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트라우마: 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
Spirit and Trauma: A Theology of Remaining
셸리 램보 지음, 박시형 옮김
셸리 램보는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서, 트라우마와 폭력에 대한 종교적 응답에 초점을 맞추어 그리스도교 전통을 탐구하며, 최근에 Post-Traumatic Public Theology (Stephanie Arel과 공저, 2016)와 Resurrecting Wounds: Living in the Afterlife of Trauma (2017)를 발표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왜 우리들 주변에는 한평생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이 그처럼 많이 있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재해 발생과 자살율, 또한 더욱 증가하는 재해는 어쩔 것인가?
영화 <생일>에서처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가 영화 <생일>만큼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해 교회는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가?
왜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믿음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그리 많은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대에도 여전히 하느님을 “역사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지옥 정복”이 상징하는 “우주의 지배자 하느님”은 아직도 살아 계신가?
“세월호 이후”에도 여전히 “십자가의 죽음(희생)을 통한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왜 성금요일의 어둠에서 벗어나 서둘러 “부활의 승리”를 찬양하려 하는가?
성토요일을 간단히 덮는 일이 왜 역사 속의 억압, 폭력, 불의를 덮는 일과 연결되는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구원론은 왜, 또 어떻게 온갖 트라우마 경험들을 외면해왔는가?
탁월한 흑인 신학자 코넬 웨스트는 왜 부활의 언어가 "억업자의 언어"라고 비판하는가 ?
끔찍한 트라우마 경험들은 전통적인 신론과 구원론을 어떻게 재구성하도록 만드는가?
왜 트라우마는 신학담론의 한 문제가 아니라 구원 신학의 재구성을 위한 “열쇠”인가?
예수의 갑작스럽고 참혹한 죽음 앞에서 제자들은 어떤 트라우마를 겪어야만 했는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서 시력과 의식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 이유는?
자기 인생이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승리”란 무엇인가?
저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대신에 “성토요일의 성령”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저자가 몰트만처럼 성령을 "생명"과만 연결시키지 않고 죽음과도 연결시킨 이유는?
"성토요일의 성령론"이 강조하는 "남겨진 사랑"과 증언, 공동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책은 트라우마에 대한 최근 연구들에 근거해서 십자가와 부활, 구원을 재해석하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의 관점에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새롭게 제시한 책이다. 전통신학의 십자가 해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희생(죽음) 중심의 구원론을 만들었으며, 부활과 구원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지옥 정복”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죽음을 이긴 부활의 승리”로 해석하는데, 이런 해석은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며 미래의 희망과 성공을 약속하지만, 승리에 대한 보장이 없는 트라우마의 끈질긴 고통을 외면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위험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곧장 부활로 이어지는 “허울 좋은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이라고 보는 저자는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성토요일의 심연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발타자르의 설교들, 스페이어의 지옥에 대한 환상들,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와 애제자에 관한 본문들, 캐서린 켈러의 성령 해석 등에 근거해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제시한다. “성토요일의 성령”은 죽음과 삶 사이에 아주 미약한 모습으로 현존하며 예수의 죽음과 제자들의 활동을 목격하고 증언한다. 저자는 숨, 위로자,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고, 성령의 지속적인 목격과 증언을 사랑과 동일시한다. 죽음과 삶 사이의 증언이 말하는 진실은 사랑이 남았고, 우리가 그 사랑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끔찍한 고통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저자는 “끈질기게 버티는 힘으로 남아 계신 성령의 사랑”을 강조한다.
