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목사라는 사람이 금란교회를 감리교 최대 교회로 성장시킨 이후에 정말로 감독회장이 되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무엇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나중에 만천하에 드러난 배 모 여인과의 관계처럼 정말로 무슨 큰 비밀을 서둘러 덮어야만 했는지, 그 복잡한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 변선환 학장과 포스트모던 신학을 소개한 홍정수 교수에 대해 종교재판을 꾸미기 시작한 1991년, 한국 사회는 강경대 군 사망 사건 이후 소위 "분신정국"이었다. 광주학살을 주도한 군부세력이 3당 합당으로 권력을 대물림할 음모를 꾸몄고 대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으며, 공권력은 무자비했다. 경찰에 맞아죽고 분신한 대학생들만 열 명이 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10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7241557001&code=940301
김홍도 목사는 1991년 말에 미국 뉴욕 뉴저지지방 연합부흥회(뉴브룬스윅 교회)에 강사로 와서 "한국의 대학생들이 분신을 통해 최후발악을 하고 있다"고 떠들었다. 강기훈 씨 유서대필 사건조작도 이런 정치공작 시대의 산물이었으며, 감리교 종교재판도 이처럼 험난한 역사 속에서 하늘의 뜻을 헤아리던 신학자 두 사람을 "통일교 비호자"로 몰아 출교시킨 교권주의자들의 공작이었다. (신학자에게 통일교 비호자라는 누명을 덮어씌우는 것은 빨갱이로 모는 것과 같다).
결국 한국교회는 광주 항쟁 이후, 아니 일제 시대와 제주 4.3 사태와 한국전쟁 이후 그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의 신학적 의미를 밝힌 홍정수 교수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부흥사가 신학자를 상대로 하여 신학/교리적으로 기소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어느 졸업생(그는 곧바로 금란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의 거짓 제보에 기초하여 감신대의 몇몇 교수들과 공모하여 "통일교 비호자"라고 증거를 조작해서 출교시킴으로써, 역사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배우기를 거부했다. 교리수호대책위원회라는 고발자 집단이 재판위원 15명 가운데 13명을 차지한 상태였으니 더 이상 무슨 시시비비를 기대할 수 있으랴.
오랜 악몽과 같은 세월,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참으로 끔찍한 일이 감리교단과 감신대 안에서 벌어졌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종교재판의 진상은 홍정수 교수가 발표한 <포스트모던 예수: 감리교회 종교재판의 진상>(조명문화사, 1992, 98쪽)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온라인 서점에서 전자책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1992년 5월 7일, 김홍도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금란교회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서울연회 재판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에 대해 출교를 결정한 후, 홍 교수가 김홍도 목사와 유상렬 장로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소위 "예수 피, 개/돼지 피 주장")으로 고발하자, 피고인들은 출교 결정에서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한 "대학원위원회보고서"라는 비밀문서를 재판부에 제출했고, 홍 교수는 1993년 6월 1일, 처음으로 그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문서들이 비밀문서인 이유는 공식적인 문서에 반드시 필요한 문서 작성자나 문서 발송자의 도장이나 서명, 연회재판위원회의 공문서 접수자 도장과 접수 시간 도장 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홍 교수는 비록 출교되었다 해도 사립학교법에 의해 교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새로 학장이 된 K 학장은 1993년 가을까지 두 차례 징계위원회를 열어 홍 교수에 대한 파면을 결의했으며, 교육부 교원징계 재심위원회는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두 차례 모두 파면을 취소하자, K 학장은 3차 징계위원회를 구성했다.
따라서 종교재판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던 대학원위원회보고서를 기록한 위원회 서기 B 교수에게 구두사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부득이 1993년 10월 13일, 홍 교수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의 결정적인 위증문서 <대학원위원회보고서>의 음해조작 과정"(최종본은 A4 용지 23장)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당일 오후부터 수업을 거부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며, 석 달 넘게 투쟁을 계속했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사과도 없었다. 당시 고생을 많이 했던 학생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다. 1994년도 가을에도 학내사태가 발생하여 결국 전교생이 한 한기 유급하게 된 것은 종교재판 문제와 직접 관련된 학내사태는 아니었다.
