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존 도미닉 크로산 |
|---|---|
| 번역자 | 김준우 |
| 출판일 | 2011-02-15 |
| 가격 | 12,000원 |
| ISBN |
목차
프롤로그: 가장 이상한 기도 … 7
1장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 19
2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49
3장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 85
4장 당신의 왕국이 오소서 … 115
5장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 149
6장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 183
7장 우리의 빚을 탕감하소서 … 217
8장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 247
에필로그: 가장 이상한 책 … 277
부록 … 289
옮긴이의 말 … 290
존 도미닉 크로산의 <가장 위대한 기도> (E. 2010) 는 2011년 2월 15일에는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는 드폴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가장 권위있는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비롯해서,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하나님과 제국}, {예수의 역사},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등 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인 '주님의 기도'에 대한 성서적인 묵상이다. 크로산은 평생동안의 예수 연구를 통해 하나님을 "이 세상이라는 집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은 한 가정의 집주인처럼, 세상에 사는 모든 식구들이 공평하고 넉넉한 몫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배적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예수 연구의 결론들을 '주님의 기도'에 비춰보면서, 이 기도가 "유대교의 중심에서 나온 기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입을 통해 세상의 양심을 향해 드리는 기도"라고 정의한다. 또한 "혁명적인 선언이며 급진적인 희망의 찬가"라고 말한다. 이런 점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이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왕국, 뜻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후반부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 빚, 시험(유혹)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 각각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상황에 대한 자세한 분석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서 전통, 고대 근동지방의 법적인 전통들과도 폭넓게 비교하며 그 각각의 의미를 밝힌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서의 하나님 신앙과 예수의 비전과 삶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오늘날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한 인류 문명에 어떤 빛을 비춰주는가를 천명한다.
프롤로그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기도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이상한 기도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들이 그 기도를 바치지만, '교회'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일날마다 그 기도를 드리지만, '주일'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라고 불리지만, 그 기도에는 '주님'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도 드리는 기도이지만, 영적인 감동[靈感]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는 틀린 말씀이 전혀 없다는 무오성(無誤性)이나, 동정녀 탄생,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이나 몸의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기도를 드리지만, '복음'(evangelium)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순절 계통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기도를 드리지만, '성령'이나 입신상태의 희열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로마 가톨릭, 회중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신자들도 드리지만, 사제, 주교, 교황, 회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저런 교리 때문에 서로 갈라진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런 교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에는 그리스도, 대속, 희생, 속죄, 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당이나 지옥에 가서 내세(來世, next life)를 지내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천당이나 지옥, 내세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기도'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믿고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 기도가 강조하는 것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열심히 이 기도를 드린다.
물론 이런 모습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님의 기도'는 유대인이었던 예수가 드린 유대식 기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 안에 그리스도교적인 단어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기도'가 안고 있는 이상함에 대해 또 다시 묻게 만든다. 즉 '주님의 기도'가 유대인 예수가 드린 유대식 기도라면, 왜 언약이나 율법, 성전이나 토라(Torah), 할례나 정결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식 기도가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교의 기도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교의 중심에서 나온 기도로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을 통해 세상의 양심을 향해 드리는 기도라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인류를 위한 급진적 선언(a radical manifesto)이며 희망의 찬가(a hymn of hope)로서 온 세상을 향한 기도라면,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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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선언(a revolutionary manifesto)이며 동시에 희망의 찬가라고 믿는다.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이유는, 이 기도가 이스라엘의 성서 전통의 핵심인 정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전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가 찬가인 이유는, 이 기도가 이스라엘의 성서 시(詩) 문학의 핵심인 시적 기법(poetic techniques)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정의"라는 말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는 보복적인 정의, 즉 처벌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프롤로그를 2009년 9월 27일,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쓰고 있었는데, {덴버 포스트} 일요일 판의 머릿기사는 "정의"에 관한 것으로서, 모든 피고인들에게 처벌이 공정하게 또한 평등하게 부과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머릿기사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정의"라는 말을, 재판에 의한 처벌을 뜻하는 것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의 일차적인 의미는 보복적인(retributive) 것이 아니라 분배적인(distributive) 것이다. 즉 정의롭다는 것은 모든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나누는 것을 뜻한다. "정의"의 일차적 의미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심지어 보복이나 처벌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공정하게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일종의 말장난이라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즉 성서 전통은 하나님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 말한다(시편 99:4; 이사야 33:5; 예레미야 9:24). 이 두 단어는 똑같은 것을 말한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옳은 것을 행하심으로써 정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정의로운 것을 행하심으로써 옳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세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공정하고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성서의 많은 구절들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서 전통이나 예수, 혹은 '주님의 기도'와 관련하여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거의 전적으로 분배적인 나눔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다.
