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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너선 라우치
번역자 강무천
출판일 2026-03-30
가격 18,000원
ISBN ISBN 979-11-93786-15-4 03230
  • 한기연 2026.03.12 11:42 글쓴이

    The Myth of Liberal Neutrality
    Review: ‘Cross Purposes’ by Jonathan Rauch
    February 4, 2025 | Bob Thune

    어떤 이들은 우리 시대를 “후기 근대(late-modern)” 시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근대주의의 황혼 속에 살고 있다. 근대주의는 산업혁명, 과학혁명, 그리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거대한 문화적·정치적 운동이다.

    근대 시대의 정치철학은 자유주의(liberalism)다. 여기서 말하는 “리버럴”은 좌파 대 우파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liberty)”라는 의미다. 자유, 독립, 개인의 권리는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들이다. 칸트, 로크, 루소는 그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 매디슨, 제퍼슨, 해밀턴은 이러한 사상을 미국 건국 과정에서 실제 정치에 적용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자유주의가 죽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패트릭 드닌은 2018년 저서 Why Liberalism Failed에서 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한 결과 자유주의가 사회적 유대를 해체하고 문화적 연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이들도 많다. 포스트-리버럴 비평가들은 앞으로 무엇이 오든 간에 그것이 건국의 아버지들이 말하던 옛 자유주의로의 회귀는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배는 이미 물이 차오르고 있으며, 역사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조너선 라우치는 이러한 주장에 반박한다. 그는 이 배를 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새롭게 하고, 재건하며,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그의 책 Cross Purposes: Christianity’s Broken Bargain with Democracy에서 그는 자유주의가 세계에 가져온 긍정적 성과들을 강조한다. 개인 권리에 대한 강조, 종교 전쟁과 박해의 종식, 경제적 번영과 과학적 탐구의 발전 등이 그것이다.

    그는 포스트-리버럴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자유주의가 스스로의 몰락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기독교가 문제라는 것이다.

    라우치는 기독교가 자유민주주의와 맺은 “약속”을 깨뜨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기독교인들이 그 약속에 다시 헌신한다면—자유주의는 통치 원리를 제공하고, 기독교는 도덕적·영적 토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미국 민주주의는 다시 번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와 민주주의가 합리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두 체제는 서로 목적이 어긋난 상태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21쪽)

    독자들이 “기독교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할 때, 라우치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기독교가 올바른 정렬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조건을 설정하고, 기독교가 이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우치의 주장뿐 아니라 자유주의 자체의 치명적 결함이다. 중립을 가장하지만, 자유주의는 사실상 자신의 도덕적 명령들을 몰래 끼워 넣는다. 그리고 미국 공화국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깨진 약속”이 아니라 바로 그 점이다.

    자유주의의 숨겨진 가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종종 자유주의가 중립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선에 대한 확정적 비전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시민들이 서로의 차이를 조정하고 함께 공공선을 찾을 수 있도록 절차적 규범의 체계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라우치의 표현에 따르면,

    “차이가 발생할 때 [자유주의 체제는] 공적 토론과 개방적이고 분권화된 규칙 기반 절차를 통해 그것을 해결한다.” (12쪽)

    이것이 우리가 미국 민주주의에서 사랑하는 부분이다. 수정헌법 제1조, 권리장전, 권력 분립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을 위해 자유의 축복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그 자유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할 자유, 말할 자유, 살아갈 자유가 포함된다. 단,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다.

    절차적 자유주의는 훌륭한 제도다.

    “매우 서로 다른 3억5천만 명이 사는 현대 국가에서 정치적·도덕적 불일치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자유주의—우리의 경우 제임스 매디슨의 자유주의—만이 그것을 관리할 수 있음이 입증된 체제다.” (48쪽)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정치적·도덕적 불일치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강요하는 것이다.

    라우치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주의가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법과 선거 같은 국가 절차에 대해서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핵심 원칙과 같은 가치들에 대해서는 ‘중립적’일 수 없다. 만약 그 원칙이 자유주의가 ‘은밀하게 세상을 다시 만드는’ 이미지라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48쪽)

    결국 자유주의는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실질적인 선의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에 따라 세상을 재구성하려 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이 직면하는 딜레마가 드러난다. 우리가 자유주의를 말할 때 그것은 서로 다른 집단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도록 하는 중립적 민주 절차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특정한 선의 비전을 강요하는 도덕적 세계관을 의미하는가?

