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심층연구 시리즈 01
매주 오경 읽기 영성 강론
하나님보다 앞서 걸어라
템플턴상 수상자
랍비 조너선 색스 지음
STUDIES IN SPIRITUALITY
A Weekly Reading of the Jewish Bible
Jerusalem: Maggid Books & OU Press, 2021.

1. 책소개
템플턴상 수상자 랍비 조너선 색스(1948-2020)의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매주 오경(토라) 읽기 본문에 따라 오경의 영성을 52회에 걸쳐 강론한 책이다. 그는 ≪언약과 대화≫ 시리즈를 통해 오경의 의미를 오늘의 삶의 현실과 관련시켜 해명한 후에,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유다이즘 영성의 핵심을 정리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점차 무관심하게 되는 탈종교화 시대에, 저자는 오랜 공부와 경험을 바탕으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정리했다. 하시디즘 전통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과는 달리, 랍비 조너선 색스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를 쓴 마이모니데스의 전통을 따라, 성서의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설명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미드라쉬, 미슈나, 탈무드 등 유대인들의 주석 자료들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거의 묻지 않았던 질문들을 통해, 오경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왜 당대에 가장 의로웠던 노아가 아니라, 무명의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시작하셨는가?” 하는 질문이다. 모든 이야기들의 맥락과 전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음으로써 그 이야기들 속에 숨어있는 깊은 영적인 가르침을 찾아낸다. 따라서 이 책은 유대인들이 매주 오경 읽기를 통해 어떻게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일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오랜 박해와 고난의 역사를 통해 불안과 불확실성이 가득한 위기 속에서도 오경을 통해 영원한 순간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다. 오경이 자신들의 삶을 비춰주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대화를 새롭게 써나가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율법을 복음과 대비시키는 바울(몽학선생), 루터(거울, 망치), 칼빈(행동 억제, 성화의 안내자)의 시각에서 소극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랍비 조너선 색스는 율법을 "사랑의 행동 구조"라고 적극적으로 이해한다. 가족 사랑이든 이웃사랑이든, 하나님 사랑이든, 사랑은 감정이고 식을 때가 있다는 점, 그래서 율법이라는 "사랑의 행동 구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해석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자들이 루터가 "천국의 문이 열렸다"고 환호했던 로마서 주석 서문(특히 하나님의 능동적인 의와 수동적인 의)을 인용하지 않고 율법과 복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이 책은 유다이즘이 매우 치밀한 구조를 갖춘 "사랑의 종교"임을 증언한다.
2. 저자
랍비 조너선 색스(1948-2020)는 영국 정통파 랍비로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 성서주석가로서, 영국연방에서 가장 큰 회당 조직인 연합히브리회중의 영적 지도자인 최고 랍비직을 22년 동안(1991-2013) 맡았으며, 또한 랍비 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최고 랍비에서 은퇴한 후에는 뉴욕대학교와 예시바대학교, 런던 킹스칼리지의 유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라울발렌버그 인권센터의 정회원이었다.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한 그는 “인생의 영적 차원을 가르친 특별한 공헌”을 인정받아 2016년에 템플턴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서 예루살렘 상, 라디슬라우스 라츠 에큐메니컬과 사회적 관심 상 등 많은 상을 받았으며, 열여덟 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런던에서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곤빌앤카이우스 대학에서 실존 철학을 공부한 후 옥스퍼드 뉴칼리지와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공부하여 1981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유대인 대학과 예쉬바 에츠 카임에서 랍비 안수를 받았다. 1978년에 런던 골더스 그린 회당의 랍비로 임명된 후, 1983년에는 센트럴 런던의 웨스턴 마블 아취 회당의 랍비가 되었다. 1970년에 일레인과 혼인했으며, 세 명의 자녀와 여러 명의 손주들이 있다.
