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최초의 기독교에 대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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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40년에는 기독교인이 1천 명 정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10년마다 40%씩(혹은 매년 3.42%씩) 증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증가율일 것이다.... 십 년마다 40%씩 증가하는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은 그런 대량증가의 원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증가율로 계산해 보면, 기적이나 대규모적인 개종이 없더라도 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기독교가 전체 인구의 절반[6천만 명 가운데 거의 3천4백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몰몬교도 현재까지 이런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대규모적인 개종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pp. 5, 6, 10, 14.
이 글은 초기 기독교를 숫자적인 확장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런 재구성은 물론 그 최초의 숫자가 얼마나 정확한가에 달려 있다. 이 글은 또한 오늘날 몰몬교의 증가율에 대한 사회학적 데이터를 사용하여 초기 기독교의 확장을 점검하고 있다. 그 숫자가 정확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도록 남겨두겠다. 내가 이것을 인용한 것은 단지 재구성의 한 사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어떤 근거에서 얼마나 타당하든지 간에, 이것은 역사적 재구성의 한 사례이며, 특히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왜 가능하며, 타당하며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역사와 이야기
앤이라는 젊은 여자가 자신의 부모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사탄의 의식을 통한 학대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치료요법을 통해 회복하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다중인격자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을 설명했다. 그 가족이 찍은 비디오테이프와 사진들은 치료받기 이전의 앤이 활달한 여성이며 가수 초년생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앤의 치료자 더글러스 새윈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녀의 진실, 환자의 진실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내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 환자의 말이 망상일 가능성은 없느냐는 물음에 대해 새윈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망상 속에 살지요. 누구나 다소간 망상을 갖고 산다는 말이에요."
Daniel L. Schacter, Searching for Memory, pp. 262-263
역사적 예수, 기독교의 기원, 최초의 계속성, 혹은 예수의 동행자들이 그의 처형 이전과 이후에 살았던 삶의 모습에 대해서는 잠시 잊도록 하자. 대신에 위에 인용한 문장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분명히 끔찍한 사례이다. 만일 앤이 그런 학대를 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만일 그런 학대를 받았으면서도 회복되지 않았다면 더욱 끔찍하다. 그러나 만일 그녀의 치료자가 사실과 허구, 환상과 역사의 차이를 전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나 그녀의 가족을 위해, 또한 그 사회를 위해 분명히 가장 끔찍한 일이다. 이 글의 저자 샥터는 최근 미국에서의 "기억 전쟁들" 사건을 말하면서, "객관적 혹은 '역사적 진실'은...., 앤의 경우처럼, 그 가해자에 대해 수백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할 때, 매우 중요하게 된다"고 각주에 달아놓았다(344 각주 28).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송과 무관하게 심지어 치료를 위해서도(혹은 특별히 치료를 위해서는) 사실적 이야기와 망상의 이야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사실인지 망상인지를 판명해야만 한다. 여기서 역사는 중요하다. 역사를 빼면 도무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역사는 가능하다.
역사는 이야기와 같지 않다. 비록 모든 역사가 이야기라 할지라도, 모든 이야기가 역사는 아니다. 다음과 같이 순전히 가설적인 사건을 상상해 보자. 두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기소된 사람 앞에서 변호인과 검사가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치자. 검사에게는 그가 유죄판결을 받아야만 하는 살인자이다. 변호인에게는 그가 무죄한 사람으로서 사건이 조작되었다. 검사와 변호사 모두 매우 능력 있는 사람들이며 훌륭한 이야기꾼이지만, 그 법정에서 그 두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만이 역사이다.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는 착오이거나, 허구, 창작, 아니면 거짓말이다. 마침내 그 기소된 사람이 법정을 걸어나갈 때, 그는 풀려난 살인자이거나, 아니면 무죄로서 조작된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는 그 둘 모두일 수는 없다. 아마도 우리는 어느 말이 분명히 역사 이야기(history-story)이며 어느 말이 허구적 이야기(story-story)인지 결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둘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옳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교양, 도덕, 인간성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그 모두가 상대적이며,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며, 사기이며, 재수없는 녀석이 걸려드는 것이며, 혹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렇다. 즉 역사는 공개적 담론에서 증거에 대한 논증을 통해 현재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재구성된 과거이다(History is the past reconstructed interactively by the present through argued evidence in public discourse.). 똑같은 사건에 대해 오직 또 다른 대안적 관점만을 택할 수 있는 때가 있다. (심지어 우리가 듣지 못할 때일지라도, 또 다른 대안적 관점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논증을 통한 공개적 재구성으로서의 역사는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우리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작업으로서 필요하다.
이런 배경을 갖고, 나는 다시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으로 되돌아 간다. 여기서 반대는 분명하다. 즉 다른 재료들을 제외한다 해도,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이라는 네 개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전부터 이후까지의 계속에 관해 (적어도 처음 며칠 동안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가 처형될 당시의 황제였던 역사적 티베리우스에 관해서도 네 개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벨레이우스 파터쿨루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들이다. 신약성서 정경의 이야기들은 모두 익명의 저자들에 의한 것으로서, 그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에 관해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모두 1세기가 끝나기 이전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반면에 티베리우스 황제에 관한 기록들 가운데 하나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독일 지방과 판노니아(크로아티아의 슬라보니아 평원지대 - 역자주)를 공격했던 1세기의 역사가가 쓴 것이며, 나머지 세 개는 2세기 혹은 3세기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마르코와 요한에 나오는 예수가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한다면,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우도 (그가 걸었던 땅까지 예배했던) 파터쿨루스와 (그가 숨쉬었던 공기마저 증오했던) 타키투스 사이에 얼마나 다른지 아느냐고 맞받아 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기원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사도들의 행전이 있는데, 이 책은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초기 기독교를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분명히 내가 찾는 역사가 있으며, 내가 할 일은 그 책을 치밀하게 읽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문제는 지난 2백 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났는데, 복음서들은 그 책들이 분명하고 정직하게 주장하는 바대로 복음일 따름이라는 점이다. 즉 복음서들 속에 비록 역사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복음서들은 역사가 아니다. 전기(傳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기도 아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good news)이다. "기쁜"이란 말은 그 소식이 누군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쁜 것이라는 말로서, 예를 들어, 황제의 해석이 아니라 기독교적 해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다. 또한 "소식"(news)이란 정례적으로 최신정보(update)로 바꾸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예수가 새로운 시대와 장소, 상황과 문제들, 저자들과 공동체에 따라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그려졌음을 시사한다. 복음서들은 신앙을 위해, 신앙에게, 신앙으로부터 기록된 것이다. 우리는 또한 마태오와 루가가 모두 마르코를 자료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마태오와 루가를 그 마르코 자료와 비교함으로써,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자신의 말씀과 행적을 선택하고 수정하며, 덧붙이고 삭제하며, 바꾸고 창작했던 절대적 자유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일 요한이 그 세 공관복음서 저자들에 의존했다면,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 거의 최대의 창조적 자유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공관(synoptic)이라는 말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를 쉽게 병행 칼럼에 나란히 병치시켜 한 번에 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구분하는 것은 애당초 똑같은 복음의 두 편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 두 책은 함께 읽어야만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성령이 처음에는 예수와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였다가, 그 다음에는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동하였는지를 말해준다.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쁜 소식은 성령이 그 본부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겼다는 점이다. 분명히 성령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지 않았으며, 또한 나일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지도 않고, 단지 지중해를 건너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 두 편의 각각은 똑같이 역사라기보다는 신학이다. 이 사실이, 만일 우리가 저널리즘(즉 객관적 역사 기록- 역자주)을 원한다면, 우리의 문제꺼리가 된다. 우리는 저널리즘 대신에 복음을 물려받았다. 역사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처럼 복음서 일반의 성격과 복음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힘겹게 찾아낸 결론들이다. 우리가 역사적 재구성을 통해, 즉 공개적 담론으로서 증거에 대한 논증을 통해, 예수와 최초의 기독교에 관해 아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1991년에 {역사적 예수}를 썼을 때는 그 연구작업의 타당성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연구가 학계에 이미 확립된 부분이라고 간주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25년 넘게 연구한 후에 나는 왜 예수의 생애와 죽음 모두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지, 또한 최초의 기독교의 처음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이유
최근에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들은 무의식중에 뉴트 깅그리치의 "미국과의 계약"에서 절정에 도달했던 운동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20년 동안 독일 학자들은 매우 조심스런 연구를 진행했지만, 지난 15년 동안에는 특히 자본주의 세계의 의기양양한 지도자인 미국에서 확신에 찬 연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최근의 주요 저작들 거의 모두가 미국 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Helmut Koester,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Cult of the Kyrios Christos," p. 14.
