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
월터 윙크 지음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560쪽.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Fortress, 2002).
* 이 책은 지난 15년 동안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출판한 120여 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예수 연구서일 뿐 아니라,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이래로 가장 정직하며 가장 설득력 있는 예수 연구서이다. 초자연적인 그리스도 신화 이전의 예수, 최후심판자(마가 13장, 마태 25장, 계 19장)라는 금관을 쓰기 이전의 예수를 매우 생생하고 정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인류 멸절의 위기 앞에서 기독교가 무기력한 근본적인 이유는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동안 가르쳐왔으며 지금도 가르치는 복음이 현대인들이 이해불가능하며, 기독교인들을 개인주의적이며, 무책임한 존재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즉 초자연적인 그리스도 신화(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며 참인간이라는 양성기독론)는 (1) 대다수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인철 교수의 지적처럼, (2) 우리가 따를 수 없으며(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기를 신적인 존재로 태어난 반면에 우리는 죄많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3) 우리가 따를 필요가 없으며(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십자가에서 다 행하셨기 때문에), 또한 (4) 우리가 따라서도 안 되는 분이다(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5) 더군다나 그분은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을 이루실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정의나 생태계 파괴 문제나 인류의 떼죽음 혹은 멸절에 대해 염려할 필요도 없고 수고할 이유도 없게 만든다.
그러나 윙크 교수가 이 책에서 밝힌 복음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쉽지는 않지만 우리가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따를 필요가 있으며, 또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정직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500년 전에 마틴 루터가 복음을 정확하게 발견하여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개혁을 위한 복음, 그 인간 변혁과 세계 변혁의 복음을 매우 명확하게 밝혀준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는 자주 카를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적 통찰력을 적용하여, 독자들 가운데 특히 자기실현/개성화individuation 이론과 원형archetypes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다. 저자는 참된 인간화humanization의 과제와 예수 해석에서 도대체 왜 카를 융의 이론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예수와 복음을 이해하는 데 융의 이론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로서는 자신의 피와 살이 된 그 이론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저자의 자서전(2014)에도 그 이유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없다. 따라서 저자의 생애와 성서해석의 특징을 비롯해서 저자가 1971년 이후로 20년 넘도록 분석심리학을 적용한 이유들과 이 책의 의미들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히 추측하여 소개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나무들만이 아니라 숲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 책소개
국가권력기관들이 대통령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할 뿐만 아니라 그걸 은폐하겠다고 검찰총장과 수사팀장을 찍어내는 것도 모자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또한 파업 노동자들에게 수십 억, 혹은 수백 억 원의 손해배상을 판결하는 작금의 현실이 보여주듯이, 국가권력-자본-보수언론-대형교회의 카르텔로 이루어진 지배체제가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세상이다. 또한 속절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만이 아니라 무한경쟁 속에서 각자도생하는 이들의 신음소리 역시 구조적인 불의가 만든 생지옥의 현실 탓이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보여주듯, 1%가 99%를 착취하는 이 세계의 구조악은 인류의 파멸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절망적인 현실이다 .
이런 절망적 현실 앞에서 월터 윙크 교수는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과 같은 “권세들Powers”에 관한 3부작에서, '사탄' '마귀' '천사'와 같은 영적인 권세들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전근대적인 미신(그런 초자연적 실재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미신)을 거부할 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의 천박한 종교적 합리주의(그것들은 모두 신화들에 불과한 헛것일 뿐이라는 입장)도 거부하며, 통합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사람들만이 아니라 국가와 교회를 포함한 사회 기관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 영적인 권세들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지배체제라는 구조악의 배후에 있는 그런 영적인 권세들과의 영적인 전투의 중요성과 또한 그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들을 자세하게 다루었다. 우두머리(예컨대, 국정원장 혹은 전경련 회장)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구조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신앙공동체가 그 영적인 권세들을 폭로하고, 그 폭력에 맞서는 하느님 나라의 비전과 비폭력 연대투쟁 전략과 전심으로 드리는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그 후 10년 만에 발표한 이 책(2002)에서 그는 영적인 전투를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보다 철저한 정신무장과 비장의 무기를 갖추게 한다. 절망적인 현실에 체념하고 하느님 나라, 즉 “지배 없는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라는 하느님의 혁명적인 꿈을 포기한 채, 개인주의적인 생존과 내적인 평안에 몰두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자신이 본래 누구였는지를 잊은 채 왜소해지고 쪼잔한 좀비들처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을 위해, 저자는 인간 예수가 정말로 누구였는지, 예수가 목숨을 바친 꿈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해명한다. 전통적인 방식처럼 초자연적인 그리스도 신화Christ myth를 통해 “위로부터”(하느님이 단 한 번 예수 안에서 인간으로 성육신한 분으로)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비평과 분석심리학을 통해 인간 예수의 신화myth of human Jesus를 아래로부터(땅의 아들, 사람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아들이 된 분으로) 해명한다. 예수는 우리들 모두 참사람의 길을 가도록 촉매 역할을 한다고 천명할 뿐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간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을 보여주며, 우리 모두 그 길을 향해 용기 있게 걸어갈 수 있다고 설파함으로써, 이 책은 “21세기를 위한 복음서”라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이처럼 저자는 먼저 인간의 탐욕과 지배체제의 폭력성과 잔인성이 초래한 세계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인류 파멸의 위기 현실 앞에서 기독교의 철저한 무기력함을 직시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그는 성서와 유대-기독교 신비주의, 영지주의 문서들 속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을 극도로 축자적인 본문읽기extremely verbatim reading 방식과 엄밀한 역사비평과 함께 자기실현(개성화)에 관한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해명하여, “사람의 아들” 예수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자기를 실현하도록 촉매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자세하게 밝힌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인류문명이 성스러움을 상실하여 영적 공허와 자기파멸의 길로 돌진하는 묵시론적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인간 변혁과 사회 변혁의 길로 초대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금자탑이다.
