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부 ◈
계속됨과 재구성
기독교의 발전과 확립에 대한 솔직하고 합리적인 탐구는 로마제국 역사의 매우 본질적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 큰 몸체가 노골적인 폭력에 의해 침입을 당하거나 서서히 쇠락해 가는 동안, 순수하고 소박한 종교가 사람들의 정신 속에 살며시 스며들어, 침묵과 모호함 속에 성장하였고, 그에 대한 반대로부터 새로운 활력을 얻어, 폐허가 된 제국의 수도에 승리의 십자가 깃발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탐구가 아무리 유용하고 유쾌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두 가지 특별한 난관이 있다. 교회사의 빈약하고 의심스러운 재료들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초기 역사 위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을 없애지 못한다. 공정해야 한다는 법칙 때문에 우리는 너무 자주 복음의 신자들과 교사들의 불완전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무심한 관람자에게는 그들의 이런 잘못 때문에 그들이 고백한 신앙에 그늘이 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경건한 기독교인의 추문과 불신자의 잘못된 승리는, 신의 계시가 누구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를 생각하면, 곧바로 끝나게 된다. 신학자는 종교가 타고난 순결을 옷입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묘사하는 즐거운 작업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우울한 작업은 역사가의 몫이다. 역사가는 그 종교가 이 지상에서 연약하고 타락한 족속 가운데 오래 머물면서 불가피하게 옮은 부패와 잘못이 혼합되어 있음을 발견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종교들보다 그처럼 특출하게 승리하게 된 수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당연히 호기심을 갖는다. 이 물음에 대해 분명하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교리 자체의 확신시키는 증거와 위대한 신의 지배적인 섭리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진리와 이성이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것처럼, 또한 섭리자의 지혜가 자주 자신을 낮추어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인간의 열정과 인류의 일반적 상황을 이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기독교 교회가 그처럼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 일차적 이유가 아니라, 이차적 이유들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물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처럼 비록 힘겨운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탐구 과정에서, 나는 기독교 진리를 그처럼 효과적으로 도와주었던 이차적 이유들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기독교 자체가 로마제국 안에서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즉 배타적인 열성, 다른 세상이 임박했다는 기대, 기적들에 대한 주장, 엄격한 덕의 실천, 그리고 원시 교회의 구조 등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Edward Gibbo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vol. I, 382-383, 430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이교도 역사가 타키투스가 기독교에 관해 기록할 때, 그들은 네 개의 연속적인 점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운동, 처형, 계속됨, 그리고 확장이었다. 나의 책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와 {누가 예수를 죽었는가}(Who Killed Jesus?)는 각각 그 운동과 처형에 관한 책이었다. 이 책은 그 다음 단계로서 그 계속됨에만 엄격하게 국한된 책이지, 확장에 관한 책이 아니다. 즉 이 책은 기독교의 탄생에 관한 책이지, 성장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에드워드 기본의 표현대로, "교회의 초기 역사 위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에 관한 책이지, "폐허가 된 제국의 수도에 승리의 십자가 깃발"을 세운 것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기본은 요세푸스나 타키투스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다섯 번째 점, 즉 기독교가 마침내 로마제국을 지배하게 된 것을 알고 있다. 기본은 기독교에 대해 이를 악물고 쓰고 있으며, 유대교에 대해서는 닳아빠진 이로 쓰고 있다. 그 다섯 개의 점, 즉 운동, 처형, 계속, 확장, 지배 가운데 나는 이 책에서 계속에만 초점을 맞출 것인데, 이 말은 역사적 예수와 최초의 기독교 사이의 연결, 즉 기독교의 탄생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물론 그 처형 이후에, 그 처형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이 계속됨을 말한다.
제1부는 이 책을 위한 나의 엄격하게 국한된 초점을 보여준다. 제1부에서는 내가 말하는 그 계속됨을 도대체 왜 숙고할 가치가 있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제2부와 제3부에서는 그 자료들을 어디에서 얻는지, 제4부와 제5부에서는 나의 방법론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제6부에서 제10부까지에서는 그 결과들이 무엇인지를 다룰 것이다.) 제1부에는 두 장이 있다.
제1장은 내가 제1부에서 다룰 계속성의 사실을 확립시킬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첫 동행자들이 예수가 처형되기 이전부터 그 이후에도 그 운동을 계속한 것을 말한다. (나는 동행자들[companions]이라는 말을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개인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공동체적 구조와 조직체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 처음부터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최초로 가능하였으며 가장 가깝게 분별할 수 있는 그 계속됨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대답하면서, 제1장은 역사적 예수만 살펴보거나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만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 사이의 최초의 접점을 탐구할 것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1991)를 쓸 때, 그 작업의 타당성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학계에 확립된 부분이라고 간주했다. 그 책에서 나는 방법론과 그 결과에만 집중했다. 즉 예수 재료들이 원래의 것들, 전승에 따른 것, 복음서 기자들에 의한 것으로서, 그 모두가 한데 뒤섞여 영광스럽게 된 재료들이라는 학자들의 합의를 인정한다면, 학문적 정직성을 지닌 채 그 전승층들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또한 그런 방법론을 인정한다면, 그 결과로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만 제기했지, 도대체 왜 그 질문들을 물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제2장에서 이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즉 역사적 예수 연구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나는 역사적 예수가 기독교 신앙에 반드시 필요한가 하고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진짜" 예수는 하느님만이 알 수 있다거나, 혹은 "복음" 예수는 신앙으로만 알 수 있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학자들이 정직하게 재구성한 예수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가 하고 묻는다. 제2장에서의 나의 대답은 수도자적이며 육체애적인 기독교를 위해서는 그렇지만, 이원론적이며 육체혐오적인 기독교를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제1장▣
최초의 외부인들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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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을 언급한 최초의 이교도는 연대상으로 111년의 플리니였으며, 그 다음에는 115년에 타키투스, 그리고 122년 이후에 수에토니우스였다. 이 세 사람 가운데 플리니는 기원후 111년의 상황을 묘사했으며, 타키투스는 기원후 64년의 로마의 화재사건을 다루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네로의 박해(기원후 64년)에 덧붙여 일부 학자들이 로마의 화재 이전의 기독교와 관계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건(기원후 49년)을 말하고 있다.