첫 번째 이유는 역사적 이유로서, 나는 이것을 디이터 게오르기(Dieter Georgi)와 특히 헬무트 쾨스터(Helmut Koester)의 최근 논문들을 통해 논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말로리 원칙(Mallory principle, 1920년대 초에 여러 차례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나섰다가 1924년 거의 정상 가까이에서 실종된 영국인 등산가 George Mallory - 역자주)이지만, 높은 산에 적용되기보다는 역사적 인물에 적용된 원칙이다. 즉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산이 그곳에 있으므로 등반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예수가 그곳에 있으므로 그를 연구한다. 예수와 그의 처음 동행자들은 역사적 인물들이며, 누구든 적절한 능력만 있으면 그들을 역사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반대자들, 혹은 줄리우스 씨이저와 그의 암살자들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해 연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오래된 과거를 현재에서 바라보는 일에는 항상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마치 우리 모두는 통일된 우리이며 그들 모두 역시 통일된 그들인 것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고대의 그들 사이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고대와 현대라는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으며, 우리가 적어도 그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그들의 과거의 미래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어떻게 마치 우리가 복음서의 묘사, 예술적 초상, 음악적 축하, 그리고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예배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을 재구성할 수 있겠는가? 물론 피장파장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도 우리 자신의 현재에 대한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 선조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에 대해 몰랐다는 점을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로부터 미래까지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고대 역사의 일반적 문제이며 일반적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 혹은 불신, 헌신 혹은 혐오, 사랑 혹은 증오가 관련될 때는 특수한 문제가 생긴다. 거의 한 세기 전, 역사적 예수 연구가 이미 중반에 접어들었을 당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예수 연구자들을 증오자들과 사랑하는 자들로 구분하면서, "사랑뿐 아니라 증오를 위해서도 예수의 생애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1969:4). 그는 우선 예수에 대한 증오자들과 그들의 저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가장 위대한 저술은 증오로 쓰여졌다.... 그것은 예수의 인격에 대한 증오라기보다는 그토록 쉽게 그를 둘러싼 초자연적 후광, 그래서 결국에는 사실상 그를 둘러싼 후광에 대한 증오이다. 그들은 예수를 참으로 순수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려 하였으며, 그에게 입혀진 영광의 옷을 벗겨내고, 그가 갈릴리를 걸어다닐 때의 조잡한 옷으로 입히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증오는 그들의 역사적 통찰력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연구를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모든 노력들보다 더욱 진전시켰다"(1969:4). 슈바이처는 특히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에 대해 말한 것인데, 그는 1694년부터 1768년까지 살았지만 그의 저작들은 그가 죽은 후 익명으로 발표되었을 따름이다. 슈바이처는 또한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에 대해서도 말한 것인데, 그는 1808년부터 1874년까지 살았고, 대학교수를 시작하면서 저작을 발표하여 즉시 쫓겨나고 말았다. 슈바이처는 이어서 예수를 사랑하는 연구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즉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생애를 쓰려했던 사람들은 정직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신학적으로 정직한 학파가 되었다.... 이들의 호감이 때로 이들의 비판적 안목을 흐리게 만들어 불성실하게 되지 않은 채 먼 산에 대해 흰 구름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1969:5).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해 증오 아니면 사랑, 논쟁 아니면 변증의 길 밖에 없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느 쪽을 택하든, 그 증거에 대해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는 그를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 모두에게 연구 대상이었으며, 그를 용납하거나 무관심한 태도 모두에게, 예배하는 자들과 처형시킨 자들 모두에게 예수였다. 오늘날 이런 두 가지 반응 모두를 제외시키고, 2천년 전에 그 두 가지 반응을 모두 제외시켰다면 어땠을지를 재구성할 수는 없을까? 그가 무슨 말을 했고 무슨 행동을 했기에 이처럼 서로 다른 반응을 낳았는가?
이런 두 가지 난관 때문에 역사적 재구성이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렵게 만들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를 연구할 때 역사가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한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내가 다음 사례를 인용하는 것은, 만일 역사적 재구성이 종종 지뢰밭을 헤쳐 가는 것이라면,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일은, 밭은 없이 온통 지뢰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99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디이터 게오르기(Dieter Georgi)는 우리가 고대 본문에 으레 적용하는 똑같은 역사비평을 성서 주석자들에게 적용했다. 그는 예를 들어 라이마루스의 관심은 단순히 개인적 혹은 감정적 특질이 아니라, 그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사회적 및 역사적 힘들에 의해 생겨난 관심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점은 라이마루스보다 오래 전에, "11세기와 12세기의 남부 및 서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그 처음 순간부터 "예수의 생애 신학은 유럽 브루주아의 양심과 그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서, 그들의 사회경제적 및 이데올로기적 진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하였다. 즉 양심적이며 책임적인 시민들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대표하며 형성할 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이상적 인물이 요청되었다는 말이다. 예수의 생애 신학이 발전한 것은 이런 초기의 자극제가 되었다"(56). 그리고 이런 사회적 힘이 20세기 중엽과 말기까지 계속되었다는 주장이다. "1950년대 초의 소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의 시작, 그리고 독일에서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 새로운 탐구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것, 그리고 여전히 활발한 것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역사가에게 완전히 놀라운 일이다. 새로운 방법론도 없고, 참으로 새로운 방법론적 통찰력도 없고, 예수 전승의 역사적 진정성 문제에 직접 영향을 미칠 새로운 문서나 새로운 역사적 증거도 없다.... 새로운 탐구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여전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주제는 중세 이래로 브루주아 의식의 발전에 매우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역사적 예수 탐구 전체의 계속적인 사회적 및 역사적 상황의 중요 원인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브루주아 의식의 발전과정 속에서, 단지 그 이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 힘의 표현으로서 탐구된 것이다. 이 새로운 탐구가 2차 대전 후 미국과 독일에서 뉴딜 정책이 끝나고 브루주아가 복귀한 시기와 같은 시기에, 특히 시장 중심적인 사회가 출현한 대서양 연안에 국한되어 진행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80, 82, 83).
이 주장에 대해 두 가지 점만 논평하겠다. 첫째로, 나는 이처럼 개괄적인 주장에 대해 어떻게 그 옳고 그름을 입증할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이런 식의 주장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이점이 있으며, 또한 입증할 수도 없는 불리함도 갖고 있다. 그러나 어쨌건 간에, 심지어 이 주장이 절대로 옳다고 해도, 단지 사회경제적 요인들과 종교적 강조점들이 서로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렇다. 둘째로, 게오르기의 분석은 지시적이라기보다는 서술적이다. 그가 유럽과 미국의 중산층 브루주아의 등장에 관해, 혹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발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그의 어조는 중립적이며 그의 서술은 치우침이 없다. 나는 심지어 그의 분석이 전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서술은 고발이 아니라고 추정한다.
헬무트 쾨스터(Helmut Koester)는 게오르기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술을 넘어 고발로 확대했다. 첫째로, 그는 게오르기의 결론을 인용하면서 그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2차 대전 후에 예수의 생애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난 것은 브루주아 체제의 복귀의 결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중요한 인물의 생애가 그들의 도덕적 정당화를 위해서, 혹은 비록 혁명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역할 모델을 제공한다"(1995:14; 1994b:539와 비교하라). 한편, 만일 역사적 예수 연구가 중산층의 가치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키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는 생애를 제공한다면, 어떻게 그런 모순이 가능한지에 대해 분명히 조사할 가치가 있다. 이런 질문을 추구하는 것은 아마도 역사적 예수와 최초의 기독교에 관해, 그리고 역사가로서 혹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들 자신에 관해,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줄 것이다. 둘째로, 쾨스터는 위의 소제목 다음에 인용한 본문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게오르기의 주장을 현재의 북미 상황으로까지 확대시켰다. 그의 적용을 내가 이해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뉴트 깅그리치와 "미국과의 계약"과 연결시킨 것은 찬사처럼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쾨스터는 또 다른 최근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들은 예수라는 본보기적 인간성과 그의 지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통해 완전과 성공을 추구한 그 개인의 노력을 합법화하는 것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즉 착취하지 않으며, 서구 세계 밖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포함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결국에는 우리를 역사적 예수 탐구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실패를 시대의 전환점으로 선포한 바울의 선포와 아우구스투스의 종말론적 제국주의의 성공을 비교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 탐구보다 더욱 가치 있는 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1994b:544-545).
이것은 바울의 선포에 관해서는 매우 분명하고 정확한 지적이다. 로마는 공식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총독은 법적으로 처형 권한이 있었으며 그것은 황제가 허락한 권한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신적인 혈통, 그 자신이 신이 되었고, 그리고 그가 로마의 풍작, 번영, 평화를 확립한 것에 대해 아무리 유토피아적인 선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우주적 정의의 하느님은 예수 편이었으며, 따라서 로마의 반대편이었다. 서로 다른 종말론적 비전들은 서로 싸웠으며, 기독교의 복음은 로마의 복음과 겨루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쾨스터가 백 번 옳다. 그러나 왜 역사적 바울을 역사적 예수와 맞서게 만드는가? 만일 역사적 예수 연구가 "완전과 성공을 추구한 개인의 노력"에 관한 것이 아니며, 예수 자신의 "본보기적 인간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제국주의로 성육한 이교도의 신에 맞서서 인간의 정의로 성육한 유대인의 하느님의 "새로운 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어쩌겠는가? 우리가 재구성해야만 하는 역사적 예수를 도대체 왜 역사적 바울, 즉 마치 우리가 바울에 대해서는 재구성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역사적 바울과 맞서게 만드는가?
