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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가장 이상한 기도 … 7
1장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 19
2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49
3장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 85
4장  당신의 왕국이 오소서 … 115
5장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 149
6장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 183
7장  우리의 빚을 탕감하소서 … 217
8장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 247
에필로그: 가장 이상한 책 … 277
부록 … 289
옮긴이의 말 … 290

 

 

존 도미닉 크로산의 <가장 위대한 기도> (E. 2010) 는 2011년 2월 15일에는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는 드폴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가장 권위있는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비롯해서,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하나님과 제국}, {예수의 역사},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등 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인 '주님의 기도'에 대한 성서적인 묵상이다. 크로산은 평생동안의 예수 연구를 통해 하나님을 "이 세상이라는 집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은 한 가정의 집주인처럼, 세상에 사는 모든 식구들이 공평하고 넉넉한 몫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배적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예수 연구의 결론들을 '주님의 기도'에 비춰보면서, 이 기도가 "유대교의 중심에서 나온 기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입을 통해 세상의 양심을 향해 드리는 기도"라고 정의한다. 또한 "혁명적인 선언이며 급진적인 희망의 찬가"라고 말한다. 이런 점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이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왕국, 뜻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후반부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 빚, 시험(유혹)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 각각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상황에 대한 자세한 분석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서 전통, 고대 근동지방의 법적인 전통들과도 폭넓게 비교하며 그 각각의 의미를 밝힌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서의 하나님 신앙과 예수의 비전과 삶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오늘날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한 인류 문명에 어떤 빛을 비춰주는가를 천명한다.

 

 

 

프롤로그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기도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이상한 기도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들이 그 기도를 바치지만, '교회'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일날마다 그 기도를 드리지만, '주일'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라고 불리지만, 그 기도에는 '주님'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도 드리는 기도이지만, 영적인 감동[靈感]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는 틀린 말씀이 전혀 없다는 무오성(無誤性)이나, 동정녀 탄생,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이나 몸의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기도를 드리지만, '복음'(evangelium)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순절 계통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기도를 드리지만, '성령'이나 입신상태의 희열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로마 가톨릭, 회중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신자들도 드리지만, 사제, 주교, 교황, 회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저런 교리 때문에 서로 갈라진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런 교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에는 그리스도, 대속, 희생, 속죄, 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당이나 지옥에 가서 내세(來世, next life)를 지내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천당이나 지옥, 내세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기도'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믿고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 기도가 강조하는 것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열심히 이 기도를 드린다.
물론 이런 모습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님의 기도'는 유대인이었던 예수가 드린 유대식 기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 안에 그리스도교적인 단어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기도'가 안고 있는 이상함에 대해 또 다시 묻게 만든다. 즉 '주님의 기도'가 유대인 예수가 드린 유대식 기도라면, 왜 언약이나 율법, 성전이나 토라(Torah), 할례나 정결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식 기도가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교의 기도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교의 중심에서 나온 기도로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을 통해 세상의 양심을 향해 드리는 기도라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인류를 위한 급진적 선언(a radical manifesto)이며 희망의 찬가(a hymn of hope)로서 온 세상을 향한 기도라면,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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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선언(a revolutionary manifesto)이며 동시에 희망의 찬가라고 믿는다.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이유는, 이 기도가 이스라엘의 성서 전통의 핵심인 정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전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가 찬가인 이유는, 이 기도가 이스라엘의 성서 시(詩) 문학의 핵심인 시적 기법(poetic techniques)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정의"라는 말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는 보복적인 정의, 즉 처벌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프롤로그를 2009년 9월 27일,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쓰고 있었는데, {덴버 포스트} 일요일 판의 머릿기사는 "정의"에 관한 것으로서, 모든 피고인들에게 처벌이 공정하게 또한 평등하게 부과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머릿기사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정의"라는 말을, 재판에 의한 처벌을 뜻하는 것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의 일차적인 의미는 보복적인(retributive) 것이 아니라 분배적인(distributive) 것이다. 즉 정의롭다는 것은 모든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나누는 것을 뜻한다. "정의"의 일차적 의미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심지어 보복이나 처벌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공정하게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일종의 말장난이라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즉 성서 전통은 하나님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 말한다(시편 99:4; 이사야 33:5; 예레미야 9:24). 이 두 단어는 똑같은 것을 말한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옳은 것을 행하심으로써 정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정의로운 것을 행하심으로써 옳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세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공정하고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성서의 많은 구절들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서 전통이나 예수, 혹은 '주님의 기도'와 관련하여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거의 전적으로 분배적인 나눔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다.
성서 전통이 분배적 정의에 대한 혁명적인 비전을 선언할 때,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리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인권을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혁명적인 비전은 제대로 운영되는 가정, 집안 살림살이, 혹은 가족의 농토에 대한 일반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비전이다. 만일 당신이 어느 집안에 들어갈 때, 무엇을 기준으로 그 집주인을 판단할 것인가? 그 논밭이 잘 가꾸어져 있는가? 가축들이 제대로 살이 쪘는가? 건물들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는가? 자녀들과 딸린 식솔들이 제대로 먹고 있으며, 옷을 제대로 입고 있으며, 잠 잘 곳은 마련되어 있는가? 아픈 이들은 특별한 돌봄을 받고 있는가? 책임에 따른 보상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 모두가 넉넉한가? 특별히 그 집주인을 판단하게 되는 기준은 모두가 넉넉한가, 아니면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차지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너무 적게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성서 전통이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처럼 제대로 운영되는 집안, 공정하고 공평하며 온당하게 관리되는 가정에 대한 비전이다. 하나님은 세계라는 집의 주인이며, 어느 집주인을 판단하기 위해서 앞에서 물었던 질문들을, 이제는 지구적인 관점과 우주적인 규모에서 다시 물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넉넉하게 갖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서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공정하고 공평하며 정의롭게 자기의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 '주님의 기도'는 혁명적인 선언이며 희망의 찬가로서, 그에 필요한 변화를 선언하고 있다.
누구든 이것이 자유주의로 바꾸는 것이라거나, 사회주의로 바꾸는 것, 혹은 공산주의로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만일 어떤 이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주의(Godism), 한살림주의(Householdism), 혹은 무엇보다도 충분주의(Enoughism)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식구들에 대한 성서의 비전을 평등주의(Egalitarianism)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충분주의가 보다 정확한 용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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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인해 6백만의 생명들을 단기간 내에 “살처분”하면서도 고기값 오르는 것에 신경을 쓰는 염치없는 세상이다. 우리가 다른 생명들을 ‘먹잇감’으로만 보는 “육식동물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드워드 윌슨)일 것이다. 또한 지난 30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이 섭씨 0.6도 상승해서 전대미문의 폭염과 혹한과 식품가격 상승을 직접 경험하면서도, 더구나 보수적인 과학자들조차 30년 후에는 섭씨 2도가 상승하며, 60년 후에는 4도가 상승하게 되며 폭염, 식량난, 전쟁으로 21세기가 끝나기까지 수십 억 명이 죽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에너지 절약운동이나 대체에너지로 바꾸기 위한 본격적 노력은 찾아볼 수 없는 얼빠진 현실이다.