박시형 목사는 서강대학교 수학과,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Boston College에서 영성 전공으로 신학석사를 마쳤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는 공동체를 꿈꾸며 2018년부터 경기도 광주에 ‘야곱의 우물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인간의 고통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
램보는 트라우마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에 근거해서,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이 생겨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주장을 다시 검토한다. 램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성토요일(Holy Saturday)의 관점에서 재검토한다. 램보는 트라우마의 여파 속에서 살아가는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신학을 추구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남아있기”(remaining)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그녀는 전통적인 구원 개념에 도전하는 새로운 성령 신학을 제안한다. 이 책을 통해, 램보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깊음 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의 끈질긴 지속까지 아우르는 성령의 증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죽음과 삶 사이에 존재하는 끔찍한 영역을 탐구하면서, 램보는 트라우마 이론, 신학, 성서 연구의 통찰력들을 결합시켜 성령에 대한 풍부한 어휘들을 발전시킨다. 저자의 독창적인 작업은 삶의 견디기 어려운 상황들에 대해 신학이 빛을 비춰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증언한다. 나는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KWOK PUI-LAN, Episcopal Divinity School
“이 책은 구성 신학에서 새로운 목소리의 도래를 알린다. 램보는 다양한 자료들에 기초해서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의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과 씨름하면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인간의 고통이라는 트라우마 경험에 응답하는 새로운 길들을 제시한다.”
―EMILY A. HOLMES, Christian Brothers University
“트라우마 이론에 해박하고 또한 뛰어난 해석가의 재능을 갖춘 램보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 즉 끔찍하게 폭력적인 죽음과 기이한 생존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램보가 다시 들려주는 그 이야기는 주석적이고, 건설적이며, 목양적이다. 램보가 전하는 이야기는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MARK JORDAN, Harvard Divinity School
목차
옮긴이의 말 __ 7
서문 (캐서린 켈러) __ 13
감사의 말씀 __ 19
서론 __ 23
트라우마 27 / 신학 29 / 방법 37 / 개요 43 / 결론 46
1장. 트라우마를 증언함 __ 49
트라우마라는 렌즈 54 / 증언 62 / 트라우마를 이론화하기 70
트라우마의 증언과 신학 78 / 증언의 신학적 모델들 93
2장. 성(聖)토요일을 증언함 __ 107
성토요일의 발견 114 / 성토요일을 기록함 124
성토요일을 신학화하기 142 / 십자가 형태의 증언 153
중간의 성령을 향하여 160
3장. 요한복음의 증언 __ 177
막달라 마리아 180 / 애제자 197 / 고별 214
남아 있기 218 / 넘겨줌 225 / 중간의 영을 향하여 230
4장. 중간의 성령 __ 237
생명의 영 242 / 심연의 성령 244 / 성령은 숨이다 248
영은 시간 속에서 다르게 움직인다 265
성령은 사랑이다 274 / 사랑이 남았다 281 / 결론 288
5장. 사랑 안에 남아 있기 __ 295
구원하는 자기 299 / 2008년 1월, 뉴올리언스 305
러브스토리 313 / 중간으로부터의 구원 319
저류를 추적하기 329 / 삶을 느끼기 331
신학의 증언 335 / 사랑 안에 남아 있기 346
*** 1장에서 세 군데 "21세기"로 번역된 것은 "20세기"로 바로잡습니다.
옮긴이의 말
한 권의 책이, 그것도 학문적인 작업을 담은 책이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그런 책이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나의 딸 이레는 임신 25주 1일만에 810g의 몸무게로 태어났다. 이레가 NICU(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수없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다섯 달 동안, 우리 부부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에 있었다.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고, 삶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레가 세상에 온 지 3개월이나 되는 동안 우리는 딸을 한 번 안아볼 수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없었다. 하루에 20분, 우리에게 허락된 그 시간 동안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경계처럼 보이는 NICU의 유리창 밖에서 어린 딸을 ‘면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어린 딸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 그것은 죽음과 마주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갓 태어난 딸아이의 생명을 계속해서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이 뒤섞인 트라우마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처절하게 경험했다. “하느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공허한 울림에 불과했고, “고통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야기는 저주처럼 들렸다.
