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세종 우수학술 도서
성서심층연구 시리즈 07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
신약성서의 문명 전환 전략들
Render Unto Caesar:
Struggle Over Christ and Culture in the New Testament
(HarperOne, 2022)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34 - )
드폴대학교의 명예교수이며,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가장 탁월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역사적 예수≫,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비유의 위력≫, ≪예수는 누구인가≫, ≪가장 위대한 기도≫ 등을 발표한 베스트셀러 저자다. 이 책은 저자가 88세에 발표한 책이다.
한성수 목사는 서울 문리대 물리학과, 감신대, 예일대 신학대학원,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고 지금은 은퇴했다.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참사람≫, ≪내 몸과 영혼의 지혜≫,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동성애와 기독교 신앙≫, ≪기후 교회≫등 10여 권을 번역했다.
왜 예수의 복음은 문명 전환의 초석인가?
이 책은 토마스 베리, 존 캅, 카렌 암스트롱, 도로테 죌레, 샐리 맥페이그, 캐서린 켈러와 같은 탁월한 신학자들의 작업처럼, “문명 전환”의 방향과 초석을 찾기 위한 신약성서 학자의 놀라운 작업이다. 왜 기독교인들이 하느님보다 카이사르를 더 사랑하는지, 왜 예수의 복음이 문명 전환의 초석으로서, 예수가 전통적인 “상벌 신학”(신명기 신학)을 폐기하고 대신에 발전시킨 “안식 신학”은 찬란한 생명에 대한 경이와 하늘의 정의, 즉 “포용•형평•다양성”(IED)의 문명을 열었는가를 깨우쳐준다.
왜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85%는 생태학살과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에 앞장서는 트럼프를 지지하는가? 왜 한국의 대다수 목사는 차별금지법 반대에 앞장서는가? 과거 노예제도 철폐에 앞장섰던 복음주의자들이 오늘날 이렇듯 차별과 혐오를 고집하며, 보수언론마저 정권 비판을 본격화하자 대규모 기도회를 통해 동성애 반대로 초점을 돌리려는 극우 세력의 앞잡이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이 종교개혁의 본래 지향대로 “오직 하느님의 의,” “오직 자기 비움,” “오직 사랑 실천” 대신에 “오직 배타(차별),” “오직 나(자기),” “오직 축복(번영)”으로 둔갑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런 둔갑을 통해 누가 이득을 보는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제국들은 여전히 학살과 약탈을 계속하고 그에 기생하는 권력자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불의와 폭력으로 확대하며 사제들은 온갖 차별(특히 인종, 계급, 성차별)과 혐오를 통해 억압과 수탈을 유지하는 구조 속에서 예수는 어떻게 문명 전환을 시작했는가? 온갖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에게 예수의 복음은 어떻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는가? 기독교는 제국과 자본주의 문명을 복음화했는가, 아니면 그 하수인이 되었는가? 극소수 권력자가 지배하는 문명을 정상이라고 믿거나 체념하는 대중은 그 폭력적 문명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예수의 큰 꿈과 정신마저 죽이지 않는가? 오늘날 전대미문의 기후 붕괴로 인해 더욱 잔인해지고 있으며 인류 자신이 멸종위기종이 된 묵시적 현실은 문명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어떤 구체적 꿈을 계시하는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 교수가 88세에 발표한 이 책은 교회의 문화적 순응에 대한 악마화(1부), 신성화(2부), 그리고 예수의 문명 전환 전략(3부)을 해명한다. 예수께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주라”고 가르친 이후, 기독교인들은 이런 폭력적 문명 속에서 씨름해왔는데, 그것은 신약성서 안에도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약성서가 어떻게 서로 반대되는 것(요한묵시록의 악마화, 루가-행전의 신성화)을 가르치는지를 자세히 분석한다. 예수의 무차별적 은총의 신학과 비폭력 저항에 기초해서 제3의 길을 제시하는 저자는 “기독교의 문화 전쟁,” 즉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논쟁의 기초가 되는 신약성서의 유산을 놀랍게 해명한다. 세상의 권력자들뿐 아니라 아집에 사로잡힌 종교 지도자들에 맞서서, 예수뿐 아니라 성서 기자들이 문명 전환의 복음을 설파하는 데 얼마나 창조적이며 치밀했는지를 분석한다. 이 책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가득하며, 민주주의가 위협당하며 머지않아 문명의 붕괴까지 예상되는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쁜 소식이다.