그러나 이런 논평을 하면서, 나는 쾨스터와 나 자신 사이의 서로 다른 감수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나는 아일랜드 사람이며 로마 가톨릭이지만, 그는 독일인이며 루터교인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1940년대에는 매우 다른 세상에 살았는데, 나는 훨씬 안전한 곳(그렇다고 반드시 더욱 영예로운 곳은 아닌), 추락한 제국의 그늘에서 살았다. 이런 차이점들로 인해 한 사람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다른 종교적, 정치적, 자서전적 감수성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대한 인간 혹은 심지어 초인간적인 사람"(1992:13)에 대한 탐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며, 혹은 "예수의 말씀과 사역의 독특성"(1994b:541)을 탐구하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나는 쾨스터처럼 히틀러의 망령이 그런 연구에 부득이 출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 운동"이라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분명한 비교를 통해 거부한다. "'교회'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는 '운동'이라는 말이 좋을 듯 하다. 나는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운동'이라 부른 것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1992:6 각주 14). 그는 나중에 또다시, 그러나 더욱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운동'이라는 말은 문제가 있는 정치적 뉘앙스를 갖고 있다. 사람들이 [나찌 운동]을 회상할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쓰 쉬슬러 휘오렌자는 그녀의 책[In Memory of Her]에서 '예수 운동'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그 특징을 '유대교 내부의 갱신 운동'이라고 말한다"(1994a:544, 각주 19). 나는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나찌 운동과 예수 운동을 연결시키는 것이 과연 공정하고, 심지어 온당한 논평인지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예수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또한 그런 주장이 공개적으로 소신껏 주장한 것인지, 아니면 그 작업에 따른 모든 난관들을 나열한 다음의 암묵적 결론인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의심한다. 모든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왜 예수만이 그처럼 알 수 없는 구름에 싸여 있어야 하며 보호막에 덮여 볼 수 없어야 하는가? 그와 같은 역사적 불가지론의 주장은 그의 독특한 지위와 초월적 위엄을 부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예수가 제우스 같은 존재라면, 역사적 재구성은 명백히 불합리한 것이다. 만일 예수가 햄릿 같은 존재라면, 역사적 재구성은 똑같이 불합리한 것이다. 전자는 신화 속에서만 살고, 후자는 문학 속에서만 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런 영역 모두에 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또한 역사 속에서도 살았다. 예수가 정말로 역사 속에 살았는가 하는 것은 적어도 예수에 관해 물어야 할 첫 번째 역사적 물음이다.
윤리적 이유
역사가나 주석가가 역사적 연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정말로 철학적 문제(예컨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나 신학적 문제들(예컨대, 하느님이 실제로 이런 특수한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갖도록 촉구했는지 하는 문제)이다. 그런 문제들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역사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들이다.
John P. Meier,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vol, 2, p. 220.
두 번째 이유는 윤리적인 것으로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존 메이어(John Meier)의 작업과 논쟁하기 위해, 윤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윤리적 이유는 두 개의 다르지만 서로 연결된 차원에서 작용한다. 한 차원은 우리가 역사가로서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현재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한 차원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믿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과거에 초점을 맞춘다. 이 두 차원은 모두 과거에 대한 공적 해석의 윤리에 관심을 기울인다.
만일 복음이 비유로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처럼 예수가 우리의 신앙을 도전한다면, 윤리적 이유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복음이 신학으로서, 예수가 하느님의 보좌에서 신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라면, 윤리적 이유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항상 역사적 기초를 주장해왔기 때문에, 윤리적 이유가 필수적이다. 우리의 복음서들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언제 역사적 진술을 하고 우리가 그 진술들을 읽으며, 그들이 언제 신학적 진술들을 하며 우리가 그 진술들을 읽는가? 위의 문장에서 중고딕으로 표기한 단어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나의 윤리적 이유의 두 측면을 분명히 드러낸다.
나는 여기서 예수의 신적인 잉태(divine conception of Jesus)사례를 이 문제에 대한 사례 연구로 제시하겠다. 존 메이어는 성령에 의한 잉태 기사의 역사성에 관해 결론적으로, "역사비평적 연구 자체는 마태오와 루가에 기록된 동정녀 잉태의 역사성에 관해 최종적 판단에 도달할 자료와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 교리를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주로 각자의 철학적 및 신학적 전제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비중을 얼마나 중요시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역사비평의 내재적인 한계를 기억하게 된다. 역사비평이란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유용한 도구이다"(I.222)라고 말했다. 그가 역사적 진술과 신학적 진술을 태연하게 뒤섞어 놓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즉 예수가 신적인 존재라거나, 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역사적인 입증이나 반증 너머에 있는 진술이다. 이 점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즉 역사의 의미에 관한 신학적 해석(theological interpreta- tion)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없었다던가,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를 잉태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인 진술(historical statement)로서, 원칙상, 입증되거나 반증되어야 할 진술이다. 즉 이 문제는 사실의 문제로서, 역사적 논의를 거쳐야 하는 문제이다.
예수의 잉태는 1세기 80년대에 기록한 루가가 전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신과 인간의 접속에 관한 기적 이야기로서, 신적인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 아이가 임신된 이야기이다. 인간 아버지는 참여하지 않은 채 말이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야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 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루가 1:26-35)
이 본문은 역사적인 이야기, 즉 적어도 부분적으로나 원칙상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이 본문은 단지 하느님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라는 여자, 즉 이 세상에 속해 있고 역사에 속한 한 여자에 관해서도 말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나의 반응은 이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부정하든 긍정하든 역사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런 초월적인 주장 앞에서 역사적 재구성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주장은 역사적 증명이나 반증 너머에 있기 때문에, 올바른 대응은 그런 주장을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은 채, 역사적인 검토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반응은 동정녀 탄생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적절한 경험적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물리적 일관성도 주장하며, 그에 대한 예외적 사건들은 사적으로 주장될 것이라기보다는 공공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한 입장을 취한 채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자.
후에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우스의 잉태에 관해서는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2세기 초엽에 기록한 {씨이저들의 생애}(Lives of Caesars)에 나타나 있다. 그의 신적인 잉태는 예수보다 약 50년 전에 일어났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출생 당시의 징조, 즉 그의 위대한 운명의 징조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아티아가 그를 잉태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Rolfe I.264-267).
아티아가 한밤중에 아폴로 신의 장엄한 제의에 참석하여 신전에서 잠이 들었는데, 다른 보모들도 잠이 들었다. 갑자기 뱀 한 마리가 그녀를 휘감아 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마치 그 남편과 교접한 후처럼 몸을 씻었는데, 즉시 그녀의 몸에 뱀과 같은 색깔의 표시가 나타나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공중 목욕탕에 갈 수가 없었다. 그후 열 달이 지나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나 아폴로의 아들로 간주되었다.(The Deified Augustus 94.4)
이처럼 아우구스투스는 아폴로 신과 인간 아티아 사이의 기적적인 임신을 통해 태어났다. 이 이야기에 대해 역사가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런 초월적 주장을 역사적 판단이나 경험적 검증 너머에 있는 것으로 제외시킬 사람이 있겠는가? 고전적 역사가들은 아무리 종교적이라 하더라도 보통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나에게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모든 신적인 잉태는 알렉산더부터 아우구스투스까지, 또한 그리스도부터 붓다까지, 문자적이며 기적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은유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우리의 이야기는 진실이고 너희의 이야기는 신화라고, 우리의 이야기는 역사이며 너희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공개적으로 또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더군다나 자신의 이야기에만 적용할 방어전략을 만들어 놓고 간접적으로 또한 암암리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더더욱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제기하는 문제로서, 이것은 분명히 윤리적인 문제이다. 반기독교적 합리주의 혹은 직접적 합리주의는 어떤 일들은 일어날 수 없다고, 혹은 좀더 현명하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일들은 우리의 세상에서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일관성 혹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관성 너머에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 일들이 신화이든 비유이든, 혹은 우화이든 이야기이든 간에, 사실, 사건, 혹은 역사로 간주될 수 없다. 물론 그런 공격을 조롱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이 관련된 문제에서 매일 그런 일을 겪으며 살고 있다. 반면에 친기독교적인 합리주의 혹은 간접적 합리주의는 그런 사건들이 보통은 일어나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독특한 경우에는 일어난다고 인정한다. 예를 들어, 신적인 잉태나 육체 부활은 세계 역사 전체에서 문자적으로 단 한번,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역사가로서, 그런 주장을 하는 과거와 현재의 다른 모든 사건들은 논의에 포함시키면서도, 그 특정 사건만은 논의에서 제외시킬 때, 그들은 내 생각에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윤리적 문제라고 지적하는 두 번째 측면이다.
위의 사례와 그 비슷한 여러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아직 직접적 합리주의나 간접적 합리주의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은 세계, 즉 신적인 잉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는 실제로 신과 인간,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하늘과 땅, 그리고 황천이 서로 통하는 세계였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신적인 잉태가 온 세상에서 예수에게만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결코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윤리적 문제의 두 번째 측면이며 보다 근본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그들이 역사적 예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그런 사건은 오직 예수에게만 일어났다고 말한 것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오해하는 것이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예수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며, 그런 주장은 그와 같은 모든 주장들에 비추어 상대적인 주장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요점이었다. 즉 그들은 당신이 어디에서 하느님이 특별히, 혹은 심지어 유일무이하게, 현존하신다고 보는가를 묻고 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부귀와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속에 하느님이 현존하시는가, 아니면 너무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유대인 농민의 아기 예수 속에 현존하시는가? 당신은 어디에서 당신의 하느님을 발견하는가? 선택하라.
우리는 집단 이데올로기, 혹은 신학이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만일 우리가 그런 주장을 하려면, 공공적인 증거와 변증법적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나 자신이 역사가로서 윤리적이며 또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실하기 위한 나의 입장은 예수나 아우구스투스의 신적 잉태를 사실적 역사(factual history)로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하느님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권력 속에 성육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유대인 농민 예수 속에 성육한 것을 믿는다.
신학적 이유
만일 예수가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을 했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면, 그 일들을 서로간에 비추어 마치 상호 해석적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특정한 행적과 말씀을 해석하기 위한 단 하나의 실제 맥락을 제공할 다른 모든 말씀들과 행적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Luke Timothy Johnson, The Real Jesus, p. 130.