성서 전통이 분배적 정의에 대한 혁명적인 비전을 선언할 때,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리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인권을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혁명적인 비전은 제대로 운영되는 가정, 집안 살림살이, 혹은 가족의 농토에 대한 일반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비전이다. 만일 당신이 어느 집안에 들어갈 때, 무엇을 기준으로 그 집주인을 판단할 것인가? 그 논밭이 잘 가꾸어져 있는가? 가축들이 제대로 살이 쪘는가? 건물들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는가? 자녀들과 딸린 식솔들이 제대로 먹고 있으며, 옷을 제대로 입고 있으며, 잠 잘 곳은 마련되어 있는가? 아픈 이들은 특별한 돌봄을 받고 있는가? 책임에 따른 보상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 모두가 넉넉한가? 특별히 그 집주인을 판단하게 되는 기준은 모두가 넉넉한가, 아니면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차지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너무 적게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성서 전통이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처럼 제대로 운영되는 집안, 공정하고 공평하며 온당하게 관리되는 가정에 대한 비전이다. 하나님은 세계라는 집의 주인이며, 어느 집주인을 판단하기 위해서 앞에서 물었던 질문들을, 이제는 지구적인 관점과 우주적인 규모에서 다시 물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넉넉하게 갖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서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공정하고 공평하며 정의롭게 자기의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 '주님의 기도'는 혁명적인 선언이며 희망의 찬가로서, 그에 필요한 변화를 선언하고 있다.
누구든 이것이 자유주의로 바꾸는 것이라거나, 사회주의로 바꾸는 것, 혹은 공산주의로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만일 어떤 이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주의(Godism), 한살림주의(Householdism), 혹은 무엇보다도 충분주의(Enoughism)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식구들에 대한 성서의 비전을 평등주의(Egalitarianism)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충분주의가 보다 정확한 용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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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인해 6백만의 생명들을 단기간 내에 “살처분”하면서도 고기값 오르는 것에 신경을 쓰는 염치없는 세상이다. 우리가 다른 생명들을 ‘먹잇감’으로만 보는 “육식동물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드워드 윌슨)일 것이다. 또한 지난 30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이 섭씨 0.6도 상승해서 전대미문의 폭염과 혹한과 식품가격 상승을 직접 경험하면서도, 더구나 보수적인 과학자들조차 30년 후에는 섭씨 2도가 상승하며, 60년 후에는 4도가 상승하게 되며 폭염, 식량난, 전쟁으로 21세기가 끝나기까지 수십 억 명이 죽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에너지 절약운동이나 대체에너지로 바꾸기 위한 본격적 노력은 찾아볼 수 없는 얼빠진 현실이다.
자본의 약탈만이 아니라 “가이아의 복수”로 인해 세상의 약한 생명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지만, “생존주의”라는 두터운 성채에 갇힌 사람들은 더 이상 이웃이나 세상, 혹은 역사에 대한 관심도 없고 “절망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할 의지도 없을 만큼 소비사회의 일차원적 욕망의 대중들이며 속물들이 되어버린”(김홍중) 때문일 것이다. 이런 떼죽음과 양심이 마비된 세상 속에서 종교는 몰상식과 이기주의와 권위주의와 폭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옛 어른들은 “후천개벽의 조짐”을 분별하고 하늘의 뜻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을 시절, “주님의 기도”에 관한 크로산의 성서 묵상을 번역하면서, 예수의 타는 목마름과 서릿발 같은 눈매를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하늘의 질서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제국의 권세로 인해 세상이 생지옥으로 변할수록, 성전마저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릴수록, 예수가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고백한 기도가 ‘주님의 기도’였다. 종교가 무엇을 해야 하며, 그리스도교가 ‘주님의 기도’의 본래적 의미를 어떻게 외면하고 왜곡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종교가 되었는지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예수가 맞서 싸웠던 당시의 세상 제국의 권세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나 더 막강하고 교묘할 것이다. 자본의 이익이든, 기술의 발전이든, 국가의 영광이든 간에, 무한한 것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사회는 언제나 하나님처럼 되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에는 짐승보다 못한 자들이 되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만다는 사실 역시 틀림없는 하늘의 뜻이다. 이런 자기파멸적인 인류 문명 속에서 예수의 복음을 통해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한 크로산의 노력은
신간안내
'주님의 기도'는 어떤 점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이며 "혁명적인 메시지"인가?
