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지도부 여성대표…가족 5명 끌려가 모진 고초
한겨레
» 1980년 5월21일 광주 도청 앞 금남로 일대에서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 진압군과 시민 시위대들이 대치하고 있다. 그날 밤 군대를 물리치고 도청을 접수한 시민들은 마침내 항쟁 지도부를 꾸린다. 정현애·김상윤 부부의 녹두서점은 사진 오른쪽 건물들 뒤쪽 구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① 정현애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30돌을 맞아 ‘오월을 지켜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 그순간 그자리에 있었던 여성들부터 그날 이후 지금까지 ‘5월의 상처’를 떠안고 보듬어온 여성들, ‘5월 정신’을 잇고자 애쓰는 젊은 후예들까지, 평범한 여성들의 특별한 체험과 기억들을 통해 파란과 격정의 민주화운동사, 그 절반을 채워온 여성사를 발굴하고자 한다.


‘정현애, 녹두서점 안주인, 광주항쟁 지도부 여성대표.’

지금 그의 이름을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지부 지회장, 광주광역시 시의원 등으로 친숙하다. 그러나 1980년 5월의 기억 속에서, 그의 삶의 이력에서 무엇보다 먼저 쓰여야 할 이름은 광주항쟁 지도부 여성대표다.

5월항쟁 당시 가족이 함께 참여한 사례를 꼽는다면 정현애의 가족이 대표적이다. 남편(김상윤)은 5월17일 밤 예비검속 수감자로, 아내인 그는 항쟁 지도자로, 시동생(김상집·예비역)은 시민군으로, 시누이(김현주·양서조합)와 여동생(정현순·회사원)은 참여자로, 두 집안 5명이 모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해 5월18일 피로 물든 광주시의 한복판, 금남로 안쪽 도청에서 5분 남짓거리사회과학 책방인 ‘녹두서점’이 있었다. 녹두서점은 정현애의 단칸 신혼방이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기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암울한 시대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나누며 위로받았다. 당시 삼계중학교 교사였던 정현애는 낮에는 학교 일을, 밤에는 민주화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보석 같은 기쁨의 시간”이기도 했다.

5월17일 밤 전두환 군부의 계엄선포로 광주지역의 민주인사들과 대학생 지도자들이 줄줄이 예비검속되자 녹두서점은 서로의 안위와 정보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활동거점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이어 5월18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시작됐고 바로 서점 앞에서도 자행됐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무차별 곤봉세례에 피투성이로 쓰러지고 끌려갔다. 20일 언론은 급기야 이들을 폭도로 매도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녹두서점 뒤편에서 몰래몰래 화염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력도 없는 화염병만으로 탱크를 앞세운 진압군대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21일 낮 12시, 야만적인 발포가 감행되자 항쟁을 이끌던 사람들도 서점 문을 닫고 피신하기로 했다. 정현애도 부모의 강권과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피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는 “역사 교육자”로서 끝내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전 재산 20만원을 털어 소식지(훗날 ‘투사회보’) 제작기금으로 내놓고 서점을 계속 열어두었다. “이곳마저 없다면 연결망이 끊기는데….” 활동가들을 먼저 피신시키고 여동생과 함께 빠져나왔던 그는 몇 시간 만에 “혼자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광주시민들이 목숨을 건 투쟁으로 군인들의 무차별 폭력을 저지하자, 피신했던 활동가들이 다시 모였다. 이후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유명을 달리한 윤상원(당시 들불야학 운영자)도 그 대열에 있었다. 5월22일 시민군에 의해 도청이 접수되고 수습대책위가 꾸려지자 서점에서 상황을 처리하기엔 너무 좁아 25일부터 근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 그는 도청에서 구성된 수습대책위에 여성대표로 참여했다. 주검 수습, 전단 배포, 시민 행사 등등 그 모든 일을 함께 하면서 마지막까지 도청 사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5월27일 새벽 최후의 진압작전이 감행됐고 그 역시 체포됐다. 바로 녹두서점에서.

정현애가 끌려온 송정리 광산경찰서 유치장에는 동생 현순을 비롯해 50여명의 여성들이 잡혀와 있었다. 단지 주검을 염했다는 이유로, 학생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엉덩이가 새파랗게 멍이 들도록 맞은 여성들이었다. 가두방송을 했던 여성 시민군, 차명숙 전옥주는 ‘간첩’으로 몰려 있었다.

“유치장에서 오가다가 조사를 받고 있는 남편을 봤어요. 동생 2명에 아내, 처제까지 투쟁에 나선 탓에 남편은 더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죠. 거꾸로 매달려 있던 남편의 모습도 본 적이 있었고….” 이들 부부는 지금도 5월 무렵만 되면 혹독한 고통에 시달린다. 고문 후유증이다.

그해 9월5일 남편이 내란음모자로 조작되면서 그는 ‘구속자 가족’으로 분류돼 일단 풀려났다. 계엄사에서는 녹두서점의 간판을 강제로 바꾸게 했다. 하지만 새 이름 ‘한얼서점’도 감시와 재정난으로 일년 뒤 닫을 때까지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항쟁 관련 구속자 가족의 석방운동본부 구실을 다했다.

정현애는 87년 6월항쟁 이후 참교육운동으로 해직과 복직의 굴곡을 거쳐 지금은 지역 정치인으로 사회운동가로 여전히 ‘현장’을 지키고 있다. “5월 광주의 항쟁정신은 교육운동, 여성운동, 여성노동자운동, 여성농민운동, 지역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리/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길을찾아서] 민주여성단체 ‘송백회’ 이끌며 시민군 지원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② 홍희윤
한겨레
» 1979년 5월 송백회 창립 첫돌을 기념해 광주 부근 화순의 송석정으로 야유회를 갔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 회원들 모습은 5월항쟁 이후 거듭된 탄압으로 대부분 자료가 사라진 까닭에 거의 유일한 사진이 됐다. 뒷줄 왼쪽부터 총무 홍희윤, (한 사람 건너)김경천, 초대 회장 나혜영씨 등이다.