유학 시절 우연히 수업에서 발표하기 위해 읽었던 이 책은 내가 그저 “버텨냈다”고, 아니 여전히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트라우마와 고통 속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책을 읽으며 수없이 울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나의 고통의 의미를 이 책이 설명하고 있었다. “죽음의 고통을 목격하는 성령”이라는 신학적 통찰은 내가 그동안 씨름했던 고통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 책은 트라우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램보는 기존 신학이 트라우마 경험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통신학이 “신앙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혹은 “신앙으로 죽음은 극복될 수 있다”)는 지나친 ‘승리주의’(triumphalism)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램보는 트라우마가 죽음과 마주했던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며, 생존자는 트라우마 사건 이후에도 반복해서 그 트라우마를 다시 경험하기 때문에 승리주의로는 그들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생존자들은 트라우마 사건의 플래시백(flashbacks: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과 몸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포함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재경험한다. 트라우마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트라우마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그 중 일부는 평생 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통해 램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내러티브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램보는 성토요일(Holy Saturday)에 주목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예수의 갑작스럽고도 처참한 죽음 앞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고통 가운데 있어야만 했던 성토요일의 제자들, 성령은 그 제자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램보는 “신앙으로 죽음을 정복하는 승리와 기적”이 없었던 그 토요일에, 성령이 모든 고통을 목격하며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다고 역설한다.
램보는 성토요일의 성령을 “중간의 성령”(the middle Spirit)이라고 명명한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고, 삶이 죽음을 이길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곳, 성토요일의 심연(abyss)과 같은 그곳이 바로 성령이 있는 “중간”이다. 램보는 자신의 성령론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의 창조론을 언급한다. 켈러는 전통신학의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가 하느님을 질서를 부여하는 지배의 주체로 상정함으로써 힘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다양성을 묵살하는 내러티브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전통신학과는 달리 켈러는 “혼돈(chaos)으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면서,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한 “혼돈의 심연”에 있는 하느님의 영(ruach elohim)에 주목한다. 켈러는 창조 이야기 속에서 혼돈의 심연에 있는 성령은 지배하고 다름을 묵살하는 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들과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는 영이라고 주장한다. 램보는 켈러의 성령론을 언급하며 “중간의 성령” 역시,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성토요일의 심연 위를 운행하는 영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수난에 대한 전통신학의 내러티브가 죽음 뒤에 이어지는 부활에 성급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램보는 성토요일의 어둠 가운데 머물러 있는 성령에 집중한다. 그리고 성토요일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혼돈 속에서, 좌절과 절망을 목격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NICU 창문 앞에서, 나는 여리디 여린 작은 몸으로, 죽음 앞에서 삶을 향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레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는 그 바라봄(witness)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아내의 고통을, 내 아내는 나의 고통을, 그리고 우리 부부는 이레의 고통을, 이레는 우리의 고통을 목격했고, 그것이 바로 우리 가족의 사랑이었다. 하느님이 부재한 것과 같았던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 말없이 우리의 고통을 목격하신 성령의 함께 하심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램보는 ‘신앙의 승리로 고통은 사라진다’는 ‘승리주의’의 메시지는 트라우마의 후유증(aftermath, 예를 들면 PTSD)을 거듭해서 겪는 생존자들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트라우마 생존자들의 사라지지 않는 고통과 아픔은 ‘곧 승리를 주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마저도 무너뜨리게 된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성토요일, 성령이 제자들과 예수님이 겪었던 고통의 목격자(witness)가 되신 것처럼, 트라우마라는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목격자가 되신다는 셸리 램보의 신학적 통찰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랑”을 보여준다. 램보는 성토요일의 이야기가 비극도 승리도 아닌,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는가?”(이 책 마지막 페이지)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신학은 승리주의로 만연해 있다. 램보의 지적대로, 승리주의는 계속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의 아픔을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고통은 신앙의 힘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빨리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선포되며, 지속적인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은 부족한 신앙인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부서를 ‘소망부’나 ‘희망부’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항구적인 장애조차 ‘천국의 소망’을 통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승리주의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애를 겪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항구적인 장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희망이나 죽음 뒤에 있을 천국의 소망만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삶의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뿐 아니라, 승리주의는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의 어려움에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의 문제가 그저 “개인의 문제” 혹은 “그들의 행동의 결과”로 해석하게 한다. “고통은 신앙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승리주의는 사회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또 다시 절망하게 만드는 일이다. 승리주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상정하고 있지만, 모순되게도 고통의 문제를 한 개인의 부족한 신앙 탓으로 돌리며 남아 있는 희망마저도 앗아가 버린다.