존 도미닉 크로산, 김준우 역,『가장 위대한 기도: '주님의 기도'의 혁명적인 메시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292쪽.
전대미문의 기후붕괴로 인한 폭풍과 가뭄, 해수면 상승에 대비해서 선진국들은 해안 장벽을 쌓고 농지 확보와 태양광 설비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호텔·레저사업을 위해서"(강만수) 4대강을 파내고 경인운하를 뚫고 있는 역주행 현실이다. 더군다나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세계 8위를 차지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내년에는 의무감축국 지정을 피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탄소배출권 거래제까지 연기할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경제성장 논리는 원유가격 상승만이 아니라, 국가경제의 토대인 생태계 파괴로 인해 경제성장 자체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이처럼 우리 자손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주화는커녕 종편 채널 사업에서 보듯이 소수 자본가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파시즘을 향해 더욱 치닫고 있다.
성서가 계속해서 이 세상이 "불의한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세상이 양육강식과 독점의 폭력적인 세상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의 뜻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현실은 바로 유대-기독교인들이 이런 불의한 세상의 원흉들이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의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학문까지 장악하여 세상을 날이 갈수록 더욱 "생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자들이 다름 아니라 바로 "유대인 파워"이며 "전쟁 불사"를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성과 몰상식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로마 가톨릭 교회 포함)가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며, 역사상 고대 제국들의 신들, 즉 마르둑, 호루스, 조로아스터, 주피터, 제우스 신이 죽어버린 것처럼, 유대-기독교의 야훼 하나님 역시 "이미 임종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존 쉘비 스퐁 주교({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성경과 폭력}, {만들어진 예수 참사람 예수}) 등 진보적 학자다.
1985년 조직된 예수 세미나의 공동대표로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이끌어왔던 존 도미닉 크로산은 드폴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그는 평생 동안의 예수 연구를 통해 "폭력적인 기독교 성서에 기초한 폭력적인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비폭력적인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God and Empire, 2007, p. 237)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예수는 "인류 문명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폭력과 착취 구조에 대해 어떤 해결방안을 제시했는지를 모색해왔다. 2010년에 출판된 이 책(The Greatest Prayer)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인 '주님의 기도'에 대한 성서적인 묵상이다. 저자는 자신의 평생동안의 예수 연구 결론들을 '주님의 기도'에 비춰보면서, 이 기도가 "유대교의 중심에서 나온 기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입을 통해 세상의 양심을 향해 드리는 기도"라고 정의한다. 또한 "혁명적인 선언이며 급진적인 희망의 찬가"라고 말한다. 이런 점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이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후반부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 빚, 시험(유혹)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 각각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상황에 대한 자세한 분석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서 전통, 고대 근동지방의 법적인 전통들과도 폭넓게 비교하며 그 각각의 의미를 밝힌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서의 하나님 신앙과 예수의 비전과 삶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오늘날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한 인류 문명에 어떤 돌파구를 열어주고 있는지를 밝힌다. 유대-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서의 야훼 신을 배반함으로써 오늘날 왜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도 깨우쳐준다.