아들 밟혀 마지막 순간 도청 떠나
부채의식에 몸일으켜 ‘깃발’ 집필

“5월은 뭔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여전히 벌떡이고 불끈거린다. 아마도 5월 넋이 아직 잠들지 못했나 보다. 투혼…업인가 보다. 나도 그랬다. 갑자기 자다 벌떡 일어나 밤을 새우며 미치도록 뭔가를 쓰게 만드는… 그것이 깃발이다.”

‘순 서울내기 이화여대 출신 문학도’ 홍희윤(사진·필명 홍희담)이 광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당시 남편인 작가 황석영이 <장길산> 집필과 새로운 문화운동을 꿈꾸며 전남 해남으로 내려오면서부터다. 해남의 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토론을 벌이고… 그는 그 뒷바라지를 말없이 수행했다. 그러던 78년 윤한봉을 만났다. ‘합수’(똥·오줌 섞인 거름물)란 별명처럼, 윤한봉은 ‘80년 5월 수괴’로 몰려 수배·밀항·귀국·병사로 이어진 파란의 삶을 살다 떠난 ‘광주 민주화운동의 기둥이자 거름’ 같은 인물이다.

“얼마나… 그 눈빛이 말이야 아이처럼 맑고… 그러면서도 말할 때는 결의와 기운이 있었어. 열정과 자신감, 맑고 순수함,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어.”

이어 광주로 살림을 옮긴 홍희윤은 그해 12월 지역의 첫 독립 민주여성단체 ‘송백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총무를 맡은 그는 유신 반대 운동권 남성들의 부인들 친목모임으로 시작해 이듬해에는 운동단체로 조직을 넓히고 다졌다. 우선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 사업을 내걸고 매월 1회 정기 학습모임을 통해 사회과학·사회운동·근대사·정치경제사 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 나갔다. 구속 또는 수배자 가족, 교사, 시민운동가, 노동자 등 다양한 배경의 여성들이 참여했지만 목표는 ‘여성·민중 해방’을 향하고 있었다. 송백회는 특히 바자회나 그림전 등을 열어 구속자 옥바라지와 수배자 도피 자금을 꾸준히 제공했다. 그중에서도 은신처 마련은 서울에 연고가 있고 예술인들과도 인맥이 넓었던 홍희윤의 몫이었다. 그가 부탁을 할 때면 어떤 이는 아예 발도 못 들이게 했고 어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줬는데, 대체로 여성들이 훨씬 온정적이고 잘 도와줬다고 그는 기억한다.


» 홍희윤(필명 홍희담)씨
이런 조직적 활동은 80년 5월항쟁 초기부터 여성들이 모금, 대자보 작성, 투사회보 편집·배포, 깃발·리본 제작, 선전·홍보 등 투쟁의 전 과정에 적극 가담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5·18’ 그날 마침 황석영은 자신이 꾸린 극단 광대의 <한씨연대기> 공연을 준비하며 소극장 자금을 구하고자 서울로 가고 없었다. 홍희윤과 송백회 회원들은 공수부대의 만행과 진상을 널리 제대로 알리고자 1년 전 미술품 판매로 모아둔 회비를 모두 투쟁기금으로 내놓고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대 단원으로 절친했던 임영희는 홍희윤이 집을 판 돈까지 일부 보탰다고 귀띔했다. 그는 날마다 양림동에서 도청을 오가며 시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투쟁 소식을 알렸다. 당시 8살 외동아들(황호준)이 걸려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그때 만난 노동자들의 그 선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 죽음을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 꽃피던 동지애…, 홍희윤에게 그것은 평생을 안고 살아갈 자산이 됐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역사의식에 눈을 떴다.

이후 홍희윤은 두 차례나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협박을 당했다. 80년 5월항쟁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 때 송백회의 자금책으로 몰려 경찰에 시달렸다. 결국 그해 송백회는 겉으로 해체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여성 노동자들과 구속자 지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89년엔 황석영의 평양 방문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려던 안기부에서 닦달했다.

홍희윤은 인터뷰를 지독히 싫어한다. ‘나는 한 일이 없어. 그냥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야.’ 수줍게 손사래를 칠 뿐이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한 소녀 같은 열정과,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어느 5월 그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쓴 글이 바로 88년 ‘작가 홍희담’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은 5월 도청에서 살아 숨쉬었던 모든 노동자들이다.”

“예술가들은 날마다 들썩여.” 아들과 며느리까지도 모두 예술의 길을 걷고 있으니 자신만이라도 일상의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한다며 기꺼이 손주들을 보살피고 있는 할머니. 그래도 ‘5월은 그를 미치게 하는 그 무엇이다.’ 해마다 그날이 되면 한번씩 그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는 그 어떤 폭풍 같은…, 잠들지 않는, 잠들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길을찾아서] ‘임을 위한 행진곡’ 첫 녹음…“울면서 불렀다”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③ 임영희
한겨레
» 1980년 5월19일 광주 시위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이 금남로 안쪽 구역에 있던 무등고시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대입 수험생들까지 거리로 끌어내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있다. 바로 맞은편 건물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임영희는 그길로 항쟁의 대열로 뛰어든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신복진 사진>




‘광주의 진실 알리기’ 온힘
‘검은리본…’ 경계속 상연

임영희(54)가 사회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중반 광주 수피아여고 다닐 때 광주일고에서 공모한 ‘무등문학상’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문예운동가들과 어울려 기독청년운동과 학생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대학 진학 대신 양림교회의 기독청년회원들과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78년 유신헌법 반대 유인물 배포와 이른바 ‘부활절 벽화’ 사건으로, 79년에는 간첩조작사건으로 연달아 끌려가 국가폭력을 경험했다. 그 후유증으로 3개월 동안 미음으로 연명할 정도로 심신은 피폐해졌고 아버지는 지역에서 전셋집을 얻기도 힘들 정도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임영희의 민주화운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임영희를 송백회 회원 홍희윤은 이렇게 말한다. “79년쯤인가, 해남에 살 때 어디서 예쁜 아가씨들이 막 와서 말이야… 겁도 없이… 밤새 사람들이랑 눈빛을 빛내면서 얘기하더라구. … 이뻤어, 아름다웠어. 정말 열정이 있었어.”