Stephen Benko, "Pagan Criticism of Christianity During the
First Two Centuries A.D.," ANRW 2.23, p. 1056
2세기 초에 세 명의 로마인 저술가는 기독교의 본성에 관해 완전히 일치된 입장을 밝혔다. 플리니는 타키투스와 서신 왕래를 했으며 수에토니우스의 친구였는데, 플리니와 타키투스는 모두 귀족 사회 최고위급 출신의 총독들이었으며, 수에토니우스는 귀족 사회 중간계급 출신의 황제 비서였다. 그들은 기독교가 "미신"이라는 점에 동의했으며, 단지 그 경멸적 용어에 붙인 가장 적절한 부정적 형용사만 달리 표현했다. 그들이 판단한 것은 다음과 같다.
"타락하였으며 지나친 미신"(superstitio prava, immodica)
"이 전염되기 쉬운 미신"(superstitionis contagio)
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Letters 10.96
"독성을 지닌 미신"(exitiabilis superstitio)
Publius Cornelius Tacitus, Annals 15.44.3
"새롭고 해로운 [혹은 마술적인] 미신"(superstitio nova et malefica)
Gaius Suetonius Tranquillus, Lives of the Caesars: Nero 16.2
이러한 최초의 이교도 외부인들에게는 기독교가, 전부 나열하자면, 타락하였으며, 지나치며, 전염되기 쉬운 것이며, 독성을 지닌 것이며, 새롭고, 해로운 미신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는 로마의 귀족들이 행하는 것이었으며, 미신은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것, 특히 이탈리아 동쪽 지역에서 비롯된 꼴사나운 형태들이었다.
타락한 미신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일반적으로 공화정 말기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가로 생각되며 그의 편지들은 당시에 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로마제국이 편지의 대가 플리니를 얻기 150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성실하고 편견에 덜 사로잡혀 자신이 아는 대로 로마의 모습을 글로 남겼는데,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로 바뀔 무렵 당시 그의 계급에 속한 로마인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Betty Radice, The Letters of the Younger Pliny, p. 12
우리는 로마의 귀족 저술가들 가운데 소 플리니(Pliny the Younger)로부터 최초의 기독교에 관해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의 숙부 대 플리니(Pliny the Elder), 즉 서부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으로서 기원후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사망한 대 플리니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트라얀 황제는 소 플리니를 흑해 남부해안의 비씨니아-폰투스에 비상 총독으로 파견하였는데, 이 지역의 소요사태로 인해 전임 총독 두 명이 해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원후 111년 늦여름에 그 지역에 도착하였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일을 끝내지 못한 채 죽었다.
그가 여행하는 동안 북부 폰투스 시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고발을 듣게 되었다. 이런 공격은 아마도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 때문에 자신들의 신전과 제사가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게 된 이교도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 제기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적어도 플리니 자신의 조치를 통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플리니는 보고하고 있다(Radice 1969:2.404-405).
그 동안 거의 찾는 사람들이 없었던 신전들이 이제는 붐비기 시작하고, 오래 동안 쉬고 있었던 신성한 축제들이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적어도 분명합니다. 희생제물로 쓸 짐승들에 대한 일반적인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희생제물로 쓸 짐승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회개를 위한 문을 계속 열어놓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Pliny, Letters 10.96)
나는 그가 당시 상황에 대해 트라얀 황제에서 보낸 보고서와 그의 질문에 대한 황제의 대답들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런 서신 교환은 특별한 것이다. 아래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이교적인 로마제국이 기독교에 대응하기 위한 공식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순간이며 그 조치들로 인해 결국에는 기독교가 승리하게 된 순간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플리니의 조치는 두 단계로 발전되었다. 첫째로 그에게 고발된 기독교인들은 그의 재판을 받았다(Radice 1969:2.401-403).
본인은 그들이 기독교인들인지 여부를 심문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하면, 본인은 그들에게 처형될 수 있다는 위협을 덧붙여 또 다시 물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 본인은 그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들의 교리가 어떤 성격의 것이든 간에 본인은 적어도 완고한 불복종과 꺾이지 않는 고집은 응징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 가운데 그것에 홀린 사람들도 있기에 본인은 그들을 로마로 압송하도록 지시했습니다.(Pliny, Letters 10.96)
그 첫 번째 재판은 아마도 그 지역 기독교의 좀더 분명한 지도자들, 두드러진 인물들, 혹은 좀더 공격적인 지지자들에 대한 재판이었을 것이다. 이 편지가 주는 인상은 이들이 모두 기독교인임을 고백하고 순교자로서 죽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고발인들은 명백히 이름이 알려진 개인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두 번째, 좀더 심각한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Radice 1969:2.402-403).
이런 고발들은 (보통 그렇듯이) 조사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퍼졌으며 몇 가지 잘못들이 밝혀졌습니다. 아무런 서명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고발한 벽보가 붙었습니다. 자신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며, 혹은 기독교인이었던 적도 없었다고 부인한 사람들은 본인을 따라 신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으며, 본인이 이 목적을 위해 폐하의 상과 신들의 상을 설치하도록 명하였기에, 그들은 폐하의 상 앞에서 포도주와 유향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저주했는데,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실제로 기독교인들이 강요당한다고 해서 행할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본인은 이런 자들을 석방시키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고발자가 이름을 밝힌 또 다른 자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지만, 나중에는 부인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 신앙을 가졌었지만, 어떤 자들은 3년 전에, 또 어떤 자들은 5년 전에, 또한 몇몇은 25년 전에 그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들 모두는 폐하의 상과 신들의 상 앞에서 예배했으며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Pliny, Letters 10.96)
여기서 플리는 두 번 놀랐다. 관련된 사람들의 숫자가 매우 많았으며, 심지어 고문을 가하면서까지 심문을 하였지만 아무런 범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중심적 이방종교들이 비정상적 제의들에 대해 보통 붙였던 마술, 혼음, 근친상간, 인육제의, 혹은 그런 종류의 악행에 대한 증거가 없었다. 따라서 이 문제 전부를 로마에 있는 트라얀 황제와 그 참모들에게 회부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플리니는 세 가지를 물었다. 로마는 세 가지로 답변했지만 정확하게 그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다. 또한 플리니가 묻지 않은 물음에 대해 트라얀 황제가 답변한 것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또한 생색을 내면서 그를 꾸짖었다(Radice 1969:2.400-407, 일련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이다).