자본의 약탈만이 아니라 “가이아의 복수”로 인해 세상의 약한 생명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지만, “생존주의”라는 두터운 성채에 갇힌 사람들은 더 이상 이웃이나 세상, 혹은 역사에 대한 관심도 없고 “절망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할 의지도 없을 만큼 소비사회의 일차원적 욕망의 대중들이며 속물들이 되어버린”(김홍중) 때문일 것이다. 이런 떼죽음과 양심이 마비된 세상 속에서 종교는 몰상식과 이기주의와 권위주의와 폭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옛 어른들은 “후천개벽의 조짐”을 분별하고 하늘의 뜻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을 시절, “주님의 기도”에 관한 크로산의 성서 묵상을 번역하면서, 예수의 타는 목마름과 서릿발 같은 눈매를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하늘의 질서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제국의 권세로 인해 세상이 생지옥으로 변할수록, 성전마저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릴수록, 예수가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고백한 기도가 ‘주님의 기도’였다. 종교가 무엇을 해야 하며, 그리스도교가 ‘주님의 기도’의 본래적 의미를 어떻게 외면하고 왜곡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종교가 되었는지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예수가 맞서 싸웠던 당시의 세상 제국의 권세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나 더 막강하고 교묘할 것이다. 자본의 이익이든, 기술의 발전이든, 국가의 영광이든 간에, 무한한 것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사회는 언제나 하나님처럼 되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에는 짐승보다 못한 자들이 되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만다는 사실 역시 틀림없는 하늘의 뜻이다. 이런 자기파멸적인 인류 문명 속에서 예수의 복음을 통해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한 크로산의 노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