그러나 그 열정과 아름다움은 80년 5월항쟁 이후 폭도로 몰리고 오랜 도피생활에 지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눌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 피어나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해 5·18, 임영희는 윤한봉이 소장인 현대문화연구소의 간사이자 극단 광대 단원으로, 작가 황석영의 작품 <한씨연대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19일 금남로 안쪽 골목에 있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연습실에 있던 그는 공수부대원들이 맞은편 무등고시학원까지 쳐들어가 공부하고 있던 학원생들을 진압봉으로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린 학원생들의 머리에서 선혈이 쏟아져내렸다. 너무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습에 뭐든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뛰쳐나간 그는 항쟁 초기 시위대와 합류해 항쟁 기지였던 녹두서점에서 만들어 온 화염병을 투척하거나 ‘투사회보’ 유인물을 나눠줬다. 그러다 도청이 접수되자 5월22일 이후부터는 투사회보 편집팀, 광대, 송백회 등과 함께 항쟁본부가 옮겨간 와이더블유시에이에서 궐기대회 준비물과 검은 ‘근조 리본’을 제작하며 조직적인 투쟁에 참여했다. 투쟁 지휘부가 꾸려지자 그는 기금 모금조를 맡았다. 그리고 도청에서 마지막 날을 맞았다.


» 임영희씨
‘나는 지금도 27일 그 새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이 없었고 그 적막감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유언이 될지도 모를 그 순간 방 안에 둘러앉아 최후의 막걸리 잔을 돌려마신 뒤 몇 푼 안 되는 돈을, 만약 살아서 이 자리를 벗어날지도 모를 사람들의 차비로 나눠주었습니다. 용준이도… (윤)상원이도… 그것이 마지막 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새벽 처절한 총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광주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슬퍼할 수만은 없어서 도피해서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과 ‘투사의 노래’ 테이프, ‘항쟁일지’ 제작 등으로 분주했다. 사태가 진정된 뒤 광주로 다시 내려와 부상자 현황 파악과 분류작업을 지속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광주를 알려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한 그는 술과 정신과 치료로도 달랠 수 없었던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안은 채, 그는 광주시민들이 폭도가 아님을 알리는 진실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81년 봄, 그 삼엄한 경계 속에서 연극 <누가, 검은 리본을 달았을까?>를 무대에 올렸다. 남도예술회관에서 황석영·홍성담·오정묵 등이 주도한 ‘광주를 위한 연극’이 처음 상연되던 날, 그는 홍성담이 제작한 항쟁 슬라이드 위로 김종률의 ‘검은 리본’이 울려퍼지던 마지막 순간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 당신은 하얀 수의를 입었지만… 나는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

그해 겨울 광주 운암동 황석영·홍희윤의 집 2층 서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처음 불러 녹음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오정묵이 첫 소절을 부르고, 그가 “산 자여 따르라”를 울면서 불렀다. ‘노동 열사’ 고 박기순과 ‘마지막 시민군’ 고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노래굿 형식으로 표현한 이 테이프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에서 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패배의식을 떨쳐버리고 전진하는 새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처음 녹음할 때만 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주화 선봉에서 민중 애국가로 불려질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오늘도 잠 못 드는 밤이면 혼자 이 노래를 부른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길을찾아서] 광주의 가슴에 리본 달았던 ‘지명수배’ 여성대표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④ 이윤정
한겨레
» 1980년 5월27일 진압작전 직후 계엄군들이 시민항쟁 지도부가 있었던 당시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 건물에 진주해 있다. 수많은 총탄자국이 새벽의 처절한 상황을 짐작게 한다.(위·<광주를 말한다> 신복진) 와이더블유시에이 간사로 이곳에서 싸웠던 이윤정은 이후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도피해 다녔다.(아래)




마지막까지 투쟁 사수 주장
5·18 알리며 민주화 앞장서

1980년 5월항쟁을 총칼로 짓누른 직후 신군부가 전국에 배포한 60명의 지명수배 전단에는 여성이 2명 들어 있다. 전남대 학생회 간부 정경자와 이윤정이었다.

당시 25살 아가씨였던 이윤정은 전남여고 시절부터 ‘해방신학’ 그룹과 함께 스터디 모임을 결성해 활동하며 해방신학자 백영흠 목사의 “무엇을 먹고 입을 것인가를 걱정하지 말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아 사회운동에 눈뜨게 되었다. 이후 송백회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등에서 활동하며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손잡고 노동현장(전남방직·일신방직·로케트전기·남해어망·전남제사 등등)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신장을 위한 조직화와 교육활동을 펼쳤다.

80년 5월18일.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 있던 사레지오고교 안의 수도원에서는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주관하는 노동교육이 한창이었다. 호남전기, 삼양제사 등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70여명이 대상이었다. 같은 시각 금남로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에서도 삼양제사, 일신방직, 전남제사, 전남방직 등의 여성노동자 90여명이 같은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윤정은 와이더블유시에이 사회문제부 간사로서 이 교육프로그램의 책임자였다. 그날 공수부대의 만행 소식을 들은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시위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두 여성노동자 그룹은 항쟁 내내 지칠 줄 모르고 투쟁에 나섰다.


» 이윤정씨
이윤정은 정현애·임영희·김정희 등과 함께 와이더블유시에이에 구성된 투쟁위원회 지도부로 참여해, 정유아와 함께 리본제작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리본들은 유족들의 가슴에, 일반시민들의 가슴에, 시민군들의 가슴에, 그리고 광주 거리 곳곳에서 의연하게 펄럭였다.

항쟁 마지막날, 도청 항쟁 지도부의 비상대책위원회에 정현애와 함께 여성 대표로 참여한 이윤정은 총기 반납을 반대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한 ‘강경파’였다. 5월27일 새벽 총소리와 함께 진압은 시작됐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이윤정은 ‘현상금 100만원에 일계급 특진’이 걸린 수배자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82년 붙잡힌 그는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그는 폭도가 되었던 것이다.

‘폭도’. 5월 이후 끝임없이 따라다니던 그 ‘낙인’을 벗어버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날을 망월동과 금남로에서 싸워야 했던가. 30년 세월 동안 이윤정은 폭도에서 민주투사로, 여성운동가로, 통일운동가로, 정치인으로 변신하며 지치지 않고 싸워왔다.