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기독교인들에 대한 재판에 참석했던 적이 없었던 본인으로서는 그들을 심문하거나 처벌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방법과 한계를 잘 모르겠습니다. [1] 나이에 따라 차이를 두어야 하는지, 혹은 가장 어린 사람과 성인 사이에 구분을 두어야 할 것인지, [2] 회개를 받아들여 용서할 것인지, 아니면 만일 한번 기독교인이었으면 회개할 기회조차 줄 필요가 없는지, [3] 아무런 범죄가 없다 하더라도 단지 그들이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혹은 그들과 관련되었다는 범죄만으로도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모든 점들에 대해서 본인은 매우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재판절차를 연기하고 즉시 폐하의 조언에 맡깁니다. 본인으로서는 이 문제가 폐하께 보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며, 특히 처형될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직위와 연령, 남녀의 구별 없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 전염되기 쉬운 미신은 도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골의 마을들에도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저지하고 고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회개를 위한 문을 계속 열어놓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Pliny, Letters 10.96)
트라얀 황제가 플리니에게: 친애하는 나의 플리니여, 그대가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된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극히 온당하다. 이런 성격의 모든 재판에 확정된 기준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일반적 원칙을 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수색을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이 고발되어 유죄가 밝혀지면 처벌해야만 한다. [2] 그러나 이런 제한 조치와 더불어, 고발된 당사자가 기독교인임을 부인하면,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할 경우(즉 우리의 신들을 경배함으로써), 비록 그가 공식적으로 의심을 샀다 하더라도 그런 회개를 근거로 삼아 용서할 일이다. [3] 고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밀고는 증거로 삼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매우 위험한 선례가 되기 때문이며, 이 시대의 정신과 결코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Pliny, Letters 10.97)
플리니의 묘사는 특이한 것이다. 만일 내가 그의 글을 어느 기독교인의 저술 속에서 읽었다면, 나는 아마도 이것을 선교사의 충천함 혹은 선전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매우 많아서 이교도들의 경제와 사회에 피해를 줄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직위, 연령, 성별, 지역을 가리지 않고 퍼져 있다고 했다.
황제의 답신 또한 매우 특이하다. 트라얀 황제의 첫 번째 답변은 플리니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이다. 그것은 암묵적으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마치 불법적 집단의 일원인 것처럼, 범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이런 "범죄자들"을 수색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트라얀 황제의 두 번째 답변은 플리니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직접적 대답이다. 즉 기독교인들이 회개하고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면 용서하라는 것이다. 끝으로, 트라얀 황제는 플리니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하지 않은 채, 그가 익명의 고발에 대해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 암묵적으로 꾸짖고 있다. 분명히 기독교는 매우 특수한 종류의 범죄이다. 트라얀 황제의 이 답변은 150년 동안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공식적 정책을 이끈 세 가지 원리를 확립시킨 것이다. 즉 기독교인들을 수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회개하면 처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익명의 고발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3세기 중엽에 이 정책이 바뀌어 수사를 통해 박해하는 정책이 되었을 때는 이미 로마의 이방종교를 위해서는 너무 늦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건, 이것은 플리니, 트라얀, 그리고 로마가 법적인 논리보다는 인간의 품위를 우선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준다.
플리니는 트라얀 황제에게 자신이 기독교인들의 모임들 속에서 결코 아무런 악행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는 적어도 예수가 죽은 지 100년 내의 기독교의 한 지역적 형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귀중한 묘사를 남겨놓았다(Radice 1969:2.402-405).
[고발된 기독교인들은] 정해진 날 새벽에 모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에게 찬양하듯 그리스도에게 찬양 노래를 불렀으며, 엄숙한 서약을 했는데, 어떤 악행을 서약한 것이 아니라, 남을 속이거나 도둑질, 혹은 간음을 하지 않기로 서약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밝혀야 할 때 말을 뒤집거나 믿는 것을 부인하지 않기로 서약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음식을 나누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일상적이며 해롭지 않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심지어 이런 관행조차 본인이 포고령을 발표한 후에 중단했는데, 본인의 포고령은 폐하의 명령에 따라 본인이 정치적 회합을 금지시킨 것이었습니다. 본인은 두 명의 여자 노예 집사들에 대한 고문을 통해서라도 좀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만, 타락하였으며 지나친 미신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Pliny, Letters 10.96)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하겠다. 첫째로 그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명의 여자 집사들은 아마도 고문을 당해 죽었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인정할 악행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고문자들이 언제 고문을 중단해야 할지 몰라서 죽을 때까지 고문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리니는 로마의 귀족들 가운데 매우 품위 있었던 사람이며, 로마 총독들 가운데 상당히 착한 사람이었다. 베티 레디스(Betty Radice)는 "여러 비천한 사람들이 그에게 감사할 이유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그의 나이 많은 유모는 작은 농장을 받은 것에 대해, ... 코뭄(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 지역의 코모 지방의 수도 - 역자주)의 학교 친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에 충분한 돈을 받은 것에 대해, ... 한 친구의 딸은 혼인 지참금을 받은 것에 대해, ... 노예에서 자유인의 신분을 얻은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 해외에서 휴일을 지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또한 그는 "흉년에는 소작료를 감해주고... 포도수확이 흉작이었을 때는 계약자에게 양보하고... 한때는 소출에 따라 소작료를 지불하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도입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1963:23, 24)고 지적한다. 그 여자 집사들은 간단히 처형되었으며, 플리니의 편지에 언급된 것은 단지 그 자신의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정보를 캐기 위한 고문은 이 기록에 있는 로마 총독처럼 인도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빌라도 총독과 소작농 예수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플리니와 이들 여자 집사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관리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이 여자 집사들의 위치보다 별로 높지 않았으며, 어쨌건 간에 빌라도는 플리니가 아니었다.