트라우마나 항구적인 장애와 같이 사라지지 않는 고통은 우리들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 책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런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승리주의로 만연한 한국교회가 인간의 깊은 절망과 고통에 대해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은 트라우마가 억압되고 부정되는 것은 개인의 의식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한다(『트라우마』, 29). 어느 세월호 희생자 가족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제 좀 그만하라”는 말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노컷뉴스, 2016년 4월 16일).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세월호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를 억압하고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고통을 지워버리려고 하거나, 없었던 일처럼 살아가려고 해도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를 다루기 위해서는 트라우마 생존자와 목격자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트라우마』, 28). 우리는 특히 세월호 참사라는 트라우마 이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그저 고통을 묵묵히 목격했던 수많은 목격자들과 함께 했다. 비록 아직도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안 된 채 해결되지 않은 고통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많은 목격자들의 연대가 작지만 희망의 불씨를 이어오고 있다.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과 쌍용차 사태, 용산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억울한 죽음들이 너무나 많다. 또한 시장전체주의라는 “악마의 맷돌”(칼 폴라니) 속에서, OECD 최악의 산재사망률과 자살률이 보여주듯이, 더욱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으스러지고 있으며, 자연재해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고통을 진정으로 치유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트라우마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시대는 트라우마 생존자들과 함께 할 목격자들을 필요로 한다.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 속에서 처절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우리는 고통의 목격자요 증인으로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일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학살 때문에 “피에 물들지 않은 땅이 한 자락도 없는 한반도” (문규현)에서, 지금도 여전히 온갖 트라우마로 인해 생지옥을 견디는 이들과 그들 곁에서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두 손만 모으고 있는 이들이 성령과 함께 목격자요 증인이 되기를!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새롭게 전개한 이 책이 따스한 등불이 되어 생명을 찬미할 수 있기를!
책 속으로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한다. 한 사건은 모든 것이 철저히 끝장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생존’이란 용어는 트라우마 사건 이후 삶이 중지된 상태를 말한다. 트라우마 사건은 그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 된다. 삶은 완전히 다르게 정의되며, 불확실하고 상처받기 쉬운 트라우마 이후의 삶은 늘 죽음이 함께 있음을 뜻한다.(28-29)
나는 신학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고통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현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 말이다. 삶과 죽음을 양극단에 놓는(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보는—옮긴이) 해석으로는 이런 구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트라우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속에 남아 있는 죽음, 혹은 삶 속에 만연한 죽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32쪽)
트라우마 경험은 죽음과 삶의 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 이야기들에 도전한다. 죽음은 완결된 어떤 것이 아니고, 삶도 새로운 시작이나 출발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서로 반대되는 양극단에 놓은 채 구원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한, 트라우마 경험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일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 내러티브는 대개 생명(부활)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해석된다. 이런 관점이 어떤 약속이나 희망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생명이 죽음을 극복했다는 단순한 해석은 위험하다. 이런 해석은 새 것이 옛 것을 대신하고, 선이 악을 무찌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마무리되고 새 삶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관점은 곤경에 처한 현실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갈 공산이 크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앨런 루이스(Alan Lewis), 코넬 웨스트(Cornel West)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을 아우르는 종교학자들은 죽음(십자가)과 삶(부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처럼 성급하게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교 승리주의(triumphalism)와 대체주의(supercessionism)가 될 수 있다. 만약 구원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거나 어떻게든 죽음이 종결되는 행복한 승리의 끝맺음으로 그려진다면,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경험은 이야기되지 않은 채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33)