종교재판의 결정적인 위증문서 대학원위원회 보고서의 음해조작 과정.pdf
감신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통일교 간부 Y을 홍정수 교수가 비호했다는 허위 사실(홍 교수는 Y가 통일교 간부라는 제보를 받고 대학원 교무처에 통보했으며, Y의 졸업논문 심사를 거부함으로써, Y는 교수 두 사람만의 논문 심사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제보자 L은 당시 학부 2학년 학생으로서 목격했다는 것을 3년이 지난 뒤에 3년 전 "대학원 과장"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서 증언했다는 게 과연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홍 교수에게 제보했다는 증언을 "대학원 과장" 홍 교수에게 제보한 것으로 악의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또한 소위 대학원위원회에 참석했다는 교수들 역시 홍 교수가 3년 전 당시 "대학원 과장"으로서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몰아붙였고, 홍 교수는 마치 이것을 자인한 것처럼 꾸며져 있다.
그러나 총장이 발행하여 위조하지 못하도록 스카치테이프까지 붙여서 떼어준 보직경력확인서(별첨자료 4)는 1987년이건 1988년이건 홍 교수는 대학원 과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당시 대학원 과장은 Y 교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감신대의 몇몇 선배 교수들은 학적부만 들쳐보아도 금방 들통이 나고 말 끔찍한 짓들을 벌였고, 이런 음해조작문서를 비밀리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 넘겼으며, 재판위원회는 당사자에게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출교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위증자들은 어느 누구도 구두사과조차 거부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학원위원회 보고서는 감신대 몇몇 선배교수들이 허위사실에 입각해 음해조작한 문서이며, 이를 근거로 작성된 기소장에 의해 홍 교수는 "통일교 비호자"로 출교되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결정적인 위증문서를 만들기로 작정했을까? 또한 누가 이런 음해조작 문서를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 넘겨주었을까? 어쨌건 통일교에 대한 비판적 논문까지 발표한 홍 교수를 "통일교 비호자"라는 누명을 씌워 출교시키기 위한 허위 문서를 조작하고 결국 출교시킨 후에, 1년 4개월이 지나 <대학원위원회 보고서의 음해조작과정>을 통해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홍 교수에 대한 3차 파면까지 밀어붙인 자들은 참으로 잔인한 선배 교수들/목사들이었다.
그 선배교수들은 오랫동안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홍정수 교수가 서울연회에서 출교당하고 이어서 감신대에서조차 파면될 당시, 홍 교수의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그들은 촉망받는 후배 신학자를 이렇게 생매장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까지 홍정수 교수가 발표한 책들은 <감리교 교리와 신학>(1989), <다종교와 기독론>(1990), <베짜는 하느님>(1991), 그리고 <상생신학: 한국신학의 새 패러다임>(1992)이었다. 그 밖에 세계신학연구원이 발행한 책들은 <좌우분열 속의 치유신앙>(1989), 홍현설의 <기독교 후기에 산다>(1990), 프레데릭 번햄의 <포스트모던 신학>(1990), 존 캅의 <종교다원주의와 오직 예수>(1992), <읽을거리: 포스트모던 신학>(1993), 존 캅의 <제니퍼를 위한 기도>(1993) 등이 있다.
박정희를 비롯하여 이명박,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독재권력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재일교포 유학생들과 납북 어부들처럼 한국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을 고문하여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 피해자들 대다수가 40년 세월이 지나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은 한 마디 사과조차 하지 않았듯이, 종교재판을 조작한 목사들/교수들 역시 전혀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도 교회도 크게 변하지 않은 거 같다. 특히 신학교는 날이 갈수록 학생들은 줄어들고, 일부 교수들은 더욱 비겁해지고 몰상식한 이사들의 눈치 보기에 바쁜 모습이다.