두 번째 사실은 나의 관심에 좀더 가까운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독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그리스도로부터 따왔다고 쉽게 결론지을 것이다. 이 기록은 2세기 초엽에 적어도 로마제국의 한 모퉁이에서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예배에 관해 매우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러나 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혹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그와 연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정보를 플리니, 즉 세 명의 이교도 외부인들 가운데 첫째 인물인 플리니로부터는 얻지 못하며, 또한 셋째 인물인 수에토니우스로부터도 얻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정체와 그리스도와 기독교인들의 연결성은 그 세 명의 외부인들 가운데 단지 타키투스에게만 의존해서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퍼져가는 전염병
타키투스는 어떤 점에서 완전한 바보였는데, 오직 그 자신의 집단이 수 천 개만 실제로 존재했다.
Ramsey MacMullen, Roman Social Relations: 50 B.C. to A.D. 384, p. 58
타키투스는 로마의 역사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며 로마의 이방종교의 가장 마지막 위대한 정신이었을 것이다.
Ronald Mellor, Tacitus, p. 163.
먼저 한여름의 보름달이 찾아왔고, 그 다음에는 기원후 64년 7월 18일과 19일 사이의 밤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 화재는 대원형 전차 경주장(Circus Maximus: 기원전 1세기 줄리우스 씨이저 당시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후에 콘스탄틴 황제 때는 25만 명을 수용하도록 재건함. - 역자주) 서쪽 끝의 가게들, 오두막집들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치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가 그 칸막이를 뛰쳐나와 달리듯, 그 거대한 경주로를 휩쓸고 내려와 북쪽의 팔라틴과 남쪽의 아벤틴 사이의 계속을 따라 펼쳐진 목재 계단과 빈 공간을 통해 불길이 치솟았다. 그 계곡의 동쪽 끝에서 그 불길은 북쪽으로 치달아 또 다른 계곡으로, 즉 팔라틴과 셀리안 사이의 계곡을 휩쓸고, 마침내 엿새 만에 에스퀼린 산기슭에 의도적인 방화벽 설치를 통해 그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카피톨린 언덕 북쪽 지역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사흘 동안 마르스 지역(Campus Martius: 군신 마르스의 제단과 아폴로 신전이 있던 지역으로 기원전 1세기에는 목욕탕, 원형극장, 묘지 등의 공공건물이 들어섰다. -역자주)을 위협했는데, 그 공공건물들에는 로마시의 공포에 질린 피난민들이 있었다. 9일 동안의 화재 후에 로마의 14개 지역 가운데 4개 지역만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3개 지역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나머지 7개 지역은 심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카피톨린 언덕의 신전들과 포룸의 고대 건물들, 그리고 수부라 지역의 빈민촌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이 화재를 기록하면서 기독교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들을 설명하면서 예수에 관해 말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개인들의 공개적이며 좀더 피상적인 악에 대해서는 분명히 보았지만, 구조와 체제 속의 숨어 있고 좀더 근원적인 악은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로마제국이 쇠퇴한 근본 원인을 그 제국이 아니라 그 황제들에게서 찾음으로써, 황제들이란 단지 로마제국의 화신(化身)에 불과하다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2세기의 첫 십 년대에 기록된 그의 {역사}(Histories)에서 그는 로마의 두 번째 제정 왕조인 플라비안 왕조의 쇠퇴와 몰락에 관해 69년부터 96년까지 베스파시안 황제로부터 도미티안 황제까지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했다. 그 다음 십 연대에 기록된 그의 {연대기}(Annals)에서는 로마의 첫 번째 제정 왕조인 줄리오-클라우디안 왕조의 쇠퇴와 몰락에 관해 14년부터 69년까지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네로 황제까지를 기록했다. 티베리우스 황제에 관한 기록에서 그는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14년부터 37년까지의 팔레스타인 상황에 관해 "티베리우스 치하에서는 모든 것이 조용했다"라고만 언급했다(Histories 5.9.2). 그러나 네로 황제에 관한 기록에서는 64년 7월의 로마의 대화재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Annals 15.44.2-3).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았고 네로 황제 자신을 희생양으로 지목했는데, 그는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로마가 아니라 해안 도시 안티움(로마로부터 약 45km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안지오 -역자주)에 있었다. 네로 황제는 즉각적으로 그 비난의 화살을 "군중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르는 역겨운 집단"에게 돌렸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 화재가 닿지 않은 두 군데 늪이 많은 계곡, 즉 서쪽으로 비아 아우렐리아 도로 곁의 트라스테비어 계곡과 남동쪽으로 비아 아피아 도로 곁의 포르타 카페나 외곽 계곡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기독교인들이 예수와 연관되어 누구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5.44, Jackson et al. 4.282-283, 일련번호와 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1. 운동] 그 이름의 창시자인 크리스투스는 [2. 처형] 티베리우스 치하에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판결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으며, [3. 계속] 그 독성을 지닌 미신은 잠시 저지되었지만 다시 생겨나, [4. 확산] 그 질병의 본거지인 유대만이 아니라 수도 자체 안에서도 생겨났는데, 그곳은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수치스런 것들이 모여들어 유행했다.
첫째는 그 운동이었다. 타키투스는 이 점에서 매우 간결하게 기록하여, 이 문장만으로는 예수 자신이 죽기 전에 그 운동을 창시했는지, 아니면 그 추종자들이 예수가 처형된 후에 그 운동을 창시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둘째는 그 처형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로마 점령당국의 본거지였던 해안도시 가이사랴에 대한 여섯 차례의 발굴에서 이탈리아의 고고학 발굴단은 1961년에 그 두 이름이 헌납과 관련하여 라틴어로 새겨진 석회암을 발견했다. 매우 훼손된 상태에서도 그 첫 줄에는 "티베리우스"가 새겨져 있어 분명히 그 황제에게 헌납된 어떤 건축물의 비문이었음을 보여주며, 둘째 줄과 셋째 줄에는 그 헌납자가 "[포]ㄴ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즉 "유대의 [총]독"([pre]fect of Judaea)으로 되어 있고, 넷째 줄은 지워져 알아볼 수 없는데 "만들었다," 혹은 "헌납했다"와 같은 동사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타키투스는 단순히 당시 41년부터 54년까지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의 칭호였던 행정장관(procurator)을 빌라도에게 거슬러 올라가 적용시켰는데, 빌라도는 그 당시에는 실제로는 총독(prefect)이었다.