    한 페이지에서는 라우치가 자유주의를 “모든 사람이 같은 규칙을 따르고 같은 권리를 누리는 체제”라고 칭찬한다(12쪽). 그러나 몇 페이지 뒤에서는 자유주의가 “계몽된 세속적 가치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말한다(15쪽).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은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자유주의가 중립적 체제라면 가치에 대해 불가지론적이어야 한다. 반대로 특정한 도덕적 가치를 주장한다면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이중 언어를 이해할 때, 왜 그것이 결국 신앙적 기독교와 충돌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기독교는 중립적이고 절차적인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양립 가능하다. 사실 그러한 정치 체제는 기독교 문명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가 담긴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양립하기 어렵다.

    기독교가 민주주의와 맺은 “약속”을 깨뜨린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애초에 그런 약속을 맺은 적이 없다. 오히려 후기 단계의 자유주의가 스스로에게 기독교인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는지 규정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에서 실제로 깨진 것은 바로 그 권리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

    지난 8년 동안 자유주의 가치에 대한 거부는 때로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다. 라우치에게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책 제2장은 “Sharp Christianity”에 대한 비판에 할애되어 있다. 이는 “MAGA 가치와 결합한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를 의미한다(73쪽).

    라우치는 트럼프를 문화 전쟁의 보복과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신앙적 원칙을 포기한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후보로 본다. 그러나 2024년 선거 이후 이러한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트럼프를 다시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단지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후기 자유주의 사회의 핵심 요소들에 실망한 다문화적이고 다세대적인 유권자 연합이었다.

    라우치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자유주의 사회는 서로 연결된 세 가지 사회 시스템에 의존한다. 정치적 선택을 위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 선택을 위한 시장 자본주의, 그리고 인식적 선택을 위한 과학이다.” (12쪽)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이 세 시스템 모두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가치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정치 지도자들은 시민들의 예배 모임을 금지하면서도 거리의 시위는 허용했다. 미국의 거대 기술 기업들은 “민주주의 보호”라는 명분 아래 정부 기관과 협력하여 “허위 정보”를 검열했다. 또한 과학의 권위는 봉쇄 정책을 강요하는 데 사용되었다.

    라우치는 말한다.

    “자유주의 사회 시스템의 특징은 동일한 규칙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12쪽)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동일한 규칙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진보적 정통성을 따르는 시민들은 우대받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배척된다.

    결국 자유주의도 또 다른 형태의 종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미국 시민들이 그 종교를 거부하고 있다.

    라우치가 자유주의의 교조적 성격을 보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Cross Purposes는 읽기 어렵다. 그의 기독교 비판 가운데 일부는 타당하고 통찰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종교를 더 잘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는 거의 자각이 없는 듯 보인다.

    늘 등장하는 익숙한 적들이 있다. “백인 복음주의 미국”,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문화 전쟁의 전사들, 트럼프 지지자들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 정치신학에 대한 진지한 논의나 왜 일부 미국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성실한 탐구는 부족하다.

    후기 자유주의에 대한 비전

    마지막 장에서 라우치는 미국 기독교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모르몬교(LDS 교회)를 사례로 든다.

    그는 모르몬교가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해 교리 차원에서는 유지하면서도 사회 정책 차원에서는 타협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추측한다.

    “왜 어떤 사람이 동성애 행위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다고 믿으면서도 LGBT 권리에 대해 타협할 수 있을까? 왜 LDS 교회가 유타 타협안과 Respect for Marriage Act를 지지했을까? 그것은 그러한 조치들이 교회가 자신의 제도 안에서 결혼과 성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할 자유를 보호하는 동시에, 더 넓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결혼 선택을 할 자유도 보호하기 때문이다.” (116–117쪽)

    결국 이것이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유일한 “거래”다. 종교적 가치는 종교 기관 내부에서는 허용되지만, 더 넓은 사회에서는 자유주의의 가치—즉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을 할 자유—가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미국인들이 이러한 거래를 점점 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약 기독교와 자유주의가 서로 목적이 충돌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비자유주의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주의가 하나의 종교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핵심 교리들이 이제 도전을 받고 있다.

    라우치는 기독교인들에게 종교를 더 잘 실천하는 방법을 강의하지만, 자신이 따르는 종교에는 거의 자각이 없는 듯하다.

    이 책은 문제를 거의 정확히 진단할 뻔했다. 거의 후기 근대 민주주의의 병을 이해할 뻔했다. 거의 미국 복음주의의 분열을 설명할 뻔했다. 거의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변호를 제시할 뻔했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왜 부활할 수 없는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Cross Purposes는 팟캐스트 인터뷰 몇 건과 뉴욕 타임스의 호의적인 서평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새로운 지지자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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