(서평) [가장 위대한 기도] 를 읽고
한성수 (순천하늘씨앗교회 목사)
책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책 제목이 우선 유혹적이다. [가장 위대한 기도], The Greatest Prayer: Rediscovering the Revolutionary Message of the Lord's Prayer. “주님의 기도의 혁명적인 메시지를 재발견함!” 그러니 부제(副題)가 이미 책의 성격을 미리 다 말해 버렸다. 289쪽짜리 책을 다 읽어내려면, 보통의 독서 속도로 대략 하루면 족할 것인데, 이 책은 그렇게 만만하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다. 대추나무에 연 걸리 듯 주님의 기도문이 여기 저기 연결된 연상을 늘어놓아, 마치 요한계시록(Revelation)을 읽는 기분이다. 사람의 발 바닥에는 온갖 내장과 연결된 맥락들이 있다더니, 주님의 기도문이 성경의 발바닥쯤 된다는 주장만 같다. 녹차만도 여러 잔 마셨다. 그리고 건너편 지리산 노고단을 가끔씩 건너다보기도 하고, 이윽고 멀리 미국 어딘가에 있을 저자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 선생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군데군데 히브리 성경 참조 부분을 일일이 대조하여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서, 나름대로 차분히 곱씹으며 읽다보니 생각보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꽤 오래전에 저자 크로싼의 다른 책 [예수는 누구인가?] 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묻는다. “크로싼은 누구인가?” 나도 신학 공부를 한 세월이 꽤 되었고, 이른바 미국의 상당한 평판이 있는 대학원 저명한 교수들 밑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 난 그 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자괴감(自愧感) 조차 스믈스믈 들게 하는 이 책, 나는 누구이길래 남의 책을 읽고 그저 감격만 해야 하고, 그는 누구이길래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학자인가? 문제는 크로싼의 특유한 관점(觀點: perspective)이다. 남들이 소홀이 한 구석을 용케도 찔러 들어간 예리함에는 우선 찬사를 보내어 마땅할 것이다. 이른바 복음주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쓴 주기도문 해설에 식상한 사람에게는,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분배(分配)의 정의(正義)와 회복(回復)의 공의(公義)에 있어서 거룩하심이란 분석에 통설을 뛰어넘는 예리한 혜안이라고 감탄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레위기 성결법전(聖潔法典: Holiness Code) 부분과 창세기를 오가면서, 하느님의 성격을 종합하여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제도를 분배와 회복의 정의에 연결시킨다. 여기서 그는 외면 받고 억압당한 사람들을 지향하는 하느님의 시선을 거룩함의 시선으로 인식한다.
절집에 가보면 불교도들이 예불할 때 모두가 암송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짧은 경문이 있는데, 당나라 현장(玄奘)의 한문 번역본으로 그 길이가 276자로, 불교 사상의 상당히 심오한 내용을 압축한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우리 기독교에서도 가령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나 니케아 신조 (Nicene Creed)나 혹은 십계명(Ten Commandments)을 다 암송하라면, 상당한 양이 되겠지만,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이 불자들만큼 진지한 정성을 가지고 이들을 암송하고 소리 내어 노래하는지를 반성해보면, 정직하게 말해서 아마도 교인들 대부분이 고작 주님의 기도문(The Lord's Prayer)이나 암송하고 있을 정도가 아닌가? 게다가 상당히 많은 불자들이 천수경(千手經)은 물론 신묘장구대타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의 엄청난 장문(長文)의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것을 보느라면, 이에 비하여, 우리 기독교의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은 희랍어 원문으로 고작 72 단어에 불과하여, 우리네 종교 생활의 부담이 가벼운 만큼 다소 허술한 기분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에 대한 상당한 비판의식을 지닌 기독교인들이 꽤 있어서, 정작 이런 암송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지 주저함도 있지 않은가? 주님의 기도문을 앵무새처럼 외우기는 해도, 그 내용의 깊이나 광범위한 집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던지를 알지 못하고, 너무도 피상적으로 이해하여온 부끄러움이 늘 남아있었다. 