95년 말 ‘반쪽짜리’ 특별법 제정으로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이 되고 ‘폭도’가 ‘민주투사’가 됐다고들 했지만 ‘광주의 5월’은 끝나지 않았다. 이윤정은 이후 광주민주화항쟁동지회장, 5·18민중항쟁 공동의장 등을 맡아 ‘진상규명’과 ‘책임자 사과’ 등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 앞장섰다. 특히 89년 독일 녹색당의 초청으로 4개월 동안 유럽을 방문했을 때, 총회에 참석한 각 당의 당수나 지도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돌아와 정치에 뛰어들었다. 91년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무소속 시민후보로 시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다 일본 사회당 의원들을 만나 ‘정신대문제해결 대책위원회’ 설립을 제안하고, 국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만나 5·18 정신의 세계화와 통일문제 등을 논의한 것이 빌미가 되어 94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또다시 3년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양심수’ 이력을 추가한 그는 풀려난 이후 광주·전남 민중연대, 통일연대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여성단체의 가족과 성문제상담소 이사장으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2008년 민주당 광주광역시 남구위원장을 맡아 정치무대 일선에 나선 그는 “인권·평화·민주도시 광주의 이미지와 예향 광주,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광주의 이미지를 통합하고 브랜드화하여 광주를 세계적인 명품도시로 만들어가야 한다”며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도시경영 전문가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윤정은 ‘5월 광주와 여성’을 이렇게 얘기한다. “흔히 ‘주먹밥’과 등치시켜 여성을 항쟁의 보조자로 묘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조직적이고 주체적으로 나서서 민주화와 공동체 정신을 꽃피우게 한 항쟁의 주역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의 시인 김준태는 이윤정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여자의 젖은 남자의 피보다 강하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길을찾아서] ‘수배자 윤한봉’ 뒷바라지…남영동서 고초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⑤ 김은경
한겨레
» 김은경이 목숨 걸고 도피와 밀항을 도운 ‘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은 93년 귀국해 ‘5·18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항쟁 정신 계승에 매진하다 2007년 6월 폐질환으로 길지 않은 삶을 마쳤다. 그해 6월30일 영결식 행렬이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에서 노제를 지내고 있다.




마흔 넘어 목회자의 길
“오월 노래 올해 재녹음”

또 눈물을 쏟는다. 백번 천번을 겪어도 5월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벌렁이고 울컥해진다. 김은경 목사는 ‘5월 광주와 윤한봉’의 이름이 나오자 연방 눈시울을 붉힌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것일까.

김은경은 전남여고 시절 <씨알의 소리>에 글이 당선되면서 함석헌(1989년 작고) 선생을 만났다. 그것이 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란 ‘소녀’를 거친 바다로 이끌어간 인연이 되었다. 그림도 곧잘 그렸고 공부도 잘하던 김은경에 대한 아버지사랑은 각별했다. 그러나 딸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함석헌 선생의 수행비서를 자원하고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기독교청년운동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와 송백회 활동으로 이어졌고, 뒤늦게 한신대에 입학한 그는 송백회의 수배자 은신처 마련과 기금모금 등을 위해 서울과 광주를 잇는 고리 구실을 했다.

그래서 1980년 5월18일 당시 김은경은 광주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광주와 함께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5·18’은 광주에서만 시작되고 광주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은경에게 5월항쟁은 정작 광주에서 상황이 끝난 이후부터 시작됐다. 5월23일 내란음모죄로 현상수배된 윤한봉이 81년 4월 마산부두에서 밀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11개월 동안 그는 윤한봉의 수호천사로 헌신했다.

5월17일 밤 계엄군의 예비검속을 피해 나주로 갔던 윤한봉은 항쟁 기간에 봉쇄된 광주로 끝내 들어오지 못한 채 도피의 길로 나섰다. 김은경은 그와 광주를 잇는 연락병이자 거처와 자금을 공급하는 지원병이었다. 수배자 뒷바라지는 당사자 못지않게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윤한봉을 만나러 갈 때는 몇 번씩 버스를 바꿔타고 왔던 길을 빙빙 돌아 미행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빠가, 그렇게 의연하고 결연했던 오빠가 수배생활로 지쳐서… 조금씩 망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맘이 아팠어…. 오빠는 매사에 철저한 사람이었어. 잠잘 때조차도 만약의 검거에 대비해 양말 속에 칼을 넣고 있었어… 자신이 체포되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까봐 자살하겠다고 하면서. … 밀항이 결정됐을 때 오빠는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어… 광주로 내려간다고 난리쳐서 그때 엄청 소리지르고 싸웠던 기억이 나.” “배 안에서 혼자 숨어서 먹을 수 있는, 마른안주·땅콩·멸치 같은 것들을 사서 건네주고… 멀리 어둠 속에서 술취한 사람처럼 선원들(정찬대와 최동현)의 부축을 받으며 배(레오파드호)에 오르던… 그것이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어.”

그길로 학교로 돌아온 그는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숨죽여 울다 쓰러져 1주일을 혼절하다시피 누워 있었다.

이듬해 11월 그는 결국 윤한봉 밀항 지원 사실이 드러나 수사를 받아야 했다. 전북 군산에서 터진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윤한봉의 도피처를 주선해준 이광웅 선생이 연루된 것이었다. 정용화·최권행·홍의윤, 윤한봉의 두 동생 경자와 영배 등등과 함께 김은경은 악명 높은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때 도피처를 둘러대다 거짓말로 알리바이를 댔던 인연으로 그는 남편을 만났다. 당시 남편은 뒤늦게 목회자의 꿈을 안고 한신대에 다니던 ‘맘씨 좋은 예비역 아저씨’였다.

다행히 구속되지 않고 풀려나온 그는 결혼한 뒤 남편의 목회활동을 도왔다. 충청도의 한 교회에서 일할 때 ‘전라도와 광주시민들을 폭도’라고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멀리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보면서 걷고 걸으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단다.

그렇게 가끔씩 바닥 모를 깊은 절망과 우울…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그를 위해 남편은 1년에 두세번은 광주에 데려와 위로를 받게 해주었다. 그런 남편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딛고 뜻을 이어 마흔 넘어 목사가 된 그는 이제 전북 익산에서 농촌 목회와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전북통일연대 상임대표도 맡아 꿋꿋이 살고 있다.

