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6장 25절-34절: 인간의 염려와 자연계
Adrian M. Leske
(Professor of Religion Studies at the Concordia University College of Alberta. 특히 마태복음과 이사야서에 대한 연구에 조예가 깊다. 1998년도에 나온 The International Bible Commentary: A Catholic and Ecumenical Commentar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가운데 “마태복음”을 집필하였다.-- 최종수 번역)
몇 해 전 한스 디에터 벳츠(Hans Dieter Betz)는 “산상수훈에 나타난 우주생성론과 윤리”라는 글에서 산상수훈 가운데 특히 마태 6장 25절-34절에 자연 질서가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성서 가운데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별 흥미를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 성서는 본질적으로 신인중심적(神人中心的)이다. 성서는 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고 그 관계가 어떻게 다른 서로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 결과 지구 공동체와의 어떤 동맹관계를 맺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회복된 관계가 창세기 1장 31절 말씀에 부합하여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선함에 대한 인식도 회복시켜준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서 종종 자연 질서에 대한 암시, 즉 구약성서의 유산에 대한 암시를 발견한다.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은 일반적으로 지혜문학의 말씀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벳츠(Betz)는 산상수훈이 하나님을 우주의 아버지로 보는 1세기 중반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기독교 그룹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들은 윤리적 행동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를 사랑하고 보존하시는 방식과 태도를 배우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을 예언서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지구 공동체와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의미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이러한 나의 주장은 줄곧 예언 전통을 강조하는 예수 자신에게서 유래한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에 대하여 더욱 신빙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 2 이사야와 다른 예언서가 나머지 산상수훈에 끼친 영향처럼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에 끼친 영향을 근거로 하여 생태정의의 상호연결 원칙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성취와 안녕을 위하여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예수가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마 5:16, 그리고 44번이나) 제자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여겨야 한다(마 5:9, 45)는 주장처럼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친족관계는 다른 인간들과의 친족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는 모든 지구 공동체와의 친족관계를 뜻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과의 관계는 예언서적 메시지의 핵심 부분이고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 밑바닥에 깔려있는 전제이다.
마태복음서의 자연 질서에 대한 암시적 언급들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을 마태복음서 전체의 문맥 안에 두기 위히여 마태 6장 25절-34절 말씀 가운데 자연 질서에 관한 언급, 특히 예수의 말씀 가운데 자연 질서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예언서의 전통을 따라가 보면 인간은 흔히 나무와 연관되어 있다. 예수는 산상수훈 말씀 가운데 제자들에게 그 열매로 알 수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멤버들은 본래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같다. 왜냐하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타락(Fall)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거부한 사람들의 땅 위에 내린 저주에 대한 일반적인 비유였다(마 7:16-20; 12:33; 비교 창 3:16; 호 10:8; 사 5;6; 7:23-25; 10:17; 32:13).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뒷날 예루살렘 제사장직의 무익함에 대한 비유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마 21:18-22). 세례요한도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보람 있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마 3:10; 비교 사 10:33-34; 말 4:1). 여기에 은연중 시사하는 함축적 의미는 인간도 하나님의 뜻 하신 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때 나머지 다른 지구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같은 심판 밑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지구 공동체 모두에게 공통된 정의가 있는 것이다.
악인은 흔히 사막의 떨기나무(가시덤불)(렘 17:6), 또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시 1:4)고 묘사되고 있고 이와 비교하여 의인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다”고 한다(렘 17:8; 비교 시 1:3). 나아가 마태복음서에 많은 이사야서 인용이나 언급들을 고려해 보면서 예수가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태는 이사야 60장 21절을 암시하고 있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이 신실한 자들에 대하여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런 다음 신실한 자들은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사 63:3)라고 묘사되고 있다. 한편 길을 잃고 흩어진 자들에게는 아직 돌아올 기회가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 여전히 모두에게 강복(降福)의 손길을 뻗는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마 5:45; 비교 사 45:8; 55:10,11)시기 때문이다.
나무 비유 외에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의 비유도 자연이라는 맥락 가운데 언급된다. 즉 씨 뿌리는 자와 씨앗, 이것은 이사야 55장 10-11절 말씀을 암시하고 있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 비유, 물고기 잡기 비유 등이다.
