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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울분과 몸부림
68학번은 서강 칼리지에 입학해서 서강 유니버시티를 졸업한 칼리버시티 학번이며, 4년 동안 교련반대, 개헌반대 등 반정부 데모로 인해 매 학기마다 휴교를 겪었다. 군사독재가 강화되면서 캠퍼스 안에는 마포서 형사들을 비롯해서 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하게 되었고, 졸업을 두어 달 앞두고는 위수령으로 군대가 캠퍼스를 점령할 만큼 황당한 시절이었다.
68학번 서강타임스 견습기자들은 구순옥(독), 김경숙(생), 서연옥(영), 김한규(사), 박 찬(철), 신윤근(화), 최광영(경영) 등이었는데, 모두들 남달리 재능이 뛰어나고 개성이 너무나 뚜렷한 인물들이었다. 그 때문에 화합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선배들은 1학년 겨울방학 때 나를 촉탁으로 임명했다. 촉탁이 된 지 두 달 만에 1면 면책이 되어 기사작성법의 기초도 모른 채 학보사 전통에 따라 수습기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야 했으니, 당시 어느 여학생 견습기자가 계속해서 기사를 퇴자 맞자 너무 답답해서 내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던 일도 있었다. 3학년이 되면 편집장만 남고 나머지 동기생들은 학보사를 떠나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우리는 3학년이 되었을 때, 편집장은 김한규가 맡았고, 나는 취재부장, 서연옥이 4면을 담당했다. 4면 원고가 부족할 때마다 서연옥은 어디선가 감동적인 시 한 편을 가져다가 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써놓았던 시를 예명으로 발표하곤 했던 것이다.
학보는 보통 4면으로 한 학기에 두세 번, 많아야 한 달에 한 번씩 모두 네 번 정도 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당시 학생회관 지하에 있던 학보사는 우리들의 꿈과 정의감을 키워내던 온상이었다. 또한 사흘이 멀다 하고 모였던 무교동의 경원집은 당시 선배들로부터 인생을 배우며 꿈과 낭만을 서로 나누며 울분과 저항의식을 분출하던 곳이었다.
3학년 때는 발행일을 맞추기 위해 조판하러 다니느라 수업을 빼먹게 되어 모두가 두세 과목씩 FA(결석초과) 경고를 받았는데, 나는 특히 장학금에 의존해서 학교를 다니던 형편이라 학보사를 한 달 동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만큼 마음을 많이 졸였다. 학보 발행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주간을 맡고 계셨던 김열규 선생님과의 일화이다. 학보에는 당연히 학교 행정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들이 많이 있었으며, 특히 시국에 대한 비판과 풍자의 수위를 조절하는 문제에서 혈기가 넘치던 우리들과 주간 선생님 사이에는 늘 껄끄러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대학언론에 대한 당국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김열규 선생님은 학보에 실리는 모든 원고를 직접 검열하시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원고뭉치를 들고 밤늦게 모래네에 있던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면 대충 제목만 검토하시고 OK를 놓으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깐깐하며 매우 권위주의적인 성격의 선생님은 특히 사설의 맞춤법을 고쳐주시겠다는 명분으로 빨간 싸인펜으로 당시 우리들의 판단으로는 내용까지 모두 뜯어고치셨다. 결국 우리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원고들을 선생님께 보여드리지 않은 채 그냥 인쇄소(당시 조선일보 외판부)에 넘겼다. 나중에 이 사실을 눈치챈 선생님은 인쇄소로 찾아와 직접 교정지를 검토하셨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이라 문선공들이 원고지를 손에 들고 일일이 활자를 찾아내어 조판을 하고 지형을 뜨던 때였다. 한 번은 선생님이 인쇄소에 찾아오셔서 교정지를 보시다가 당신이 검토하지 않은 기사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셔서, 이미 조판이 완료된 판에서 그 부분의 활자들을 모두 뽑아내라고 하셨다. 우리는 견습기자들만 남겨둔 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근처 다방으로 갔다가, 나중에 올라가보니 선생님께서 직접 원고를 새로 고쳐 쓰고 계셨다. 결국에는 선생님께서 최종 OK를 놓아야 인쇄를 시작하도록 했지만, 이것마저 불안하셨던지 학보를 학생들에게 배포하기 전에 학생처장의 최종 검열을 받게 하셨다. 한 번은 학생처장의 최종 검열을 하시기 전에 학보를 미리 빼돌려 일부를 배포하기도 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선생님들께 미안한 마음이다.