이 책은 저자가 스무 살 때 성령체험을 한 후, 야만적이며 천박한 세계 속에서 오직 예수(Just Jesus)처럼 “복음 전도자”로 살기 위해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월터 윙크에 따른 복음서"라고 부를 만큼 획기적인 예수 연구서다. 그의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 예수 속에 단 한 번 성육신했는가 하는 전통적 기독론(위로부터의 기독론) 대신에 인간 예수가 어떻게 하느님을 성육신했는가(아래로부터의 기독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간 변혁의 계시”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초자연적인 “그리스도 신화” 대신에 저자는 우리들에게 참사람의 길을 걸어간 인간 예수를 만나게 해준다. 즉 하느님에게서 분노, 질투, 심판, 복수를 제거하고 오직 무차별적인 사랑과 무한한 용서의 하느님만을 가르친 예수, 그 거룩한 영에 사로잡혀 죄인들을 용서하며 병자들을 고쳐주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온전한 예수, 승산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절망을 돌파하기 위해 적극적인 희망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두려움 없이 새로운 길을 내는 예수를 생생하게 만나도록 해준다. 그리고 우리도 각자의 자폐증과 무의식의 그림자를 직시하고 자기를 온전히 실현도록 거룩한 길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21세기를 위한 예수의 복음”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를 유일한 메시아로 고백해왔으며,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왔다. 또한 “진노하시는 하느님”과 더불어 인간의 원죄, “전적 타락”과 “오직 은총” 교리와 대속신앙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와 동일시하는 것을 극구 피했으며, 또한 재림 예수의 폭력적 심판은 예수가 가르친 비폭력적인 하느님 나라와 정반대된다. 결국 메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희망 때문에 하느님의 무차별적 사랑과 무한한 용서를 가르친 예수를 최후심판자와 도살자 예수(계 19장)로 둔갑시켜, 더욱 유아적/의존적이며 개인주의적/자폐적/내세적이며, 독선적/심판적이며 교리적/배타적이며 폭력적/가부장적/제국주의적인 기독교가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비평과 분석심리학에 입각해서, 전통 기독교의 원죄와 대속론 중심의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긍정의 길via positiva로 바꾼다. 즉 포이어바흐와 융의 지적처럼 인간의 완전성을 신(그리스도)에게 투사한 것과 (밝은 빛뿐인) 그리스도를 모방하라는 가르침은 우리들 자신의 무의식 속의 어두운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인간의 온전한 자기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자신의 그림자를 타자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으로 투사하기 때문이다. 성육신이 예수에 대한 교리는 되었지만, 우리 모두가 성취해야 할 과업이 되지 못한 이유는 예수 이야기에서 성스러운 차원을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저자는 이 책에서 하느님이 단 한 번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교리(위로부터의 기독론)보다는 예수가 어떻게 하느님을 성육신하였는지(아래로부터의 기독론)를 묻는다. 구체적으로 예수가 말한 “사람의 아들”은 예수만의 칭호가 아니라 참사람의 궁극적 원형으로서, 예수는 어떻게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참사람을 일깨우고 또한 온전한 인격적 통합을 이루도록 힘을 실어주었는지를 밝혀줌으로써, 예수에 관한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종교, 즉 성전브로커 없이 영적/신비주의적이며 주체적/성찰적/능동적이며 공동체적/포용적/다원적이며 비폭력적/여성적이며 창조적/역사변혁적인 사랑과 자비의 종교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책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내려오신 구세주/메시아가 아니라, 예수가 항상 자기호칭으로 사용했던 "사람의 아들"을 온몸으로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정진하는 예수, 자기를 감히 메시아와 동일시하지 않는 겸손한 인간 예수,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참사람의 길을 가도록 깨우쳐주며 힘을 실어주는 성스러운 예수를 만난다. 거의 완벽하게 그 참사람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기에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로 예배의 대상이 된 예수를 만난다. 그리고 500년 넘게 지속된 가혹한 식민지 역사 속에서 메시아에 대한 타는 목마름, 민족이 해방되기 위해 외국의 압제자들이 심판받고 멸망할 날을 기다리는 부정적인 희망 때문에, 결국 무차별적인 사랑과 무한한 용서를 가르친 예수가 최후심판자와 도살자 예수(계 19장)로 둔갑하게 된 과정까지 보게 된다.
이제까지의 예수 연구서들이 거의 대부분 지적으로 사실근본주의와 문자근본주의라는 오류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을 위해 예수가 가리킨 손가락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킨 하느님 나라를 지적으로 해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 책은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성숙한 어른들이 되도록, 하느님의 임재와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공동체적 연대성의 기쁨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인격을 온전하게 해주는 예수, 하느님의 거룩한 영에 온전히 사로잡힌 예수를 직접 생생하게 만나게 해준다.
사람의 아들 예수가 이끄는 길은 혼탁한 세상 속에서 비굴하게라도 살아남기 위해 지배체제에 순응하고 또한 판에 박힌 전통 교리에 무비판적으로 머리 조아리며 순종하여 왜소해지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예수처럼 하늘의 부르심에 온전히 자신의 삶을 내어맡김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혁명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어 완전히 자주적인 자유의 영혼이 되는 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이 충만한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각자의 잠재성을 실현하도록 담대하게 현실의 어둠을 돌파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권력자들과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놓는 신화들에 맞서서, 예수처럼 비유들을 통해 현실적인 지배구조를 전복시키는 시인의 열정을 우리 안에서 되살려내는 길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분야가 워낙 엄밀한 본문연구를 통한 천기누설의 대가들이 모이는 분야이지만, 월터 윙크 교수는 성서본문을 매우 축자적으로 읽고 엄밀한 역사비평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크게 깨달은 신비주의자이며 동시에 지배체제에 치열하게 맞섰던 예언자 예수를 솔직하고 생생하게 만나게 해준다.