세 번째 이유는 신학적 이유로서, 이것은 룩 티모시 존슨이 1996년에 발표한 책 {진짜 예수}(The Real Jesus)와 논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바로 그 책에 대응하기 위해서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동료 기독교인에게 신학적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며, 신약성서 복음서들 자체의 구체적 모델 내부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박은 개인적 이원론을 충분히 받아들여 몸-육신 속에 영혼이 존재하듯, 멋진 집, 황폐한 모텔 방, 혹은 섬짓한 감옥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흥미가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것이 역사적 예수 연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내가 신학적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내부에서 한 도전으로 제시하는 것이며, 기독교 정경 내부에서, 그리고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 도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신학적 이유는, 매우 의도적으로 또한 보수적으로, 정경 복음서들의 성격에 기초한 것이다.
룩 티모시 존슨의 책 {진짜 예수}는 그 부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오도되었고"(misguided), "전통적 복음의 진리"를 부정했다고 주장한다. 존슨은 첫째로 "진짜"(real)는 "역사적"인 것보다 훨씬 더 넓게 퍼져있으며, 역사학의 제한된 전략들로는 결코 충분히 혹은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일반에게는 사실이지만, 특정인에게는 연관성이 없다. 예를 들어, 1996년 5월 1일 뉴욕의 트리니티 인스티튜트에서 열렸던 텔레비전 논쟁에서, 존슨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역사로서 알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능가하는 진짜였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그처럼 전지한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의 "진짜" 자아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진짜"라는 말은, "코카콜라는 진짜 품목이다"처럼, 광고 용어이지 학술 용어는 아니며, 논쟁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계산된 용어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의 실재든 그에 대해 공적으로 알 수 있는 바, 혹은 역사적으로 주장될 수 있는 바를 훨씬 능가한다는 점에서, 나는 "진짜 예수"라는 말 대신에 학술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용어인 "역사적 예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즉 공공적인 담론에서 증거를 갖춘 논쟁을 통해 현재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재구성된 과거의 예수(the past Jesus recon- structed interactively by the present through argued evidence in public discourse) 말이다.
존슨은 둘째로 "좋은 역사적 방법"을 통해 "예수가 허구적 인물, 즉 그를 해석하고 그를 지칭한 고대 문헌들이 충분히 보여주는 허구적 인물 이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 그의 활동 시기와 장소, 그의 죽음 방식, 그의 활동의 성격에 대한 단서들과 같은 근본적 문제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117, 126)을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다음에 존슨은 자기가 방금 주장했던 "그 (고대 문헌들의) 틀을 벗어난 탐구"의 타당성을 부정하며, 그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의 재구성 가능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과거와 심지어 현재의 모든 역사의 가능성마저 부정했다. 이 절 시작부분에서 인용한 그의 대표적인 문장을 살펴 보라. 그것은 역사적 재구성의 타당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것, 즉 일상적인 지식으로부터 중요한 사법적 결정의 타당성도 부정하고 있다. 역사적 재구성에서는 누구나 최상의 공개적 논증을 제시하는데, 그 논증에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특정한 말, 행동, 사건들이 이치에 맞도록 서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피의자는 그 피해자를 죽이겠다고 말했으며, 그 피해자가 살해된 후 그 집을 나서는 것이 보였고, 그의 차 속에 피가 묻어 있었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현재의 범죄를 판단하는 배심원들에게 사실인 것처럼,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학자들에게도 사실이다. 또한 아무리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크다 하더라도 그런 판단의 윤리적 필요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심지어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불확실성과 불안정 속에서도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으며, 우리가 예상한 미래를 위한 기초가 될 과거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슨은 기독교인이며 로마 가톨릭 신자로서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해 이제까지 말한 것 같은 일반론으로 대응할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이 세 단계의 신학적 및 정경적 반론을 통해 대응하겠다.
복음서의 네 가지 형태
나는 먼저 독자들이 복음서의 네 가지 형태, 즉 초기 기독교 안에서 예수 이야기를 전한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을 고려하도록 요청한다. 그것은 현재의 신약성서 속의 네 복음서들, 즉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 가지 형태(types)를 말하는 것으로서, 정경의 네 복음서들은 모두 하나의 형태인 것이다. 미리 언급할 세 가지 사실은 첫째로, 내가 장르(genres)라는 보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형태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한 형태 속에 여러 장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런 형태론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 양식(form)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실제로 양식이 내용이 되고, 전달매체가 메시지가 되는 것을 강조한다. 끝으로 어떤 본문이 스스로를 복음서라고 부르는가 혹은 부르지 않는가 하는 것은 현재의 나의 관심에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본문 형태가 예수 이야기를 기쁜 소식으로 전하는 데 이용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각각의 형태에 서술적인 이름을 붙였다.
말씀복음서(語錄福音書, Sayings Gospels)
첫 번째 형태인 말씀복음서에는 일차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수집한 것들이 포함된다. 이런 형태의 복음서는 일반적으로 경구, 비유, 간단한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나타난 사건들은 행적보다는 말씀을 강조한다. 이런 형태의 복음서들 속에는, 예를 들어, 기적 이야기들도 거의 없고, 출생이야기, 수난 이야기, 부활 현현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다. 1세기 중엽에 시작된 전형적인 말씀복음서들은 Q 복음과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이다. Q 복음은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 속에서 19세기에 발견된 가설적 문서 자료이다. 도마복음은 이집트의 모래 속에서 20세기에 발견된 실제 문서이다.
전기복음서(傳記福音書, Biography Gospels)
두 번째 형태인 전기복음서는 네 개의 정경복음서들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나는 네 개의 전기복음서들이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넷 모두가 똑같은 형태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이 형태의 복음서들에서는 예수가 1세기 20년대 말의 팔레스타인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새로운 상황과 공동체에 대해 직접 말하고 행동한 것으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당시의 예수(Jesus-then)와 현재의 예수(Jesus-now) 사이에는 당시에 말한 예수(Jesus-said-then)와 지금 뜻하는 예수(Jesus-means- now) 사이에 아무런 구별 없이 얇은 판막이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마르코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부인하고 용서받는 동안에 예수가 고백하고 정죄 당하는데, 이 특정 사건들이 말하자면 30년도에 일어난 사건들이지만 70년도의 박해받는 공동체에게 직접 말하며 또한 그 박해받는 공동체를 위해 창작되었다. 그 메시지는 여러분들도 예수처럼 행동했어야만 하지만, 심지어 여러분들이 베드로처럼 행동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예수 자신으로부터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얇은 판막은 왜 네 개의 정경 복음서들이 비록 서로를 베낀 것이지만 그토록 서로 다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실제로 우리는 왜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 네 복음서들 사이에 그처럼 분명한 차이점들을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네 복음서들 모두를 간직했는지 의아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음 형태를 볼 때 분명해진다.
담화복음서(談話福音書, Discourse Gospels)
세 번째 형태인 담화복음서는 전기복음서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즉 전기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를 자세히 다루고 그의 부활에서 끝나지만, 담화복음서들은 부활 이후에서 시작되어 그 후로 계속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이야기는 그 제자들과 예수 사이의 독백과 대화, 질문과 대답이 뒤섞여 이어진다. 두 가지 예로 충분할 것이다.
첫 번째 예는 1945년 나그 함마디(I,2)에서 발견된 사본들(NHLE 30-37) 속에 있었던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의 {야고보의 아포크리폰}(Apocryphon of James)이다.
열두 제자는 모두 함께 앉아 구세주께서 그들 각자에게 은밀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하신 말씀들을 회상하면서 책 속에 [쓰고 있었는데] [그러나 나는] [내 책]에 있는 것을 쓰고 있었을 때, 갑자기 구세주께서 나타나셨으며,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동안 우리를] 떠나가셨다.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지 오백오십일이 지나 우리는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 그들 모두는 대답하기를 ... 그는 말씀하시기를 ... (Apocryphon of James 2.9-29)
담화복음서들에서는 예수가 말하고 제자들, 특히 이 경우에는 베드로와 야고보가 질문을 한다.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대화나 담화 현상만이 아니라 그 모두가 부활 후에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예 역시 부활 후에 일어난 이야기로서 이번에는 질문자가 바톨로뮤, 마리아, 마태오, 필립, 그리고 도마이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The Sophia of Jesus Christ)로서, 역시 나그 함마디(III,4)에서 발견된 문서이며 1세기 후반의 것이다(NHLE 222-223).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후, 그의 열두 제자들과 일곱 여자들은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로서 갈릴리 산으로 갔다... 구세주께서 나타나셨는데, 예전의 형태가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으로 나타나셨다. 그 모습은 빛의 천사와 닮았다... 그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나는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 모두 놀랐으며 무서워했다. 구세주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필립이 말하기를... 구세주께서 말씀하시기를... (The Sophia of Jesus Christ 90.14-92.6)
전기복음서들이 부활 전에 20장에 걸쳐 이야기를 전한다면, 담화복음서들은 부활 후에 20장에 걸쳐 이야기를 전한다.