그런데 크로싼은 이런 간단한 72 단어에 불과한 주님의 기도문에서 히브리 성경과 신약성경 속에 보전되어 온, 그러나 사람들에게 외면 당해온 요소들,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어 소리 높여 외치면서 이 기도문은 전 지구적인 차원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물론 주님의 기도문도 3세기의 카르타고의 싸이프리안(Cyprian of Carthage)이 터툴리안(Tertullian)의 영향을 받아 주해서를 낸 이래, 적어도 1700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 해설서를 내놓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주님의 기도문은 [가장 위대한 기도]라고 여겨져도 당연한 기분이 들기는 하겠다. 그렇지만 왜 그토록 위대한가? 그동안 한국에도 주기도문 해설서를 낸 사람들이 꽤 여럿 출판도 하였지만(번역서를 포함), 모두 주기도문이 가장 위대한, 가장 완벽한 기도문이라고 강변을 늘어놓아, 독자의 어리둥절함만 더해준 일이 너무도 많았다. 크로싼의 주님의 기도문 해설서가 그 제목을 [가장 위대한 기도]로 달기는 했어도, 막상 이 책을 다 읽어보기 전에는, 그가 무슨 이유로 그런 황당한 그럼에도 결국 타당한 제목을 달 용기를 내었는지 미리 가늠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위대하다고 주장하면서 책을 써내기만 하면, 독자는 그저 위대한 것으로 믿어주어야 하는가? 크로싼이 위대한 기도라고 찬탄을 붙인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독자에 따라서는 주님의 기도문이 가장 위대한 기도문이기는 하지만, 크로싼의 견해에 따라서 위대하다고 동의를 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선 크로싼 자신의 말대로 그는 주님의 기도문이 혁명적인 선언(a revolutionary manifesto)이며 희망의 찬가(a hymn of hope) 이가 때문에 가장 위대한 기도문으로 추켜세운 것이다. 이 점이 다른 여타의 저자들과 갈라서는 지점이라고 미리 작정하고 그의 논지를 따라 가야 이 책이 부드럽게 읽혀진다. 그렇지 않으면, 사사건건 동의할 수 없는 요소들이, 때로는 수많은 히브리 성경 본문들을 인용하는 것이 다소간 견강부회(牽强附會)의 흠집도 느낄 곳이 더러 눈에 띄고, 친절한 설명을 위하여 든 예화들이 자칫 서양인 특유의 장광설(長廣舌)로 책의 두께만 늘인 느낌도 든다. 물론 집중력이 대단한 사람들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산천경개를 구경하는 재미를 즐기다가 가는 길을 잘못 잃어버릴 염려가 없겠지만, 대체로 횡설수설 늘어놓는 버릇은 인문학자들이 공연히 자기 글 솜씨 자랑하는 듯한 폐단의 일면이기도 하니까(바로 나도 그런 짓을 잘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흩어버리는 문장력에 감탄하면 안 될 것이다.
왜 그는 혁명적이라고 했을까? 주님의 기도문 자체가 당시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내용이라서 그 자체로서 혁명적인가? 아니면, 혁명적인 내용으로 해석해 읽어낼 수 있어서 혁명적인 것인가? 왜 다른 주석가들은 그토록 혁명적인 주님의 기도문을 계층이나 빈부 등 입장이 달라도 모두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 위대하다고 주장하면서, 크로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었던가? 사실 정직하게 말해서 72 단어에 불과한 주님의 기도문에서는 정말 요령 좋게 짜내지 못하면 별로 많은 기름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다량의 물을 붓고 짜내면서 많은 기름이 나왔다고 주장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기름의 양은 많지 않아도 영양가가 풍부하다고 그 뛰어난 질적인 차원을 강조하기도 한다. 비유컨대, 내 집에 인형이 하나 있는데, 그 인형의 눈은 옛날 클레오파트라가 지녔던 목걸이에 달린 청옥에서 온 것이고, 그 머리칼은 중국의 양귀비의 것이었는데 귀하게 얻어 온 것이고, 그 옷은 에짚트의 어느 여왕의 치마폭을 베어온 것이고 등 등 .... 여기 저기서 모아온 진귀한 조각들로 모자이크(mosaic) 한 오브제라고 자랑하면, 그 인형이 정말 예쁠 것인가? 주님의 기도문을 이룬 단어 하나 하나의 근원이 성경 어디 어디에서 어떻게 써진 전례가 있음을 주장해도, 그 단어가 위치했던 문장의 맥락을 떠나서, 지금 그 전체가 깊은 뜻을 드러내도록 구성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해설자의 자의적(恣意的)인 주장이 들어갈 틈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설교자들이 가끔 잘도 써먹는 수작이 바로, 성경이 성경을 해설한다는 이른바 개신교 해석학을 빙자하여 도처에서 성경구절을 캐내어다가 자기 입맛대로 모자이크 처리해 놓고는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설교한다고 자랑하는 것도 꽤나 알려진 행태가 아닌가?