저자는 예수의 자기호칭인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으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수만의 칭호가 아니라 “참사람의 원형” 혹은 “온전함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며, 예수 자신이 어떻게 이런 원형을 성육하기 위해 정진했는지를 치밀하게 해명한다.
이처럼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예언자적인 전통만이 아니라 신비주의 전통과 통합한 관점에서 이해하는 저자의 예수 연구는 전통 기독교의 교리중심적 신앙이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왜소하게 만들며 또한 우리의 가슴을 얼마나 편협하고 메마르게 만들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참사람의 원형을 가슴에 새기고 그런 참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구도자/순례자로서 살았던 예수의 성스러운 꿈과 거룩한 영에 사로잡힌 유쾌한 웃음과 활달한 걸음걸이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이 큰 감동을 주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특히 학문적으로 매우 엄정하고 정직할 뿐 아니라,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 가운데 이처럼 예수를 신비주의와 통합한 관점에서, 또한 융의 분석심리학적 통찰을 통해 우리의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과제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이 책이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의 손가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리킨 길, 그 성스러운 하느님의 뜻에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쳤던 예수처럼 높고 웅장한 영혼이 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저자 월터 윙크(1935-2012)는 역사적 예수와 권세들(지배체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성서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평화운동가였다. 『예수와 비폭력 저항 』,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 등이 번역되었다.
옮긴이 한성수 목사는 연합감리교회에서 은퇴했으며,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등을 번역했다.
2. 이 책에서 묻고 있는 질문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념할 문제들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당하는 현실에서 기독교가 무기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수사랑을 가르친 기독교가 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교가 되었는가?
19세기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는 왜 인간과 사회 변혁 운동에 실패했는가?
예수는 성육신한 하느님으로 예배되기 전에 어떻게 하느님을 성육신했는가?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 이전에 예수가 가르친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유대교와 달리 예수의 제자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선교에 대한 긴급성을 느꼈는가?
예수는 왜 자신을 메시아와 동일시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했는가?
예수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를 대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무엇인가?
예수는 왜 하느님 이미지에서 분노, 질투, 복수, 심판과 폭력을 제거했는가?
“끝없는 용서”를 가르친 예수를 “최후 심판자”로 둔갑시킨 결과는 무엇인가?
성직자들과 정치권력은 무슨 이유로 “심판과 복수의 하느님”을 선호하는가?
초자연적 기적을 믿는 이들일수록 생태계 파괴에 무관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의 십자가 보혈에 의한 전통적인 대속론들은 어떤 결과들을 초래했는가?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예배하라고 했는가, 자신의 길을 따르라고 했는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실패자였던 예수는 왜 예배의 대상이 되었는가?
부활신앙이 먼저 생겼는가, 아니면 원수들을 쓸어버릴 재림이 먼저 생겼는가?
하느님 오른편으로 올라간 예수의 승천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초대교회 이후 신학자들은 예수에게 왜, 온갖 종류의 화려한 옷들을 입혔는가?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새로 태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참사람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유다처럼 배반감을 빙자해서 지배체제와 공모하는가?
왜 예수처럼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법적인 살인을 당할 수밖에 없는가?
도대체 왜 예수를 죽이는 일에 수도권의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앞장섰는가?
예수가 추구한 참사람의 원형 사람의 아들은 동학의 한울님과 어떻게 다른가?
참사람 예수는 인간의 탐진치 삼독을 씻어내는 데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는가?
1%가 99%를 착취하는 구조에 더욱 절망하는데 참사람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환경파괴로 인해 국가들이 더욱 우경화되는데 참사람의 목회적 의미는 무엇인가?
3. 서평
“명석하며 열정적이고, 강력하며 도발적인 책이다. 종교, 심리학, 정치와 우리가 예수 안에서 보는 ‘참사람’에 대한 갈망을 훌륭하게 통합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답게 되려는 열정으로 넘치도록 해준다.” - 마커스 보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엄정한 역사비평적 분석과 철학, 심리학, 신비주의에 대한 성찰을 결합시켜, 저자는 에스겔, 다니엘, 복음서들에 대한 새로운 통찰만이 아니라 예수를 1세기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자가 ‘참사람’을 회복시켜 모든 독자들에게 인간이 된다는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다. 열정적이며 정직한 최고의 학문적 업적이다.” - 에이미 질 르바인
4. 월터 윙크 교수의 생애
월터 윙크(1935-2012년) 교수는 감리교 목사이며 뉴욕의 오번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자서전 Just Jesus(2014)에 따르면, 그는 스무 살 때 오순절교회에 갔다가 신비체험을 하였으며, 달라스의 남감리교대학교(SMU)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철학과 영문학을 부정했다. 4학년 때는 텍사스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으로 흑백 학교통합운동에 참여했다.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 다닐 때는 흑인 민권운동과 반전반핵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청소년 갱단 멤버들을 감화시켜 그들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도 했다. 그는 1961년에 미국연합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63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텍사스 주 히치콕 감리교회에서 5년 동안(1962-67) 목회했다. 그는 성령을 체험한 후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확신했으며, 목회하면서 어느 교인이 자궁에 오렌지 크기 만한 종양이 생긴 것을 알고 그에게 기도를 부탁하자, 교인들과 함께 안수기도를 하여 그 종양이 완전히 사라져 담당의사를 놀라게 만든 일도 있었다. 그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흑백 인종통합을 하였으며, 교회를 건축하고, 춤 예배를 도입하여 감리사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민권운동이나 베트남 전쟁처럼 당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라 교회 내의 지도력 다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한 신학 교수들의 책들이 교회 목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특히 신학자들의 질문들과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부딪치는 신앙적 질문들이 매우 다르다는 경험을 통해, 성서해석에 대한 역사비평 방법론의 필요성과 한계를 확인한 후, 성경공부가 인간과 사회의 변혁을 위한 공부가 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했다. 