81년 겨울 ‘임을 위한 행진곡’, ‘5월의 노래’를 몰래 녹음해 전국 곳곳에 알렸던 그는 “올해 30돌 기념으로 당시 함께 노래를 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공식적으로 재녹음을 한다”며 감회에 젖었다.

이제는 ‘5월을 희화화시키지 말고, 5월 때문에 서로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목사 김은경. 그의 눈에는 눈물이 다시금 그렁그렁 고인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길을찾아서] 공수부대 점령 병원에 학생들 숨긴 간호부장
계엄군 눈 피해 환자로 위장
야전병동 일화 생생히 기억
한겨레
» 1980년 5월22일 도청을 장악한 시민군과 시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 사이에 곳곳에서 무장충돌이 빚어지면서 광주시내 병원마다 사상자들이 밀려들었다. 치료를 위한 피가 모자란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헌혈에 나섰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5·18기념재단 펴냄) 중에서 황종건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⑥ 오경자

1980년 5월, 오경자(당시 40살)는 조선대부속병원 간호부장이었다. 5월18일 0시 계엄 확대 직후 조선대병원은 공수부대에 접수됐다. 이른바 ‘충정작전’에 따라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한 가운데 조선대 체육관과 종합운동장에는 7공수여단 35대대가 주둔했다. 이후 학교는 시위시민 집단수용소이자 폭력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고문훈련소로 돌변했다.

부속병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병원의 직통전화까지 공수부대가 차지한 상태였다. 그러다 돌연 긴급상황이 발생했다. 공수부대 진입 사실을 모른 채 병원 쪽으로 난 지름길을 따라 도청으로 나가려던 조선대 학생 30여명이 총격을 피해 병원으로 쫓겨들어온 것이다. 마침 병실 순회 중이던 오경자는 학생들을 재빨리 입원실로 숨게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병원 안으로 마구 총을 쏘아댔고 심지어 입원실까지 들어와 총을 겨눴다. 간호사와 환자들은 이심전심으로 학생들에게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포도당 주사까지 꽂아놓는 재치를 발휘했다.

그에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환자들이 있다. 휴교령으로 내려왔다는 한양대 학생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계림시장에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최루탄 연기 속에 헤매고 있는 시각장애인 할아버지를 부축하려던 순간 의식을 잃었다.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다리를 깊이 찔려 피를 철철 흘린 채 조선대 운동장 옆에 버려져 있던 그를 차를 몰고 지나가던 한전 직원이 군인들 몰래 실어온 것이었다. 중위로 기억되는 한 공수부대원을 치료해줄 때였다. 얼굴을 많이 다치고 출혈이 심한 상태여서 군복을 벗기고 들고 있던 총을 한쪽으로 치워놓았는데, 주위에 있던 젊은이들이 그 총으로 그를 쏴버려야 한다며 흥분했다. 도청 앞에서 진압군의 만행을 목격한 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람도 명령에 따른 것이다. 우리 의료인은 누구라도 치료해야 한다”며 총을 잘 싸서 건네주었다.

그러다 부처님 오신 날인 21일, 증강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육과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저항이 절정에 이르면서 부상자와 주검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남대병원·기독병원·적십자병원 같은 종합병원은 물론이고 시내 개인병원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으로 시민군들이 도청을 접수하자 정부는 광주를 봉쇄한 채 병원을 닫도록 지시했으나 광주시의사회는 ‘부상 시민들을 포기할 수 없다’며 버텨 끝까지 모든 부상자들을 무료로 치료했다. 최근 광주시의사회에서 조사한 당시 병·의원 진료기록을 보면 항쟁기간 동안 환자 수는 모두 858명이다. 하지만 혼란 중에 기록하지 못한 부상자도 많았고 무엇보다 신변 보호를 위해 환자 수를 10분의 1 정도로 줄여 보고했다고 당시 의료진들은 증언한다.

오경자는 그때 야전병동 상황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일화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광주문화방송> 건물이 불타던 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시위학생을 부축해 왔던 경찰, 구급차가 불타버리자 트럭으로 부상자를 실어 나른 운전기사들, 총을 맞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부상자에게 30병 이상 수혈을 했는데도 모자라자 기꺼이 팔목을 내밀던 간호사와 의사들, 대중교통이 멈추자 12시간을 걸어서 출근해 병원을 지킨 1000여명의 직원들, ‘환자들을 굶길 수 없다’며 밥 반그릇 먹기운동을 펴던 식당직원들, 환자용 산소며 쌀이며 부식거리며 자발적으로 구해다 주던 시민군들 등등등.

그러나 그는 40년 간호사 생활에서 가장 끔찍한 참상도 그때 겪었다. 5월27일 새벽 도청 진압작전이 끝난 직후 그는 계엄군의 요청으로 파견된 의사들에게 검안 도구를 전하려고 도청으로 갔다. 그리고 화단과 구름다리 주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민군의 주검들을 목격했다. 교련복, 검은 운동화, 하얀 러닝셔츠, 얼굴만 가려놓은 신문지…. 그도 의사들도 구급차 기사도 그날 이후 한동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잠도 못 자고 앓아누운 이들도 있었다.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무고한 사람들이 저런 모습으로 죽어가야 하는가….”

그 후 30년, 올해 고희를 맞은 그는 새삼 참 간호의 본질을 깨닫는다. 아픈 사람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병들게 하는 사회문제와 환경에도 “늘 썩지 않도록”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인으로서 국민으로서 여성으로서 남은 바람이 있다면, 어떤 이유로도 서로 생명을 살상하는 그런 일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한겨레 2010/5/10

[길을찾아서] 시민군에 주먹밥 나른 대인시장 고추방앗간 아줌마
아들 찾다 ‘총쏘는 군인’ 대면
쫓기는 학생들 가게 안 피신
“무서웠어…그래도 도와야제”
한겨레
» 1980년 5월22일 시민들의 힘으로 계엄군을 물리친 광주는 ‘5일간의 해방’을 맞았다. 대인시장과 양동시장 상인들은 돈과 쌀을 내서 주먹밥을 지어 시민군과 학생들을 지원했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에서 황종건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⑦ 김동심

광주 대인시장 ‘고추방앗간집 아줌마’ 김동심(62), 그는 처음 소문으로만 ‘5·18’을 들었다. 장사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바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시장 골목 안까지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최루탄 냄새가 퍼져 눈이 매워지기 시작했다. 공수부대가 와서 학생들과 시민들을 잡아가고 때리고 야단났다는 소리에 사달이 나도 뭔가 단단히 난 듯했다. 무서운 생각에 골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손님이 없어 장사를 접고 가게 문을 닫았다.