또한 신실한 사람들은 동물계의 일원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양에 비유하는 일반 예언서적 비유(렘 23:1-4; 겔 34; 사 40:10-11; 슥 10:2-3)에 이어서 예수는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다’(마 9:36)고 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마 15:24).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 하시며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여야만 하였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동물계의 다른 동물들도 언급하셨다. 예수는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 8: 20) 하시면서 제자직은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신뢰를 요구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우주를 주장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가르치셨다.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저 흔한 참새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마 10:29; 비교 사 34:15-16). 이러한 말씀들에는 생태 정의의 6원칙 가운데 상호연결의 원칙이 들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창조물들을 돌보시는 지에 대하여 지구 공동체의 다른 멤버들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라던 바 천지일체(unity between heaven and Earth)를 암시하는 말씀들도 있다. 마태 11장 25절에 예수는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기독교 성서에서 상당히 독특한 명칭이다. 이 명칭은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확인하는 것으로 이 명칭은 사 40:12-31; 42:5; 43:10-13을 시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부르시면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되어 일제히 일어서는 것이다(창 48:13).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신실한 자들이란 바로 이러한 하늘과 땅의 일체(하나됨)를 달성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고(마 5:5) 땅 위에서 죄를 용서할 권능을 갖게 되어(마 9:6-8)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거나 풀릴 것이다(마 16:19; 18:18-20).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도록 세상에 내어 보내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는 확신을 갖도록 하셨다.
예수의 많은 비유들이 하나님과 조화롭게 사는 사람들은 지구 공동체의 모든 멤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조화롭게 살도록 이끄는 신실한 종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포도원 농부 비유(마 21:33-46, 이 비유는 사 5:1-7에서 끌어 온 것), 혼인 잔치 비유(마 22:1-14),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비유(마 24:45-51), 열 처녀 비유(마 25:1-13), 달란트 비유(25:14-30), 그리고 대 심판 비유(25: 31-46)가 그러한 비유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천국의 멤버들은 세상(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마 5:13-16; 비교 사 42:6-7; 49: 6-8). 물론 여기서 추구하는 것은인간 요소의 변화(transformation)이다. 이제 앞으로 보겠지만 이러한 인간 요소의 변화를 통하여 모든 지구 공동체의 모든 요소들이 하늘과 하나님의 뜻과 더 큰 조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늘은 물론 땅도 비하하여 경시하거나 오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다(마 5:34-35; 23:22; 이것은 사 66:1에서 빌려 온 것이다). 여기서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구가 지배하에 있다거나 열등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하늘과 땅은 둘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권능과 다스림 아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마태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는 말보다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단지 경건한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 ‘하늘’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나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마태 6:25-34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
주석가들 대부분은 마태 6:25-34의 말씀을 헬라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유대교 지혜문학 범주 안에 넣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요점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욥 12:7-10(“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의 말씀이나 잠 6:6-11(“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말씀도 흔히 비슷한 것으로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욥기나 잠언에서 예로 들었던 말씀의 내용은 마태 6:25-34에 나오는 말씀의 내용과 전혀 반대되는 것이다. 실제로 본문의 말씀을 어딘가 다소 피상적이고 경제학적으로 나이브하며 나태함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개념과 함께 마 6:33 말씀이 지혜문학 범주에 맞지 않고 또 본문의 흐름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Ulrich Luz는 여기의 지혜문학 자료는 본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떠돌이 급진주의자가가 되었으나 더 이상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제자들을 겨냥하였던 것인데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구체적인 진술을 위해 여기 삽입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자연의 주가 모든 창조를 지배한다는 우주 신앙(cosmic piety)을 반영하고 있는 이 말씀을 지나치는 한편 학자들 대부분은 소(小)에서 대(大)로 나아간다고 주장하면서 전형적인 지혜문학 형식을 찾아내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 벳츠(Betz)는 이 인용구에서 먹을거리(음식)로부터 입을 것(옷)으로 진행하는 것은 자연 안에 있는 존재들의 위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자연 질서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가장 높은 존재는 인간이고 다음으로 동물(동물 가운데 가장 높은 존재는 공중 나는 새들)이며 그 다음으로 식물(식물 가운데 가장 높은 존재는 꽃들)이라는 것이다. 벳츠(Betz)는 견유철학(犬儒哲學 Cynic philosophy)을 언급하면서 고대 세계에서는 동물들이 인간의 행동을 위한 본보기였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동물들을 자연의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문명의 결과로 자연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므로 벳츠(Betz)는 동물의 행동이 자연에 부합하고 따라서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 이성에 부합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합리적인 인간 행동을 확립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식물계에 관련시켜 보면 잘 들어맞지 않는다. 식물들에 관련하여 벳츠(Betz)는 동물들은 털이나 깃으로 옷 입은 반면 식물들은 꽃으로 옷 입었고 인간은 이 세상에 벌거벗고 나온다는 사실에 초점 맞추기를 선호한다. 창 3:21에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벳츠(Betz)는 하나님을 문화의 창안자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벳츠(Betz)는 하나님이 문화를 통하여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필요 충족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중립(neutral)”으로 남아 있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모든 주장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중심적 메시지로 이끌어 주는 염려에 관한 말씀의 진정한 요점을 놓치고 있다. 