셋째는 그 계속성이다. 셋째 구절은 그 이전의 문장을 명료하게 해준다. 즉 예수의 처형은 이미 예수에 의해 시작된 운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패했다. 타키투스가 보기에 그 운동이 계속된 것은 투약을 통해 제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질병이 발전한 것과 같았다. 처형은 그 목적에 실패했지만, 그리스도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의 창시자가 되게 만들었다.
끝으로, 확산이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혐오와 경멸을 여기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운동은 유대에서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자체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는데, 로마는 모든 부패한 것들이 도달하는 하수구였다. 또한 로마는, 타키투스가 미처 깨닫지는 못했지만, 미래가 달려 있던 도시였다. 제임스 조이스는 {피네간스 웨이크}(Finnesgans Wake)에서 "긴 이야기를 짧게 한다"(to make a long story short)는 영어 표현을 말장난하면서, 기독교보다는 아일랜드에 관해 타키투스를 생각하여, 그를 "우리가 짓밟혔던 이야기를 짧게 언급한 사람"(our wrongstory-shortener)이라고 불렀다. 정확한 지적이다.
그 세 사람의 최초의 이교도 외부인들 가운데 단지 타키투스만이 간단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리스도와 그의 운동, 그의 처형, 그리고 그 판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운동이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유대로부터 로마 자체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는지에 관해 말해준다. 이 네 가지 점에 대해서는 1세기가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외부인도 지적했는데, 그는 이교도가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였다.
끊임없는 사랑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혹은 요셉 벤 마티아스는 ... 확실히 기원후 1세기의 유대인들의 역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Harold W. Attridge, "Josephus and His Works," p. 185
요세푸스는 ... 이야기를 지어내고, 과장하고, 지나치게 강조하고, 왜곡하고, 은폐하고, 단순화시킬 수 있으며, 혹은 가끔씩 진실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
Shaye J. D. Cohen, Josephus in Galilee and Rome, p. 181
타키투스와 요세푸스는 모두 귀족 출신의 역사가들로서, 한 사람은 로마의 집정관 귀족 출신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유대인 제사장 엘리트 출신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60대 초반까지 살았는데, 37년경에 출생한 요세푸스보다는 55년경에 출생한 타키투스가 더 젊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출신에 대해 끝까지 충실했는데, 타키투스는 로마 공화정의 원로원 제도를 이상으로 삼았던 것에 대해, 그리고 요세푸스는 유대인 성직자들의 신정정치라는 이상에 대해 충실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황제의 폭정에 협조했다고 비난받았을 뻔했으며, 두 사람 모두 그렇게 한 것이 자살한 것보다는 낫다고 응수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연설한 것 때문에 죽게될 때, 침묵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소한 당시를 기억하여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키투스는 "망각하는 것이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쉬웠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와 더불어 우리의 기억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Agricola 2)라고 썼으며, 요세푸스는 "두 번 다시 내가 내 종족을 저버리거나 내 조상들의 전통을 망각할 만큼 비굴한 포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Jewish War 6.107)고 썼다.
이들은 심지어 로마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는데, 7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새로운 플라비우스 왕조 치하에, 로마에서 타키투스는 이제 막 자신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으며 요세푸스의 경력은 절정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들이 서로 만났다면, 비록 귀족의 명예와 황제의 후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서로 공개적으로 경멸하는 것보다는 예절을 지켜 존중하는 것이 훨씬 현명했다 할지라도, 두 사람은 아마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키투스는 일반적인 민족중심주의와 구체적으로 반셈족주의을 지니고 있어서, "그들[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에 대해 단지 증오와 앙심만 갖고 있다"(Histories 5.5.1)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자신의 민족이 갖고 있는 "율법은 불경건함이 아니라 가장 진정한 경건함을 ... 가르치며 ...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것을 나누도록 만든다"(Against Apion 41)고 옹호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예수에 관한 작은 주제들에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데, 타키투스의 라틴어 본문에 약 40 글짜로 된 내용과 요세푸스의 그리스어로 된 약 60 글짜의 내용이 모두 예수에 관해 그 운동이 있었으며, 처형이 있었고, 계속되었으며,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대목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대목으로서, 이 두 역사가는 각자 보다 큰 제국의 사건들과 폭넓은 역사적 지평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타키투스의 관심은 왕조의 쇠퇴, 황제의 타락, 그리고 어떻게 "폭군들의 영혼이 ... 잔인함, 욕정, 악의[를 통해] 상처를 드러내는지"(Annals 6.6)에 있었다. 한편 요세푸스의 관심은 총독의 실정, 민중의 대응, 그리고 어떻게 그런 소동이 결국에는 유대 땅에서 로마에 대한 노골적 반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예수에 관해서는 네 가지 점을 지적했는데, 이 사실이 나의 관심이다. 요세푸스의 본문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두 가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중복이다. 요세푸스의 두 가지 중요 저작들, 즉 1세기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기록된 {유대 전쟁}(Jewish War)과 90년대 초에 기록된 {유대 고사}(Jewish Antiquities)는 기원전 160년대 중반부터 기원후 70년대 초반까지의 역사가 중복되어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두 저작은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두 가지 판본(version)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 어느 책에서는 빼놓고, 바꿔놓고, 달리 설명한 것은 언제나 치밀하게 평가해야만 그 편향성, 편견,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유대 전쟁}에서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관한 부분(2.169-177)에서는 그의 실정이 초래한 단 두 번의 민중 소요사태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나 {유대 고사}에서 빌라도 총독 기간에 대해 다시 쓴 부분(18.55-89)에서는, 요세푸스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이것들은 그의 예수 이야기의 맥락을 위해 중요한 것들이다.