“크로산의 방법은 논쟁적이다. … 그의 작업은 매우 신중하며, 그의 결론은 항상 조심스레 들어야 할 가치가 있다.” ―The New York Times
“크로산은 예수와 사도 바울로에 대한 여러 베스트셀러 책들을 써냄으로써 예수 세미나의 사역을 이룩했다. 그는 또한 PBS 방송의 From Jesus to Christ: The First Christians, A&E’s Mysteries of the Bible 같은 다큐멘터리 방송에 출연했다. 크로산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교리화된 예수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과 역사가 무시한 숨어있는 또 다른 예수가 있다. … 동료 학자들이 그를 두고 종종 ‘훌륭한,’ ‘예리한 정신의,’ 그리고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말을 한다.” -CNN
“물의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저명한 기독교 학자로 현대 기독교가 자명하게 여기는 것들에 도전하는 데 노련한 짙은 아일랜드 액센트를 지닌 가냘픈 남자, 깊은 영적인 샘(우물)이요, 장난꾸러기 같은 감성의 유머를 즐기는 이” -Los Angeles Times
“그는 우리가 예수를 보고 생각하는 방식에 도전하였다. 그가 중요한 것은 그런 방식의 학자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Byron McCane, Roll Back the Stone 의 저자
“매혹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영감을 주는, 현대 신앙인들에게 참된 선물. 크로산의 특징적 역사 해석은 현대의 문화적 분열들에 좋은 통찰을 제공하여, 현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정부의 부패에 저항하고 또한 공통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사회를 어떻게 개혁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Brandon Robertson, Filled to Be Emptied 의 저자
<성서심층연구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 9
프롤로그: 너무 이른 승리, 너무 빠른 비극 / 13
서막: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 23
제1부: 배척하고 악마화한 문화
1장. 하느님이 언젠가는 승리하실 것이다 / 43
2장. 지금 여기 이미 있는 것이 다가온다 / 61
3장. 언젠가 있었던 미래의 짐승 / 79
4장. 이 어두운 사탄의 언덕들 / 97
5장. 가장 오래된 거짓말 / 115
제2부: 수용하고 신성화한 문화
6장. 대항 내러티브를 창조하기 / 143
7장. “바울로가 함께 데려갔던 사람” / 167
8장. 로마 기독교의 비전 / 191
9장. 거룩한 영의 길 / 215
10장. 문화적 적응의 대가 / 245
제3부: 대결하고 비판한 문화
11장. 비폭력 저항의 창안 / 277
12장. “너희가 보듯이 우리는 비무장이다” / 293
13장. “그리스도라 부르는 예수” / 313
14장. 상벌 신학과 안식 신학 / 329
15장.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 345
에필로그: 카이사르의 것에 맞서는 하느님의 것 / 359
부록 1.
“하느님 나라/왕국”에 대한 다문화적 번역 / 367
부록 2.
이스라엘이 로마화된 것에 대한 폭력적 대응과 비폭력적 대응 / 370
부록 3.
성서의 서막: 창세기 1:1-2:4a / 373
저자와 역자 소개
기본적인 사실은 요한이 금식(fasting)을 잘하는 반면, 예수는 잔치(feasting)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식은 곧 오고 있는 것(what is coming soon)을 위해 준비하는 것인 반면, 잔치는 이미 온 것(what has already arrived)을 축하하여 벌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땅 위에 와 있다. 그러나 여전히 폭력적인 불의, 군사력, 그리고 군법에 의해 통치되는 세계 안에서 그걸 어떻게 아득하게라도 믿을 수 있는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있는 “모루 위의 망치들 합창”을 누가 듣는가? 로마화가 시작된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예수의 메시지가 잔인한 농담이 아닐 수 있는가?