크로싼은 “모든 종교의 가장 위대한 기도는 온 세상과 온 지구를 향해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책 제목을 그렇게 붙였다고 설명(18쪽)하지만, 온 세상은 그만 두고 모든 사람에게 만이라도 공평하게 말하고 있는가의 의문은 피해간 것만 같다. 저자가 그토록 힘을 기울여 설명한 “아빠, 참 아버지(Abba, Father)" 라는 호칭에 대한 변명은 상당히 진부하기만 하다. 물론 성경에서 남성편향적인 호칭(아버지, 아들 등)으로 남녀를 통합한 대상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 포괄적인 언어 자체를 포괄적인 용어(inclusive language)로 고쳐 쓰면 왜 안 되나? 옛날에 그렇게 써 놓은 것이니까, 그대로 유지한다 해도, 내용이 그렇게 지시한다면, 오늘 그 주기도문을 암송해야하는 사람으로서는 과감히 바꿀 수 있어야한다. 메리 데일리(Daly)나 로즈마리 류터(Ruether) 등 여성신학자들이 주장하듯,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아버지가 하느님이 된다“는 말은 귀 기울여 들어야할 말이다. 사실 옮긴이 김준우 박사의 유려한 번역에 가려 저자 크로싼의 문체를 일일이 씹어볼 형편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이 책이 주는 인상은 좀 느슨하고 평이하게 문장이 흘러가서, 대중들을 위한 서적으로는 안성맞춤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는 해도,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여지는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본 사람은 그 품평이 각양각색이지만, 놀랍게도 그의 최후의 작품 판전(板殿)이란 글씨 두 글자를 두고는 대체로 모두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댄다. 직접 붓으로 글씨를 써본 사람은 추사의 글씨가 정말 대단한 경지에 오른 것을 알지만, 대개는 그저 그가 중국에까지도 이름을 떨친 명필이란 평판만으로 그의 글씨를 무조건 높게 본다. 괴상한 글자체를 자랑하는 추사가 젊은 시절에 썼던 반야심경 한문 해서(楷書)를 본 사람은 비로소 왜 추사가 위대한지 안다. 사실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의 전작들 특히 1988년의 The Cross That Spoke, 1991년의 The Historical Jesus, 1998년의 The Birth of Christianity 같은 대작들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발상과 내용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방대한 자료들과 엄청난 독서량이 주는 위압감을 겪어본 사람은, 마치 추사의 저 유명한 그러나 간결하기 그지없는 그림, 뼈만 남은 소나무 두 세 그루 서 있는 세한도(歲寒圖)를 본 듯이, 이 책 [가장 위대한 기도]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드러낸 몇 가지 견해는 매우 진보적이고 도전적이다: 주님의 기도문에 대하여 해설하다가, 바울의 “아빠기도문” 혹은 주님의 게쎄마니 기도문 등을 열거하면서, 주님의 기도문에 병행시킨 점은 예수가 부른 “하늘에 계신 아버지” 란 의미 내역의 독특성을 약화시킨 점이 있을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아버지” 로 부른 전통은 예수 이전부터 이미 오래 동안 있어온 관행이라면, 예수가 이를 사용한 특이점이 무엇이었던가를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크로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가 ”지구의 집주인(Household of Earth)" 이란 의미 전환으로 주장하면서, 그 집주인은 창조자, 보호자, 부양자, 모델로서의 집주인 역할을 확대해 나간 설명은 놀랍기만 하다. 하늘에서 끌어내린 땅의 집주인, 그러니 땅 위에서 자행되는 현실에 대한 탄원이 주님의 기도문의 후반부를 이룬 절절함이 강조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탄원 빵에 대한, 빚에 대한, 그리고 시험(유혹)에 대한 설명에서 크로싼의 혜안이 과감하고 혁명적이다. 예전에도 있어온 주장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라”는 기도문에서 “죄(sin)" 란 말이 원래 ”빚(debt)" 이란 내력을 설명한 크로싼의 자세한 안내는 고맙기 그지 없다. 한 걸을 더 나아가, 누가 감히 주기도문 속에서 비폭력적 저항의 중심을 이끌어내어, 악에 대한 저항을 폭력적으로 하고 싶은 유혹과 시험을 넘어가려는 기도로 해설할 수 있었던가? 크로싼은 예수의 대리만족(vicarious satisfaction) 교리의 발생 근원을 제 1차 십자군 전쟁 당시, 1093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안셀름(Anselm)의 책 "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었는가?[Cur Homo Deus?]“ 에 돌리면서, 예수의 십자가 대속론(代贖論: substituionary atonement)을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논증한다. 그러나 이는 다소 지나친 강변일 것이다. 희생제물이 대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린 선물이기에, 예수님의 죽으심도 대속적이 아니라는 분석은 그럴싸해도, 성경에 나온 말들에 반영된 성경기자들의 신학적 줄기를 왜곡하는 것이리라. 