둘째는 맥락(context)이다. 그는 우선 빌라도 총독 기간의 소요사태를 셋으로 확대시키는데, 세 번째 소요사태는 그가 총독직을 박탈당하게 된 사건으로서, 만일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 사태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죽지 않았더라면, 빌라도 총독의 목숨마저 위태로웠을 사건이었다. 빌라도 총독 기간의 그 세 차례 소요사태는 모두 그 사태의 책임이 행정 당국자에 있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처음 두 차례의 사태(Jewish Antiquities 18.55-64)와 세 번째 사태(18.85-89) 사이에, 세 번의 소요사태를 더 삽입시켰다(18.63-64, 65-80, 81-84). 이처럼 새로 삽입된 세 번의 소요사태 역시 그 책임 소재가 유사한데, 이번에는 반대이다. 즉 여기서는 소요사태의 책임이 행정 당국자들이 아니라 그 주동자들에게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새로운 세 번의 소요사태 가운데 첫 번째 사태가 예수에 관한 것인데, 이것이 매우 적절한 것은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 총독 시대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 두 가지 삽입은 매우 이상하다. 그 두 사건 모두 분명히 소요사태와 관련된 것이지만, 예루살렘에서라기보다는 로마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그 하나는 어느 난봉꾼 귀족이 파울리나라는 이름의 로마의 귀부인을 유혹하는 데,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의 사제들이 도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형벌로서 그 사제들은 십자가에 처형되고 그들의 신전은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을 어기고 그 때문에 도망친 어떤 유대인 건달"(18.81)이 풀비아라는 이름의 유대인 귀족 개종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바친 선물을 속여서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몄다가, 결과적으로 "유대인 공동체 전부"(18.83)가 로마에서 추방되는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빌라도 총독의 소요사태와 로마의 소요사태를 나란히 기록한 것, 범죄적으로 사기를 친 이야기들과 예수의 이야기를 나란히 기록한 것은 예수 이야기를 부정적인 맥락에서 보게 한다. 이것이 요세푸스의 의도였으며 목적이었나? 즉 예수의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과 연관시켜 판단해야 하는가? 요세푸스에게 있어서, 예수, 이시스 여신의 사제들, 그리고 유대인 "건달"은 어떻게 개인의 종교적 불법행위로 인해 대중적인 소요사태와 공식적인 처벌이 초래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세 가지 경고였을 것이다.
셋째로는 본문(text)이다. 비록 예수 이야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맥락을 배열했다 할지라도, {유대 고사}의 본문 자체(18.63-64)는 매우 중립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앞에서 타키투스의 요약에서 보았던 네 가지 똑같은 요소가 여기 요세푸스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운동] 이즈음에 예수라는 현자가 살았다. (만일 그를 인간으로 지칭하는 것이 적합하다면 말이다.) 주지하는 바대로 그는 놀라운 묘기들을 행하였고, 기쁘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메시아였다.) [2. 처형] 그는 우리의 최고 지도자들에 의해 고발되었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형에 처형시켰다. [3. 계속]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흘만에 그들에게 다시 살아나 나타났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던 예언자들은 이것과 그에 대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한 바 있다.) [4. 확산] 그의 이름을 딴 기독교인들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타키투스의 기록보다 더욱 세밀하지만, 위의 본문에서 내가 괄호 속에 넣은 문장들을 주목하라. 그 문장들은 너무 명백하게 기독교적 문장들이라서, 일부 학자들은 예수에 관한 이 부분 전체가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삽입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비록 괄호 속에 넣은 문장들을 기독교인 편집자들이 교묘하게 삽입시켜 이 본문 자체를 보다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이 본문의 기본적 내용은 요세푸스의 원문이었을 것 같다. 즉 의심스러운 구절들을 일단 빼버리면, 나머지 본문은 그 문체와 언어가 요세푸스의 특징적인 본문이다. 이 나머지 본문이 너무 중립적이라서 나는 요세푸스가 60여 년 전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해서보다 그 당시 로마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해 더욱 치밀한 안목으로 쓴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진술이 공평하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그가 "많은 유대인들과 많은 그리스인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도 가능하다. 즉 이런 점은 분명히 20년대의 팔레스타인보다는 90년대의 로마의 역사적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네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겠다. 첫째로, 그 운동이다. 예수는 "현자"(a wise man)로 불려지는데, 이것은 {유대 고사}의 앞에서 솔로몬을 "모든 덕을 갖춘 현자"(8.53)로, 또한 다니엘을 "현자이며, 사람의 능력 너머에 있으며 오직 하느님께만 알려진 것들을 찾아내는 데 능숙한 사람"(10.237)으로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요세푸스로서는, 예수의 지혜가 그의 행적과 말씀 모두 속에, 그의 행동과 가르침 모두 속에 드러났다. 이 둘의 순서, 즉 행동이 먼저 나오는 것은 아마도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점일 것이다. 요세푸스는 예수의 행동들을 여기서 "놀라운 묘기들"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문구로 기술했다. 이 문구는 {유대 고사}에서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했던 똑같은 문구이다. 즉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하느님이 분명히 영예롭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예언적 능력을 통해 놀랍고 경이적인 행적들 [혹은 놀라운 묘기들]을 수행하였기 때문인데, 히브리인들은 이런 일들을 영광스럽게 기억하였다"(9.182). 나는 이런 놀라운 묘기, 혹은 경이로운 행적들의 사례로서 요세푸스가 그 직후에 말한 이야기를 인용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열왕기하 13:20-21에서 끌어온 이야기이다. 즉 "어떤 강도들이 자신들이 죽인 사람(의 시체)을 엘리사의 무덤 속에 던졌는데, 그 시체가 그의 몸과 닿자 그가 다시 살아났다... [왜냐하면] 그는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하느님의 권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또한 예수를 "기쁘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스승"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예수의 청중들이 애매하게 표현되었는데, "기쁘게"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쉽게"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이 똑같은 그리스어를 앞에서 헤롯 대왕의 처형된 아들 알렉산더를 가장한 사람을 속아서 따랐던 추종자들에 대해서도 사용했다. 즉 "그들은 기꺼이 [혹은 기쁘게, 열심히] 그의 이야기를 믿었다"(Jewish Antiquities 17.329). 그러나 요세푸스는 타키투스의 간결한 언급보다 훨씬 유용한 설명을 제공해준다.
