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4,750 추천 수 0 댓글 1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이전 다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목록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이전 다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목록
Extra Form
저자 로빈 마이어스
번역자 김준우
출판일 2013-07-06
가격 14,000원
ISBN ISBN 978-89-97339-10-5 94230
  • 한기연 2013.07.15 01:18 글쓴이

    독자 여러분께 정말로 죄송한 말씀 올립니다.

     

     

     

    긴 장마와 무더위 속에 평안하신지요.

    이번에 간행한 로빈 마이어스 목사의 <언더그라운드 교회>(E. 2012)는 자기 파멸의 길로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희망으로 붙들고 계신 교회 목회에 목숨을 건 한 목회자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대해 피를 토하듯이 외치는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서둘러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오자들과 오역을 미리 수정하지 못한 채 서둘러 책을 발간하여 독자들에게 매우 송구한 말씀 올립니다.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한 차례 교정 과정을 거쳤으나 매우 부실하였음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오자가 많이 나오게 되고 황당한 오역까지 그대로 나온 것에 대하여 거듭 용서를 구하며 다음부터는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언더그라운드 교회>(김준우 역, 2013) 정오표

     

    18쪽 위에서 넷째 줄 – 강열함 -> 강렬함

    44쪽 아래서 열한째 줄 – 들으면 -> 들으면서

    54쪽 아래서 셋째 줄 – 열심히 -> 열심이

    57쪽 아래서 넷째 줄 – 것입니다 -> 것이다.

    74쪽 위에서 넷째 줄 – 이것들로 -> 이것들도

    81쪽 아래서 셋째 줄 - 예수님은 -> 예수님이

    86쪽 위에서 열넷째 줄 – 카이사 -> 카이사르

    89쪽 위에서 열째 줄 - 그 물에 -> 그 나물에

    96쪽 위에서 첫째 줄 – 구성원들을 -> 구성원들은

    105쪽 아래서 열째 줄 - 판이하게 다른 -> 판이한

    106쪽 위에서 둘째 줄 – 그들을 주장했다 -> 그들은 주장했다.

    122쪽 위에서 열째 줄 – 하느님 -> 하나님

    150쪽 아래서 여섯째 줄 – 우스깡스러운 -> 우스꽝스러운

    188쪽 위에서 열째 줄 – 간다 -> 같다

    194쪽 위에서 넷째 줄 – 띠기가 -> 띄기가

    198쪽 위에서 여섯째 줄 – 띠게 -> 띄게

    203쪽 위/아래서 열셋째 줄 – 서로와 -> 서로 

    206쪽 위에서 열한째 줄 –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교회에 피해를 주기 위해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그들은 ‘치명적인’ 불신의 형태다.

    ->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런 사례들이 교회에 피해를 주었다고 말하기 까지 하는데, 그런 사례들은 ‘치명적인’ 불신의 형태다.

    207쪽 위에서 여덟째 줄 – 우리는 -> 우리가

    217쪽 위에서 다섯째 줄 – 성장과 개신의 -> 성장과 갱신의

    224쪽 아래서 첫째 줄 – 당신을 -> 당신은

    226쪽 위에서 일곱째 줄 – 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 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229쪽 위에서 다섯째 줄 – 어떻게 할 것인이다. ->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229쪽 위에서 여덟째 줄 - 그리스도인이 것이 될 -> 그리스도인이 될

    246쪽 아래서 여섯째 줄 - 되어 않을 -> 되어 있지 않을

    253쪽 아래서 첫 줄 – 띠지 -> 띄지

    254쪽 위에서 여섯째 줄 – 신앙 수양의 -> 신앙 수련의

    255쪽 위에서 열한째 줄 – 단어에게 -> 단어에서

    302쪽 위에서 열한째 줄 – 플리모스 -> 플리머스

    316쪽 위에서 열셋째 줄 – 최소임금 -> 최저임금

    318쪽 위에서 열째 줄 – 솔직하지만 위엄성을 갖춘 -> 솔직하지만 위엄을 갖춘

    319쪽 위에서 여덟째 줄 – 또 다시 우리가 -> 또 다시 우리의

    321쪽 위에서 열째 줄 – 것도 아니면, 궁극적인 -> 것도 아니며, 궁극적인

    326쪽 위에서 여덟째 줄 – 페이트 -> 페인트

    340쪽 아래서 첫째 줄 – 기본적인 택임 -> 기본적인 책임

    360쪽 아래서 다섯째 줄 – 안수받은 목사들 -> 안수받은 목사를

     