온 식구가 가게에 딸린 방에서 지냈는데 하루는 중학교 2학년 큰아들이 나가고 없었다. 금방 오겠지 했는데 저녁 내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광주역 앞에 죽은 중학생 주검이 버려져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도저히 혼자서는 갈 용기가 없어서 남편과 같이 가서 확인했다. 다행히 아들은 아니었다. 뒤늦게 돌아온 아들은, 호기심에 금남로 쪽으로 나가려다 군인들이 어찌나 총을 많이 쏘던지 무서워서 혼자 빠져나오지 못하고 시위대 뒤를 따라다녔다고 했다.

겨우 안도의 숨을 돌리고 있자니 시장 골목으로 공수부대에 쫓긴 학생들이 몰려왔다. 우르르 달려오는 학생들을 엉겁결에 불러들이고 가게 셔터문을 내렸다. 몇시간인가를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가 공수부대들 기미가 사라진 뒤 내보냈다. “아조 난리 속이 되아갖고 쫓아댕기고 쫓겨다니고… 학생들은 담박질로 우르르하니 쫓겨오고 (공수부대는) 몽둥이 들고 쫓아오고… 학생들이 들어오면 셔터문 딱 내려불고… 그라믄 군인들이 지나갔제.”

그때부터 골목골목 공수부대가 모여 있는 것만 보면 가슴이 떨려 쥐어짜는 듯했다. 공수부대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젊은이만 보면 두들겨 패서 차에다 싣고 갔다. 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고 일어나 보니 온 도시가 조용해졌다. 군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였다. 금남로에 불탄 차들이 널려 있고, 그 옆으로 죽은 사람들이 신문지에 덮여 있었지만 누가 치울 생각도 안 하고,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장사할 궁리고 뭐고 마음은 모다 거리에 가 있었어. 손님들도 물건 살 생각은 안 하고 시내에서 사람이 죽고 잡혀갔다는 얘기에 걱정만 나누다 갔으니께.”

그러다 시민군들이 등장했다. 처음엔 겁도 났지만 내 자식 같고 동생 같아서, 동네 슈퍼에서 빵과 우유를 사다가 차를 타고 지나가는 차에 던져줬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시장 골목에서 아주머니들이 솥을 걸고 밥을 짓고 있었다. 김동심도 자연스럽게 일손을 보탰다. 김에 주먹밥을 싸서 도로로 나가 있다 시민군들이 지날 때면 전해주곤 했다. 차츰 조를 짜서 밥을 하기도 하고, 물을 떠다 주고, 하루 종일 주먹밥을 싸는 일을 나누어 하기도 했다.

금남로에서 한 구역 안쪽에 자리한 대인시장과 금남로 끝자락에서 가까운 양동시장의 상인들은 ‘5·18’ 당시 시민군에게 먹을거리와 갖가지 물품을 자발적으로 제공하며 ‘보급창고’ 구실을 했다.

그는 지금도 대인시장을 지키고 있다. 30~40년 단골손님들이 올지 몰라 문을 닫을 수 없다. 그동안 시장 바로 옆에 백화점이 들어서고 상권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과 광주시청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곳곳에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시장은 예전의 이름값을 못한다. 새로 시장에 들어올 사람이 없어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이웃이 많다. 밥벌이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5월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그는 못 배운 한을 풀고자 환갑 넘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 꿈도 뭣도 없이 살았던 세월이 억울해 어렵게 마음을 먹었다. “나이가 있은게 그런가, 머리에 잘 안 들어와. 배워봤자 까먹어불고 그래. 그래도 하루에 한 글자씩만 배우고 댕기자 했어, 그렇게 다녔어.”

장사를 하면서 배우는 일이 녹록하지 않다. 그래도 그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5·18 때 무섭고 힘들어도 시장을 떠나지 않고 만들었던 주먹밥이 큰 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한겨레 2010/5/11


[길을찾아서] 당나무 뒤꼍서 ‘계엄군 잠복’ 알린 주남마을 아낙
군인들 주둔하며 ‘광주 봉쇄’
통행인·차량엔 무차별 총격
“이제는 다 말해도 될틴디…”
한겨레
» 1989년 1월18일 국회 광주특위 위원들이 ‘5·18’ 당시 공수특전단 11여단이 주둔했던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 뒷산에서 암매장 주검 발굴 현장을 검증하고 있다. 주남마을의 비극은 ‘5월23일 학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양금숙씨의 청문회 증언 등으로 뒤늦게 속속 확인됐다. <광주일보> 보도 사진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⑧ 김막님

광주시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 주민 김막님(76), 그는 열일곱에 이 마을로 시집왔다. 오빠 아는 사람의 중매와 부모의 성화에 떠밀리듯 결혼한 지 2년, 겨우 낯을 익힐 즈음 남편은 군대를 갔다. 남편은 “당신이 엄청 못생겨서 말뚝을 박는다”는 핑계를 대더니 8년을 더 군대생활을 했다. 그사이 어린 새댁은 홀로 시부모 봉양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이 마을 억척 아줌마로 터를 잡았다.

1980년 5월21일, 공수부대원들이 주남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김막님은 마을 앞 하천둑 공사장에서 시멘트를 나르는 일용근로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미 18일부터 계엄군의 학살과 시위대의 저항으로 광주시내는 ‘전쟁’이 난 터였지만, 변두리인 까닭에 소문으로만 알고 일상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공사 뒤처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콩볶듯 총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작업반장인가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지금 난리가 났다. 하던 일 다 치우고 얼른 집으로 가라.”

‘피의 초파일’로 불리는 그날 이후 항쟁 기간 내내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주남마을은 계엄군과 시민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요충지가 됐다. 그날 낮 도청과 광주역 일대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자 맨손 저항의 한계를 느낀 시민들은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주남마을 인근 너릿재 너머의 화순광업소를 비롯해 화순 역전파출소와 동면 지서의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한 시민군들은 반격전을 벌였다. 오후 4시30분께 계엄군은 도청과 도경 상황실을 내주고 물러났고 공수특전단 11여단은 주남마을 뒷산에 본부 진지를 구축했다.