중요한 요점은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마 6:28)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마 6:28)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심 요점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들이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모든 것이 뒤따라 올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지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벳츠(Betz)는 하나님의 나라란 장차 신실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 보고 있고 또 ‘그의 의’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제 조건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으로 이 직유들의 목적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벳츠(Betz)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 의(義 dikasiosyne)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요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뜻이 서로 상충(갈등)하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의’를 마태의 삽입으로 보려고 한다. 어쨌든 누가복음의 병행구(눅 12:31)에서는 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정된 상충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염려와 하나님의 나라 및 자연계와의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해 줄 더 나은 해석은 없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태 6:25-34에 대한 예언서적 접근
마태복음서는 유태적 기독교인이 주로 유태적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과 그의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행동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확신시키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마태에는 많은 유태주의적 요소가 들어 있다. 즉 히브리 관용구의 단어와 문구, 그리고 저자가 마태복음서를 기록할 때 유태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명하지 않은 유태적 풍속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독자들이 히브리 성서(구약)에 나와 있는 신앙에 관한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이 히브리 성서의 본문, 특히 예언서의 본문들을 익숙히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마태는 기독교 성서(신약)에 포함된 그 어느 다른 저자들보다도 더 자주 이러한 히브리 성서로부터 인용하거나 언급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마태의 인용들은 단지 마태복음서 이야기에 덧씌워진 것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자 마태복음서 이야기의 의미와 중요성을 추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서의 ‘성취되었다’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본적 개념이다. 전체 이스라엘의 역사, 소망, 목적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메시지를 통하여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보는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의 메시지와 사명에 끼친 가장 의미 깊은 영향은 예언문학에서 왔고 특히 제2 이사야와 여러 다양한 정도의 같은 예언적 전통을 따르는 제 3 이사야, 말라기, 스가랴 9-14장, 요나, 다니엘, 솔로몬의 지혜서, 그리고 비유의 책 에녹 1서 37-71 등 예언서들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한 영향은 이미 마 4:23(마 9:35에 반복된)에 예수가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예수의 활동을 요약해 보여주는 데서 밝히 들어나고 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다’는 구절은 이사야서의 유배생활로부터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 자신이 왕으로 통치하실 때 왕국이 회복된다는 기쁜 소식 선포(사 40:9; 52:7)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제2 이사야는 당대의 많은 예언자들처럼(예를 들자면 겔 45:8-9) 왕국의 몰락에 유배생활의 제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회복이란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의 통치 밑의 백성들은 왕실 제사장이라는 출 19:5-6의 이상적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비교 사 41:21, 43:15; 44:6). 그리고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구절은 사 53: 3-4, 10-11에 기술된 고난 받는 종 및 회복의 종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고, 또 사 35:5-7; 41:17-20, 42:7, 18-22; 61:1-3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그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는다는 언급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회복과 치유를 가져온다는 소식이다.바로 이 소식이 이른바 팔(8)복이라고 부르는 산상수훈(마5:1-12) 서두에 선포된 기쁨의 소식이다. 이 팔복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새로운 법도 아니고 새로운 자격요건도 아니다. 그것은 약속된 축복의 갱신 선포이다. 이와 같이 마태는 예수가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종으로서 그 천국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참 의미를 가르치심으로써 제2 이사야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밝히 들어내고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불러 모아 살아있는 백성의 언약(비교, 렘 31:31-34)과 이방의 빛(사 42:6; 49:6-8; 비교, 마 28:19-20)이 되어 참된 이스라엘의 역활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제2 이사야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것은 치유와 회복의 선포요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사 61:3)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라는 부르심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염려에 대한 말씀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예수는 일찍이 ‘너희는 세상(Earth)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마 5:13-16)이라고 부르신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회복된 약속의 백성들로 살아갈 것을 상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 6:25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 세 가지 사항은 신 28:47-48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 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저주한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언약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들 세 가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예루살렘의 이사야가 굶주림과 목마름을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들에게 내린 저주라 말할 수 있었고(사 5:13; 29:8),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굶주림과 칼과 전염병(예를 들면 렘 14:12-18; 겔 5:12-17)이라는 말로 임박한 심판에 대하여 계속 경고할 수 있었던 반면,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이끄시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굶주림이나 목마름을 겪지 않을 유배 생활로부터 구원을 말하고 있다(사 41:17; 49:10; 비교 시 1:3; 렘 17:8). 하나님의 통치와 다윗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백성들에게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은 것은 ‘돈 없이 값도 없이’ 와서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사 55:1-5). 뒷날 유배 생활에서 돌아 온 뒤 신실한 자들을 적대하던 자들에게 내린 경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사 65:13).