좌우간 1992년 종교재판 과정에서 "통일교 비호자"를 조작함으로써 출교판결의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한 "대학원위원회보고서"라는 위조비밀문서를 조작한 것은 신학교의 선배 보직교수들이었다. 그 조잡한 문서가 비밀리에 작성되고 또한 비밀리에 재판위원회에 전달될 당시 학장은 P 학장이었다(OMG!). 군대에서조차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부대 지휘관이 모든 책임을 떠 안고 후배 장교들을 보호하는 일이 보통이지만, 감신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발생한 것인가?
출교결정을 내린 서울연회 감독은 나원용 감독이었다. 그 후 새로 학장이 된 K 교수는 백주년기념관 건립을 위해 김홍도 목사로부터 돈을 받아내기 위해 사립학교법에 의해 보호받는 홍 교수를 축출할 징계위원회를 세 차례 열어 결국 파면시켰다. 상당수 교수들이 학장의 지시에 따라 매번 징계위원회에서 파면을 결의했다. 결국 신학교에서 동료 교수를 죽이기 위해 떼거리로 달려들어 물어뜯은 것은 외톨이가 된 자를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하이에나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학장의 지시에 따라 징계위원이 된 교수들 명단은 밝히지 않겠지만, 아무도 징계위원직을 사퇴하지 않았고, 학장에게 저항하여 학살을 막지도 않았다). 동료 교수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동료 교수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출교시킨 후 집요하게 공격하여 끝내 파면시킴으로써 확인사살까지 하는 짓들은 코끼리나 박쥐들도 결코 하지 않는 짓이다.
심지어 당시 학장을 비롯해서 보직교수들이 경찰과 검찰 앞에서 홍정수 교수가 통일교 비호자인 것은 그가 세운 연구소 이름이 "세계신학연구원"처럼 통일교의 "세계일보"와 비슷하며, 그가 발행하는 신학잡지 이름이 "한몸"이었다가 "세계의 신학"(Worldly Theology)으로 바뀐 것은 통일교의 피가름을 통한 한몸의 구원론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전문적인 신학자들처럼 떠들어 결국에는 학교에서도 쫓아냈다.(감신대 학술잡지 이름이 <세계와 신학>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교수들이 세계라는 단어를 통일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김홍도 목사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소위 "예수 피 개 피")을 동부지청 이충* 검사 앞에서 인정하고, 한 시간 가까이 살려달라고 빌자, 홍 교수는 선배목사를 기소하여 또 다시 교단이 손가락질 당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적 차원에서 고소를 취하하고 합의각서를 작성했다. 그 후 보름 정도 지나서 김홍도 목사는 종교재판을 조작하여 홍 교수를 출교시킨 것에 대한 죄값으로 금란교회 재정담당이라는 정찬* 장로를 통해 8,000만원을 주택은행 자기앞수표로 지불했는데(물론 그에게 영수증을 끊어주었다), 그 최소한의 죄값을 받은 것이 "교수품위손상"에 해당한다며 교육부까지 학교 손을 들어주었다. 홍 교수는 고소를 취하하면서, 또한 그 이후에도 결코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수 억 원을 지불하여 중앙일간지에 최소 6회, 교계신문에 최소 11회에 걸쳐 5단 광고를 통해 흑색선전("홍정수 교수는 예수 피를 개/돼지 피라고 썼다")을 유포함으로써 신학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가해자로부터 돈으로 배상받은 것이 설령 교수품위손상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1개월 근신이나 감봉이 아니라 파면이었다. 신학교 보직교수들과 교육부가 한 통속이었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였고 그만큼 교회 장로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의 눈치를 보던 때였다.