그는 복음전파를 가로막고 있는 유물론적 세계관과 세속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성서에 나타난 사탄, 마귀, 천사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영적인 권세들을 해명하고 구조악의 배후에 있는 이들 영적인 권세들과의 영적 전투의 중요성을 깨닫고 1964년부터 “권세들”에 관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가 1971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심리학연구협회Guild for Psychological Studies>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하여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을 배우게 된 동기 역시 성서해석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협회 창립자 엘리자베스 하우에스Elizabeth Howes 박사는 카를 융과 프리츠 쿤켈 밑에서 배운 심리학적 통찰들을 신약성서 연구에 적용하는 작업을 30년 넘게 공동체적으로 진행하면서, “개성화” 이론을 통해 “인간의 성숙과 사회적 성숙”을 도모해왔는데, 여기서 그는 “가장 기대되는 새로운 방법론”을 배우게 되었다(1973: 48). 융의 분석심리학적 통찰력과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을 종합하여 통전적인 성서연구 방법론에 관한 책들을 발표하기도 했다(1973[2010], 1980). 그는 융을 통해,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를 체험하고, 그로 인해 의식의 변화와 특정한 정신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을 한 인간으로서의 성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전체적인 존재wholistic being이면서 동시에 대극적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서 정신적 통일을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현실 속의 인간은 이런 전일성/온전함wholeness을 이루지 못한 채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대극성polarity 가운데 살고 있다. 즉 의식과 무의식의 대극, 자아와 그림자의 대극, 외적인 인격persona과 내적인 인격anima/animus 사이의 대극 속에서 갈등과 충돌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여기서 융은 인생의 과제는 그의 정신psyche
속의 서로 반대되는 성격의 대극들을 창조적으로 통합하고 균형을 맞추어 가는 데 있다고 본 것이
다. 이처럼 융의 통찰력들을 성서연구에 도입하여 인간과 사회의 성숙을 지향하는 과제를 수행했던 <심리학연구협회>의 성과물들을 통해 윙크 교수는 통전적인 성서연구 방법론에 관한 책들과 특히『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그리고 이 책 『참사람』을 집필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는 제3세계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자, 인종차별주의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밀입국하기도 했다. 그는 비폭력투쟁의 성서적 근거와 그 효용성을 가르침으로써 당시 그의 책을 읽은 수백 명의 흑인 교회 지도자들이 무장폭력투쟁을 지양하고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긴박했던 위기의 순간을 넘기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오늘날 미국인들이 하느님이 아니라 폭력의 힘을 신봉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또한 십자가에 의한 대속론과 관련하여 기독교 신앙에 뿌리깊은 "폭력이 구원한다는 신화"(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문명비평가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경험들과 수많은 독서를 통해 통합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영향을 준 학자들은 카를 융과 프로이트만이 아니라 떼이야르 샤르뎅, 레이철 카슨,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찰스 하츠혼, 존 캅, 데이비드 그리핀, 폴 틸리히, 토마스 머튼, 비벌리 해리슨, 로즈마리 류터, 브라이언 스윔, 이안 바버, 존 폴킹혼, 아서 피콕, 게리 슈바르츠, 프리초프 카프라, 흑인 신학과 켈틱 영성, 모톤 켈시, 토마스 베리, 매튜 폭스, 틱낫한, 조애나 메이시, 북미 원주민 종교와 신비가들, 시인들과 예술가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그는 감리교 신학자답게 단지 진보적인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생태학자, 신과학, 불교 스님과 사상가 등 폭넓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통합적인 사상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20년 넘게 하지불안증후군(RLS)을 앓아 그 약의 부작용으로 말년에는 기억력 감퇴와 치매로 인해 고통을 겪은 그는 죽기 한 달 전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아내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남긴 말은 "Open up your heart and let God's love come in."이었다. 그가 남긴 이 마지막 말은 그의 신앙적인 체험과 신비주의 전통과 예언자 전통을 통합한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한 말처럼 기억될 것이다. 치매조차도 그가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왔던 그 자신의 신념을 망각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정도로, 그는 평생 동안 사람의 아들 예수처럼 참사람이 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5. 월터 윙크 교수의 성서해석의 특징
그는 성경공부가 너무나 지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대하여 좌뇌의 기능(분석적, 논리적, 추상적, 원인결과 파악)만이 아니라 우뇌의 기능(종합적, 상상적, 통전적, 은유적)까지 합쳐져 인간의 통전적인 변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목회자나 교수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에 반대하여, 지도자는 질문을 준비하고 참석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삶의 경험들을 통해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화 방법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중풍병자를 고친 이야 기에서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행동을 상상력을 통해 접근할 뿐 아니라 각자 자신 안의 "중풍병"은 무엇인지, 자신 안의 "바리새인"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찾는 과정을 통해 평신도들이 스스로 자기의 삶을 결단하는 주체적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Transforming Bible Study: A Leader's Guide (1980).
그는 자신의 성서해석방법을 변증법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역사비평이 교회의 인습적 신앙(thesis)을 극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반antithesis에만 매몰되는 것 때문에 "파탄났다"고 주장하며 "합synthesis"을 향해 나아가야 창조적인 성서해석이 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이 성서의 권위를 훼손하기 쉬운 이유는 성서본문을 연구 대상으로 객관화하기 위해 거리를 두게 만들며(어느 관계에서든 거리를 두는 것은 위험성이 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 개입은 애당초 역사적 관점에서 부정되며, 성서본문만 검토할 뿐 자기는 검토하지 않게 만들 수 있으며, 연구의 대상이 된 성서본문은 목적어처럼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흔히 인습적 신앙을 부정하고 정직하게 이해하는 작업에만 몰두하는 위험성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본문의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고,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 성서본문과 깊이 교감하지 않는다면, 또한 역사비평이 신선한 경험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만큼 고착된다면, 방법론 자체에 대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본래 목적이 단지 본문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신앙적 영감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냄으로써 개인의 철저한 자기-비움과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엡 4:13) 영적으로 성숙하여, 모든 생명을 극진하게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도록 수고하는 사회적 변혁에 있기 때문이다. Walter Wink, The Bible in Human Transformation (Minneapolis, MN: Fortress, 2010).