    긴 장마와 무더위 속에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2013년 7월 15일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김준우 올림

  • 한기연 2013.10.03 07:31 글쓴이

    예수학당 2013년 가을학기                                                                                           이름:

     

    <언더그라운드 교회> 시작하면서 생각할 문제(5분 안에 답을 쓰세요. 정답은 없습니다)

     

    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는가, 아니면 점점 더 멀어지는가?

     

    2. 예수님이 굳게 믿었던 것은 무엇인가?

     

    1)

    2)

    3)

     

    3. 교회란 무엇인가?

    1)

    2)

    3)

     

    4.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무엇인가?

    1)

    2)

    3)

     

    5.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매일 하나님과 자신에게 서약/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1)

    2)

    3)

  • 한기연 2013.10.03 08:32 글쓴이

    <언더그라운드 교회>를 번역한 동기, 번역하면서 느낀 점(2013/10/1 예수학당)

     

    1.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은 열정의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 않고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으며, 목회에 목숨을 걸고 있다.

     

    2.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자신의 신학적 기초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정직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회중 600명 이상의 교회로 성장시킨 모델이다.

     

    3. 현재 지구의 절박한 위기와 인류문명이 풍전등화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 원인이 아메리카 제국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저자가 미처 지적하지 못한 아메리카 제국의 붕괴, 예컨대 9/11 사태가 미국의 통킹만 사건처럼 "적국의 깃발을 달고 수행한 작전"(false flag operation)이라는 데이비드 그리핀의 원인분석은 역자주로 덧붙였다(146쪽).

     

    4. 이런 전대미문의 위기 시대에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교회와 기독교인들뿐이다. 전 세계에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제국과 죽임의 체제를 위해 복무하기 때문이다. IMF에만 경제학 박사가 800명이 넘는다. 월스트리트, 군산복합체, 월드 뱅크 등 국제금융자본은 세계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에 앞장서고 있는 현실이다.

     

    5. 그러나 현재 교회는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은 외면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의 글은 매우 날카로운 죽비와 같아서, 이 책을 읽고도 교회와 목회자들이 깨어나지 못하면 교회는 죽어 마땅할 것이다.

     

    6. 성서 안에 많은 장르가 있지만,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 저자들이 피눈물을 삼키면서 기록한  부분들이다. 바빌로니아가 침공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터에서만 8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광주사태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군인들의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을 것이지만, 피눈물을 삼키면서 창세기 1장을 기록했을 것이다. 대 로마 항쟁 때도 포위당해 굶주린 예루살렘 주민들이 매일 밤 수백 명씩 성을 넘어 탈출하다 잡혀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더이상 십자가에 사용할 나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피눈물을 삼키면서 마가복음서 저자는 눈을 똑바로 뜨고 복음서를 기록했으며, 랍비들은 미슈나를 기록했다. 우리 시대에도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 특히 천안함 희생자들만이 아니라 쌍용차 해고자들, 강정마을과 밀양에서 피눈물 삼키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려야 예수님의 말씀도,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의 교회론도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 한기연 2013.10.05 11:32 글쓴이

    예수학당 2013년 가을학기 이름:

     

    <언더그라운드 교회> 끝내면서 생각할 문제(5분 안에 답을 쓰세요. 정답은 없습니다)

     

    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는가, 아니면 점점 더 멀어지는가?

     

    2. 예수님이 굳게 믿었던 것은 무엇인가?

     

    1)

    2)

    3)

     

    3. 교회란 무엇인가?

    1)

    2)

    3)

     

    4.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무엇인가?

    1)

    2)

    3)

     

    5. 하나님 나라에 기쁘게 참여하기 위해 내가 하나님과 자신에게 서약/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1)

    2)

    6. 어떤 역경 속에서도 나를 지탱시키며 내 삶을 경축하게 하는 내 삶의 머릿돌은 무엇인가?