홍 교수는 왜 그토록 동료교수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으며 목회자들 사이에서 괘씸죄에 걸린 것일까? 동정녀 탄생과 육체 부활에 관한 그의 정직한 신학과 직설적인 말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집단에나 대다수는 누이좋고 매부좋고 식으로 그냥 적당히 넘어가지만, 원칙에서 벗어나면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 있게 마련이다. 신학교 안에서도 학장과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교수회의에서 원칙을 강조하며 판단력이 빠른 홍 교수를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생동안 십자가의 원수사랑과 화해를 입에 달고 사는 신학교 교수들이 홍 교수를 통일교 비호자로 몰아서 출교시키고 끝끝내 파면시킨 데에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싫은 사람에 대해 그냥 용납하거나 인정하거나 보듬어 안을 생각을 하지 않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쫓아낸 데에는 그의 삶의 방식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무의식이 작동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교수들처럼 대한민국 상위 1%의 연봉을 받아 아파트 평수 늘리는 대신에 그는 교수 근속 10년 표창패를 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13평짜리 연립주택에 살면서도 자비를 들여 동녘교회를 개척했고 세계신학연구원을 만들어 신학잡지(계간 발행이었다) 운동을 벌이고 많은 단행본들을 출판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삶의 방식과 다른 그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통일교 돈을 받으니까 저렇게 엄청난 돈이 드는 일들을 할 것이라고 의심하다가, 결국에는 그 의심을 누명으로 덮어 씌움으로써 자신들의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을 정당화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책을 발행하려면 인쇄소에서 문선공들이 활자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조판을 한 후, 교정작업을 거쳐 보통 활판인쇄를 해야만 했기에 출판비가 매우 비쌌지만,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된 이후에는 컴퓨터로 직접 편집작업을 한 후, 인쇄소에 파일을 넘겨주면 되었기 때문에, 출판비용이 훨씬 줄어들었다).
감신대 교수단 내의 이런 알력과 질시가 시작된 것이 특히 1980년대 이후 특정 교수를 중심으로 한 미국 유학파와 독일 유학파 사이의 알력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인간 관계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음해문서를 조작할 정도로 집단적인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권력과 돈 맛에 취하면 흔히 정신이 마비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기 십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해방 전후의 혼란기, 한국전쟁, 독재정권을 겪는 동안,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후배 신학자를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해서 통일교 비호자로 모함해서 생매장시킨 것은 그들이 교수/목사가 되기까지 에고가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팽창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복음조차 그들이 평생 겪게 된 깊은 심리적 상처들과 그림자들을 결코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후 세대들조차 권력이 저지르는 불의와 부조리에 순응하게 된 이유는 집단 내에서 복종을 거부할 때 치러야 할 대가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복종과 침묵을 통해 자기 이익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홍도 목사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값을 돈 8000만 원으로 지불했지만, 신학교 선후배 교수들/목사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감리교단이 20여 년이 지나도록 종교재판이 명백한 조작극이었으며 학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듯이 말이다.
이후 홍 교수는 한국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로 가서, 그레고리 라일리 교수와 같은 신약학 교수들로부터 "예수세미나"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되어, 한국기독교연구소(세계신학연구원을 개편한 연구소)를 통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서들을 처음 소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홍 교수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아름교회를 개척하여 10년 가까이 목회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목회자 재교육을 위해 "갈릴리 신학대학원"을 세워 주정부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또한 "예수목회세미나"를 미국과 한국에서 해마다 개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07698.html
다음의 글은 종교재판의 도화선이 된 홍정수 교수의 신앙고백이었다.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예수 피/개 돼지 피는 김 목사의 날조였다.
http://historicaljesus.co.kr/xe/index.php?mid=article&category=18268&document_srl=21233
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 1 / 손승호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966
"한국의 개벽사상의 빛에서 본 기독교의 부활신앙"
財團法人 省谷學術文化財團 貴中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2가 24-1 쌍용 빌딩 5층 100-748
종류 : 個人 學術硏究 人文分野
硏究課題의 題目 :
韓國의 開闢 사상의 빛에서 본 基督敎의 復活信仰
논문작성자: 洪 丁 洙
소속: 감리교신학대학
주소: 은평구 갈현2동 523-75 연린 203호
사무실: 서대문구 충정로2가 99-19
세계신학연구원(312-4778/313-9698)
제출일: 1992년 12월 11일(미국에서 우송함)
<요약> “復活과 開闢”
필자가 이 연구를 하는 데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각종 신학적/신앙적 혼란의 저변에 놓여 있는 “신앙 언어”의 혼동을 조금이라도 해명하려는 것이며, 둘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있었던 한민족의 불행, 곧 “때 이른 죽음”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접근의 전초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하여 제1장에서는 소위 “포스트모던 신학”의 개념과 그것이 등장하게 되는 신학사적 이유를 간단히 논하고 나서, 한국인들이 최근에 겪었던 각종 불행한 죽음들과 그것에 대한 교회의 불성실성을 지적하였다. 이것이 이 논문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오늘날의 우연한 문제가 아니라, 18세기 한국 실학자들의 신랄할 비판을 이미 받은 바 있는 뿌리 깊은 문제임을 밝혔다.