전기-담화복음서(傳記-談話福音書, Biography-Discourse Gospels)
네 번째 형태를 전기-담화복음서들이라 이름 붙인 것은 그 혼성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두 가지 예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매우 다르다. 첫 번째는 {사도들의 편지}(Epistula Apostolorum)이다. 이 문서의 담화부분은 그 전기부분보다 훨씬 길지만, 이 편지는 담화를 전기 속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두 번째 예는 {요한의 복음설교}(John's Preaching of the Gospel)이다. 이 문서의 전기부분은 그 담화부분보다 약간 길지만, 이 문서는 전기를 담화 속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2세기 중엽 내지 말기에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도들의 편지}는 현재 매우 초기의 콥트어 번역과 매우 후대의 에디오피아 번역만 남아 있는데(NTA I.252-278), 현재 남아 있는 51개의 단락 가운데 9개가 전기부분이다. 즉 {사도들의 편지} 앞부분(3-12a)은 정경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 생애와 죽음, 매장과 부활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 요약은 사실상 기적들의 목록이다. 그것은 동정녀 잉태와 베들레헴 출생에서 시작하여 예수가 글짜를 배우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고 언급한 후, 가나의 혼인잔치, 혈루병 앓는 여인, 군대 귀신들을 돼지들 속으로 쫓아낸 기적,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열거한다. 그 결말은 본디오 빌라도와 아켈라우스(안티파스?) 치하에서의 십자가 처형, 매장, 무덤을 찾은 여인들(과 예수의 나타남), 제자들의 불신, 그리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남, 그리고 베드로, 도마, 안드레의 의심으로 끝맺는다. 이처럼 짧은 부분에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이 빠르게 요약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 전체(13-51)는 부활 이후의 대화로서 부활한 예수("그가 말씀하시기를")와 사도들("우리가 말하기를") 사이에 계속해서 오가는 대화이다. 아래 본문(12a)은 전기복음이 담화복음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만져봄으로써] 그가 육체로 [다시 살아났는지를] 정말로 알아보려 했는데,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못 들고, 우리가 믿지 [못한] 우리의 죄를 고백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일어나라. 나는 너희에게 하늘 위에 무엇이 있는지, 또 하늘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하늘 나라에 있는 너희의 안식을 보여주겠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께서는] 너희들과 또 나를 믿는 사람들을 데려갈 권능을 주셨다... 우리는 대답하기를 ...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 우리는 말하기를 ... (Epistula Apostolorum 12)
예수는 심지어 {사도들의 편지} 31-33에서, 바울이 교회를 핍박할 것이며 회심하여 이교도들을 위한 사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담화부분 전체에서 예수와 대화하는 제자들은 모두 합창하듯 "우리"로 기록되어 있을 뿐, 특정한 제자가 질문자로 뽑히는 일이 없다.
이런 혼성형태의 두 번째 예는 보통 {요한의 복음설교}라 불리는 2세기 초엽의 자료로서 지금은 {요한행전}(Acts of John) 87-105 (NTA 2.179-186)에 들어 있다. 이 문서는 그 두 형태가 특출나게 융합된 아름다운 본문이다.
첫째 부분(Acts of John 88b-96)에서 예수의 지상생애가 요약되어 있지만, 그의 몸의 비실재성이 강조되어 있다. 이 비실재성은 네 가지 점에서 드러나는데, 그 각각이 두 번씩 언급되어 있다(NTA 2.180-181). 첫째로 예수의 몸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계속 변한다. 세배대의 아들들이 예수를 바닷가에서 보지만, 처음에 야고보는 "아이"를 보고 요한은 "잘 생기고 명랑한 모습의 남자"를 본다. 나중에 그들이 배를 해변에 댈 때, 요한은 예수가 "대머리이지만 턱수염이 긴" 모습을 보는 반면에, 야고보는 "턱수염이 나기 시작한 젊은이"를 본다. 둘째로, 요한은 "예수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이 언제나 눈을 뜬" 모습만을 보았다. 하루는 밤에 실제로 요한이 잠든 척 하고 있을 때, 예수에게 "그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셋째로, 예수의 몸은 자그마하고 동시에 거구였다. "그는 때때로 작고 볼품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를 들어, 변모산에서 예수는 "그 머리가 하늘까지 뻗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서자 "작은 사람으로 나타났다." 넷째로, 예수의 몸은 "또 다른 이상한 (특성을) 갖고 있어서, 내가 식탁에서 비스듬히 앉아 있을 때, 그는 나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도록 하곤 했는데, 내가 그에게 착 달라붙으면, 때때로 그의 가슴은 부드럽게 느껴졌지만, 어떤 때는 바위처럼 딱딱했다." 여기서도 두 번째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또 다른 영광을 알려줄 것이다. 때때로 내가 그를 만지려했을 때 나는 물질적인 단단한 몸을 느꼈지만, 어떤 때는 그의 몸이 빗물질적이며 비육체적인 것으로서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몸인 것처럼 느꼈다."
한편 두 번째 부분(Acts of John 97-101)은 십자가 처형 당시에 일어난 내용이다. 이 복음에서는 그 몸의 비실재성의 결과로서, 수난을 당하고 죽은 것은 예수의 실재가 아니라, 단지 상징으로만 그러했다고 요한은 주장한다(NTA 2.184-185).
나는 그가 수난 당하는 것을 보고 그냥 견딜 수가 없어 올리브 산으로 도망쳐 눈물이 나오는 대로 한없이 울었다. 그가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렸을 때, 제6시에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 나의 주님은 그 동굴 한복판에 서서 빛을 비추며 "요한아, 저 아래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위해 내가 십자가에 달렸으며 창과 갈대로 찔렸고, 식초와 담즙을 마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잘 들어라. 내가 너로 하여금 이 산 위에 올라오도록 마음먹게 한 것은 제자가 그 선생이며 하느님의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네가 듣게 하려 함이라. (Acts of John 97)
이것은 부활 이후의 예수가 표준적인 담화형태의 복음을 시작한 것처럼 들리지만, 여기서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가 의미가 없는 이유는 오직 한 예수만 있기 때문인데, 그 예수는 몸을 입은 존재이기도 하며 동시에 몸을 입은 적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예수의 다음 설명은 이 파라독스를 주장한다(NTA 2.186).
너희는 내가 수난을 겪었다고 들었으나 나는 수난을 겪지 않았다. 나는 수난을 겪지 않았지만, 그러나 나는 수난을 겪었다. 나는 창에 찔렸으나 나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나는 나무에 매달렸으나, 나는 매달리지 않았다. 나로부터 피가 흘렀으나 피가 흐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는 겪지 않았으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나는 겪었다.(Acts of John 101)
예수의 설명은 두 개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다. 즉 나무로 만든 십자가(Cross of Wood) 위에서는 그의 비실재성이 수난을 겪었지만, 빛의 십자가(Cross of Light) 위에서는 그의 실재가 계속 수난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전자는 몸의 일시적인 수난이다. 후자는 하느님의 항구적인 수난이다. 하느님은 사실상 사지가 절단되었으며, 그 부분들은 마치 빛의 조각들처럼, 이 땅 위에 몸들 속에 분산되었다. 그 모든 지체들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하느님은 사실상 빛의 십자가 위에서 수난을 겪고 있으며 찔림을 당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Acts of John 102-104)은 예수의 승천에서 시작된다. "그는 하늘로 들려 올려졌는데, 무리들 가운데 그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요한은 자신의 주석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의 기본적인 해석 원리는 "내가 이 한 가지 일을 내 마음 속에 단단히 새겨두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이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상징과 섭리로서 하셨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위와 같은 파라독스, 즉 예수는 (나무)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수난을 겪지 않았지만, (빛의) 십자가 위에서는 항상 수난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의 상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이 겪는 현재의 박해는 우리의 영의 박해를 위한 상징으로서 중요한데, 현재의 박해로 인해 우리가 (나무) 십자가에 달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빛의 십자가 위에 달려 있다고 요한은 말한다. 즉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수난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아름답고 가슴에 사무치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 몸과 (상관없이) 인간이 되신 그분을 (예배하자).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감옥 속에, 무덤 속에, 굴레와 지하감옥 속에, 치욕과 모욕 속에, 바닷가와 마른 땅 위에서, 고문, 정죄, 음모와 처벌 속에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살펴보자. 한 마디로, (나의) 형제들아, 그분은 우리 모두와 더불어 계시며, 수난 당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스스로 수난을 당하시며, 갇힌 사람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분 자신의 자비를 통해 우리를 도우신다.(Acts of John 103)
이 복음형태는 오늘날 독자들에게 매우 이상스럽게 들릴 것이지만, 바로 그 이상함이 이 네 가지 복음 형태의 가장 중요한 관건을 드러낸다.
복음 형태들의 싸움
네 가지 복음 형태들은 복음의 가능성들에 대한 평온한 목록이 아니라 그 형태들의 싸움이다. 그 싸움의 핵심에는 전기복음서들과 담화복음서들 사이의 충돌이 있는데, 그 싸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기초적이며 고대의 논쟁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필요하다.
첫째로, 고대 사상에는 한편으로 몸, 육신, 혹은 물질 세계와 다른 한 편으로 영, 혼, 혹은 비물질적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단층이 있었다. 그 분리에 대해 적절한 용어를 확정하는 것, 즉 그 분리를 받아들이는 입장과 그것을 거부하는 입장에 대해 적절한 용어를 확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부터 단지 그 용어들보다는 그 개념들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주장하겠다. 나는 서문에서 이 주제에 대해 처음 언급할 때, 육신과 영혼의 분리를 받아들이는 입장과 거부하는 입장에 대해 육신혐오(肉身嫌惡, sarcophobia)와 육신애(肉身愛, sarcophilia)라는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39쪽 참조). 육신혐오, 즉 육체 대 영의 분리를 주장하는 반육체적 입장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육신을 영에 비해 하찮은 것, 혹은 부적절한 것으로 보는 형태로부터, 육신을 영의 방해물, 혹은 영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는 입장, 그리고 육신이 영에 적대하는 것, 혹은 악한 것으로 보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이런 경향의 한쪽 끝에는 육신이 영을 끈질기게 혼란시키는 것 혹은 타락시키는 것으로 보는 철학적 인간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육신이 영을 바보로 만드는 마약, 혹은 악한 대적자로 보는 신화적 우주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에 육신애, 즉 육체와 영의 연결을 주장하는 친육체적 입장은 위의 경향에 대해 어느 입장이든 반대했다.