대속론은 그 근원을 재해석하여, 오늘의 우리 현실에 의미 있는 것으로 해설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성경에 너무도 뚜렷한 표현들을 그게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흔히 신학서적이라면 한 세대 전만해도 독일풍의 깐깐하고 난삽한 전개를 자랑하는 책들 앞에 미국의 신학자들도 주눅이 들었던 적이 많았지만, 요즘은 좀 세상이 달라졌다. 독일인 학자들 가운데도 몰트만(Moltmann)이나 죌레(Soelle)같이 다분히 포퓰러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 더 널리 읽히는 것은, 그들의 책이 영문으로 번역되었거나 아예 영문으로 써진 탓이라거나, 단지 독자들의 수준이 저하된 탓이라거나 그에 영합하는 학자들의 타락으로 폄하할 일이 아니다. 사실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 연구만 해도 알베르트 쉬바이쳐(Albert Schweizer) 의 회기적인 역작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 이 나온 게 도대체 언제인데 (1906년), 이제 와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하여 불끈 솟아 오른 것을 지켜보면, 이제 유렆 신학의 퇴조를 보여주는 현상이 눈에 보인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전환기를 연 크로싼(Crossan)과 펑크(Robert Funk)의 등장으로 미국 성서 신학은 세계적인 지평을 획득하였거니와, 사실은 이제 독일을 비롯한 유렆 대륙의 기독교가 퇴조한 시대상을 반영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미 미국에서도 중요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시대의 풍조를 드러내어, 재주 있고 패기 있고 끈기 있는 학생들이 신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진행 중인 것은, 사실 미국 내 기독교의 퇴조와 병행하는 모습이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교들을 점령한 듯 한국 학생들이 캠퍼스를 누비게 된 것이, 단지 한국인들의 뛰어난 자질 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가 이제껏 미국 교회의 아류(亞流) 혹은 흉내 내기에 빠져 정신 못 차리다가, 뒤 늦게 스스로 타락한 풍조에 휘말려, 신학 이전에 신학이 그려낼 대상의 중심부가 세속의 쓰나미(津波)에 초토화될 운명이 다가오는 듯한 불길함을 금할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일본 열도를 삼켜버린 강도 9의 지진과 전대미문의 쓰나미에 전 세계가 놀라고 있는 뉴스를 보면서, 일본을 향하여 참으로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이 시간, 왜 나는 한국 교회를 향한 염려를 하는 연상을 하는지 스스로 기분이 암울하다.
최근 미국 연합감리교단 소식지에서 소그룹 안에서 통성기도를 실천해보았더니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한 이야기(선전 광고?)를 읽고 기분이 착잡하였다. 미국 감리교단도 살아남으려고 별 짓을 다 하는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한 아픔이다. 나는 통성기도는 특별한 사건, 가령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당하여, 이런 급박하고도 엄청난 사태에 대하여 하느님은 무엇하고 계시느냐고, 하느님에게 호통이라도 치며 달려들고 싶을 때나 할 수 있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통사정을 하는 모습은 그 모양새 이전에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아버지 혹은 어머니 앞에 성숙한 기도의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비하면, 불교도들이 하는 기도는 노래다! 사실 노래하지 않는 종교란 생각할 수조차 없지만, 그 노래가 곧 기도임을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크로싼은 성숙한 기도의 진행을 불평과 간구의 요청에서 찬사와 찬양의 감사로, 감사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 참여와 협동으로 나가가는 점강적 진행으로 실천될 것을 말한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신 예수의 기도는 사실 그 정신만 유지하라는 강령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주님의 기도문을 마치 무슨 주문(呪文)이라도 되는 듯이, 모임을 마칠 때 축도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일이다. 교회에서는 이 기도문을 회중의 기도 전에 떠올려서, 이어질 기도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었으면, 그래서 이어지는 기도가 이 정신 이 범위를 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지료로 삼았으면 한다. 이 뼈대에 살을 붙이고, 이 줄기에 잎이 무성하고 꽃이 피어나면, 언젠가는 우리의 기도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겠는가? 추사 김청희의 세한도(歲寒圖) 쓸쓸한 나뭇가지 너머에 그 많은 추사의 글씨가 풍성하게 떠오른다. (기독교사상 2011년 4월호)












2010년 11월 13일 엘에이 타임즈 기사
http://www.latimes.com/news/local/la-me-beliefs-prayer-20101113,0,7881583.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