제2장에서는 부활의 전통적 이해의 한 견본으로 칼빈의 부활 사상을 다루었다. 칼빈의 사상은 오늘날 서방 기독교와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아직도 대표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부활 사상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죽음의 극복이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고 모형”(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부활 사상은 만일 그것의 근저가 되는 “타락”이 사실(事實/史實)이 아님이 밝혀질 경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제3장에서는 기독교의 부활 사상을 그 본래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신약성서 일반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중간기”에 씌어진 소위 묵시문학의 산물임을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통하여 밝히었다. 그리고 신약성서 연구에서 어떻게 하여 오늘날처럼 묵시문학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를 논하면서, 특히 쉬바이쳐와 케제만의 공헌을 피력하였다. 물론 묵시문학과 바울의 신학은 연속성이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켁의 논리도 담았다. 만일 신약성서가 묵시문학을 배경으로 하여 읽을 수밖에 없는 문서임을 성서학자들이 밝히어 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제로 “부활”이야말로 묵시문학의 종말론, 곧 하나님의 정의(신절론)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기독교인의 언어라는 우리의 명제를 확보할 수가 있다.
제4장과 5장에서는 조금 독특한 작업을 하였다. 즉 부활을 묵시문학의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면, 우리 민족은 성서의 그 언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토착적 질문에 답하기 위한 준비/기본 작업으로서, 한국인들의 “종말론”이라 할 수 있는 무속의 원, 한, (귀)신 사상을 검토한 후, 불교의 미륵/미타 사상을 검토하였다. 이들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늘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어 오기는 했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새 세상/시대(신천지)”을 소망하는 한이 서려 있음을 논구하였다. 특히 5장에서는 희망과 좌절의 격동기였던 한국의 19세기의 민족종교 운동들, 곧 (김일부와) 水雲, 甑山, 少太山 등의 종교/사회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開闢에서 한국인의 부활 언어의 가능성을 논하였다.
제6장 결론에는 지금까지 논한 것을 기초로 간단히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였다.
1) 신약성서의 “부활”은 인간의 자연스런 죽음의 문제에 대한 대답(인간론적 접근)도 아니며;
2) 신약성서의 “부활”은 지구 또는 우주의 종말에 대한 도래를 알리는 경고(우주론적 접근)도 아니며;
3) 신약성서의 “부활”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정의의 죽음을 경험하였던 특정 시대 유 태인들의 신앙의 언어(신정론적 접근)로서;
4) 한국인들의 경우, 그것을 “개벽”이라고 번역해 준다면 오히려 몇 가지 장점이 있다.
<ABSTRACT>
'Resurrection' in the Light of Kaebyuk by Jeong Soo Hong
This paper deals with two related issues in Korea: first, the Korean people have experienced the suffering of premature deaths in socio-political context; secondly, the Korean church has fallen into a deep confusion of their understanding of "religious
language," i.e., resurrection, death, parusia and so on. From this account, this paper proposes a new Korean interpretation of the traditional Christian concept of "Resurrection."(#1)
In chapter two, the root of premature understanding of 'resurrection' is inquired. The Christian myth of the "Fall" illustrated in the Reformers' thought would be a main cause. Especially, Calvin claimed that the three evils will be all overcome in the Resurrection at the End of History, while he insisted that the (Greek form of) immortality should be kept in the Christian faith of Resurrection(#2).
In chapter three, being sensitive to such misunderstandings and arbitrary interpretations,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idea of Christian resurrection demands a close inquiry on the original context and its influence. In this sense, the true meaning of resurrection should be considered in the light of apocalyptic literacy and its relation with eschaton. As a result, the intrinsic idea of resurrection is an answer to the Righteousness of God, so called theodicy as apocalypse was another answer to the same question.