이런 관점에서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을 말하는 것과 달리, 그가 해석학적 나선hermenneutical spiral을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해석학적 순환이란 독자가 사전 질문이나 이해를 갖고 성서본문에 접근하며, 성서본문은 독자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는 쌍방통행의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말한다. 그러나 해석학적 나선이란 성서를 통해 예수처럼 성스러운 실재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온전한 인격을 향해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려는 자신의 신앙적 성숙을 위한 영적인 순례를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극단적인 축자적인 본문 읽기verbatim reading"를 통해 성서본문의 단어들이 하나하나 얼마나 "신비적인 정확성"을 요구하는 표현들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그는 예수세미나 회원으로서 문자주의자는 결코 아니며 또한 성서해석에서 공평무사한 객관주의적 해석이라는 신화 역시 타파한다. 문자주의 혹은 문자근본주의는 성서의 모든 문자들이 역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지만, 축자적인 본문 읽기는 성서의 모든 표현들, 단어 하나하나에서 성서 기자들의 의도를 찾아내기 위해 치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하며, 성서의 모든 표현들이 매우 "신비한 정확성"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성서해석에서 그가 무엇보다도 철저한 역사비평 방법만이 아니라 신비주의 전통에서 성서해석자들은 하느님이 아직도 말씀하시는 영혼의 시나이 산the Sinai of the soul 위에 서 있다는 확신을 통해 언제나 하느님이 개인에게 또한 공동체에게 하시는 변혁적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예언자로서 살려고 했던 것, 또한 동이 틀 때까지 하느님과 씨름했던 야곱처럼 엉덩이뼈가 탈골될 각오로 말씀과 씨름한 것(창 32:25)은 그의 평생 소망이 오직 예수처럼 "복음전도자"로 살고 싶어했기 때문이며, 그가 체험한 예수는 예언자 전통만이 아니라 성전브로커 없는 신비주의 전통에 서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 이 책의 신학적/교회사적인 의미
1)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기념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정말 심각하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도대체 왜 종교개혁이 곧이어 30년 간의 잔혹한 종교전쟁으로 치달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물론 종교전쟁에는 당시 정치경제적인 원인들이 작용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개신교인들의 내세에 대한 불안감과 초기자본주의의 발흥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안감이 타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나타난 측면 역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안의 다른 교파들에 대해서까지 이처럼 증오심과 적개심이 많은가? 또한 오늘날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비신자들에 비해 폭력적인가? 단적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Ronald J. Sider가 <복음주의자들의 양심의 스캔들,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Why Are Christians Living Just Like the Rest of the World, 2005>의 제1장에서 자세하게 인용하듯이, 도대체 왜 미국 남부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들"이 많이 사는 바이블벨트 지역의 이혼율은 미국 평균보다 대략 50% 높으며, 아내구타, 돈에 대한 집착, 성적인 방종, 인종차별에서 더욱 심하며 폭력적인가? 도대체 성경을 가장 많이 읽고 기도를 가장 열심히 하는 "거듭난 복음주의자들"이 이처럼 더욱 폭력적인 이유는 하느님의 군주적인 성격과 성서 자체 속의 폭력성만이 아니라, 카를 융이 지적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자체가 자신들의 무의식 속의 그림자를 못보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기독교인들도 선과 악의 복합체이지만, 자기는 죄를 용서받은 의인인 반면에 자기가 속한 교파 밖의 타인들은 모두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며 악인들"이라고 판단하며, 자신 속의 그런 무의식적인 불안감과 증오심을 자기 외부의 "죄인들과 악인들" 특히 "하느님의 대적자들"로서 영원한 지옥불 속에 던져질 자들을 향해 적개심으로 표출하도록 만들어 결국 매우 잔혹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 폭력적인 인간들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청교도 사회가 그토록 엄격했던 이면에는 그토록 잔혹했던 것은 바로 이처럼 빛이 밝을수록 어두운 그림자도 짙게 마련인데, 그 무의식적인 그림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흔히 자기가 믿는 것이 옳다는 주장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닌가? 교회 정치나 신학교 분쟁에서 종종 일반 사회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비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외면하고 상대방에게 투사하기 때문에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지 않아 자신 곳에 있는 그림자가 괴물로 드러나기 때문이 아닌가? 메시아를 살해하는 일에 가장 거룩하다는 대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앞장 선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개신교인들의 폭력성은 로마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와 성례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개신교가 그런 성례를 대부분 철폐한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부자가 되어서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태도가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지향하는 대형교회의 3박자 축복과 같은 성공과 번영신학의 모태가 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고 가르치신 예수는 사람들 특히 종교인들의 이런 심리적 성향을 정확하세 간파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당시에 사람들이 온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2) 인간이 신을 창조한다는 포이어바흐의 도전에 대해 기독교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신학적 질문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자신의 완전성과 가치와 능력들을 투사하여 신을 창조한다는 그의 주장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무시해왔으며 그의 순진한 낙관주의라고 간단히 치부해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할수록, 예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믿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십자가 보혈의 대속론 교리가 보여주듯,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 때문에, 혹은 안셀름의 만족설처럼 당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당신의 죄없는 독생자를 죽게 만드셨다고 한다.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하느님이 자기중심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하느님을 높일수록 인간은 더욱 왜소하게 되며, 하느님을 풍성하게 만들수록 사람들은 자신들의 최고 능력들을 비워서 하느님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 능력들을 사용하기를 포기하게 되며,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인간이 완전히 의존적인 영아infantile 상태로 남아 있게 만들지 않는가? 도대체 왜 기독교인들에게 흔히 이런 유아적이며 수동적/의존적 현상이 나타나며, 이런 태도가 과연 하느님이 원하시는 현상인가?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감정이라고 할 때, 전능한 신에게 의존해서 나의 개인적 감정은 편해졌을지 몰라도 나의 잠재력은 위축되기 마련이 아닌가? 또한 그처럼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는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의존함으로써 세상은 손톱만큼이라도 나아졌는가?