편집자주: 예를 들어,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되었지만, 나치의 아우슈비츠나 일본군 731부대에 소속되어 생체실험을 자행하게 된 의사들은 그것이 “정상”이라고 믿는 상관들의 명령, 동료들의 압력, 그리고 출세를 위해 그 “악에 사회화되어” 갔다. Robert Jay Lifton, The Nazi Doctors: The Medical Killing and the Psychology of Genocide (New York, NY: Basic Books, 1986); 노다 마사아키, 서혜영 역, ≪전쟁과 죄책≫(또다른 우주, 2023).
프롤로그
너무 이른 승리, 너무 빠른 비극
대규모 정복전쟁들과 카이사르의 등장 사이의 기간(80년대–30년대 BCE)은 …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섬뜩하게 익숙한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한 시기였다. … 경제적 불평등이 악화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사라지고,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정치적 행위들에서 무언의 규칙들이 무너지고, 군대를 사유화하고, 부패가 만연하고, 사회적 및 인종적 편견이 팽배하고, 시민권과 투표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고, 군대의 구조적 병폐가 계속되고, 폭력이 정치적 수단으로 등장하고, 지배층은 자신들의 특권에만 사로잡혀 그 체제를 구할 수 있는 시간 내에 개혁하기를 거부했다.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연구할 때 흔히 놓치는 것이 당시의 로마제국이라는 보다 큰 드라마 안에서 차지하는 예수운동의 위치인데, 이것은 예수 당시 사람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원전 80년대부터 30년대까지 로마는 제국이 됨으로써 공화정 체제를 상실했다. 그 기간 동안에 정치적인 원한과 무장 폭력을 통해서, 로마는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가차 없이 독재체제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 독재체제는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기념비들에 공식적으로 새겨진 것처럼 “정복자”(라틴어로 imperator, 그리스어로 autokrator)였다.
기원전 40년경,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일시적 소강상태를 평화로 착각하여, 로마에 황금시대가 돌아온 것으로 선언했다. 즉 수고하지 않고도 풍작을 얻고 원래의 평화주의라는 메시아적 비전과 더불어 “위대한 세기들이 새롭게 시작된다”(Eclogue 4.5)고 노래했다. 그러나 당시 또 다른 로마 시인이며 신학자였던 호레이스(65-8 BCE)는 베르길리우스의 비전과는 정반대로 단호하게 표현했다. 그렇다. 로마 공화정에서 독재체제로 비틀거리며 치닫는 마지막 라운드는 끝났다고 그는 말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암살당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라운드는 이미 그들의 아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시작되고 끊기는 내전의 또 다른 라운드인가?
베르길리우스의 광상곡에 대한 반박으로 호레이스는 냉혹하지만 정확하게 로마 공화정 권력의 살인적인 양극화에 대해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를 몰아가는 것이 어떤 맹목적 광기인가, 아니면 보다 강력한 어떤 힘인가, 아니면 죄의식(culpa)인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기원이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한 형제살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냉혹한 운명이 로마인들을 뒤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후손들에게 저주가 내린 것”은 아닌지 하고 물었다(Epode 7.13-20). 애당초 그런 저주에서 시작된 마당에, 어떤 구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막강한 로마를 정복할 수 없기 때문에, 호레이스는 “내전으로 인해 이미 제2 세대가 박살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 저주받은 얼간이들의 사악한 세대가 스스로 이 도시를 파괴할 것”은 아닌지 물었다. 그의 몹시 신랄한 해결책은 로마를 야생짐승들에게 넘겨주고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서, 있을 리 만무한 어떤 유토피아로 가는 것이었다(Epode 16.9-22). 황금시대는 여기 로마에 있지 않고, 로마에서 먼 곳에 있다!
그것은 분명히 수사학적 과장법이었지만, 로마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이 독재체제로 기울어가는 것에 대한 도전은 분명했다. 어떤 외부의 힘도 로마 공화정을 정복할 수는 없지만, 로마는 자체적으로 내부에서 그것을 파괴할 수 있다고 호레이스는 말했다. 또한 그는 그런 내부적인 파괴가 이미 로마의 출발점이 된 살인, 즉 로물루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살해한 형제살인으로 상징되거나 심지어 그것에 의해 초래된 것인지를 물었다.