트라우마가 주는 통찰은 치유와 구원을 신학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해석학적 렌즈를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교 내러티브 속 죽음과 삶의 관계는 이 렌즈를 통해 보다 다양한 빛을 발하게 된다. 트라우마는 신학이 반드시 탐구해야 할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신학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한 열쇠다.(41)
2장에서는 죽음과 삶 사이에 위치한, 신학적으로 중간의 날이라 부를 수 있는 성(聖)토요일을 살펴보려 한다. 나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 스위스 출신 가톨릭 신학자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역자주))와 아드리엔느 폰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r, 1902-1967, 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의사이며 신비주의 신학자로서 60권 이상의 책을 썼다.—역자주)의 신학을 통해 이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이들의 신학은 성토요일의 독특한 구원 메시지를 증언하기 위한 중간 영역을 만들어 낸다. 이 렌즈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3장에서는 십자가와 부활 중간에서의 제자들의 활동과 이에 대한 요한복음의 해석을 살펴보려 한다. 이 렌즈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두 경우 모두, 죽음을 넘어서긴 했지만 살아 있다고 단순하게 말하기에는 찜찜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활동이 쉽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이런 해석은 삶 속에 지속되는 죽음의 흔적들을 목격하고 증언해야만 하는 복잡한 상황을 드러낸다.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앞서 언급한 텍스트들을 해석해 낼 때, 그 텍스트들은 살아남은 삶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생존의 텍스트가 된다. 성서와 신학 텍스트들에 대한 익숙한 해석에서 벗어날 때 텍스트가 증언하는 측면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특정한 해석들을 유지하기 위해 묵살되고 묻혀진 측면들을 추적할 수 있다. (43)
맥아담스가 묘사하는 주류 신학의 구원 내러티브는 죽음과 삶이 정반대에 있다고 해석하면서,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한 삶을 이야기해왔다. 이 내러티브는 구원하는 결말(redemptive ending)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 극복하라고, 다시 시작하라고, 새롭게 출발하라고, 과거는 지나갔고 새 것이 왔다고. 리 집사에게 쏟아지는 메시지들의 이면에도 이런 압박들이 깔려 있다.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령론은 구원하는 내러티브가 트라우마의 고통을 뭉개버리는 것을 비판한다. 이런 성령론은 십자가에 근거를 둔 구원하는 고통(redemptive suffering)이라는 논리에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구원이 부활 안에서가 아니라 중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301-02)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려운 이야기들을 보면서 해피엔딩을 기대하고, 심지어는 해피엔딩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불행한 일들이 구원받을 것이며, 구원받아야 한다고 기대하는 미국인들의 삶 속에는 일종의 학대가 있다고 믿는다. … 고통을 견뎌내야 하지만, 반드시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맥아담스는 미국적인 구원이 일종의 허울이나 몽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그는 이런 구원이 복잡한 인간의 실존을 바라보게 만들기보다는 외면하게 한다고 경고했다. 우리가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이런 사실을 고찰해 보면, 구원하는 결말(redemptive ending)을 추구하기 위해 트라우마의 고통―남아 있는 고통―이 생략되는 것을 보게 된다.(302)
시몬 베유는 무언의 울음/속울음(mute cry)이라는 이미지로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울음은 너무나 깊고 몸서리쳐지는 것이어서 고통을 경험한 사람 속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다.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도전—베유가 하느님의 사랑에 비유하는 것—은 이런 울음을 들으라는 요청이며, 모든 면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것을 들으라는 요청이다. 베유는 사실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이런 울음이 들려온다고 말한다. 모두가 이런 울음을 간직하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울음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다.(309-10)
그리스도교의 성서 안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의 이야기와 부활 후의 만남들 안에 있다. 구원하는 능력(redemptive power)은 예수의 죽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 안에 있다. 브록은 “구원은 화육(성육신)을 고백하는 공동체적인 실천들과, 삶 속의 성령, 그리고 부활과 낙원에 대한 계속되는 성령의 약속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지배적인 구원 이야기는 오로지 십자가에서 성취된 ‘업적’(work)에 비추어 부활을 해석한다. 부활은 승리의 시작이지만, 그 승리는 죽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죽음이 중심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들을 휘두르는 나쁜 소식(bad news)이라는 비판이다.(317-18)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구원 내러티브들(redemptive narrative)은 그저 심연의 표면을 스치듯 지나친다. 허울 좋게 반짝거리는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일 것이다. 이 구원은 약속만으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약속한다.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339)
천안함 생존자의 트라우마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853403.html?fbclid=IwAR09v9OVcLZ437WGCo6EBkVK_cVTfQFsGlEvU0mfW-TQc9s3HL63CiQw6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