3) 복음의 신빙성과 현실적합성, 그리고 교회의 사명과 무기력함에 관한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아/그리스도/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정통적 그리스도 신화Christ-myth는 과연 오늘날 상식적인 현대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 신화를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이유는 그 신화를 고백한 이들이 경험했던 종교체험의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그런 신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그리스도 신화를 문자적으로/과학적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처럼 탈맥락화한 신앙의 그리스도는 한인철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가 따를 수도 없고, 따를 필요도 없고, 따라서도 안 되는 분으로 만들 뿐 아닌가? 또한 신앙의 그리스도는 불변하는 상수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가르침(상수)의 의미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석(변수)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신약성서 기자들과 그 이전에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를 만나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런 고백을 당시의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또한 이처럼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느님 혼자 다 하셨고 우리는 단지 그걸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기본 교리가 주입시키는 "복종의 영성"은 교회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도록 만드는가? 즉 "아바타"나 "설국열차"가 보여주듯 1%가 99%를 착취하며 인류문명이 파멸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는 세계 현실에서,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려는 국가-자본-보수언론의 카르텔에 대형교회가 가담하여 가난한 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구세력의 온상 역할을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지 않는가?
4) 전대미문의 위기들로 인해 인류문명이 풍전등화 상태에 처해 있는데, 도대체 왜 교회는 이런 위기들 앞에서 이처럼 무기력한가? 도대체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자녀들에 대한 보호본능조차 상실한 시대에 예수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미국과 영국의 안보전문가들조차 지금과 같은 온실가스 배출 추세로는 인류 문명이 63∼75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는 상황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은 인류 생존의 최대 관건이며 이 시대의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2015년을 정점으로 삼고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1990년 수준의 25∼40% 이하로 줄여야 하는 과업은 현실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1% 이상 줄이는 일은 심각한 경제 불황에서만 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교토회의 이후 에너지 절약 대책으로 연간 평균 1조 엔 이상의 예산을 투입하면서 교토의정서를 매우 강력하게 추진하여 1990년 대비 6%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2009년 8월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1990년 수준의 9%를 오히려 초과함으로써 결국 목표치의 15%를 초과했다. 이런 현실에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세계 에너지 소비가 또 다시 50%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귄 다이어는 2040년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파국적이며 복합적인 기후재앙들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과학기술이나 정치를 통해서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된 현실에 절망하여, 극단적인 종교형태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즉 “탈레반”과 비슷한 호전적인 종교분파들이 등장하여 모든 재앙을 “분노하신 하나님의 징벌”로 설명하며, “타자들”에 대해 배척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이런 종교적 강경파들이 의회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처럼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위기들은 이미 충분히 절망적이다. 결국 지구의 가난한 생명체들이 대규모로 학살당하는 “전 지구적인 홀로코스트 시대”가 되었다. 인류문명의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는 “생명의 자궁”인 지구 자체가 파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기업들과 대학들과 종교들이 이 위기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짐승들조차 자기 새끼들에 대한 보호본능이 있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가 자기 자녀들과 손주들의 생존 문제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할 정도로 집단적인 최면상태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지구적 홀로코스트 시대”의 신학적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기후재앙으로 인해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뭄과 태풍과 홍수와 식량난과 식수난으로 인해 매년 수만 명씩 무고하게 떼죽음을 당하는 현실에서, 특히 이미 시작된 “기후대전”으로 인해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수십 억 명의 인류가 죽게 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가는 현실에서, 인류의 운명이 단순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태”(로버트 하일브로너) 정도가 아니라 63∼75년 이후에는 <지구호>가 완전히 침몰할 것으로 예측되는 현실에서, 지구 전체가 점차로 대량학살의 거대한 “아우슈비츠”로 바뀌고 있어서 다음 세대들의 생존마저 위협당하는 현실에서, 기독교는 지금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런 전대미문의 총체적인 위기에 대해 경고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깊은 잠에서 깨우며 대책 마련에 서두르고 있는가, 아니면 히틀러 시대의 대다수 독일교회들처럼, 이런 위기의 근본 원인인 “자폐증”과 집단최면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가?