김막님은 계엄군이 들어온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저녁 8시 이후 집 밖으로 나온 사람을 향해 무조건 총으로 쏴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유탄을 피하기 위해 밤새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설치다 날이 밝은 뒤에야 나갈 수 있었다. 모내기철이 막 지난 터라 못자리에 물을 충분히 봐줘야 했지만 무서워 들에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해 농사는 망쳐 이웃에서 쌀을 꿔다 먹어야 했다. “그때 마을에 군인들이 걍 꺼맸어라, 꺼매. 바우(바위) 있는 데서 절 있는데까장(까지) 꺼매. 헬리콥터가 가믄(가면) 시방 하우스 지어 놓은 곳에 가만히 떠가고. 가만히 안즈기만(앉으면) 하면 먼지 조깐(조금) 나고, 헬기 뜨는 데서.”

퇴각한 계엄군은 22일 새벽부터 광주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외곽 길목을 봉쇄했다. 그렇지만 주남마을은 근처 용산마을과 함께 화순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이어서, 도심을 빠져나와 고향집으로 가려는 피란민들이 ‘6·25’ 때처럼 몰려들었다. 시민군들도 무기와 실탄 보급을 위해 자주 오갔다. 길목 곳곳에 매복한 계엄군은 도로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십명이 희생됐다.

그러다 23일 끔찍한 집단학살 사건이 터졌다. 계엄군이 너릿재를 지나던 미니버스에 기관총과 M16으로 총격을 가해 타고 있던 18명 가운데 여고생 1명만 빼고 모두 죽고 말았다. 애초 부상만 당했던 2명은 계엄군에 의해 주남마을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발굴됐다.

당시 마을 어귀에는 어디나 그렇듯 키 큰 당산나무가 서 있었다. 김막님은 당산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계엄군을 피해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의 옷을 잡아당겨 “산으로 가요, 신작로로 가면 죽소”라고 말해주곤 했다. 멋모르고 마을 앞 버스길로 지나가던 시민 3명이 군인들 총에 맞아 죽은 뒤였다. 그 덕분에 무사히 피난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그는 지금도 그 나무를 생명나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때 계엄군이 시민들의 주검을 묻었던 뒷산 밑 고랑은 지금도 무서워 가기가 꺼려진다.

5월 그날 이후 마을은 침묵에 싸였다. ‘우리가 복이 없어서 당한 일이니까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딱 덮고 입을 다물자’고들 했다. 지금도 누군가 그때 일을 꺼낼라치면 ‘쓸데없는 소리’라며 입을 막곤 한다. 민주화 이후 조사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 피해도 없었다고 해버렸다.

“이제는 다 말해도 될틴디… 그 징한 꼴을 겪으며 숨도 못 쉬고 고생했는데….” 어르신들도 하나둘 돌아가시고,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는 요즘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날의 진실을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한겨레 2010/5/12


길을찾아서] 눈물로 시민군 주검 염해준 성당 봉사자
신부 전화받고 병원으로
“걍 짠한 게로 달려갔제”
한때 매일 망월동서 기도
한겨레
» 1980년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에게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숨진 시민들의 주검이 담긴 목관이 이튿날 연막소독을 하는 가운데 광주시 청소차에 쌓여 망월동 묘역으로 실려가고 있다. 제대로 염도 되지 않은 채 묻인 이 주검들은 대부분 신원불명의 무명열사였다.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 중에서 김녕만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⑨ 방귀례

방귀례(93), 그의 고향은 전북 남원이다. 아들 열에 이어 열한째로 태어난 딸이었던 덕분에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귀한 자식으로 호강하며 자랐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자식 셋을 힘들게 키우면서 마흔 넘어 생긴 병이 낫지를 않자 신앙에 의지해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성당을 다니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입관 봉사를 하게 되었다. 흔히 ‘염한다’고 하는 입관 봉사는 자식들이 없거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날 성당 신도의 상가에서 입관을 도와주다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양동시장에서 자루를 사다가 입관 연습도 해보고 동네에서 상이 나면 염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배우기도 했다. 그는 입관할 때 다들 꼭 하는 입마개도 하지 않았고, 끝나면 그 손으로 막걸리도 곧잘 받아먹었다. 그러자 ‘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 신도들이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됐다.

1980년 5월18일, 전남대 부근 용봉동에서 살던 그는 교문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봤다. 총을 든 계엄군에게 학생과 시민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남대 농과대 뒤쪽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이 죽었다면서 학동에 있는 전남대병원으로 빨리 와달라는 성당 신부님의 전화가 왔다. 거리 곳곳에서 군인들이 통제를 하며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금남로에는 유리 조각이며 돌 조각이 쫙 깔려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입원한 아들을 보러 가야 한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샛길로 샛길로 살림집의 담을 넘어가면서 겨우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에는 학생들의 주검이 샛가마니에 아무렇게나 싸여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때 날씨도 무더워 주검 옆에는 쥐가 바글바글하고 창자가 배 밖으로 나온 사람, 눈알이 빠진 사람, 어깨가 떨어진 사람까지 그야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가젯베로 옷을 입혀 입관을 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울면서 울면서 눈물을 닦으며 하나하나 염을 해서 내놓으면 누군지 모르는 이들이 관을 병원 마당에 가지런히 가져다 놓았다.

그해 5월의 전남대병원은 비통함과 애통함으로 가득한 시체안치소였다. 18일 낮까지만 해도 지역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인 까닭에 광주는 물론 가까운 화순, 나주 등에서까지 환자들이 몰려 외래입원실이며 만원이었다. 그러다 시내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군인들이 들어와 다 잡아가고 난리가 났다는 소리에 환자들이 다투어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병원은 더 바빠졌다.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계엄군들이 시위 군중을 무차별 진압하면서 사상자들이 몰려와 응급실은 돌연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주검들이) 누구 땜에 뭔 일 땜시 죽은지도 모르고 시위한 것만 알지, 걍(그냥) 하도 짠한게로(그 일을 했지). 독자가리(돌자갈)하고 요만한 막대기 하나 들고 싸운디 저 사람들은 총을 갖고 싸워, 저놈들 다 죽것다 싶더라구.”