둘째로, 위의 입장에 근거한 또 다른 전제가 있었다. 현대인들은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 신과 인간, 불멸과 가멸이 선험적으로 서로 분리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세계는 신, 여신, 영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이들은 마치 우리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스타일을 바꾸듯이, 다양한 형태와 모습을 지닐 수 있었으며 육체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신들과 여신들은 때에 맞추어 물질적 형태, 동물의 형태, 혹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몸들은 모두 사실상 실재적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외견상으로만 실재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꼭두각시 조종자가 서로 바꾸어가면서 조종하는 꼭두각시들과 같았다. 신들이나 여신들이 육신을 입을(성육) 수 있었으며 실제로 육신을 입었는가? 물론 그럴 수 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으로, 현실적으로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 허깨비 같은 환상적 몸들의 비실재성을 알아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육신을 입었는가(성육하였는가)? 물론 아니었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인간 육신의 부적절함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적인 육신의 비실재성 때문에 최초의 기독교는 예수에 대해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안게 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은 고대 세계의 거대한 단층선 위에 서게 되었는데, 그 단층선은 물질세계 전체와 그 속의 모든 인간들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제는 예수에 초점을 맞춘 단층선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는 물론 인간이었다고 인정하고, 그가 신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우리와 반대되는 물음을 갖고 있었다. 즉 그들이 예수가 신이라고 믿었다면, 그들의 물음은 그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의 몸이 어떻게 허깨비 같거나 환상적인 것이라기보다 실재적인 것이 될 수 있었는가? 그의 몸은 단지 몸처럼 보인 것(a seem-to-be body)이 아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그의 몸을 보았으며, 들었으며, 심지어 만졌다는 사실을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사실상 이 땅에 사는 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해 하나의 명백한 대답을 탁월하게 찾아낸 것은 그레고리 라일리(Gregory Riley, 1998)였다. 예수는 신(god)이나 영(spirit)이 아니라 영웅(hero)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신과 인간의 결합에 의한 인물이기 때문에, 반신반인(半神半人)이며 사실상 진실로 각각 반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실제적이며 진정한 죽음 후에 천상의 불멸의 존재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승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고대인들 가운데 누가 영웅으로서의 예수를 넘어 영으로서의 예수, 혹은 신으로서의 예수로 인정하고 싶어했다면, 그의 육신의 비실재성과 그의 몸의 도깨비 같은 환상을 불가피하게 동시에 해결해야만 했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신이라면, 그의 몸이 완전히 또한 확실하게 육신을 입었다는 의미에서 실재했으며 성육하였는가, 아니면 그의 몸이 비실재였으며 도깨비 같은 것으로서 단지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인 가현적 몸(docetic body, 그리스어 dokein, 즉 "처럼 보인"에서 온 말)이었는가? 이런 해석의 충돌을 설명하는 한 방식은 성육신적 기독교(incarnational Christianity)가 가현적 기독교(docetic Christianity)와 맞섰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보편적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가 영지주의 기독교(Gnostic Christianity)에 맞섰던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인데, 내가 이 책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용어들은 너무 많은 역사적 논쟁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에 그 서술적 정확성은 너무 적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존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 특정한 이분법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이름을 붙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고대의 저자들과 현대의 독자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의 의식은 크게 이교도, 유대교, 기독교로 갈라진다. 또한 그 갈라짐 때문에 그 강력한 이분법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고대세계로부터 현대 문화까지 연장된다. 그 당시와 현재에서 그 이분법이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그 이분법에 대해 특정한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즉 인간을 육신과 영이 연결된 것으로 보는 육신애적이며 수도원적인 감각과, 인간을 육신과 영이 분리된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이며 육신혐오적인 감각 사이에 균열이 있는 것이다. 이런 균열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균열은 한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까지 다양한 선택의 폭을 지니고 있다. 예수의 육신의 실재성과 중요성에 관한 이 균열은 사실상 역사적 예수의 중요성에 대한 관건으로서, 복음형태들 사이의 충돌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그것은 육신애적 기독교(sarcophilic Christianity)의 전형적 복음서들인 전기복음서들과 육신혐오적 기독교(sarcophobic Christianity)의 전형적 복음서들인 담화복음서들이 어떻게 서로 반대하였는지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또한 말씀복음서들, 즉 보다 초기의 복음서들로서 전기복음서들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담화복음서들로 발전할 수 있었던 말씀복음서들이 그 애매성 자체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는지도 설명해준다. 즉 말씀복음서들은 이처럼 서로 반대되는 복음서 형태들 가운데 어느 것 속에 통합될 운명이었는데, Q 복음은 전기복음서 속으로, 도마복음서는 담화복음서 속으로 통합되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혼성적 전기-담화복음서들을 설명해준다. 한편으로 {사도들의 편지}는 론 카메론(Ron Cameron)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신학적 무기를 통해 그 대적자들과 싸우려 했던 많은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었던 계시문학 형태를 흉내낸 것이다"(132). 다시 말해, 만일 육신혐오적 기독교인들이 담화복음서들을 사용했다면, 육신애적 기독교인들은 전기-담화복음서들을 갖고 대응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요한행전} 87-105에 나오는 지상의 예수, 혹은 전기적 예수는, 비록 상징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실재적이며 가현적인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경이 전기복음서 형태의 네 가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그 네 정경복음서들을 규범적인 것으로 만들뿐 아니라, 바로 그 전기복음서 형태도 규범적인 것으로 만든다. 전기복음서들은 완전히 몸을 입은 예수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반면에, 담화복음서들은 그 강조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주장한다. 한편 독자들이 여전히 이런 점들에 대해 매우 기이하게 생각할 경우, 나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하겠다. 만일 독자들이 예수와 5분 동안 만날 수 있는데, 오래 전 과거 역사의 5분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지금 현재 천상의 5분을 선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규범적 형태로서의 정경복음서들
우리의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잠시 고백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 나 자신의 종교적 감각은 육신혐오적 기독교보다는 육신애적 기독교 쪽이라는 점을 곧바로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담화복음서들이나 전기-담화복음서들보다는 전기복음서들을 선호한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육신혐오적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그들을 부당하게 묘사할 생각은 없으며, 그들을 박해하는 것이 최상의 설득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또한 기독교 신학의 역사는 오랜 기간에 걸쳐 육신혐오적 감각이 서서히 육신애적 감각에 대해 승리한 역사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나는 정경의 규범성 내에서 신학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다. 즉 정확히 어떻게 단 한 가지 형태로서의 그 네 복음서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규범적인 것이 되어 그들이 그 유산 속에서 살려고 했으며 자신들의 권위를 그 유산 속에서 찾게 되었는가? 규범이 된 것은 단지 그 내용만이 아니라 특히 그 형태이다. 그 정경 복음서들은 단순히 부활한 예수의 네 담화들, 즉 그 각각이 절대적으로 정통적이며 공식적으로 인증된 교리들을 설명해주는 담화들이 아니다. 그런 본문들은 아무리 그 내용을 문제삼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정경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그 결정은 기독교의 미래와 기독교의 탄생에 대한 나의 관심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었다. 정경복음서들 각각은 20년대 말의 역사적 예수에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만, 그 각각은 예수로 하여금 (복음서 기자들이 글을 쓸) 당시의 상황과 그 공동체에 대해 직접 말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 정경복음서들 각각에는 당시와 현재(then-and-now)의 변증법, 현재로서의 당시(then-as-now)의 변증법, 즉 현재 부활한 예수로서의 당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 then as the risen Jesus now)의 변증법이 있다. 당시의 역사적 예수만이 아니며, 현재의 부활한 예수만이 아니라, 그 둘이 현재의 신앙 속에 하나로 있는 것이다. 이 똑같은 과정은 언제나 동일하지만, 언제나 약간 차이가 있는, 혹은 큰 차이가 있는 결과를 내놓는다. 예를 들어, 예수의 고뇌에 관해 얼마다 서로 다른지에 대하여, 마르코 14장에는 (게쎄마네) 동산이 없으며, 요한 18장에는 고뇌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여전히 당시와 현재의 변증법은 유지된다. 나의 주장은 정경복음서 형태가 규범적인 것인 일차적으로 그 변증법적 과정으로서 규범적이라는 것이다. 그 복음서들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한 예수 사이에 상호작용을 일으켰으며, 그 상호작용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계속 되풀이되어야만 한다.
나는 정경복음서들을 그 이후의 모든 기독교 담화, 즉 현재의 예수로서의 당시의 예수(Jesus-then as Jesus-now)의 변증법의 규범적 모델로 간주한다. 그 복음서들은 단지 결과(그들의 기능)로서만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과정(그들의 방법)으로서도 규범적이다. 그 복음서들은 항상 유일한 역사적 예수, 즉 20년대 말의 팔레스타인의 예수에게 되돌아간다. 그 예수가 부활한 예수로 경험되는 방법은 다양한데, 정의와 평화를 통해서,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명상과 신비주의를 통해서 경험된다. 그러나 그 경험된 예수는 언제나 반드시 그 예수이며 다른 누구일 수 없다.
