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1991. 3. 30. [크리스챤신문]에 기고한 홍정수의 부활절 "설교" -- 이 글은 91-92년도 감리교 "종교재판"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그는 이 글과 그의 저서 {베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단자"로 파문당하였다. 그는 당시 80년대 한국의 젊은 죽음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급히 썼다.


1. 서울의 강북에서 한강을 건너가면, 우리 나라 최고의 명당 자리에 이름하여 '국립묘지'가 있다. 독재자 박정희 장군의 묘지도 그 한가운데 있으며, 그 후예들의 묘지도 내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발밑으로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크고 작은 우리 시대의 영웅적 전사들이 '말없이' 누워 '눈을 감고' 있다. 아마 이것을 보고 누군가가 말했던 모양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참으로 고귀한 삶을 살다간 무명의 병사들도 더러는 거기에 누워, 잠들고 있다.
독일주재 한국 대사관 직원 하나가 얼마 전 갑자기 그 직을 사임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갔다. "저게 뭐요?" "아, 제가 6.25 때 너무나 용감히 싸웠다고 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달아준 훈장들이랍니다." "그래요?" "왜 놀라십니까?" "우리 독일 사람들은 서로를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기 때문이랍니다. 설사 그런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을 역사 앞에서 참회했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훈장을 달아주지는 않았을거예요."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민만 가지 않았다면 그 직원도 아마 동작동에 묻힐 수 있었을텐데.......

2. 얼마 전에 한국 교회들의 장례식 예문집을 들춰보았다({세계의 신학} 7호). 아니나 다를까, 그것들은 이교도들의 장례식 예문과 다를 바 없었다. 세계적인 칼빈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가 만일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과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교의학 개요})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따라서 바르트식으로 말하면, 한국 교회의 장례식 예문들 속에 나타나 있는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예문집들은 하나같이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동시에 믿고 있기 때문이다({세계의 신학} 10호 참조). 즉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낙원'이나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 이것은 바로 헬라적 신앙이다. 부활 없이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고 하는 구원의 종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모자라는지 하나님과 함께 있던 영혼은 공중이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낡은 옷과 같은 '육체'를 덧입게 되는, 소위 '부활'을 또한 믿는다. 이 두 신앙은 엄연히 서로 다른 두 체계의 신앙인데, 우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둘을 동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인간이 죽어 그 영혼이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를 누리게 된다면, 그것으로서 기독교적 구원은 완성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인간의 편에서 말하면, 임마누엘- 그것 외에 그 무엇이 더 있어야 인간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불신앙이다. 마치 선물을 들고 오는 아빠보다는 선물이 더 좋은 철부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신앙이라고나 할까.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불로장생을 더 바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신앙을 가리켜 이교도적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이런 신앙이야말로 무신론적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한국 교회는 부활에 관한 한 무신론자들이다.
이같은 무신론적, 이교적 부활 신앙은 한국 교회만의 혼란은 물론 아니다. 가톨릭 신학자 발터 카스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부활 증언에 대한 해석학적 토론(의미 규정)이 별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주로 신앙의 증언을 단순하게 반복해서 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였다"({예수 그리스도}). 즉 기독교는 '그냥' 믿고 전해 주었을 뿐, 부활의 메시지를 알아들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태만은 교회의 설교자들과 일반 신도들로 하여금 부활의 메시지를 제멋대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우리는 부활의 메세지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믿어왔다. 용감하게도....

3. 최근의 신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독교가 이렇게 큰 혼란에 빠져 있었던 사실의 배경에는 성서의 언어 세계에 대한 무지가 깃들어 있다. 성서의 언어 세계는 헬라 문화의 언어와 다를 뿐 아니라, 17세기 이후의 지구인들을 지배해 왔던 과학적 사고 방식(모더니즘)과도 현저히 다르다. 이러한 반성을 신학의 초점으로 삼고 있는 신학을 소위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한다. 포스트모던 신학의 지적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성서의 언어 세계가 뜻밖에도 한국인의 일상적 언어 세계와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그같은 전제에서 예수의 부활 신앙과 또 한국인들을 향한 그의 부활 사건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자.

4. 예수의 언어 세계의 골격이 유태민족사일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페르샤 문화와 헬라 문화에 의하여 오염된 세계에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유태인이었다. 아니 그는 그 민족을 의식하며 살았고, 또한 목회했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페르샤적 껍데기와 헬라적 탈을 예수와 그 제자들의 진정한 메시지로 혼동하는 일을 피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절 메시지를 오늘의 한국인들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의 하나는 동작동과 망월동을 함께 생각하면서 그것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5. 우리 시대의 의인들, 충신들은 지금 동작동에 묻혀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죄인들, 역적들은 대부분 망월동에 묻혀 있다. 그런데 동작동 부근에 가면 "정숙"이라고 하는 대형 경고판이 붙어 있다. 어르신네들의 영원한 쉼을 혹시라도 방해할까 걱정을 해서이다. 그런데 망월동에도 그런 표지판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는 당신들이 말하는 곳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기에 아직도 눈감지 못하고 있는,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저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하는 뜻으로 말이다.
이 두 공동묘지를 나란히 두고 성서의 부활 사건 이야기를 읽으면 그 의미는 이렇게 분명해진다.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 묻혀 있던 죄인, 역적 하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역사 속으로 되돌아 오게 된 사건"이요, 또한 천지개벽의 시작이었다. 즉 이미 영원한 쉼을 쉬고 있던 자들 중의 하나가 징그럽게도 무덤을 박차고 되살아난 사건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임금이 역적과 죄인이라고 처형해 버린 불의한 자들, 곧 망월동에 묻혀 있던 자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난 사건"이다. 이것은 썩다가 만 한 인간의 부활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시작을 뜻한다. 이것을 어렵게 말해서 "종말적 사건"이라고 한다. 현존의 정치 질서, 곧 각종 구조적 갈등과 민족적 분단의 세계를 정의로운 세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몸으로, 삶으로 저항하다가 그들에 의하여 고문당하고 죽어갔던 한 청년이 하나님에 의하여 되살아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처형한 그 죄인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을 심판할 새로운 정의로서 확정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서 시작되어 동작동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망월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시작과 완성(재림)의 중간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6. 이렇게 놓고 볼 때, 우리는 부활 사건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예수의 제자들과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사명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부활의 소식은 제자들에게 기쁨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였다(눅 24:38, 막 16:11). 왜? 왜 자기들의 스승의 부활이 불안과 공포가 되었겠는가? 이 비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부활절 메시지는 완전히 이교도적인 설교가 될 것이다. 부활이 인간의 무궁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 특히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 동작동의 사람들,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는 부자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정의의 회복)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부활한 사람이 바로 우리 모두가 역적이요 반역자라고 죽여버린 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가 되살아나 우리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면, 우리는 영락 없이 죽은 목숨이다. 이 어찌 두렵지 않으리요! 당시의 예수의 제자들은 (가룟 유다 만이 아니라) 세상과 짝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즉 이 세상의 훈장을 받으려고 동작동으로 가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들이 역적이라고 하여 죽인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가 되었다는 소식은,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소식이었다. 망월동에다 거짓 역적들을 묻어놓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안심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다가 동작동에 묻혀 이제는 다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망월동 원혼이 되살아나고 그들에 의해서 세상이 새로와지며, 더 나아가 이미 죽은 자들도 되살아나 그들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면 이 어찌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으랴?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부활은 핵심이지만, 그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정의가 결코 죽지 않았다는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삶을 탐하고 죽기를 서러워하는," 비겁하고 허황된 인간 욕망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