랍비 색스는 그의 사역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 2016년에 템플턴 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1995년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삶을 위한 그의 공로로 예루살렘 상을 받았고, 2011년에는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교로부터 라이슬라우 라츠 에큐메니칼 및 사회적 관심 상을 받았다. 바일란 대학교의 잉게보르그 레너르트 예루살렘 학문센터로부터 시온 수호자 상을 받았으며, 2014년에는 이스라엘의 현대생활에서 할라카에 대한 그의 실천적 분석과 적용에 공헌한 것을 인정받아 카츠 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차이의 존중: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와 ≪사회의 재창조: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가 번역되었다.
3. 목차
<성서심층연구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__ 11
서문: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써넣기 / 시반 라하브 메이르 __ 15
서론: 시간의 한복판에서 영원을 느끼기 __ 21
창세기
듣기의 기술 __ 31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갈 용기 __ 38
세대를 거쳐 이어가는 여정 __ 43
우리들 사이의 공간을 축복하는 일 __ 49
미래에 대한 믿음 __ 55
아버지의 사랑 __ 61
빛은 어떻게 스며드는가 __ 67
두려움을 느낄 때 __ 73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__ 80
절망하지 않고 기다리기 __ 86
틀을 새로 짜기 __ 92
미래를 예측하지 않기 __ 98
출애굽기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기 __ 107
물질적 세상에서의 정신 __ 113
영적인 자녀 __ 119
새롭게 하는 에너지 __ 125
생각하기 전에 감사하기 __ 131
행위와 듣기 __ 137
줌으로써 받는 선물 __ 144
영감과 수고 __ 150
가까이 계신 하나님 __ 156
사회적 동물 __ 163
앉아 있지 말고 걸어라 __ 169
레위기
의미 찾기 __ 177
희생제사 이해하기 __ 183
열광주의의 위험성 __ 189
수치심의 힘 __ 195
실수를 인정할 용기 __ 202
유대인의 정체성을 찾아서 __ 208
거룩한 시간들 __ 216
가족의식 __ 224
방향감각 __ 230
민수기
침묵의 소리 __ 239
사랑의 축복 __ 246
절망에서 희망으로 __ 254
두 종류의 두려움 __ 261
위계질서와 정치: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 __ 267
사별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__ 274
무엇이 하나님을 웃으시게 만드는가 __ 282
모세의 실망 __ 289
우리의 약속 지키기 __ 297
인권의 복잡성 __ 303
신명기
백스무 살까지: 늙어도 젊게 사는 길 __ 313
“왜?”라는 물음의 힘 __ 319
귀 기울임의 영성 __ 327
기쁨의 깊은 힘 __ 334
겸손의 위대함 __ 341
사랑의 한계 __ 347
우리의 예배와 정체성 __ 355
하늘에서가 아니다 __ 363
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기 __ 369
도덕적 우주의 호 __ 376
4. 책 속으로
(14쪽) 제도 종교의 “영적인 파산”(존 캅)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적인 변화 없이는 사탄의 체제와의 투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월터 윙크). “대량파괴의 가장 큰 무기는 인간의 마음”(조너선 색스)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서해석이 흔히 문자에 매여 과거 지향적이 됨으로써, 당면 위기와 미래를 위한 과제를 무시한 채,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수구적 태도를 조장해왔다. 특히 성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과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성서의 심층적 의미를 배우고, 기존질서를 비판하고 저항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책임이 부족했다. 일차적으로 신학자들의 책임이다. (발간사 중에서)
(27쪽) 역자주: 저자는 창세기가 “의도적으로 비철학적 방식으로 쓰여진 철학”이며, 철학이 “체계로서의 진리”인 것과 달리, 창세기는 “이야기로서의 진리”라고 말한다. “오경이 모두를 위한 보편적 책”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 중 하나는 엘리트들, 특히 지식 엘리트들에 맞서는 한결같은 전투다. 토라는 이스라엘을 ‘제사장들의 나라와 거룩한 민족’(출 19:6)으로 정의한다. 즉 모든 구성원들이 적어도 은유적으로는 제사장들이 되려고 열망하고, 거룩한 민족이 되려는 나라로 정의한다. … 유다이즘은 거룩함을 민주화하는 것이며, 누구나 종교적 지식에 접근할 사회를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이야기에는 많은 층들이 있어서, 나이가 들수록, 세대가 바뀌어도 새롭게 캐내는 층이 있고, 서스펜스가 있어 결정론을 거부하며,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또한 창조와 인간의 악이 확대되어 “생명의 미래를 위협하게” 된 과정에 뒤이어, 가족 이야기 중심의 창세기가 민족 탄생 이야기인 출애굽기보다 앞에 놓인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함”을, 즉 거대담론이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개인의 마음과 가족의 평화를 우선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Jonathan Sacks, Genesis (Meggid Books, 2009), 6-11.