예배에 자주 참석할수록 동물들에 대해 지배적이며 부정적인 반면에, 예배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생태적이며 자연친화적이라는 예일대학교 스티픈 켈러트 교수의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는 교회가 집단최면을 걸어 자폐증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은 무엇으로 어떻게 사람들의 자폐증을 악화시키고 집단최면 속에 몰아넣는가? 기후붕괴로 인한 인류문명의 붕괴를 피할 방법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과학자들이 에너지 전환과 군비 축소를 비롯한 해결책들을 분명히 제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갈수록 세상을 더욱 끔찍한 “생지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 자신인 마당에, 빙하가 녹아내리고 폭염과 가뭄과 홍수로 인한 농산물 흉작과 식수난에 전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하나님을 여전히 “초자연적인 전능한 하나님”이며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종족학살과 종자학살과 지구학살은 전 세계의 경제력과 군사력과 매스컴과 학문과 예술을 지배하는 “유대인 파워”가 중심이 되어 우리 모두가 참여하여 자행하는 또 다른 “전 지구적인 홀로코스트”인데, 또 다시 하늘로부터 내려올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리거나,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절망의 묵시적 해결자로서 “재림 예수”(계 19에는 도살자 예수로 나온다)와 “휴거” 혹은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것이 성서적 신앙인가? 이것은 기후붕괴시대에도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아래 살고 있다는 허위의식, 그리고 유대 민족주의와 결탁한 제국들과 에너지 대재벌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우리의 에너지낭비를 합리화하는 집단최면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교회는 거의 대부분 여전히 4영리(창조-타락-속량-믿음)에 입각해서 “개인의 영혼구원”과 “마음의 평화,” 심지어 교회성장을 위한 “성공과 번영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인류가 눈앞에 닥친 생존의 절박한 위기마저 은폐하며 세계 현실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아편”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 “생명의 자궁”인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 인간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하여 “내일에 대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는 식으로, 기후붕괴와 대멸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일은 초자연적 유신론의 틀 때문인데, 목회현장에서 절박한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는 과제에 몰입하는 목회자들이 초자연적 유신론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더구나 “유대인 파워”가 “인류 공공의 적”으로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시대에,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난다”(요 4:22)고 말한 유대인 예수를 여전히 “인류의 구세주”이며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한국인들에게 또 다른 “신사참배”와 같은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IMF에만 800명이 넘는 경제학 박사들이 제국의 이익을 위해 몰두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고급 두뇌들이 군산복합체들과 에너지 대재벌들과 월스트리트를 비롯해서 세계 전역에서 무한 경제성장과 소비를 부추기는 사탄의 체제의 하수인들로 종사하고 있는 반면, 전 세계 교회들은 급속하게 몰락하는 현실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믿고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를 선포하는가? 또한 기후붕괴 현실 속에서도 기독교는 여전히 농경시대에 제국화된 기독교가 만든 정통 구원론, 즉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계속할 것인가? 구원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듯이 “외적인 의의 전가를 통한 구원” 혹은 “밖으로부터의 구원”을 반복하며 “재림 예수”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
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책의 저자인 월터 윙크 교수가 신약학자로서 심혈을 기울인 이 책에서 묻는 질문들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것들이다.
예수가 그리스도/하느님의 아들/구세주로 예배의 대상이 되기 전에, 그는 식민지 땅에서 태어나 농부 혹은 목수로서 살다가 어떻게 하늘의 뜻에 따라 참사람/사람의 아들이 되기 위해 치열한 구도자/순례자로 살았는가? 또한 예수는 선생으로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참사람의 길을 가도록 깨우쳐주었는가? 도대체 왜 예수는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로 부르지 못하게 했으며, 언제나 자기를 "사람의 아들"이라고만 불렀는가? 그리고 그리스어 성서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정관사가 두 개씩 들어간 이상야릇하고 생소한 표현을 계속 사용하는가? 에스겔이 본 환상은 예수의 자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복음서 기자들을 비롯해서 특히 요한계시록은 재림 예수를 기다리면서 어떻게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왜곡시켰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하심과 용서와 원수사랑을 가르쳤지만, 500년이 넘도록 식민지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 특히 로마제국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완전히 박살내고 피바다를 이룬 후에,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던 묵시론을 예수에게 적용하여 예수를 최후심판자와 도살자 예수(계 19장)로 둔갑시킨 성서 기자들은 어떻게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폭력이 구원한다"는 신화로 둔갑시켰는가? 또한 예수가 다른 성인들, 즉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등과 매우 달랐던 점은 무엇인가? 오늘날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떼죽음당하며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지구 자체가 점차 금성처럼 생명이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에서, 예수가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가?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생태계 파괴로 인해 무고한 생명체들이 떼죽음 당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점차 인류의 운명에 대해 절망하게 되며, 국가들은 더욱 우경화되고, 기독교 파시스트들이 점차 준동할 것으로 예상되는 현실에서, 우리들 속의 참사람의 가능성을 믿는 낙관주의가 갖는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이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목회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처럼 인류가 직면한 전대미문의 위기와 기독교의 급속한 쇠퇴와 무기력함에 비추어 이 책은 신학적으로 또한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책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을 구체적으로 또한 거의 완전하게 살아내신 신비주의자 예수의 용서와 자기실현과 비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높이 자유롭게 날아오르기를 원하시는지, 또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온전하게 됨으로써 우리 시대의 절박한 과제인 "풍성한 생명"과 "지속가능한 문명을 향한 대전환"을 위해 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창조적인 공동체 운동을 실천하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7. 목차