다음은 처형이다. 요세푸스는 여기서도 중요한 새로운 정보를 덧붙이고 있다. "최고 지도자들"(문자적으로, 우리들 중에 우두머리들)이란 말 자체는 제사장 계급의 지도자들, 혹은 평신도 귀족 지도자들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제사장 계급의 지도자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좀더 크다. {유대 고사}(18.120-123)에서 시리아의 이방인 총독 비텔리우스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유대인 영주 헤롯 안티파스를 대동한 채, 시리아 군단들을 이끌고 "유대 땅"을 통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군기(軍旗)에는 거슬리는 이방인 형상(images)이 있기 때문에 "최고 지도자들"이 통과하지 말도록 간청했다. 이에 대해 비텔리우스는 동의하였고, 심지어 그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다. 이 특별한 경우에는 적어도 "최고 지도자들"은 분명히 대제사장 당국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들"이라는 용어 자체는 단순히 귀족들, 지도자들, 당국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랍어로 기록된 {칭호의 책}(Book of the Title)은 10세기 중엽 소아시아 프리기아 히에라폴리스의 멜카이트 감독 아가피우스가 쓴 세계사 책으로서, 요세푸스의 이 본문이 인용되어 있는데, 단지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여 죽도록 했다"라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독립적이며, 보다 원래의 것이며 보다 정확한 것이라기보다는, 좀더 긴 문장을 축약시킨 것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요세푸스로서는 유대인 귀족들의 고발과 로마제국의 처형이 최고 지도자급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셋째로 계속이다. 셋째 단계에 대한 요세푸스의 묘사 역시, 일단 괄호 속에 넣은 후대의 기독교적 삽입을 제거하고 나면, 매우 중립적이며 공평한 기술이다. 그는 그 계속을 전염이 퍼진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식지 않은 사랑(undying love)으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확산이다.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따른 것임을 지적했다. 요세푸스 역시 기독교인들이 그의 이름을 딴 사람들, 즉 그가 유일하게 언급한 "예수"라는 이름을 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단지 그의 독자들이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를 기름부음 받은 자, 즉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Christ), 히브리어나 아람어로는 메시아(Messiah)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나중에 {유대 고사}(20.200)에서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대제사장 아나누스]가 [페스투스 총독과 알비누스 총독 사이의 공백기간인 기원후 62년에]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을 소집하여, 그들 앞에 그리스도라 불렸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는 사람과 몇몇 다른 사람들을 잡아다 세웠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불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중립적인 표현이지 신조의 표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유대 고사}의 앞부분에서(18.63-64) 예수에 관해 언급할 때 "그는 그리스도라고 불렸다"고 표현했지만, 기독교인들이 삽입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라고 불렸다"를 신앙고백적 주장인 "그는 그리스도였다"라고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최초의 외부인 네 사람 가운데, 플리니와 수에토니우스는 기독교인들에 관해서는 말하지만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만이 예수 혹은 그리스도에 대해, 또한 그로부터 기독교로 계속된 것에 관해 말해준다. 이 계속성이 바로 이 책이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 계속성의 매우 특수하고 정확한 형태에 관한 것이다.
초점은 최초의 계속성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예수 추종자들의 가장 놀라운 특성은 팔레스타인의 짓밟히고 폭발 직전의 농촌에서 설교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세계에서 비롯되었다. 다소의 바울은 디아스포라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유대인이었다. 그는 심지어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교여행을 통해 서부 소아시아의 오지에 있던 도시들까지 방문했다. 50년대 초기에 그는 한번에 몇 년씩 에게해의 거대한 이방도시들, 즉 에페소, 데살로니카, 필립비, 고린토 등지에 머물렀다. 그는 60년경, 멀리 떨어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처형되었다.
Peter Brown, The Body and Society, p. 44
기독교 2천 년의 전체 역사를 통해, 기독교의 모든 제의와 문화, 그 모든 역사와 신학을 통해, 예수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다. 또한 처음 3백 년 동안에도 예수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다. 또한 앞에서 타키투스와 요세푸스를 통해 살펴본 1세기에서도 예수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2천 년, 3백 년, 혹은 심지어 1백 년 동안에 관한 설명이 아니다. 대신에, 이 책은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초기의 계속성, 즉 십자가 처형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의 계속성, 그 순간들을 모두 포함하고 그 연결에 초점을 맞추는 계속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 책이 묻는 질문은, 예수가 처형된 직후에 예수의 첫 동행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이 묻는 질문은, 하느님이 예수의 처형을 막지 않았을 때, 그 하느님의 나라를 믿던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이 묻는 질문은, 바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혹은 바울이 박해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렇게 최초의 계속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바울 자신에 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바울 연구를 포함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의 생애, 그의 편지들, 특히 그가 사용한 바울 이전의 전승들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바울 연구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지만, 바울의 신학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바울의 사상이, 역사적 예수의 상황과는 매우 다른 상황 속에서, 예수로부터 기독교로 연결된 매우 초기의 계속성, 완전히 타당한 한(a) 계속성을 나타낸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책에서 의도적으로 바울을 뺐다. 하나는 예수가 죽기 전부터 함께 했으며, 예수가 처형된 이후에도 계속 예수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만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갈보리 이전부터 갈보리 이후까지 예수의 동행자들의 연속성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전승들 가운데 어느 전승이 바로 이 연속성을 보여주는가? 두 번째 이유는 바울의 진정한 편지들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기원후 30년대 초기를 서둘러 지나쳐버리고 너무 빨리 30년대 말, 40년대, 50년대로 넘어가려는 유혹을 받는데, 바울의 편지들은 이런 기간들을 위해 매우 귀중한 증언들이다. 이렇게 서둘러 넘어가는 현상에 대해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나로 하여금 바울 이전에 있었던 기독교, 바울 없이, 바울과는 별도로 있었던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상상하도록 만든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바울의 증언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박해한 기독교, 바울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있었을 기독교, 마치 바울이 없었던 듯이 미래로 계속되었을 기독교에 대해 탐구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바울의 증언들이었다. 내가 여기서 그런 사례로 드는 책 두 권은 초기 기독교에 관한 최근의 책들인데, 그 책들이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탁월한 책들이기 때문에 사례로 드는 것이다.
