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약 백 년 전에, 게르의 랍비 이삭 메이르 알터는 자신이 알고 지내는 구두 만드는 사람이 아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고객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 구두가 단 한 켤레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구두 주인들이 아침에 일하러 나가기 전에 구두를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구두 만드는 사람은 밤이 늦은 때에 그들의 구두를 가져다가 밤새도록, 어떤 때는 이른 아침까지 고쳐야만 했다. 그러니 구두 만드는 사람이 언제 아침기도를 할 수 있겠는가? 아침에 우선 재빨리 기도부터 드린 다음에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해진 아침 기도 시간을 그냥 지나치고 난 다음에, 때때로 일하다 말고 망치를 든 채, "나에게 화 있을진저, 내가 아직도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니!" 하면서 한숨을 쉬어야 할 것인가? 아마도 그런 한숨은 기도 자체보다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이처럼 전심으로 후회하거나 아니면 형식적으로 기도를 드리거나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애석하게도 습관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그만 두고, 갑작스럽고 완전하며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기도의 충동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매우 드물게 찾아올 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기도 드리는 것을 그만 두다 보면 그것 자체가 습관이 되기 쉽다. 우리는 심지어 무엇을 후회할 것인지, 무엇을 빼먹었는지조차도 잊게 될 수 있다.


대답할 능력

우리는 기도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기도의 문을 들어서려 할 때, 단지 우리의 혀가 묶여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활력이 없고 우리의 내적인 눈이 침침하다고 느낄 따름이다. 우리는 기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삼간다. 우리는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고요함, 생활의 모든 번잡스러움과 두려움을 덮고 있는 고요함,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될 고요함을 온몸으로 흡수하기보다는 이기주의라는 공허한 종을 울린다. 쓸데없는 자기 탐닉은 구원을 열망하는 인류의 노래와 구원을 기다리는 자연의 부드러운 노래와는 음정이 맞지 않게 만든다. 경이감의 고동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자기 주장을 삼가고 침묵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우리는 고요함에 맡김으로써 하느님께 헌신하기 위해 하루에 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지 않는가? 우리는 신비의 가장자리에 살면서도 신비를 무시하고 우리의 영혼을 낭비하며, 우리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우리는 끝없이 우리의 내면의 빛을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 그분과 우리의 변덕스런 이성 사이를 이미 뒤덮고 있는 어두움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추측을 교리로 받아들이며, 편견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증거를 우습게 여겨 생명 이상에 대해서는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경이에 대해 더 이상 예민하지 않게 되었다. 생존에 대한 염려들에 잠겨버려 우리의 개인적인 운명보다 더욱 중요한 것에 대해 헌신할 능력을 상실한 채, 우리는 운명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라볼 시각을 잃어버렸다. 야심에만 신바람 나서 달려가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은 오직 공포나 비통함에 빠져들 때뿐이다.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위로와 의미와 기도를 찾기 위해 손을 더듬는다.
그러나 슬픔과 절망보다 자발적으로 기도로 나아가는 더욱 넓은 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하느님께 열어놓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서 보실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그분께 열어놓는다. 우리의 혀는 힘이 없지만 우리의 가슴을 예민하게 열어놓는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본다. 나무들은 영원하신 분의 경비병들처럼 서 있다. 꽃들은 그분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길잡이다. 오직 우리들만이 그분의 임재하심에 대한 증언자가 되지 못했으며 그분의 신뢰의 증표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위대하심의 그늘 속에 살아왔으면서도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있었는가?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는 일은 더디게 일어나며, 한 순간에 한 생각씩만 나타난다. 그러다 갑자기 우리가 그 자리에 이르게 된다. 아니면 그분이 이곳에 우리 영혼의 가장자리에 와 계신가? 우리가 거룩한 것을 훼방하지 않으려고, 온전한 것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머뭇거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분이 엄한 분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한다. 그분은 우리가 두려운 마음으로 전율할 때 사랑으로 대답하신다. 잠시라도 그분을 망각했던 것을 회개함으로써 우리는 부드러운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그분의 최종적인 질서가 펼쳐지는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이 영원히 헌신하고 싶어진다.