민주 공화정을 유지하는 도전은 과거 지나간 세기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존 애덤스가 1814년 12월 17일에 존 테일러에게 보낸 답신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오래 존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만간 약화되고, 피폐하게 되고 스스로를 죽인다. 자살을 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결코 없었다”라고 쓴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그보다 더 먼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1796년 9월 19일에 발표한 “동료 시민들에게”라는 고별사에서 공화정의 죽음은 흔히 도움을 받는 자살이라고 경고한 것을 기억할 수도 있다: “무질서와 비참함은 … 한 개인의 절대 권력에서 안전과 평안을 추구하는데 … 그 개인은 이런 경향을 이용하여 … 자신을 드높이며, 대중의 자유를 파괴한다.”
호레이스는 로마 공화정이 애당초 로마/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한 형제살인에 의해 저주를 받았는지를 물었다. 미국 공화정 역시 그 두 차례의 경고 편지들 이후 수십 년이 지나 벌어진 형제살인의 경험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절대적으로 뜨거웠던 내전(남북전쟁)이었고 여전히 비교적 차가운 내전으로 계속되고 있다. 공화정은 형제살인의 저주에 의해 무너질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나 형제살인의 정치에 의해서는 확실히 무너진다.
더 나아가 보다 폭넓은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은 진화상의 비정상(evolutionary anomaly)으로서, 사회적 종자로서 개인적 의지를 갖고 있다. (우리의 유전적인 비통함은 원죄가 아니라 이런 원래의 상태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정부적 개인주의와 독재적 공동체주의라는 양극단 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생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울 때는 항상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치열하게 집중한다.
2006년 5월 3일(수요일)부터 5일(금요일)까지, 일본성서협회가 국제성서포럼을 개최했는데 그 주제는 “원래의 본문부터 현대 번역까지: 성서를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였다. 나는 아내 새라와 함께 도쿄에 머물면서 두 차례 강의를 했다. 그 후 우리는 도쿄에서 신칸센 급행열차를 타고 교토에서 이틀을 지냈고 5월 8일 월요일에는 히로시마에 갔다.
그 모임에 가기 전, 나는 <하느님과 제국>을 탈고하여 그 서문 초고를 갖고 일본에 갔다. 나는 의도적으로 히로시마에 다녀오는 길에 그 도시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수정 작업을 하려고 했다. 그 서문의 장소로 그 도시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 서문에서 내가 언급한 것처럼, 1990년대 이후 저술가들이 승리로 생각하든 아니면 비극으로 생각하든 간에, 미국이 “새로운 로마” “새로운 로마제국”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런 주장이 남북전쟁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또한 우리의 남북전쟁이 로마의 형제살인과 병행한다는 점에서 로마와 같은 미국의 운명이 확인되었다고 보았다. 그 서문의 끝에서 나의 마지막 질문은 “성서로 양육된 기독교인들의 폭력이 새로운 로마제국으로서의 우리의 제국적인 폭력을 뒷받침하거나 심지어 선동하는가?”였다.
이제 15년이 지나, 나는 또 다른 책의 프롤로그를 쓰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로마/미국의 병행이 너무 빠르게 승리에서 비극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해외에서 제국이 승리한 확실성 속에 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국내에서 제국이 몰락하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제일 앞에서 인용한 글이 보여주듯이 로마처럼 행세하지만, 국제적으로 폭력적인 영광을 향해 올라가는 공화정이라기보다는 국내적으로 폭력적인 치욕을 향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로마/미국의 병행은 이제 해외의 폭력이 국내의 폭력을 증가시키는 순간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하며, 공화주의가 독재체제를 향해 비틀거리는 순간, 그리고 우리의 독배가 우리 자신의 입술에 돌아오는 순간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런 병행들, 즉 고대 로마와 현대 미국 사이에서 상승하는 제국주의인지, 아니면 하강하는 공화주의인지에 대한 병행들보다 더 깊이 파고들 것이다. 나는 “로마의 것”과 “미국의 것” 사이의 병행에서부터 돌이켜, 예수가 대조시킨 것, 즉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사이의 유명한 대조(마태오 22:21; 마르코 12:17; 루가 20:25)로 옮겨간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대조와 이 책의 연관성은 확대되는 폭력이 인간의 불가피성이며, 그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은 단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 여부에 관한 질문이다.