Finally, in the chapters of four and five, the question of 'how we the Korean interpret the resurrection-language in the Bible properly?' would be raised. Answering to this question will be an agent task for the indigenization of Christianity for today. This task in turn demands a close examination of the Korean traditions, i.e., shamanistic suffering, reconciliation and god(s), Buddhist concepts of Amida and etc. This research shows commonly the expectation of "New Heaven and New Earth." Particularly, the national religions in the 19th century concentrated this traditional concept in terms of "KaeByuk." From this perspective, the concept of "KaeByuk" will be a strong alternative for that of resurrection.
Summary statements are shown in the chapter 6 as followings:
1) The meaning of 'resurrection' in the New Testament is not the answer to the problems of natural death. It repudiates humanistic approach in itself.
2) The meaning of 'resurrection' is not a signal warning the end of the Earth or Cosmos. It refuses cosmological approach.
3) Thus, 'resurrection' is a kind of religious language of the Jew who experienced the death of divine righteousness. It is an answer of (Judeo-Christian) theodicy.
4) From this account, for the Korean today, the term of "KaeByuk" will be an alternative translation which has many theological strengths.
「韓國의 開闢 사상의 빛에서 본 基督敎의 復活信仰」 <목차>
I. 왜 ‘부활’을 새롭게 이해하려 하는가
1. 신앙언어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
1) “포스트모던 신학”의 등장 이유
2) 포스트모던 신학의 전제와 목표
2. 최근 한국인이 겪었던 “눈감지 못하는 죽음”
II. ‘부활’의 일반적 이해와 그 비판
1. 타락과 원죄
2. 불멸성과 부활
3. 구원의 완성과 부활
4. 잠정적 평가
III. ‘부활’ 언어의 맥락 -- 묵시문학
이제 본장에서 우리가 논증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1) 신약성서는 대체로 소위 중간기 묵시문학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2) ‘부활’은 특별히 그러하다.
1. 묵시문학의 재발견
2. 신약성서와 그 묵시문학적 배경
3. ‘부활’의 맥락으로서의 묵시문학
IV. 한민족의 부활 언어 -- 開闢
시작하는 말
1. 무속에서의 죽음과 신
2. 불교의 미륵 신앙과 말법 사상
1) 미타(彌陀)・미륵(彌勒) 정토 신앙
(1) 미륵정토 사상과 지배 이데올로기
(2) 미타정토 사상과 지배 이데올로기
(3) 민중의 미륵정토 사상
2) 혁명적 미륵, 미타 사상과 말법 사상
V. 한민족의 부활 언어 -- 개벽
1. 開闢의 일반적 의미
2. 水雲의 開闢 사상
3. 甑山의 開闢 사상
4. 少太山의 開闢 사상
VI. 한국인의 ‘復活’로서의 “開闢”
1. ‘부활’에 대한 3 유형의 오류
2. “開闢”과 ‘復活’
* 이 논문은 인터넷 서점에서 전자책으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홍정수, 개벽과 부활, pdf file, 3000원.
"지옥에는 더 이상 악마가 남아 있지 않다" / 김준우
http://historicaljesus.co.kr/xe/article/18657
그것이 알고 싶다. 붉은 유령: 보도연맹 사건의 전말
https://www.youtube.com/watch?v=EuHx4kLG384&index=1&list=RDEuHx4kLG384
사학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 / 정대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92022215&code=990304
민간인 학살 발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6314.html
The Man He Killed
by Thomas Hardy
Had he and I but met
By some old ancient inn,
We should have set us down to wet
Right many a nipperkin!
But ranged as infantry,
And staring face to face,
I shot at him as he at me,
And killed him in his place.
I shot him dead because -
Because he was my foe,
Just so: my foe of course he was;
That's clear enough; although
He thought he'd 'list, perhaps,
Off-hand like - just as I -
Was out of work- had sold his traps -
No other reason why.
Yes; quaint and curious war is!
You shoot a fellow down
You'd treat, if met where any bar is,
Or help to half a cr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