기도하는 것은 경이감을 깨닫는 것이며,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신비를 다시 느끼고,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여백을 발견하는 일이다. 기도는 파악할 수 없는 인생의 놀라움들에 대한 우리의 겸손한 대답이다. 기도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신비에 대해 우리가 바칠 수 있는 것의 전부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시간을 맞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산들은 명상하고 꽃들은 겸손을 드러내며 모든 알파벳 글자들보다 지혜로운 구름들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계속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 미워하며 사냥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갑자기 우리는 자연 속의 말없는 영광 앞에서 우리들의 소음과 불평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산다는 것이 너무 창피스럽기까지 하다! 세상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괴상한 모습이며,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란 얼마나 염치없는 짓들인가! 단지 하나의 반응만이 우리를 지탱시킬 수 있는데, 그것은 경이를 목격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일이며, 우리가 섬기며 찬양하며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권리를 선물로 거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감사할 힘이 없으며, 대답할 용기가 없으며, 기도할 능력이 없다. 사람은 때로 천박함과 인색함, 계산적이며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음 속의 불화와 알력에 지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원한다. 또한 기도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도 도망치기를 원한다. 스스로 기도 에 몰두하여, 모든 생각들 둘레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부드러운 실을 뽑아내어 비단과 같은 노래의 천으로 자신을 감싼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만일에 우리의 의식이 두려움과 야심의 비참한 소용돌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가슴에서 노래를 불러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짜증밖에는 드릴 것이 없으며 영혼을 낭비하는 권태밖에는 바칠 것이 없다. 요동치는 생각들, 성공하기 위해 왜곡하는 말들에 익숙하게 되면, 단순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언어는 속임수와 유혹, 허풍과 희롱, 비웃음과 경멸이 넘치게 된다. 그처럼 심란한 마음에 짓눌릴 때, 우리는 마음의 모든 힘들을 하나의 관심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 온통 휘젓는 한복판에서 어떻게 평온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겸손함과 무례함, 자기-부정과 편견이 뒤섞인 존재들이라는 점을 깨닫고 몸서리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 구조를 간청한다.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시기를 간청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들을 그분 앞에 내려놓는다. 기도는 그 문지방에 도달하는 것이다. 통제는 그분이 하신다. 당신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할 것들을 모두 저에게서 벗겨내십시오.


영적인 생활의 본질

나무가 흙에서 뽑히듯이, 강물이 발원지에서 분리되듯이, 인간의 영혼이 그 자체보다 더욱 큰 것으로부터 떨어지게 되면 쇠약해진다. 거룩함이 없이는 선함이 혼돈으로 둔갑하며, 선함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우연한 것이 된다. 보통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존재들의 방식이다. 영적으로 우월한 것을 사모하는 것, 즉 신성한 사람이나 사상에 충성하는 것, 어떤 사람이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내면 생활을 온전하게 붙들어준다. 그러나 인간적인 이상이나 사회적인 이상, 혹은 예술적인 이상이 삶의 모든 부분 위에 지붕처럼 덮게 되면, 빛을 차단시킨다. 심지어 손바닥으로도 태양 빛을 가릴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가까운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멀리 있는 것에 마음을 열어야만 한다. 우리가 최고의 것을 열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등한 것으로 오그라든다.
기도는 최고의 것을 사모하는 일이다. 시야에 하느님이 없을 때는 우리가 부러진 사다리의 계단처럼 흩어진다. 기도하는 일은 사다리가 되어 그 위에서, 우주 전체에 걸쳐서 눈에 띄지 않게 밀려오는 그분을 향한 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이 하느님께 오르는 일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을 다른 환경에서 본다. 자기는 바퀴의 중심이 아니라 돌아가는 바퀴의 바퀴살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삶의 중심을 자기-의식에서부터 자기-맡김으로 바꾼다. 하느님은 모든 힘들이 향하는 중심이다. 그분은 원천이며, 우리는 그분의 힘이 흐르는 것, 그분의 조수의 밀물과 썰물이다.
