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궁극적인 열망

기도가 희귀한 꽃으로서 매혹적이며 놀라움을 자아내게 만드는 꽃으로 경험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우연히 불행을 겪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게 가져다주는 행운의 기회이거나 고통이 가져다주는 우연한 산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통은 기도의 원천이 아니다. 원인이 결과를 초래하는 것처럼 동기가 행동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동기는 단지 잠재적인 것을 자극해서 실제가 되게 할 따름이다. 위험이나 부족함은 자기 확신이라는 잡초들을 뽑아내고 마음에서 강팍함과 냉혹함을 없애주어, 기도가 자라도록 터전을 치워줄 수는 있지만, 기도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묘판(苗板)을 만들려는 농부에게 필요한 것은 우연히 곡식을 얻겠다는 마음이 아니다. 그가 식량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땅을 갈 수 있는 기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필요성은 단지 묘판을 만들려는 자극과 목적을 줄 따름이다. 농부로 하여금 곡식을 재배할 능력을 주는 것은 농사에 대한 그의 지식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평생 간직한 신앙이라는 비료를 뿌려주면서 삶에 대해 자연스럽게 충성하는 것이 기도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다. 은밀한 비료와 영원히 알지 못하는 세상일들에 대해 인내하며 신중함으로 살아갈 때, 영혼의 토양은 기도의 뿌리에 자양분을 주며 튼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토양 자체는 곡식을 산출하지 않는다. 영혼이 그 놀라운 소출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말을 걸 수 있으며, 우리의 희망과 슬픔과 바라는 것을 그분 앞에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우리가 받은 특별한 능력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한하신 분에게 말할 수 있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기도의 놀라움, 사람이 영원하신 분께 말할 수 있다는 놀라움을 볼 따름이다. 그분과 잠시나마 만나는 것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로서, 로케트처럼 올라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운석처럼 높은 곳에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다. 기도하는 말이 입술에서 나오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꺼이 우리 가까이 다가오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그분이 다가오시는 길을 우리가 깨끗이 치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그런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로 이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인가? 사람은 하느님께 인격 대 인격으로 말하는가? 기도를 인간의 대화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이 그분께 소통될 수 있도록 만들 따름이다. 기도는 우리 안에서 가장 귀한 것을 그분을 향해 발산하는 것이다. 우리의 심장을 그분 앞에 쏟아내는 것이다. 기도는 인격과 인격 사이의 관계가 아니며, 주체와 주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그분의 생각의 대상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다.
기도는 불타는 유리의 빛처럼, 영혼에서 발산되는 모든 광선이 한 초점에 모아지는 것과 같다. 이 땅에 대한 그분의 은밀한 관심을 우리가 함께 나누어 갖고 있다는 타오르는 인식을 통해 우리가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분 앞에 인도된다. 우리는 단지 그분의 명령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도 알아차리기 위해 애를 쓴다. 기도는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여기에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살아온 날들의 기록입니다. 저의 가슴 속을 살피시고, 저희 희망과 저의 후회를 살펴주십시오." 우리는 부끄러움과 기쁨 속에 떠난다. 그러나 기도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앙은 우리에게 담대한 갈망을 주기 때문인데, 그 갈망이란 그분이 단지 지배자로서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를, 단지 우리가 그의 길을 걸음으로써만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길 속에 들어오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그분이 우리를 주목하시도록, 그분이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도록, 우리가 그분에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에게 알려지기 위한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생명이 단지 그분의 능력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분의 의지의 관심이라고 보는 것이며, 혹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관심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사람의 마지막 열망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아는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의 빛 가운데"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참된 경력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에게 알려질 가치가 있으며, 그분의 자비 속에 들어가고, 그분의 관심사항이 될 가치가 있는가? 기도의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생각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열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신성한 분을 섬길 때 하느님 안에서 (달처럼) 차오르게 되며, 그의 과제를 배신할 때 (달처럼) 기울게 된다. 그분이 사람의 삶 속에 거하실 때 사람은 그분의 마음 속에 살아간다.
사람이 하느님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그분에게 거절당한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 하느님에 의해 버림받아 그분의 마음에서 지워진 채 살아가는 것은 전율이다. 단지 한 순간만이라도 그분에게 잊혀졌다는 두려움은 경건한 사람에게 박차가 되어 그를 다시 하느님의 주목을 받도록 만들며, 그의 삶이 그분께 알려질 가치가 있도록 만든다. 그는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들겨 맞기를 바란다. 기도하면서 그는 명시적으로든 함축적으로든, "오, 주님,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한다.
날마다 그분을 배신하는 사람, 허영과 분노, 혹은 무모한 야심에 취해서 사는 사람은 유령같은 걱정의 안개 속에 살아간다. 탐욕으로 사랑을 파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다정함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의 영혼에는 양심이 도피하기 위한 은신처가 있다. 그는 하느님과의 유대를 찢어 큰 소리를 내는 불안의 조각들로 만들어버렸으며, 그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굳어진 상태이다. 자신의 운명을 망쳐버리는 그는 영혼의 해골이 되어 걸어다니면서 잃어버린 기쁨을 외쳐댄다.
사람이 하느님을 버릴 때 하느님은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다.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간격이 심연으로 넓혀진다. 그러나 때때로 절망의 끝에서 정신이 들어 울음을 터뜨리고, 망각에서 털고 일어섬으로써, 우리는 열망이 어떻게 부드럽게 불안한 가슴의 주인이 되는지를 느끼며, 또한 우리가 날렵한 꿈을 통해 그 간격을 뛰어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