(31쪽) 인간이 저지른 첫 번째 죄는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무엇이었는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그토록 나쁜 것이라서 금지해야만 했으며, 또한 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었는가? 선과 악의 차이를 아는 것은 인간이 되는 데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그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지식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지식을 갖기를 원하셨을 것 아닌가?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금지하셨는가?
(36쪽) 아담과 하와의 드라마는 비유대인들이 해석해왔던 것처럼 “타락”이나 원죄, 사과나 섹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도록 요청받는 도덕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도덕에 지배당할 것인가? 마치 도덕이 정치인 것처럼, 대다수의 의지에 지배당할 것인가? 우리 감정의 지평이 명예와 수치심이라는 두 가지 뿌리 깊은 사회적 감정에 국한될 것인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남들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것,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직면했던 것은 인간의 원형적 선택, 즉 그들의 눈이 본 것(선악과나무와 그 열매)과 그들의 귀가 들은 것(하나님의 명령)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다. 죄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한 형태이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잘못된 형태다. …
(40쪽) 이것은 물론 고대 전통의 일부분으로서 라쉬(1040-1105)가 그의 주석(창 6:9)에서 언급한 것이며, 하나님이 도대체 왜 유대 민족을 노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셨는지에 대한 그 현자의 이해에서 핵심적인 이유였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창 6:9).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나보다 앞서 걸어라(Walk on ahead of Me)”(창 17:1)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 요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미드라쉬의 드라마와 힘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이것이 유다이즘에서 믿음의 중요한 부분임을 파악했다. 믿음은 개척할 용기를 갖는 것, 새로운 무엇을 할 용기, 남들이 별로 걷지 않는 길을 걸어갈 용기, 알지 못하는 것 속으로 감히 나아갈 용기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들의 땅, 고향,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가졌던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시대에 광야로 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할 때 가졌던 믿음이었고,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만 받았다.
(170쪽) 역자주: 랍비 예후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년이고, 하나는 아이였다. 아이에게는 왕이 ‘함께 가자’고 말하지만, 성년 아들에게는 ‘앞서 가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너는 성심껏 행하니까 내 앞에 가라’(17:1)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6:9)고 오경은 말한다.”(Bereschit Raba 30:10). Jonathan Sacks, Genesis: The Book of Beginnings (Meggid Books, 2009), 47.
(48쪽) 역자주: 저자는 “창세기의 주인공들은 놀랍게도 인간이다. 그들은 신화의 영웅들과는 한참 떨어진 세계다. 그들은 막강한 전사들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군대를 지휘하고 전설적 승리를 쟁취하는 통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꺼이 따르려 함으로써 비범하게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망설임과 의심, 두려움과 불안을 듣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창세기 주인공들이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과 대조적 성격임을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아브라함이 (1) 아담과는 달리 개인적 책임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는 점, 즉 아담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에덴에서 쫓겨나 유배되었지만, 아브라함은 일종의 자발적 유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만 의존했다는 점, (2) 가인이 형제를 지키기를 거부했던 것과 달리, 도덕적 책임을 받아들여, 조카 롯을 구출했다는 점, (3) 노아와 달리, 소돔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써 집단적 책임을 받아들였다는 점, (4) 바벨탑 건설자들과 달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하는 존재론적 책임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인간 유형”이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신앙이 태어났는데, 그것은 “책임성의 신앙”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오늘날처럼 온갖 책임 회피가 만연한 “희생자 문화”에서 책임성의 신앙이 왜 중요한지를 인간의 자유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다고 주장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배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땅을 떠나라”고 하셨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타고난 본능에 의해 형성된다는 유전적 결정론을 주장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난 곳을 떠나라”고 하셨다. 한편 프로이트는 인간이 아동 초기의 경험, 특히 아버지와의 적대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고 설명한다. Jonathan Sacks, Genesis (2009), 10, 67-71.