더 나아가, 예수가 도전한 말씀의 그리스어는 ‘타 투 테우’(ta tou Theou), 또는 “하느님의 것”(the [things] of God)과 ‘타 카이사로스’(ta Kaisaros), 또는 “카이사르의 것”(the [things] of Caesar)이다. 영어로 things를 넣은 것은 완벽하지만, affairs(사태), matter(문제), 또는 demands(필요사항)을 넣어도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마가 8:33에서 (베드로를 꾸짖는 가운데 나오는)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과 비교해보라.
이 책에서는 독자들이 이미 이 책의 부제목에서 짐작한 것처럼, 여기서 ‘것’(things)은 한 사람의 종교-정치적이며 사회경제적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문화”를 뜻한다. 실제로 성서의 계약신학과 로마의 제국신학에서, 하느님이나 카이사르의 “문화적인 것들”은 하느님이나 카이사르의 “지배방식들”(rule things)로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다. “그의 것들”(the [things] of)은 의도적으로 개방된 말로서 구체화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어서, 그것을 “문화”로 생각하지만 “지배”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이분법(하느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본질적 질문들을 야기한다. 카이사르의 문화와 구분되는 하느님의 문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느님의 문화는 카이사르의 문화와 같아야 하는가, 구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여야 하는가? 이런 문화들의 각각은 폭력적인 지배나 비폭력적 저항과 어떤 관계인가? 하느님의 문화로부터 카이사르의 문화로, 또는 그 역으로, 문화적 변용(acculturation)은 어떠해야 하는가? 예수가 이론적으로 분리시켰던 그 둘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실제적으로 화해시켰는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예수가 (그 둘을 분리시킴으로써) 도전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문화와 카이사르의 문화 사이의 문화적 변용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고 있는가? 우리는 정확히 어디에서 그 대답들을 가장 충분하게 찾을 수 있는가? 명백하게 하느님과 카이사르의 세계가 구체화되어 서로 직면한 것은 예수가 체포되어 빌라도와 직면하고 십자가에 처형될 때였다. 그러나 책의 분량으로 나타난 것 가운데 고려할 두 가지 중요한 자료는 계시록과 누가-행전이다. 그 두 자료는 (그 대답에서)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신약성서 안에 제3의 선택지는 없는가?
우선, 나는 이 책의 서막에서, 예수가 세금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인 유명한 장면에서 ‘신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GOD AUGUSTUS CAESAR)라고 새겨진 동전을 보면서, “하느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에 대한 동일시를 거부하고, 그 둘을 분리시킬 것을 주장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카이사르를 분리시켰지, 그리스도와 카이사르,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킨 것이 아니며,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킨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이론적인 분리를 인정할 때, 이 책의 본질적인 질문은 “하느님과 카이사르는 실제적 차원에서 어떻게 화해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명백한 말씀은 하느님 대(versus) 카이사르의 문제―미국 역사 전체를 통해 항상 논쟁적인 문제―가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과(and) 카이사르 모두와 함께 하는 하나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임을 정립해주었다. 그 분명한 첫 단계는 신약성서로 돌아가 그 이분법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지만, 그러는 중에 우리는 조만간 그 문제가 매우 논쟁적인 이유를 발견한다.
