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몸의 부활
    
복음 이야기들은 고운 베옷[壽衣]을 입힌 것, 시신을 잘 모신 것, 또한 무덤 가에서 밤샘한 것 등을 언급하지만, 아마도 석회를 뿌린 구덩이였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석회는 시신을 빨리 위생적으로 썩게 만든다. 이 때문에 1세기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처형된 수천 명의 유골의 잔재를 우리가 거의 찾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교회와 더불어 있는 그 굶주린 소자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을 위해 절대적으로 몸으로 확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활한 주님의 몸과 실제 예수 사이에는 은유라는 멋진 쐐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Marianne Sawicki, Seeing the Lord, pp. 180, 275.
                     
앞부분에서 설명한 두 개의 요점이 여기에서도 상관이 있다. 첫째는 바울의 타협이다. 나는 바울이 우주적 이원론에 대해 전통적 유대교와 당시의 헬레니즘 사이에 타협점을 찾았다는 보야린의 주장에 동의한다. 즉 육은 영에 종속되지만 거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록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급진적 이원론과 온건한 이원론이 매우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둘째는 바울의 비일관성이다. 바울이 그 타협을 민족, 계급, 성별이라는 세 가지 구분에 적용시키는 데 일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그 타협이 또 다른 비일관성을 초래한 것에 대해 설명하겠다.
(나는 여기서 '타협' 혹은 '비일관성'이라는 용어를 어떤 우월성이나 겸손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런 용어들이 바울이 역사적으로 서로 상충하는 사상적인 파도 속을 힘겹게 헤쳐나가면서 만들어진 강력하고 창조적인 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런 과정들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근본적인 인간의 도전을 더욱 발전시켜야만 한다.)
바울은 50년대 초기에 여전히 에페소에 머물지만, 동쪽으로 갈라디아 지역을 향해 편지를 쓰기보다는 오히려 서쪽으로 고린토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다. 그가 개종시킨 고린토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온전한 플라톤적 이원론자들로서 예수를 부활한 혼(resurrected soul), 혹은 불멸의 영(immortal spirit)으로 보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몸을 지니고 있을 수 있으며, 도대체 왜 몸을 원할 것인가? 왜 (몸에 갇혔던) 죄수에게 영원토록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가? 도대체 누가 영원한 짐을 필요로 하겠는가? 혼은 좋다. 그러나 몸은 아니다. 영은 좋다. 그러나 육은 아니다.
고린토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한 예수의 출현을 모두 열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5:1-11에서 부활한 예수의 출현을 열거한 후에, 15:12-58의 나머지 논증에서는 그것을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고린토인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그런 비전과 출현에 관해 모두 알고 있으며, 그 타당성을 부인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망자의 영이 지하에서 되돌아올 때 가시적이며 심지어 만질 수 있는 몸을 입고 오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과 신적인 부모 사이에 태어나고, 죽은 다음에는 신들과 여신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멸의 존재들이 위로부터 되돌아올 때 가시적이며 심지어 만질 수 있는 몸을 입고 오는 것은 당연하다. 신들과 여신들이 인간들과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대화하기 위해 몸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몸이란 단지 몸처럼 보이는 것(seeming-bodies), 연극하는 몸(play-bodies), 오직 외형상으로만 몸(in-appearance-only bodies)이다. 그 몸은 육과 피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영기(ether)와 공기(air)로 만들어진 몸이다. 한편 우리는 몸(body)과 육(flesh)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헬레니즘의 감각은 신적인 존재들, 불멸적 존재들, 혹은 영들이 몸은 지니고 있지만, 육은 갖지 않은 것으로 쉽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특수효과를 사용한 영화 같은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몸은 보지만 육은 보지 못한다. 영화 속의 공룡들은 음식을 소화시키지는 않는다. 아래에서 바울은 그에게 분명히 중요한 것을 주장하려고 노력하지만, 여기서도 타협이 어떻게 비일관성을 초래하는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15:35에서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다. 즉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대답을 섞어서 하는데, 하나는 상당히 관습적인 대답이며, 다른 하나는 좀더 도전적인 대답이다. 관습적인 대답은 몸의 형태들(body-types)이 많이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별들이 움직이는데, 이 때문에 바울 시대의 사람들은 별들이 몸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들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몸들은 우리의 몸과는 달리, 불멸의 몸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바울은 "영적인 몸"(a spiritual body) 같은 것도 있다고 주장한다(15:44). 대부분의 헬라적 청중들은 그렇게 출현한 신적 존재들의 몸들이 "육체적인" 몸이라기보다는 "영적인" 몸이라고 간주하여, 출현이 끝나면 옷처럼 벗어놓을 몸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새로운 몸, 다른 몸, 식물과 동물, 혹은 광물의 몸은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바울의 대답을 읽으면서, 또 다른 대답, 즉 씨앗을 심는 것에 대한 은유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 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 하나에 각각 알맞는 몸을 주십니다.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동물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또 다릅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이 있고 또 땅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것들의 영광도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 사이에도 그 영광이 다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5:36-44)

다양한 몸의 형태들에 관한 은유는 단지 차이를 강조할 뿐이지만, 씨앗을 심는 것에 관한 은유는 연속성과 차이성 모두를 강조한다. 즉 심겨진 것은 수확한 것과 절대적으로 똑같은 것이며 또한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람이 물고기를 심어 새를 수확하지는 않는다. 씨앗 하나를 심으면 그 특정한 곡식 이삭을 수확한다. 이것이 바울의 플라톤적 타협에서 생기는 비일관성이다. 물론 지상의 예수와 천상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영적인 연속성이 있다. 고린토 교인들 가운데 아무도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상의 예수와 천상의 그리스도 사이에 육체적인, 물질적인 연속성이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만일 당신이 서로 다른 몸의 형태들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즉 예수가 전에는 육체적인 몸을 지녔지만, 지금은 영적인 몸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신이 씨앗의 은유에 초점을 맞추면,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즉 예수는 완전히 똑같으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고린토 교인들은 아마도 "영적인 몸"에 초점을 맞추어, 신적인 존재들, 불멸의 존재들, 망령들이 인간과 접촉하기 위해 입었던 것과 같은 공기로 짜여진 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결론을 듣고 자신들의 해석을 확신했을 것이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 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15:50)