뉴스위크(Newsweek), 타임(Time), 유에스 뉴스 앤 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 등의 잡지들은 1996년 4월 8일자 부활절 특집에서 모두 역사적 예수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뉴스위크는 특집 제목을 "부활을 다시 생각함: 부활한 그리스도에 관한 새로운 논쟁"을 잡았다. 그 제목은 예수가 팔을 들고 손바닥을 앞으로 한 채 하늘로 올라가는 그림을 가로질러 놓였다. 그 그림을 보고 즉각 이상하게 느낀 점은 그처럼 분명하게 보이는 팔과 발에 아무런 상처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 잡지사가 부활 그림 대신에 변모산 그림을 잘못 사용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라파엘이 그린 그 바티칸 그림에는 물론 상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예수의 죽음 이전의 사건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에스 뉴스 앤 월드리포트는 정확한 그림을 사용했다. 그 표지에는 "예수를 찾아서: 그는 누구였는가? 그의 생애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평가?"라는 제목이 벨리니의 부활 그림(예수의 오른 손의 상처가 분명히 보이는 그림)을 가로질러 있었다.
다시 되풀이하지만, 언제나 한 예수만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 예수는 부활한 예수로서의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 as risen Jesus)이다. 그 시금석은 그 부활한 예수가 여전히 십자가 처형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 복음, 예술, 신비주의에서는 그 대답이 분명히 '예스' (yes)이다. 그러나 그 상처는 역사의 표시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에 관해 알아야만 한다.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에 관해 알아야만 한다. 그의 생애를 잘못 안다면, 예수는 적절한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될 수 있거나, 그의 처형자들이 닥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한 잔인한 자들이었을 수도 있다. 각각의 기독교인 세대들은 그 정경복음서들을 첫 번째 모델이며 최초의 본보기로 삼아, 자기 세대에 맞는 복응서들을 새롭게 써야만 하는데, 우선 철저하게 정직하게 그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한 다음, 그 재구성이 이 세상 속에서의 현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살아내야만 한다. 역사와 신앙은 언제나 육신애적 기독교를 위한 변증법이다. 달리 말해서, 예수의 몸의 부활에 대한 주장은 예수의 역사의 항구성에 대한 나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언제나 그것은 신앙을 통해서 본 역사이다.
깊은 우물 속의 우리 자신의 얼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우물 위 정(井)자 테 옆에 무릎을 꿇어
언제나 빛을 가려 우물 깊은 곳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 물 위에는 여름 하늘에 신처럼 보이는 나의 모습
밝게 비치는데,
화관을 걸치고 구름 모자를 쓰고 올려다보네.
한번은 우물 위 정(井)자 테에 턱을 문지르다
그 그림 너머, 그 그림을 통해
하얗고 불확실한 어떤 것, 더욱 깊은 어떤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네.
Robert Frost, "For Once, then, Something"(91)
흔히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단순히 깊은 우물 속을 내려다보면서 그 아래에 비친 자신의 반영을 볼 따름이라고 도매금으로 조롱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내가 도매금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 다른 사람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런 조롱으로 간단히 치부되지 않을 수 있는 재구성이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당신의 예수가 묵시종말적이라면 당신은 다가오는 천년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당신의 예수가 치유자라면 당신은 빌 모이어즈(미국의 교육방송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대담자로서 조셉 캠벨과의 대담을 엮어 {신화의 힘}을 출판했다 - 역자주)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예수가 무아경에 빠진 인물이라면 당신은 두뇌화학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조롱할 것이다.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몰아붙인다면 거기서 벗어날 주장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셋째로, 그렇게 쉽게 조롱하는 사람들은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에밀리 디킨슨의 다음 경고(3.970, no. 1400)를 귀담아 듣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물에는 얼마나 신비가 스며있는가!
그러나 자연은 아직도 이방인이라오.
그녀를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유령 나오는 집을 지나간 적이 없으며
그녀의 유령을 단순화했던 적도 없다네.
역사적 재구성의 두 가지 대안적이며 서로 반대되는 방식, 즉 하나는 불가능한 망상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가능한 착각인 방식을 상상해 보라. 가능한 착각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이것은 당신이 과거나 아니면 타자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당신 자신의 반사된 현재 모습을 볼 따름이다. 당신은 당신이 보기 시작하기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것만을 볼 뿐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현재 모습을 과거에 찍어서 그것을 역사라 부른다. 나르시시즘은 그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 얼굴을 비추는 물을 망각한 채, 그 자신과 사랑에 빠진다. 그것이 바로 위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속에 나오는 두 이미지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
그 물 위에는 여름 하늘에 신처럼 보이는 나의 모습
밝게 비치는데,
화관을 걸치고 구름 모자를 쓰고 올려다보네.
불가능한 망상은 실증주의(positivism)이다. 이것은 당신이 인식자로서의 당신 자신의 개인적 상황이나 사회적 상황에 전혀 간섭받지 않고 과거를 알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 자신의 눈과는 상관없이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당신이 영원히 단 일회적으로 과거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 과거를 순수하게 그 인식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채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증주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 않은 채 물을 볼 수 있다는 망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물의 표면을 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눈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두 이미지 가운데 두 번째 것이다. 그것은 비록 단 한번이라 할지라도, 불확실하게, 애매하게, 그러나 가능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할 때이다.
그 그림 너머, 그 그림을 통해
하얗고 불확실한 어떤 것, 더욱 깊은 어떤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네.
그러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만일 그 시인의 얼굴이 하얗다면, 어떻게 "그 그림 너머"에 있는 "하얗고 불확실한 어떤 것"을 또한 "그 그림을 통해" 볼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가 본 것은 그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너무 이상스럽게 다르게 보여서 자신의 얼굴인 줄을 알아채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프로스트가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두 번째 이미지가 불러일으킨 세 번째 이미지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 대안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상호작용주의(interactivism)라 부르겠다. 이것은 우연하게도 내가 이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방식이다. 과거와 현재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각각이 서로를 변화시키고 도전해야 하는데, 그 이상은 서로간에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평등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우물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당신은 그 표면을 보면서 동시에 당신 자신의 흔들리는 얼굴, 뒤틀린 얼굴을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두 가지 명백한 이미지들 뒤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세 번째 이미지이다. 그 시인이 본 것은 그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너무 이상스럽게 다르게 보여 그가 자신의 얼굴로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하얗고 불확실한 어떤 것"이며 "더욱 깊은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그림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 그림을 통해" 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여진 그림이었다. 이것이 상호작용주의의 변증법으로서, 나르시시즘이나 실증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가능한 것이며 또한 필요한 것이다. 다음 두 가지 고전 연구에 대한 검토가 이 상호작용주의의 실례와 경고로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에 관한 것이다. 로널드 멜러(Ronald Mellor)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뀐 것에 대한 네 가지 중요한 해석에 관해 타키투스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가장 위대한 로마사가들인 기본(Gibbon), 몸센(Momsen), 로스토브체프(Rostovzteff), 그리고 사임(Syme)은 로마와 자신들의 시대와 연결에 대해 자신들이 본 것을 열정적으로 기록하였다... 에드워드 기본은 프랑스 계몽주의를 통해 자신의 종교관에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불온한 부분을 삭제한 판을 내는 것으로 끝났다. 테오도르 몸젠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일한 전문 역사가로서 여러 권으로 된 정열적 {로마사}(History of Rome)를 썼는데, 그 책에서 씨이저가 공화정 로마의 딜렘마를 해결하기 위한 불가피한 인물로 그려진 것은 몸젠 자신이 19세기 독일의 혼란을 해결할 독재자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미카엘 로스토브체프는 그의 {로마제국의 사회경제사}(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Roman Empire, 1926) 속에 혁명에 휘말린 성 피터스버그를 도망친 자신의 입장, 즉 로마시의 브루조아지에 대한 찬양을 담았다. 그리고 로널드 사임 경의 {로마의 혁명}(The Roman Revolution, 1939)은 아우구스투스의 등극을 자유주의자의 관점, 즉 이탈리아를 방문해 새로운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가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제국의 명칭들과 장식물들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타키투스의 방식대로 그 두 개의 체제 사이에 폭력적 유사성을 폭로하고자 원했던 자유주의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45, 164). 이 모든 주장들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확고한 사회적-인간적 상호작용을 통해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저술은 고전적이며 또한 전형적이다. 물론 로마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뀐 것에 대한 여러 주장들을 통해 각각을 바로잡아준다.