그렇기 때문에 마태 6장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하고 강력히 권고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모든 것을 더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제2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의는 공통된 주제이고 언제나 그의 백성들을 회복해 주시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의 통치를 세우신다는 언약은 신실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사야(사 35:40-55)는 의(義) 또는 공의라는 용어를 남성형(sedeq)과 여성형(sedeqah) 둘 다 사용하고 있는데 오직 여성형만 인간의 의에 사용하고 있다. Moshe Weinfeld가 제시하는 남성형은 추상적 원리를 말하고 여성형은 구체적 행위를 말한다는 것은 제2 이사야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제 2 이사야 도처에서 남성형과 여성형 의(義)의 사용은 남성형은 주도적 솔선수범(initiative)을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고 여성형은 응답(반응)을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besedeq)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불러 손을 잡아 주시고 당신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사 42:6) 것처럼 하나님은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고레스를 일으켜 세우셨을 때 주도적으로 솔선수범하셔서 공의(besedeq)를 행하신다(사 45:13). 하나님의 주도적 솔선수범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 생활에 머물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웨 하나님을 예배하되 ‘진실도 없고 공의(besedaqah)도 없었기’(사 48:1)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공의롭게 응답하기 위하여 야웨 하나님의 공의를 체험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이사야는 이렇게 외친다: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sedeq 남성)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sedaqah 여성)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기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8).
야웨 하나님의 공의(sedeq 사 5:11)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공의가 빠르게 다가올 것을 확신하고(사 51:5)난 다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의(sedaqah)가 영원할 것을 체험할 것이다(사 51:6-8).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sedeq)를 체험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간직한 사람들은(사 51:7) 그들에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사 50:8)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수행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이러한 공의에 대한 이해가 바로 마 6:33 말씀에 대한 해석의 큰 열쇠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 6:33 말씀이 말하는 “그의 의”는 그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는 가운데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는 바로 “그의 의를 구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신실하게 응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백성들에게 넘겨주심을 축하하는 행사에 관해 묘사하는 이사야 55:1-5 말씀에 이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변증(vindication 옹호 지지)은 뒤에 큰 연회(잔치)로 묘사된다(사 25:6-8). 이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시(顯示)인 메시아 잔치라는 개념으로 이끌어 준다. 또 이 잔치는 오 천명 또는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마 14:13-21; 15:29-38)와 혼인 잔치의 비유(ak 22:1-14; 25:1-13)에 반영되고 있다. 무리들을 먹이신 이야기에서 ‘다 배불리 먹었다’는 말은 출애굽 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던 것(출 16:4-12)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언약의 축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예, 신 6:11;8:10; 11:15; 비교, 마 5:6!). 이와 같이 마태복음은 물론 예언서들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축하하는 것의 한 부분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먹고 마시는 것들에 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에 의존하는 공중에 나는 새들을 돌보고 먹이시는 것(마 6:26)과 똑같이 자기에게 돌아와 의지하는 사람들을 돌보실 것이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벌거벗음은 수치심과 굴욕감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태초의 부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 벗은 줄을 알고 자기들 몸을 가리려 하였고 그러한 행동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하였다. 그 결과 벌거벗음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에게 내린 저주로 여기게 되었다(암 2:16; 겔 16:7-39; 23:29).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애굽에 두는 것이 재앙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이사야는 애굽과 구스에 내릴 심판의 예표로 삼 년 동안 벗은 몸으로 다녔다(사 20:1-6). 그래서 제 2 이사야는 사 52:1-2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시온/예루살렘의 임박한 회복을 선포하였을 때 시온이여 깨어 포로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 지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뒤 신실한 자는 주 안에서 이렇게 기뻐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슴이라”(사 61: 10). 이 이미지는 예수의 혼인 잔치의 비유에 언급되어 있고 혼인 예복을 입고 오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게 된다(마 22:11-14). 그래서 하늘나라 백성은 입을 옷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직 한 계절 짧은 기간 동안만 꽃을 피우는 들풀조차도 아름답게 옷 입혀 주시기 때문이다(마 6:30).