역자주: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가라”고 하신 첫 번째 명령의 여러 차원을 이렇게 요약한다. (1) 그것은 “너 자신을 위해(for yourself) 떠나라”는 명령으로서, 그에게 중요한 것들, 그가 속한 익숙한 곳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가서, “네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다. (2) “너 자신과 함께(with yourself) 가라”는 뜻으로서, 너의 영향력을 한 장소가 아니라 많은 장소로 확장시키면서, 하나님이 한 장소에 매인 분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창조자이며 주권자임을 증언하라는 것, 즉 너의 믿음, 너의 생활방식과 함께 가라는 뜻이다. (3) “너 자신에게(to yourself) 가라,” 즉 “영혼의 뿌리로 가라”는 뜻으로서, 우리를 다른 어떤 누구로 만드는 모든 것을 떠나 진정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외로운 여정을 시작하라는 뜻이다. (4) “너 혼자 가라(by yourself)”는 해석으로서, 혼자, 독특한 존재가 될 각오를 한 사람만이 독특하신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역사의 법칙 안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법칙의 지배를 받고, 또 자연적인 것은 해체와 몰락을 겪으며, 이것이 모든 문명에서 벌어지는 현실이지만, 아브라함은 쇠퇴하거나 몰락하지 않는 영원한 백성(am olam)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너 혼자 가라”는 명령은 “남들과 다르게 될 용기를 갖는 것, 시대의 우상들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다신론 시대에는 그것이 우주를 하나의 창조적 의지의 산물로 보는 것을 뜻했다. 노예제 시대에는 그것이 하나님 이름으로 현상유지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했고, 대신에 하나님 이름으로 그것에 도전하는 것을 뜻했다. 권력을 숭배하는 시대에는, 그것이 힘없는 이들, 과부와 고아와 낯선 이들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뜻했다. … 전쟁이 인류를 시험할 때는 그것이 평화를 위해 수고하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처럼 철저한 개인주의 시대에는 그것이 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는 것이 우리를 규정하며, 우리가 구매하는 것이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는 것이 우리를 규정한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며, 기호와 욕망보다 더 높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한다. Jonathan Sacks, Genesis (2009), 77-80.
(57쪽)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 트라우마와 비통함을 극복했는가? 당신이라면 아들을 거의 잃을 뻔 했고, 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실제로 잃어버릴 경우, 다시 일어나 일을 계속할 에너지를 갖고 있을 것인가? 무엇이 아브라함에게 회복력, 살아남을 능력을 주었으며, 그가 넋을 잃지 않게 만들었는가? 내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배운 것은 도덕적 용기에서 나의 스승들이 된 사람들, 내가 만나볼 수 있었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로부터였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이 보았던 것, 알게 된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했다.
(62쪽) 진짜 문제는 왜 이삭이 쌍둥이 아들 가운데 큰아들 에서를 사랑했는가 하는 점이다. 에서는 사냥꾼이며 집밖에 사는 아들이지, 깊이 성찰하거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삭이 몰랐는가? 그가 에서를 사랑한 것이 단지 그가 사냥해온 고기에 맛 들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그의 정신과 가슴을 지배했는가? 이삭은 에서가 어떻게 자신의 상속권을 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고, 상속권 자체를 어떻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29-34절)를 몰랐는가? 그에게 아브라함의 영적인 전통을 맡겨도 좋을 사람이었는가? 이삭은 분명히 그의 큰아들이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는 변덕스런 성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 이것은 헷 족속과 가나안 족속, 그리고 그들의 종교, 문화, 도덕과 거리를 두어야만 했던 아브라함의 계약(언약)을 이어갈 사람이 취할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삭은 분명히 에서를 사랑했다.