신약성서 자체에서, 그 문제는 이미 과거의 정치-종교적 양극화에 의해 충분히 극단적으로 논쟁이 되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것처럼 극단적인 모습이다. 그뿐 아니라 신약성서의 한 반응은 “하느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을 분명히 동일시하고, 초월적 폭력의 차원에서도 동일시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과 카이사르에 대한 종교-정치적 양극화의 한 편은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거기에서는 당시의 문화를 배척하고 악마화한다. (이것은 이 책의 제1부에서 해명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밝힌 이유는 로마가 최근에 기독교인들을 학살했으며, 정당한 복수로서 그리스도가 로마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조만간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 프로그램에 가담하도록 초대받지 않는다. 왜 그런가? 왜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나 (휴거 이후) <남은 자들>(Left Behind)에서처럼, 사람들이 묵시종말적 전투에 깊이 개입하고, 심지어 (2021년) 1월 6일, (선거 이후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의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안에서는 기도를 하고 밖에서는 피를 흘린 사건을 정당화하는 방식이 아닌가?
하느님과 카이사르에 대한 신약성서의 종교-정치적 양극화의 또 다른 한 편은 두 권으로 된 누가-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여기서는 당시의 문화를 수용하고 표준화한다. (이 책의 제2부). 누가-사도행전의 저자는 기독교의 미래가 유대인들의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것으로 상상하고, 성령이 사령부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긴 것을 축하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벌어질 것(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을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이 저자 혼자만이 미래를 정확하게 보았다. 그 미래가 더 좋아지는 것이든, 아니면 더 나빠지는 것이든 말이다.
만일 오늘날 기독교인들, 특히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로마는 정기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는 요한계시록의 거짓 주장에 근거하여 다른 문화들을 악마화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로마는 정기적으로 기독교인들을 결백하다고 인정했다는 누가-사도행전의 주장에 근거하여 “우리의” 문화를 표준화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어찌 할 것인가? 만일 다른 성서적 사실들과 당시의 종교-정치적 거짓말에서 비롯된 가짜 복음(fake good news)이 오늘날 그런 거짓말을 다시 불러일으킨다면 어찌 할 것인가?
신약성서에서 이처럼 악마화된 문화와 표준화된 문화 사이의 절대적 이분법에서 비롯되는 그런 유혹들을 인정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과 문화에 대해 반응한 것을 숙고하기 위해 다른 어디를 살펴볼 수 있는가? 명백한 대답은 예수가 하느님과 카이사르를 분리시킨 것을 그 자신의 생애 가운데 다른 어디에서 화해시킨 적이 있었는지, 또한 어떻게 화해시켰는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신약성서가 똑같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카이사르를 화해시키는 문제에 대해 그처럼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방식으로 응답한 것(제1부와 제2부)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똑같은 성서로부터 제3의 선택지를 발굴하려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나의 해결책은 완전히 신약성서 바깥에서 행해진 역사적 실험으로 시작해서, 마치 신약성서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 속에서 나오는 예수의 생애에서 하느님과 카이사르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방법이다. 일단 독립적으로 그런 방법을 확립할 때만, 나는 복음서들의 증거를 덧붙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정경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들과는 구분되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예수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 방법은 우리에게 제3의 선택을 제공하는데, 역사적 예수가 개척한 선택, 즉 문화와 맞서고 비판하는 선택, 하느님과 카이사르 사이에 항구적으로 대결하는 문화, 신약성서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문명의 “이 세계”라고 묘사한 것 사이에 항상 긴장이 있는 선택이다. (제3부). 이런 비판적 대결은 분배하지 않는 불의라는 폭력에 맞서서 예수가 분배정의를 위해 비폭력 저항을 한 것에 근거하며, 또한 예수의 그 비폭력 저항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는 비판적 대결이다.
한 가지 결론은 이렇다. 네로 황제는 죽어가면서 “[내 안에서]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네로에게는 그 자신이 끝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잠시 동안 어디론가 갔다가 조만간 승리와 복수 가운데 되돌아 올 것이라는 희망을 창조하고 축하하며 심지어 그 희망을 구체적으로 살려내기에 충분할 만큼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 있었다.
네로의 귀환(Nero Redivivus)이라는 전설은 1세기 말엽, 요한계시록에게는 너무 생생했고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이 프롤로그를 마치면서 네로의 마지막 말에 대한 또 다른 판본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나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너희들을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