마태 6:33은 진정 장차 이루어질 회복에 대한 예언서적 열망의 성취 선포이고 신명기 28:48의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가운데 적군을 섬기던 것에 대한 완전한 역전(逆轉)이다. 이제 더 이상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는 일이 없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모든 관계와 화목의 축복을 통합하고 있다. 이곳에 사용한 “더하시리라(prostithemi)라는 동사는 종종 (어떤 모임에) ‘들어가다, 가입하다’(to join) 또는 ‘더하다, 추가하다’(to incorporat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행 2:41 47; 5:14; 11:24; 13:36). “더하시리라”는 신 28:48의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것의 반전이다. 회복의 때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이곳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언약의 축복 아래 살고 있다. 저주 아래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이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마 7:7-11; 비교, 사 55:6; 65:1).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자연 질서와 부합하는가? 마 6:26의 공중에 나는 새의 즐거운 모습은 어딘가 목가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회복에 대한 마태 저자의 표현이다. 새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그 새들을 알고 돌보신다(시 50:11; 마 10:29). 그리고 그들은 깃들 곳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시 104:12). 그러나 예언자들은 인간이 가진 탐욕과 자기중심성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맺은 언약도 파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호세아는 탄식한다. 사람들은 언약 규정에 따라 살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 4:3)는 것이다. 다른 예언자들은 인간의 불성실함 때문에 땅을 황폐하게 내 버려둔 채 공중에 나는 새와 짐승들이 땅 위에서 도망갔거나 진멸 당하였다고 말한다(렘 4:25; 9:10; 습 1:3).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또한 타락 이전처럼 되어 지구 공동체의 동반자로서 인간과 동물계와의 합당한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호 2:18; 비교, 사 11:1-10).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하여 인간에게 내린 저주의 일환으로 황폐하고 오염된 지구를 바꾸실 수도 있고 회복하실 수도 있다. 제2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설명하기 위해 계속 사막이 번성하는 정원으로 바뀐다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사 32:12; 27:2-5; 35:1-10). 하지만 그것은 은유(비유) 이상의 것이다. William Brown은 제 2 이사야를 주석하면서 그것을 아래와 같이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기원(new genesis)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자연도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의 심판이 땅의 황무와 떼려야 뗄 수 없이 묶여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은 땅의 결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것이 국가도 자연도 갈등하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시는 새 것(new thing)이다.
제 2 이사야는 생태정의의 6원칙 가운데 상호연결의 원칙을 아주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하실 때 모든 피조물들이 이렇게 기뻐하고 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원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55:12-13).
새들은 동물계의 최고 단계이고 꽃들은 식물들 가운데 최고 단계라고 본 벳츠(Betz)의 견해에 반(反)하여 공중의 새들은 두 마리에 동전 한 닢에 팔리고 들꽃들은 그들의 짧은 생애 때문에(마 6:26, 30) 택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선택은 단지 가치의 대조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창조물의 가장 하찮은 면을 가진 것조차도 저토록 돌보아 주신다면 당신이 구원하신 백성들을 사랑하고 염려하실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들의 꽃들을 이용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옛 문서에서 인간의 생명이 덧없고 짧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간은 들의 꽃들과 같다고 하였고(욥 14:1-5; 시 90:5), 또 종종 영원히 지속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하기 위하여 인간의 생명이 덧없음을 강조하였다(시102:12, 26-29; 103:15-18; 사 40:6-8; 51:12). 이사야 40:6-8에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라고 하였다. 이 이사야 40:6-8절 말씀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기쁜 소식 선포로 이어지는데(사 40:9-11) 마태복음서의 염려하지 말라는 부분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풀도 아름답게 옷을 입히는 일에 많은 관심을 두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여지가 없다. “믿음이 작은 자들”(oligopistoi), 즉 비록 긍정적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제자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의 전체 영향력을 감싸 안기 위하여 그들의 시야를 열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들 고유의 가치를 나직이 속삭여주는 지구 공동체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제자들은 진정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사 61:3) 나무로 자랄 것이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사 55:12).