(276쪽) 주석가들은 모세가 정확히 무슨 잘못을 했는지에 대해 논쟁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화를 참지 못한 것인가?(“너희 반역자들은 들어라”[10절]). 그가 물이 나오도록 말로 하는 대신에 바위를 친 게 잘못인가? 그가 바위를 친 것은 물에 대한 책임이 마치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 자신과 아론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하랴?”[10절]). 더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왜 모세가 그 순간에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전에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었지만, 그가 결코 화를 참지 못하지는 않았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출애굽기 17장에서는 마사와 므리바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치라고 하셨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따라서 이번 주 오경 읽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 저 바위에게 말하여라”(8절)고 하실 때, 모세가 이번에도 바위를 치라는 뜻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히 용서받을 수 있는 실수였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난 번에 말씀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선례를 따랐던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바위를 치라는 뜻이 아니셨다면, 도대체 왜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으라고 명령하셨는가?
(375쪽) 따라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또한 우리에게, 단지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불멸하는 비결을 알려주신 것이야말로 얼마나 정확한 타이밍이며,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 모세는 죽었지만, 그가 가르친 것과 그가 추구한 것은 계속 살아있다.
서문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써넣기
시반 라하브 메이르(Sivan Rahav Meir)는 오늘날 이스라엘 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채널 2 뉴스의 골든아워 앵커로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신문 Yediot Aharonot에 칼럼을 쓰며, 매주 Galei Tzahal (Army Radio) 라디오 쇼를 진행한다. 그녀는 종교와 세속 영역 모두에 걸쳐 매우 존경받는 대중적 지성인이며, 소셜미디어에서 오경에 근거하고 가족 중심의 통찰력을 유대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많은 팔로워를 갖고 있다. 매주 오경 읽기 본문에 대한 그녀의 강의는 수천 명이 시청한다.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이 책은 랍비 조너선 색스(1948-2020년)가 선종하신 후 영어로 출판된 첫 번째 책이기 때문에, 당신이 이 책을 손에 들었다면, 이 책을 읽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이 책을 공부하십시오. 다른 누구와 함께 공부하는 게 좋으며, 가장 좋은 것은 다음 세대, 당신의 자녀들이나 손주들 가운데 한 사람, 혹은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젊은이와 함께 공부하는 것입니다. 랍비 색스는 추리소설, 요리책, 정치적 넌픽션 가운데 “또 다른 책”을 읽도록 이 책을 쓴 게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글을 소극적으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읽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우리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열정을 갖고 토론을 통해서, 질문과 대답, 호기심을 갖고, 우리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랍비 색스가 공부하고 가르칠 때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던 것을 누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유다이즘은 기계적인 암기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며, 학생들은 로봇이 되는 게 아니라고 그는 항상 우리에게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이 책은 역사상 우리의 영혼을 가장 사로잡는 이야기로서, 그 이야기 속에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써넣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랍비 색스의 유산은 읽을거리가 아닙니다. 그의 유산은 삶을 변화시키며 현실을 바꾸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들고 그 메시지를 내면화하도록 하십시오. 그 메시지에 동의하든지, 반대하든지 하십시오. 당신의 목표가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놀라운 생각들이 어떻게 나의 삶과 연관되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읽어주고 함께 토론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몇 문단을 읽은 후에 멈추고 당신 자신의 의견은 무엇인지를 숙고하십시오.
