비엔나를 떠나 뉴욕으로 갔다.
신시내티의 히브리 연합대학에서 가르친 랍비 학생들 몇몇이 그의 친구가 되어, 그가 영어를 익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한 교수들과도 친하게 되었다. 그는 특히 성경 이야기들로 유명했던 아브라함 크론바흐 교수와 친해져서, 그와 함께 신시내티의 미혼모 시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미혼모들에게 어떤 성경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크론바흐 교수가 하갈의 이야기를 미혼모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어머니 실비아 스트라우스를 처음 만난 것은 신시내티의 제이콥 마커스 교수의 집에서였다. 피아니스트였던 나의 어머니는 세브린 아이젠버거 교수에게 배우기 위해 고향 클리브랜드를 떠나 신시내티에 와 있었다. 그 날 저녁 그녀는 피아노 연주를 요청받았고, 나의 아버지는 사랑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열린 그녀의 음악회에 참석했고, 연주가 끝난 후에 축하하기 위해 둘이 따로 만났다. 몇 달 내에 뉴욕의 유대인 신학교가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했는데, 그 자리는 보수주의 운동의 자리였다. 나의 어머니가 연주하는 것을 들은 아써 루빈슈타인은 나의 어머니에게 에두어드 슈토이어만에게 배울 것을 종용했는데, 그 역시 뉴욕에 살고 있었다. 나의 부모는 1946년에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고 있던 로스 앤젤레스에서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