첫 번째 책은 웨인 믹스(Wayne Meeks)의 {최초의 도시 기독교인들: 사도 바울의 사회세계}(The First Urban Christians: The Social World of the Apostle Paul, 1983)이다. 그는 1장 첫머리에 "바울은 도시 사람이었다"고 주장한다. "도시는 그의 언어를 통해 숨을 쉬었다. 예수의 비유들, 즉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소작인의 비유 등은 퇴비와 흙 냄새를 풍기고, 팔레스타인 시골 마을에서 쓰던 아람어는 종종 그리스어 속에 울려퍼졌다. 반면에 바울이 올리브나무나 정원 같은 은유를 구사할 때는, 그 그리스어가 깔끔하고, 농장보다는 교실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그리스어의 수사학적 관습들, 즉 경기장, 연무장, 혹은 일터에서 사용하던 수사학적 표현들에 더욱 익숙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가 처형된 후 10년 이내의 그 초기에, 이미 팔레스타인의 시골 문화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로마의 도시가 기독교 운동의 지배적인 환경이 되었다"(1983:9, 11). 시골에서 새로 뿌린 퇴비가, 하수구 시설을 갖추지 못한 도시의 주택가와 골목의 악취보다 훨씬 냄새도 좋을뿐더러 사람의 건강에도 훨씬 덜 해롭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자. 대신에 나는 아람어에서 그리스어로, 팔레스타인 시골마을에서 로마의 도시로 재빨리 넘어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겠다. 내가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즉 예수가 죽은 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어떻게 그런 일이 그처럼 재빨리 벌어졌는가? 문제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한 도시로부터 다른 도시로 어떻게 퍼져나갔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독교가 갈릴리의 시골 마을로부터 로마의 도시들로 퍼져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기독교가 그 마을들을 벗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요점은 믹스가 마을로부터 도시로 옮겨간 문제를 직시했어야만 했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이것이 여전히 한 문제로서 남아 있다는 점이며,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관심을 갖는 문제이다.
두 번째 책은 로드니 스탁(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등장: 사회학자가 재고한 역사}(The Rise of Christianity: A Sociologist Reconsiders History, 1996)인데, 이 책은 종파들(sects)과 제의(cults) 사이를 확고하게 구분했다. "종파 운동은 .... 전통 종교 안에서 신앙의 타계적(otherworldly) 입장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 환경과 더욱 높은 긴장관계를 갖는 종교를 '회복'하려고 떨어져 나갈 때, 그 분립을 통해 생겨난다.... 반면에 제의 운동은 단지 옛 신앙의 새로운 조직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으로서, 적어도 그 사회에서는 새로운 신앙이다"(33). 더 나아가, 종파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적어도 전통 종교에 밀착된 사람들보다는 사회적으로 하층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제의는 "보다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틀림없다"(33, 34).
이런 구분을 한 것은 다음 구절을 위한 준비였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 동안에 유대교 내부의 한 종파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십자가 처형 직후에도 그 제자들과 다른 유대인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이 기독교 종파를 제의 운동으로 뒤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즉 기독교인들은 그 날에 예수가 죽은 사람들로부터 다시 살아났으며 그후 40일 동안 반복해서 여러 추종자 집단들에게 나타났다고 믿는다. 그들이 더 이상 또 하나의 유대교 종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도들이 믿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부활을 믿는 것은 불필요하다. 비록 이 사실이 충분히 인지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당시 유대교의 엄청난 다양성 때문이기도 했다), 부활에서부터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종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즉 그들이 더 이상 유대교의 내부적인 종파로 남아 있기에는 너무 많은 새로운 문화를 유대교에 덧붙여주는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물론 교회와 회당 사이에 완전한 분립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지만, 예루살렘의 유대교 당국자들이 기독교인들을 그 공동체 너머의 이단자들로 재빨리 구분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문선명 집단을 제외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44-45).
여기서 종파에서 제의로 잠깐 동안에 바뀐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 수식어들을 주목할 수 있다. 즉 "이 사실이 충분히 인지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는 말과 "교회와 회당 사이에 완전한 분립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즉 그런 잠깐 동안의 변화가 실제로 있었는가? 모든 관련자들이 유대교 종파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정상적인 유대교의 전제 범위 안에서 설명하지 않았는가? 기독교는 유대교 내부의 종파로서, 그러나 이교에서는 벗어난 제의로서 이중적으로 호소력을 지녔던 것은 아닐까? 결국에는 기독교가 어떤 식으로든 정착했지만, 이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한 단계들과 과정들을 거쳐, 서서히 그리고 다양하게 일어났다. 앞에서 믹스가 시골마을에서 도시로 재빨리 이동했던 것처럼, 여기서 스탁은 종파로부터 제의로 너무 빨리 이동한다. 나의 요점은 스탁이 종파로부터 제의로 변화된 문제를 직시해야만 했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이것이 아직 문제로 남아 있으며, 내가 이 책에서 관심을 갖는 문제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나 자신의 질문을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의 처형 이전과 그 이후의 동행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계속성을 분별할 수 있는가? 십자가 처형 이전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그 이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30년대 초에 그 동행자들에게는 예수운동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들이 어떤 궤적을 남겼기에 우리는 후대의 문서들에서 그 궤적들을 조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내가 최초의 계속성(first continuation)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그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의 계속성으로서, 그 이전과 그 이후 모두의 계속성이다. 나는 이 문제를 좀더 개인적인 방식으로 진술할 수도 있다. 즉 이 책은 내가 먼저 쓴 책 {역사적 예수: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의 가장 가까운 속편이며 계속이다. 이 책은 역사적 예수 자체, 혹은 기독교의 기원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연결, 즉 예수의 첫 동행자들이 겪은 그 계속성에 관심을 갖는다. 반대는 명백하다. 그 초창기의 일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다른 학자들처럼 재빨리 바울로 넘어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는가? 도대체 왜 그 원초적 계속성을 재구성하려 애쓰는가? 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