둘째로, 당신이 이 책을 구입한 것으로 랍비 색스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그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을 때 우리는 모두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록 그가 코로나19의 희생자가 되신 것은 아니었지만, 팬데믹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라,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무덤까지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온라인에서는 수천 명이 함께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새로 서가에 꽂는 것으로 그를 기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랍비 색스를 사랑한다면, 그가 떠남으로써 유대인 세계에 만들어진 큰 공백은 채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공백은 우리 자신이 랍비 색스가 되려고 애를 쓸 때만 비로소 채워질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과업은 이 책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길을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가 루바비처 랍비에 대해 말한 것처럼, “그분은 추종자들을 만들기 원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을 만들기 원했습니다.” 랍비 색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복사하거나 인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갖고, 자신을 초월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고 또한 모든 유대인들이 오경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 역시 좋은 책을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유대인들이 무지하다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그는 자신의 삶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비록 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교수, 학자, 성서주석가였지만, 그는 무엇보다 먼저 랍비였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 괴테, 니체의 저작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보다 유대인들의 연속성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 레이디 일레인이 그의 선종 한 달 후에 추모예식을 진행한 방식을 듣고 내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인터넷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찰스 황태자와 캔터베리 대주교 등이 있었지만, 레이디 일레인은 개회사에서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수많은 편지들과 이야기들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남편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이 유대인 교육을 받도록 보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그 모든 명사들의 조사에 앞서서 그녀가 전한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참으로 랍비 색스의 핵심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호화스런 저택에서 왕들과 황태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아이가 한 명이라도 더 조상들의 길을 계속 걷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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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 가지 “경고”를 함께 나눈 다음에 이 놀라운 책을 즐기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책은 유대인들의 영원한 심장박동, 곧 매주 읽는 오경 본문을 따르는 책입니다. 나에게 중요한 두 가지 본문을 공부할 때, 나는 정확히 내가 이제까지 말한 두 가지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랍비 색스는 안식일 오전에 선종하셨는데, 전 세계 유대인들이 매주 오경 본문 읽기에 따라서 ‘바예라’(Vayera, 창 18:1-22:24) 부분을 읽고 있었습니다. 랍비 색스는 이 본문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교육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였으며, 도대체 왜 그가 선택되었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처럼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되지도 않았으며, 모세처럼 불의에 항거한 인물도 아니었고, 다윗처럼 전쟁 영웅도 아니었으며, 이사야처럼 예언자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바예라’ 부분에는 오직 한 군데, 오경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를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창 18:19). 이 말씀을 요즘 식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마치 “나는 이 친구를 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가? 그는 좋은 선생이다. 좋은 부모다. 좋은 교육자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나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 군대가 아니고, 돈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아니다. 교육이다. 그는 그 불꽃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할 것인지, 그들의 눈동자에 어떻게 똑같은 불꽃을 일으킬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요점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들이 많은 책을 읽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책들과 일치하여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과업에 성공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랍비 색스는 안식일에 선종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길을 계속 걸어가도록,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지키도록 상기시켜 줍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까지 훑어보면서, 창세기의 토대가 되는 부분들,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 레위기의 거룩함과 성전에 관한 주제들, 그리고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떠돌던 이야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랍비 색스는 그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 독창적이며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내가 오경의 마지막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 빛이 사라졌음을 발견했습니다. 랍비 색스는 그가 선종하기 전에 그 마지막 부분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풀어내는 것을 끝마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그의 렌즈를 통해서 잠시 그 부분을 바라봅시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우리는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을 지킨다. 이 율법은 야곱의 자손이 가진 소유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보물이다”(신명기 33:4)라는 구절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삶의 좌우명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줄 최고의 유산은 오경이며, 우리의 정체성이며, 우리의 유산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의 마지막에서, 모세가 그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한 후에,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부 주석가들에 따르면, 오경의 모든 것을 쓴 모세는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인 여호수아가 그의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 오경의 마지막을 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랍비 색스가 우리에게 남겨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 책이 그 마지막 부분에 대한 주석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추종자가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라는 것, 그의 팬이나 방관자가 되지 말고 플레이어가 되라는 뜻입니다. 오경은 우리의 주석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