몸에는 서로 다른 형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살과 피를 지닌 몸은 오직 한 형태뿐이었다. 플라톤적 이원론자들을 괴롭혔던 것은 살과 피를 지닌 몸이었다. 영적인 몸은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모든 논의에서 나는 바울의 씨앗 은유만을 지지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여기에서 일단 그 타협이 부정되고 그의 전통적 유대교가 큰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심겨진 씨앗과 그 씨앗에서 얻은 곡식은 똑같으며 동시에 서로 다르며, 물리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헬라적-유대적 설명 속에서 단지 지나가는 유대적-유대적 비일관성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톤적 이원론이 그 정도가 어떻든 간에 근본적으로 비인간화시키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비일관성을 지지하며 그런 이원론 이외에 다른 무엇이 바울의 마음속에서 작용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이 절의 시작 부분에 인용한 것은 사위키(Sawicki)의 두 가지 진술을 결합한 것이다. 하나는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몸이 마지막으로 처리되었을 장소는 아마도 석회를 뿌린 구덩이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예수의 몸의 부활(bodily resurrection)은 기독교 신앙을 위해 절대적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매장한 것으로 기록된)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역사적 기술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제발 그렇게 매장되었으면 하고 바랬던 - 역자주) 강렬한 소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그녀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두 번째 진술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것의 함축적 의미를 내가 모두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하지만, 내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지상의 예수는 단순히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대의를 지닌 반란자(a rebel with a cause)였다. 그는 태도로 보아 유대인 농부였으며, 또한 그는 자신의 태도가 유대인들의 하느님의 태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 속에, 또한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계시되었으며, 유대인들의 정의의 하느님이 불의한 세상 속에 성육신하였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말과 사상, 경구와 비유, 말씀과 대화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생활방식(a way of life)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 나라가 육신과 피로 이루어진 몸에 관한 것임을 뜻했다. 정의는 단순히 말과 사상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언제나 몸과 생활에 관한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의 영이나 혼이 이 세상에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예수의 추종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도 아니다. 부활은 그 구체화된 삶이 이 세상에서 강력하게 능력을 발휘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임에 틀림없다(It must be the embodied life that remains powerfully efficacious in this world). 나는 역사가로서 이렇게 주장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주장을 믿는다. 그러므로 오직 한 예수만 있다. 그 갈릴리 사람은 이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 세상의 대표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처형되었으며, 그가 계속해서 힘을 불어넣는 존재로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이 불의의 편이 아니라는 점, 심지어 (혹은 특히) 제국의 불의의 편이 아니라는 점을 가리킨다. 두 명의 예수, 즉 부활절 이전의 예수(pre-Easter Jesus)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 지상의 예수와 천상의 예수, 육체적 몸을 입은 예수와 영적인 몸을 입은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예수, 즉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만이 있을 뿐인데, 그는 심지어 예수가 죽은 후에도 예수와 같이 정의의 하느님을 성육신하는 삶을 계속하기로 결단하는 신앙공동체에게는 유대인의 정의의 하느님을 성육신한 예수이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바울의 씨앗 은유를 매우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씨앗이 곡식이 되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똑같은 것과 여전히 완전히 다른 것을 결합시키는 것이 있다.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고향에서 20년대 말에 살았던 한 사람의 유일한 역사적 예수, 그 똑같은 예수이지만, 이제는 시간과 공간, 언어와 거리에 방해받지 않는 예수이다. 그 유일한 예수는 절대적으로 똑같으며, 절대적으로 다르다. 그는 물론 당시에도, 현재에도, 항상 신앙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몸의 부활은 그 무덤에서 나온 소생된 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몸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 자체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용어도 아니다. 몸의 부활은 역사적 예수의 구체화된 삶과 죽음이 신자들에 의해 이 세상에서 강력하게 능력을 발휘하며 구원시키는 현존으로 계속 체험된다는 뜻이다. 그런 삶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비슷한 삶을 사는 공동체를 계속해서 형성했다.
이런 점에서 이 절의 제목은 "예수의 몸의 부활"(The Bodily Resurrection of Jesus)이 아니라, "예수의 육체의 부활"(The Fleshly Resurrection of Jesus)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나는 이런 용어들을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것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울은 매우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이 왜 이런 용어들을 그렇게 바꿔 쓰려 하지 않았는지가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바울이 "살(육)과 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할 때(15:50), 그와 예수 사이에는 (그리고 솔직히 그와 나 사이에도) 감각의 격차가 벌어진다. 예수에게는 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성육신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살과 피"이다. 바울은 또한 요한의 선언, 즉 "말씀이 육신(flesh)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1:14)는 선언과도 모순된다.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인데, 이것은 신적인 정신의 계시로서 이 세상의 이해가능성, 이 우주의 합리성,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은 말씀이 단순히 몸이 된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었다고, 즉 당시 그리스 로마의 신적인 존재가 방문할 때 입는 특수효과와 같은 몸이 아니라, 완전히 정상적인 인간 존재의 하나뿐이며 유일한 살과 피를 지닌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 말은 생명의 신적인 의미가 인간의 특정한 생활방식 속에 성육신된다(the divine meaning of life is incarnated in a certain human way of living)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