목차
서 문 __ 11
약어표 __ 14
서 론 __ 18
제1부: 예수의 본래적 충동 … 23
1장.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참사람 … 25
A. 객관주의의 종언 … 25
B. 성육신한 하느님의 신화와 인간 예수의 신화 … 29
C. 역사라는 신화 … 35
D. 예수의 본래적 충동 … 37
제2부: 인간 변혁의 계시: 참사람 … 43
2장.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 … 45
A. 에스겔서에서 참사람 … 52
B. 에스겔의 환상 … 74
3장. 포이어바흐의 도전 … 85
A. 포이어바흐에 대한 평가 … 87
B. 신인동형동성론 … 101
C. 우리는 보는 자이며 보여지는 자이다 … 109
D. 포이어바흐에서 베르자예프로 … 112
4장. 참사람에 대한 그 밖의 100년까지의 언급 … 117
A. 시편 8편 … 117
B. 시편 80편 … 118
C. 에녹 1서 14장 … 119
D. 다니엘서 7장 … 120
E. 비극작가 에스겔 … 128
F. 사해문서 두루마리들 … 128
G. 에녹의 비유들 37-71장 … 129
H. 에스라 4서 … 137
I. 솔로몬의 송시 … 137
J. 결론 … 140
제3부: 참사람: 부활절 이전의 말씀들 … 143
5장. 예수와 참사람 … 147
A.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딴 일 … 148
B. 중풍병자를 치유함 … 163
C. 여우도 굴이 있고 … 175
D. 참인간에 대한 모독 … 182
E. 먹보요 술고래 … 188
F. 참사람은 징표sign를 거부한다 … 196
G. 참사람은 섬긴다 … 199
H. 참사람은 길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한다 … 209
I. 참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하며 … 211
J. 그리고 죽임을 당한다 … 224
K. 결론 … 238
6장. 예수와 메시아에 대한 희망 … 241
A. 베드로의 집착 … 247
B. 예수에게 물은 요한의 질문 … 250
C.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냄 … 252
D. 나사렛에서 배척당함 … 254
E.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자름 … 254
F. 다윗의 자손들에 대하여 … 255
G. 어리석은 부자 … 257
H. 예수의 유혹(시험) … 258
I. 산헤드린 앞에 선 예수 … 262
7장. 투사Projection와 메시아 희망 … 269
A. 메시아에 대한 투사를 끊기 … 277
B. 하느님을 성육신하기 … 290
C. 죽음: 투사의 분산 … 294
D. 투사와 팽창 … 301
제4부: 참사람: 부활절 이후의 말씀들 … 307
8장. 참사람: 인간 변혁의 촉매 … 309
A. 승천Ascension … 311
B. 원형적인 이미지 속으로 … 316
9장. 참사람: 묵시론과 종말론 … 323
A. 종말론 대對 묵시론 … 324
B. 예수는 묵시론자였는가? … 329
10장. 묵시론 1: 참사람이 온다 … 339
A. 마가 14:62과 병행구절들 … 339
B. 마가 13:24-27과 병행구절들 … 342
C. 마태 10:23과 16:28 … 348
D. 누가 17:24 // 마태 24:27 … 350
E. 누가 17:25-30 // 마태 24:37-41;
마태 24:44 // 누가 12:40도 보라 … 351
F. 누가 18:8 … 352
11장. 묵시론 2: 참사람이 심판한다 … 361
A. 참사람을 시인하기 … 371
B.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기 … 374
C. 참사람은 이들 가장 작은 자들 가운데 있다 … 375
D.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 381
12장. 묵시론 3: 참사람의 미래 … 385
A. 참사람의 은폐 … 386
B. 참사람의 회복 … 390
13장. 요한복음 속의 참사람 … 403
A. 지도자는 사다리다 … 404
B. 십자가 처형을 통하여 높여짐 … 416
14장. 바울의 편지들 속의 참사람 … 423
A. 속사람 … 425
B. 그리스도의 몸 … 428
C. 그리스도 안에서 … 430
제5부: 유대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속의 참사람… 433
15장. 유대교 신비주의 속의 참사람 … 437
A.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참사람으로서의 하느님 … 439
B. 유대교 신비주의 속에서 에녹/메타트론Metatron 그리고 참사람 … 457
C.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승천한 사람들 … 461
D. 결론 … 469
16장. 영지주의 속의 참사람 … 473
A. 나그함마디 문서 속의 참사람 … 477
B.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정통파” 신학자들의 보고서 … 494
C. 포이만드레스Poimandres 속의 참사람 … 500
D. 결론 … 502
제6부: 결과와 결론들 … 507
A. 다시 한 번 더 본다는 것 … 507
B. 실제적인 참사람이 일어설 것인가? … 511
C. 참사람 … 525
부록 1: 최초 인간에 대한 신화가 있었는가? … 531
부록 2: 필로Philo와 원형들 … 537
부록 3: 에스겔이 예수에 끼친 영향 … 545
용어풀이 … 547
고대 문서 색인 … 550

일러두기
1. 이 책은 Walter Wink,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Fortress Press, 2002)의 완역이다.
2. 저자는 인간의 탐욕과 지배체제의 폭력성이 초래한 인류 파멸의 위기 현실 앞에서, 성서와 유대-기독교 신비주의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을 역사비평과 자기실현(개성화)에 관한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해명한다. 융에게 자아ego는 의식의 중심인 반면, 개인적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전체정신의 중심으로서,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될 때 비로소 전체인격이 실현되어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전체적 자기Self의 원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융은 말한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 불성佛性, 도道라고 부르는 것을 모두 심리학적으로 자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나 융이 지적하듯이 ‘자기’를 그리스도에 투사하고 “그리스도를 모방”하도록 가르친 기독교 역사는 무의식의 그림자를 외면한 채 또 다른 페르조나를 부과함으로써 신자들을 자기실현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통찰에 입각해서 저자는 예수가 왜 자신을 메시아/그리스도와 동일시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지칭한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자신만을 가리키는 배타적 칭호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는 참사람의 원형으로 선포했는지를 해명하며, 또한 예수가 구원자/하느님의 아들로서 믿음/예배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예수가 가르친 믿음의 본질을 밝힘으로써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위한 성서적 토대를 확고하게 마련해준다.
3. 이런 점에서 원서에서 대문자로 표기된 “the Human Being”(지시대명사를 사용할 때는 it로 표기함)은 저자의 뜻을 살려 “참사람”으로 옮겼다. 이런 의미를 갖는 우리말의 전통적 표현은 “진인眞人,” “대인大人,” “하늘이 낸 사람,” 혹은 “얼나”(유영모)라 생각하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참사람”이 더욱 친근감이 있는 용어이며, “참교육”처럼 “참사람”은 체제와 전통에 대한 저항과 함께 본질 회복의 의미가 포함된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4. 한글성서는 새번역을 사용했다. 사람, 도시, 국가 이름도 새번역을 따랐다.
5. 본문에서 타이프체로 표기한 것은 원문에 이탤릭체로 표기해서 강조한 부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