5월27일 새벽 상황이 끝난 뒤, 도청과 상무관에 임시 안치됐던 항쟁 희생자들의 주검은 광주시 청소차에 짐짝처럼 실려 북구 망월동 광주시립묘지 제3구역에 묻혔다. 그중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용사’들도 상당수였다. 2001년 12월 정부가 집계해 인정한 ‘5·18’ 공식 사망자는 민간인 16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5명이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보상신고 때 신청한 행방불명자는 406명이었으나 정부는 70명만 인정했다. 암매장되거나 비밀화장터에서 태워져버린 주검들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5월 그날 이후 그는 한동안 망월동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죽어간 사람들, 특히 젊은 학생들의 넋을 위해 거의 매일 기도하러 다녔다. 어떤 날은 괜히 혼자서 망월동 입구 신작로에 앉아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미친 사람처럼’.

염 일을 한 지 15년쯤 되던 어느날. 동네 할머니의 입관을 부탁하는 신부님의 전화를 받고 채비를 하고 나서려는데 큰아들이 따라나섰다. “엄마 혼자 가지 말고 나랑 둘이 가세. 엄마가 한 일 내가 할라네. 엄마는 인자 늙어서 못한게.”

그는 10년 전 팔순이 넘어서까지 염 일을 했다. 여한도 없다. ‘어머니가 지금까지 한 일이야말로 고귀한 넋을 위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실천한 것’이라며 자청해서 대물림한 아들이 있으니 말이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한겨레 2010/5/13

[길을찾아서] “사형 막아달라” 추기경실 점거한 구속자 누나
‘구속자가족협’ 참여해 활동
국내외에 간절한 석방 호소
동생은 ‘옥살이 후유증’ 사망
한겨레
» 1980년 5월27일 도청 진압 뒤 계엄사는 상무대 영창에 2200여명의 시민을 잡아넣고 이 가운데 375명은 혹독한 고문 끝에 구속했다. ‘광주의 아우슈비츠’로 불리던 상무대는 99년 상무기념공원으로 옮겨 복원해 당시 모습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⑩ 노영숙

노영숙(56), 그는 1970년대 지역 재야운동의 산실이었던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청년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간디연구모임’ 회원들과 함께 함석헌 선생을 초청해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 방식으로 독재와 싸우는 길을 토론하기도 했다.

80년 5월 당시 그는 초중생 과외지도를 하며 남동생·여동생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2살 아래 남동생 준현은 무진교회 청년활동과 독서모임 등을 통해 사회문제에 관심을 키우다 78년 6월 이른바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 때 구속됐다. ‘우리의 교육지표’를 작성해 연대서명한 송기숙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거나 해직당한 데 항의해 일어난 대규모 시위의 주동자로 몰려 옥살이를 하던 그는 이듬해 10·26 이후 풀려나 80년 봄 복학했다.

‘5·18’ 직전의 전남대는 민주화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5월15일 교내에서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연 학생들은 16일에는 도청 광장까지 횃불대행진을 벌이고 시민들과 더불어 밤새 민주화 토론을 벌였다. 그날 교문에서 광주역과 금남로를 거쳐 도청에 이르는 행렬의 선두는 전남대 교수단이 이끌고, 경찰은 호위를 해줄 만큼 광주는 평화로웠다.

그런데 15일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던 준현이 17일 밤 계엄군이 대학마다 진주하고 재야 민주인사들을 일제검거한 뒤, 광주시내를 점거한 18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그는 평소 동생이 자주 다니던 녹두서점으로 향했다. 거리에 나서자 계엄군들이 젊은 청년들을 쫓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잡아 때리고 끌어가고 있었다. 공포스러웠지만 그는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총검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20일에는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가 부상도 입었지만, 동생의 안부와 상황이 걱정스러워 그는 날마다 도청 광장으로 나갔다.

5월27일, 결국 도청이 함락되고 계엄군은 28일부터 도청 안의 주검들을 청소차에 실어 망월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혹시 동생도 실려갔을까 하는 마음에 여동생과 함께 망월동으로 쫓아갔지만 주검들은 가족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다 묻혀버려 확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며칠 뒤에야 준현이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갔다. 면회도 안 되는 상황에서 초조한 며칠이 지났을까, ‘장지권’이란 군인이 당시 합수부 수사국 요원들이 퇴근한 뒤 저녁에 면회를 시켜주었다. 그때 상당히 많은 가족들이 그 군인의 도움을 받았다.

노영숙은 그곳에서 알게 된 안성례(명노근 당시 전남대 해직교수 부인), 이명자(정동년 당시 전남대 복학생 대표 부인), 김정부(구속자 김종배의 형) 등과 ‘5·18구속자가족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 구속자 석방 탄원서를 보내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81년 군사법정에서 ‘내란수괴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정동년과 2명의 구명운동을 하고자 김수환 추기경을 면담했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아기까지 업은 촌 아낙네들이 추기경 집무실로 몰려들자 명동성당 쪽에서는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정작 추기경은 ‘아, 정말 고생했다, 잘 왔다’며 한 명 한 명을 다독여 위로해주었다. 이때의 점거시위는 ‘5·18로 인한 사형수는 없다’는 정부의 발표(약속)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광주전남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로 재결성된 86년 이후 그는 “상처받고 지친 광주시민들을 음악과 예술로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클래식 전문 ‘베토벤 음악감상실’을 열었다. 그의 바람대로 감상실은 결사항쟁지 전남도청이 보이는 곳에서 오랫동안 광주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81년 풀려난 뒤 내내 인쇄일을 하며 노동운동을 하던 준현은 두 번의 옥살이 후유증으로 2000년 먼저 세상을 떴다. 이후 어머니도 여읜 그는 상심한 나머지 2007년 감상실 문도 닫았다. 그는 지금 5월어머니집(관장 안성례) 사무총장으로서 ‘5·18’을 비롯해 민주화운동 유가족 여성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돕고 있다.

그의 남은 바람은 언제부턴가 떠들썩한 잔치로 변해가는 ‘5·18 기념’ 행사가 항쟁의 현장에서 시민들이 함께 모여 주먹밥을 나누며 그날의 상처를 공유하고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진정한 축제가 되는 것이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한겨레 20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