흔히 문제가 되던 부분이 사설이었는데 사설을 통해 논리정연하게 우리의 입장을 주장했던 김한규 편집장은 학보 인쇄가 끝날 때면 으레 사학과 답사를 떠나곤 했다. 대신 학생처에 불려간 나는 주간 선생님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1면 담당이라 사설과 기획기사는 내가 모르는 일”이라며 뻔뻔스럽게 오리발을 내밀곤 했다. 다른 대학들에서는 학보 사설을 주간 교수가 썼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편집장이 쓸 수 있었다. 한 번은 국문과 복학생들이 “사설에서 막걸리 냄새가 진동한다”는 등 협박을 하면서 사퇴를 강요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굴복하지 않고 용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우리 학번이 잘 뭉쳐 있었던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4학년 때 일이다. 대학들마다 학보에 대한 검열이 강화되면서 점차 대학 언론의 사명과 기능을 잃게 되자, 서울대 법대, 연세대 등에서는 소위 “지하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위수령이 발동되고 휴교령과 함께 캠퍼스에 군대가 진주했으며, 학생회 간부 등 여러 동기생들이 갑자기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몇몇 대학 대표자 회의에서 자퇴동맹이 결의되어 서강대도 이에 동조하자는 운동이 추진되어, 장충동에 있던 어느 학생 집에서 꽤 여러 사람이 모임을 가졌다. 문제는 이미 고향으로 내려가 흩어진 학생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자퇴원서를 받는 작업이었다(당시에는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때였으니까). 밤늦도록 회의를 했으며 며칠 뒤 다시 그 학생 집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이를 눈치챈 부모님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그 학생은 잠적하고 말았다. 캠퍼스가 군홧발에 짓밟힌 것에 대해 끝내 굴욕감을 참지 못했던 세 사람이 지하신문을 발행하기로 의기투합하여 통렬하게 시국을 비판하는 글들을 휘갈겨 썼고 8절지 2면을 만들어 한밤중에 어느 교회에서 몰래 등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밤에 시내 대학 세 곳에 들어가 당시 학생들 출입이 가능했던 도서관 주변 곳곳에 뿌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둠이 짙은 캠퍼스에 우리의 젊은 기백과 혈기를 뿌리고 교문을 나서니, 거리는 크리스마스 캐럴로 요란하고 어수선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72년에 우리가 졸업한 이후 시작된 유신시대와 더욱 치열했던 80년대에 학보사를 이끌었던 후배들의 투쟁에 비하면, 낭만적인 몸부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젠 세월도 40년 가까이 흘렀지만, 정치적인 민주화 과정도 멀게만 느껴지고, 세계 경제위기와 환경위기까지 겹친 탓으로 세상은 더욱 어두워져 가고 분통 터지는 일들은 더욱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그러나 서강타임스는 지금도 기억할 때마다 마음 가득 웃음꽃이 피어나는 우리들 젊은날의 신바람이었다. 특히 “우리 신문사원 권투선수야! 오늘도 때렸다 학생처!”를 선창하면서 덕수궁 돌담길을 앞장서서 행진하던 정붕조 형님(66, 경영)이 오늘따라 참 그립다.
김준우(68, 영)












http://cafe.daum.net/VoiceOfNewChristian
새로운 기독교를 여는 운동 (새기운) 공동운영자입니다.
김준우 선생님의 삶과 신학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뜻있는 분들과 공유하고자 새기운에 올렸음을 말씀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