두 번째 사례는 초기 기독교 미술의 역사적 재구성에 관한 것이다. 토마스 매튜스(Thomas Mathews)는 "황제 신비화 장치(Emperor Mystique)가 어떻게 기독교 이미지의 발전을 설명하는 주도적 이론이 되었는지"를 논의하면서, "그리스도를 황제로 해석할 필요성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 관해 설명하는 것보다 그 관련된 역사가들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이 이론을 세운 것은 1-2차 대전 사이의 매우 독창적이며 대담한 세 명의 유럽 학자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들은 부유한 상인 가문의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중세 연구가인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 헝가리의 시골 의사의 아들로서 고고학자였던 안드레아스 알펠디(Andreas Alf ldi), 그리고 러시아 이민자로서, 그의 가족이 마지막 짜르(Czars) 아래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미술사가 앙드레 그라바(Andr Grabar)였다.... 이 위대한 세 명의 학자들의 생애와 저술의 한 개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제국에 대한 향수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장한 세 개의 제국, 그래서 그들이 방어하기 위해 용기 있게 싸웠던 제국이 1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의 끔찍한 혼란 속에 수치스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짜르의 영광,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들의 권세는 결코 회복될 수 없었다(16, 19). 매튜스는 현재와 과거의 상호작용이 초기 기독교 미술을 왜곡시켰다고 판단하고, 자기 자신이 바로잡은 재구성과 견주어 "'역사적' 예수 탐구는 예수를 그의 첫 제자들의 원망사고(wishful thinking)의 산물로 환원시키기 쉬운 작업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는 별 수 없이 그와의 만남을 통해 매우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왜곡된 인상들을 자세히 검토하는 일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만큼이나 파악하기 어렵다. 기록된 자료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시각적 형상에서도 그리스도는 많은 외관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누가 그를 시각화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를 표현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준 인상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지금까지는 그가 신자들의 가슴 속에, 신비가들의 비전 속에, 설교자들의 언어 속에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가 돌과 회화 속에 살아 있어야만 한다"(21-22). 역사적 재구성은 언제나 현재와 과거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최상의 이론들과 방법들조차도 여전히 우리의 최상일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틀렸을 때만이 아니라 심지어(또한 특히) 옳은 것일 때에도 (시간이 지나면) 낡은 것으로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적 재구성은 중요한 일이 관련될 때, 다시 새롭게 작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역사가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자신도 낡아 사라진다고 해서 인생이 무가치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나는 상호작용주의에 대한 이런 이해로부터 두 가지 결론을 얻는다.
첫 번째 결론은 탐색(search) 혹은 탐구(quest)라는 용어에 관한 것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내가 역사적 예수 탐색이나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탐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 용어들은 우리가 한번 유일회적으로 영원히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과정을 시사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과정에 대해 상상하는 방식이 아니다. 대신에 나는 재구성(reconstru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재구성은 시대와 장소, 집단과 공동체에 따라 되풀이되는 것이며, 매 세대마다 다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런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이제부터 어느 장소와 시대이든 최상의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대해서 말하겠다.
최근에 토마스 라이트(N. Thomas Wright)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 가지 탐구를 구분했다. 첫 번째 탐구는 라이마루스로부터 슈바이처까지 이르는 탐구로서 대략 1700년부터 1900년까지의 탐구였다. 두 번째 탐구 혹은 새로운 탐구(New Quest)는 에른스트 케제만이 그의 스승 루돌프 불트만의 저작에서 역사적 예수를 제외한 것에 대한 반발로 1953년에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탐구가 실제로는 진행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번째 탐구가 그 선언을 결코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나를 포함한 많은 오늘날의 학자들이 단순히 "다시 시작한 '새로운 탐구'"(renewed 'New Quest')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폐기된 과거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세 번째 탐구는 사실상 라이트 자신을 포함해서 약 20명의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그 학자 집단을 위해 세 번째 탐구라는 이름을 지어냈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예수 연구의 사실상의 선봉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1996:84)이라는 것이다. 이런 구분법이 우스운 무례함인지 아니면 성가신 교만인지 판단할 수 없기에, 나는 단지 두 가지 점만 간단히 논평하겠다. 탐색이나 탐구 같은 용어에는 실증주의적 망상이 따라붙는다. 즉 역사적 예수는 성배(聖杯)처럼 한번 유일회적으로 영원히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왜 라이트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세 번째 탐구에 넣고, 자신의 집단을 네 번째 탐구에 넣지 않는지 의문스럽다. 바꿔 말해서, 라이트는 미래의 네 번째 탐구, 그 다음에는 다섯 번째 탐구, 여섯 번째 탐구 등등을 상상하는가? 실증주의적 망상은 세 번째라는 용어에도 따라붙는가? 인도-유럽의 민담에서는 세 번째가 마지막이고 완성이다. 영웅은 두 번 실패할 수는 있지만 세 번째는 성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오직 민담이나 동화에서만 일어난다.
두 번째 결론은 방법에 관한 것이다. 나는 예수에 대한 재구성이 다른 재구성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창조적인 상호작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와 그들의 변증법이 가능한 한 공정하고 정직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법이며, 방법이며, 또다시 방법이다. 방법은 우리에게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자의식적이며 자기비판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전술이다. 방법은 결코 우리의 현재의 피부와 몸, 두뇌와 가슴, 사회와 문화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은 우리가 정직성을 위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희망이다. 방법은 역사의 당연한 과정이다. 이 때문에 나는 다시 라이트에게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용어대로 "비판적 현실주의"(critical realism), 그리고 내가 말하는 "상호작용주의"에서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만, 그 개념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대답은 당신의 주제를 보호하는 방법, 즉 대화로부터가 아니라 위반으로부터 보호하며, 토론으로부터가 아니라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을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를 들어, 나는 {역사적 예수}의 부록에 예수 전승에 대한 나의 전체 자료목록(inventory)을 그 독립적 출처와 전승층의 위치로 구분하여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그 책에 두드러진 포스트모던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 재료의 방대한 자료목록은 철저히 모더니스트의 작품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 평신도들에게는 그 책의 중요한 논증을 위한 확고한, 거의 실증주의적인 기초로 보인다"(1996:50)고 했다. 포스트모던 감각, 즉 당신 자신의 역사성과 당신의 주제의 역사성을 동등하게 인식하는 감각은 방법에 대한 주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한다. 법정에서 적법한 과정이 변호인과 검사 사이의 법적인 상호작용을 공정하게 유지시키는 것처럼, 적법한 방법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역사적 상호작용을 정직하게 유지시킨다. 그러나 나의 저술에서는 역사적 예수, 혹은 최초의 기독교에 대해 당신이 단 한번에 영원히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외람된 태도는 없다. 그것은 예수 혹은 기독교가 특별하거나 독특하기 때문이 아니다. 계속해서 중요한 과거는 결코 반복되는 재구성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내가 도전하는 것이다. 육신혐오적 기독교와 구분되는 육신애적 기독교는 역사와 신앙 사이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은 정경의 복음서 형태들에서 그 규범적 모델을 갖고 있으며, 그 전형적 사례를 그 네 개의 복음서 본문들 속에 갖고 있다. 그 정경 복음서들은 1세기의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통해 당시의 예수(Jesus-then)가 어떻게 현재의 예수(Jesus-now)가 되었는지, 어떻게 역사적 예수가 부활한 예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신앙 없이 역사를 가질 수는 있지만, 역사 없이는 신앙을 가질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세대들마다, 역사적 예수는 새롭게 재구성되어야만 하며, 그 재구성은 신앙에 의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얼굴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이것이 이상스럽게 보인다면, 다음의 비슷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안에서 성서는 본문이 된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made text)인데, 이것은 마치 예수가 육신이 된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made flesh)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전통이 성서의 어느 한 사본을 공식적이며 정경적인 사본이라고 선언한 것은 확실히 가능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즉 4세기에 송아지 피지(皮紙) 759장에 각 장마다 3 칼럼(column)으로, 각 칼럼마다 42줄로 기록된 사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라. 그 3 칼럼으로 기록된 사본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영원히 드러낸 것으로서, 변치 않으며 영감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선포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히브리서 1장3절의 왼쪽 여백에, 선배 필사자의 작업에 대해 "멍청하고 무뢰한 놈, 본문을 변경시키지 말고 옛 본문만 그대로 남겨둘 수는 없었는가"(Metzger 1981:74)라고 분노의 코멘트를 달아놓은 필사자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초기의 시대로부터 전해진 사본들 가운데 이집트의 사막에서 갈가리 찢겨진 본문이 남았는지, 아니면 전체 본문이 남았는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학자들이나 본문 비평가들이 생각한 것이 역사적으로 보다 정확한 원본이라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티칸 사본이 유일회적으로 영원히 그것(보다 정확한 원본)이었을 것이다. 본문이 된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의 변덕, 고고학자들의 발굴, 농부들 혹은 목동들의 갑작스런 발견들로부터 안전했을 것이다.
내 책상 위에는 1993년 미국성서공회가 출판한 {헬라어 신약성서}(The Greek New Testament) 4차 개정판이 놓여 있다. 이 책은 그 편집위원회가 원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을 보여주며, 다른 독법(讀法, alternative readings)은 각주에 실려 있다. 논란이 되는 독법에 대해서는 그 편집위원회가 "본문으로 채택될 확실성의 정도를 등급별로 표시하는" A, B, C, D가 표기되어 있다. 브루스 메츠거(Bruce Metzger)는 그 편집위원회의 등급표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는 그 본문이 거의 확실하다는 표시이며, {B}는 그 본문으로 선택된 독법에 관해 약간의 의문이 있다는 표시이며, {C}는 그 본문 혹은 각주에 훨씬 나은 독법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관해 상당한 정도의 의심이 간다는 표시이며, {D}그 본문으로 선택된 독법에 대해 매우 많은 의심이 간다는 표시이다. 실제로 {D}로 결정된 것들 가운데는 때때로 다른 독법들 중에 어느 것도 원문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장 덜 불만족스러운 독법을 표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1971:xxviii).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특정한 파피루스나 특정한 위원회의 투표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과 신앙, 역사와 신학은 그 과정에서 함께 엮어지며, 결코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다.
본문이 된 하느님의 말씀처럼, 육신이 된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재구성은 기독교 신앙과 뒤섞여, 그 어느 것도 다른 것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꼭 그런 방식은 아니었다는 점을 주장한다. 역사를 볼모로 내어준 것은 육신혐오적 기독교와 구분되는 육신애적 기독교였다. 지금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역사, 특히 기독교 신학사는 육신혐오적 기독교가 육신애적 기독교에 대한 점진적인 승리가 아니었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