생태정의를 위한 마태 6장 25-34절의 함축적 의미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마 6:25-34의 중심 주제이자 복음서 전체에 걸친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는 물론 미래에도 있다는 소식이다. 그 나라는 사람들이 찾을 때 은혜로운 선물로 임할 것이다. 그 나라는 구하는 자에게 이미 거기 있다. 그 나라는 팔복 선언 가운데 산상수훈 첫 머리에 이미 선포되어 있다(마 5:3-12). 그들의 것인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창조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사 65:17; 66:22; 마 6:25-34과 함께 전체 산상수훈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 새로운 창조의 일부가 되라고 하는 부르심이다. 마태는 산상수훈 바로 뒤에 나오는 8장 9장에서 의도적으로 치유 이적 이야기들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약속된 회복, 새 창조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마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맨 처음에 배치하여 이 일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 종은 때때로 나병환자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산헤드린 98b). 심지어 더욱 의미 깊은 것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이야기(마 8:23-27)를 가지고 치유 과정 가운데 자연을 끌어들였다. 회오리바람과 폭풍은 사악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었고(비교, 사 29:5-6; 40:24; 41:16; 렘 23:19; 25:32), 자연의 비바람(악천후)을 잠잠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축복의 징표였다(비교, 시 107:25, 29; 욘 1:4, 12). 이 모든 사실들은 마 4:23과 9:35에 나오는 예수의 행적(가르치심, 천국 복음 전파, 병자들을 고치심)에 관한 포괄적 삽입구를 통하여 함께 산상수훈과 연결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전체 지구 공동체는 함께 연결되어 있다. 제2 이사야처럼 예수는 자연계와 인간 세계를 함께 엮어 짜고 있다. 모든 것은 지구의 부분 부분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부분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과오는 땅의 황폐화에 이르게 하고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회복은 지구의 갱신을 뜻한다. 회복된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여야 한다. 공중의 새든 들의 꽃이든 지구 공동체 멤버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들 또한 돌보신다는 것을 강하게 지적해 보여준다. 이와 같이 인간 존재와 지구 공동체의 나머지 존재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결국에는 인간 존재들이란 지구의 한 부분으로 지구를 떠나서 생존할 수 없다. 지구의 치유는 인간 치유와 함께 온다. 그 일이 일어나면 신적 조화 가운데 한 쪽은 다른 쪽을 섬기게 된다.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다. 심지어 공중의 새나 들의 풀처럼 가장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조차도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 주변의 자연에서 배우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하신다. 이런 요청은 제자들에게 불가피하게 지구에게 자행한 손상에 대하여 더 큰 민감성을 가지고 인식할 것과 지구 공동체 치유에 관여할 것을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마 6:25-34이 주로 신인관계를 다루는 한 편으로 그것은 지구 공동체의 다른 멤버들과의 친족관계 또한 암시하고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심판과 축복을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은 모든 것의 하나님이시고 모든(all) 피조물들을 돌보시는 분이며 모든(all) 것을 다 매우 좋다고 하는 분이시다. 이 말은 지구 공동체의 모든 측면,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사물 事物이든[옮긴이 추가]) 하나님의 창조 설계 가운데 그 자체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 자체의 천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마태복음의 말씀을 예언서적 배경에서 고려해 볼 때 하나님 나라의 멤버들은 모든 창조의 갱신 과정을 공유하도록 부르심 받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도록 부르심 받고 있다는 좀 더 깊은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마 7:21). 생태정의는 창조주의 뜻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이다.
마태 6:25-34절 가운데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의 기본적 주제는 바로 이 상호연결의 원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