기도는 마음을 자기 이해의 협소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거룩하신 분의 거울 속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자아의 정반대로 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측면으로부터 상황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 안에 열등한 것을 정복하는 길이며,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절대로 필요한 것과 무익한 것 사이를 분별하는 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살피고, 우리의 운명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기도는 우리의 희망과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 기도는 우리의 참된 열망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며,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고통, 우리가 잊고 지내는 열망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기도는 자기 정화의 행동이며 영혼의 검역소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정직할 기회를 준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정직하게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왜냐하면 주장과 확신, 생각과 양심의 일치가 모든 기도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열망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너무 자주 우리는 무엇에 매달릴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기도는 우리들 속에 우리가 간직해야만 하는 이상들을 심어준다. 구원, 마음과 혀의 순수함, 혹은 기꺼이 도와주려는 마음은 생각으로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지만, 그런 생각이 관심이 되고 열망하는 것, 도달할 목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나의 혀를 악에서 지켜주시며 나의 입술이 교활하지 않게 지켜주소서. 나를 저주하는 사람 앞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케 하소서"라고 기도할 때이다.    
기도는 영적인 생활의 본질이다. 기도의 능력은 모든 영적인 체험에 나타난다. 기도가 이끄는 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과 욕망 아래에 있는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가며, 선한 사람들의 무한한 단순성을 새롭게 맛보게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소우주의 세계에서 기도의 흐름은 멕시코 만류처럼, 우리들 안의 차가운 모든 것 속에 따스함을 전하며 단단한 모든 것을 녹아내게 만든다. 왜냐하면 심지어 충성조차도 그 충성할 힘을 이끌어 가는 흐름으로부터 떨어질 때는 무관심으로 얼어붙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주 정의가 잔인성으로 타락하며, 의로움이 위선으로 둔갑하는가! 기도는 과거의 매우 드문 경험, 곧 사물들이 의미와 축복으로 빛나는 경험을 되살리며 살아 있도록 만든다. 그런 경험은, 낮 시간에 치워놓았던 촛대처럼, 우리가 잠시 무시할 때조차도 매우 중요하다. 밤은 오게 마련이며, 우리는 다시 그 작은 불꽃 둘레에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사소한 일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모든 사람들의 안락을 위한 열망과 뒤섞일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행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우리 앞에 어둠 속으로 비취는 섬광과 같다. 바로 이 빛 속에서 우리는 더듬거리고 넘어지며, 다시 기어오르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기도는 올바른 것을 보이게 해주며, 방해하는 것들과 거짓된 것을 드러내준다. 그 밝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수고하는 일들의 가치, 우리의 희망의 범위, 우리 행동의 의미를 바라본다. 시기심과 두려움, 절망과 후회, 고민과 비탄은 우리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지만, 그 빛에 의해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때때로 기도는 우리 앞에 비추는 빛 그 이상이다.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빛이다. 이 빛으로 밝아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효력에 관한 공론들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않는다. 어떤 랍비가 꿈속에서 천국에 들어간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탈무드의 위대한 현자들과 탄나임(기원후 70년에서 200년까지의 랍비들로서 그들의 견해가 미슈나에 기록되어 있다 - 옮긴이)이 영원한 삶을 보내고 있는 낙원의 성전에 다가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그 현자들이 그냥 책상 둘레에 앉아서 탈무드를 연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실망한 랍비는 "낙원에는 고작 이런 모습밖에 없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 때 갑자기 음성이 들렸는데, "너는 잘못 알고 있다. 탄나임은 낙원에 있지 않다. 낙원이 탄나임 속에 있다"는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