  • 한기연 2013.11.28 10:50 글쓴이

    초판 발행한 지 다섯 달만에 1000권이 다 나가서 2쇄 찍습니다. 오자 모두 교정한 2쇄가 이 책을 기다리는 모든 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입니다.

  • 한기연 2013.11.30 12:06 글쓴이

    서평 - 어느 복음주의자의 언더그라운드 읽기 / 이원석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194924

  • 한기연 2013.12.01 06:56 글쓴이

    서평

    Robin R. Meyers. 『언더그라운드 교회: 예수의 철저한 사랑의 길을 따르는 방법』〔The Underground Church: Reclaiming the Subversive Way of Jesus〕. 김준우 역.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0. 도입: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

    “체제전복적인 반제국주의 메시지와 선교를 통해서, 그 급진적인 뿌리로 되돌아 갈 수 없다면. 교회는 죽어 마땅하다. 교회는 고통을 무디게 만드는 것, 끼리끼리 모이는 것, 혹은 구명보트의 숫자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 이외에는 세상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수백만 개의 교회들이 이미 죽은 것은 그 자체의 지적인, 영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부정직함의 희생자가 된 때문이다.”(28)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라는 급진적인 제목과, 예수의 입이 테잎으로 봉해진 표지로 교계에 커다란 한 방을 먹였던 로빈 마이어스, 그가 또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텅 빈 설교는 텅 빈 좌석을 향한다.”(25), “오늘날의 로마는 지금 불타고 있는데, 우리는 한가롭게 우리의 신학적인 바이올린들이나 연주하고 있는 꼴이다.”(88)라며 그야말로 절대절멸의 위기를 직면한 교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언더그라운 교회』는 성서 속에서 ‘은유’로 사용되어진 용어, ‘누룩’이란 낱말에 깊이 관심을 가진다. 그야말로 제국주의, 다국적기업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희망이 ‘누룩’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희망을 교회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당위성과 의무를 제시한다. 원서의 부제는 “예수의 전복적인 길을 회복하기” 즈음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역자는 “예수의 철저한 사랑의 길을 따르는 방법”이라고 의역했다. 아마 역자는 ‘누룩’의 책무를 정성껏 다하는 방법이 예수의 철저한 사랑의 길을 따르는 방법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저자의 문체와 글솜씨가 아주 수려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과 부담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만큼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사랑의 길을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터, 교회의 각 지체로서 우리는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읽어야겠다. 언더그라운드 교회를 소망하며 말이다.

     

     

    1. 시인들의 모임, 교회: 한편의 ‘시’가 된 예수.

    “시인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스테인드글라스 속에 얼어붙은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경건이라는 끈적끈적한 시럽 속에 빠져 있다는 식의 감상적인 모래 속으로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갈 것이다.”(32)

     

    성서는 고백적인 글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이 담겨져 있다. 그러니 21세기의 과학적이고 역사 실증주의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성서는 이상한 본문이다. 판타지 같은 느낌도 나고, 반지성주의의 맹목성을 요구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렇게 상정할 여지가 있다. 오히려 그런 태도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있다. 교회 예배당에 오기만 하면 비판적인 사고가 멈추는 경향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신을 숭배하듯이 자신의 요구만을 신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출석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종교 자체에 의심이나 회의감을 갖는 것 자체는 악이 아니다.

    로빈 마이어스는 이전 책,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에서 필자가 즐겨 인용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진리가 깊을수록 그 적절한 표현은 산문보다는 시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50)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는 어쩌면 역사실증주의적으로 예수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교계에서는 불건전하게 인식하는 내용들인데, 그 목적은 예수의 삶을 재건하고 그걸 본받자는 것이다. 물론 한계가 많다. 이천년전의 인물에 대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톺아보는 것 자체부터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학자들이나 시인들의 노력은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곧 ‘진리’를 파헤치는 것과 다르지 않는 까닭이다.

    성서에는 은유, 시, 운문체의 글이 매우 많다. 오늘날에도 글을 잘 쓴다고 평가받는 기준 중 하나는 은유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고대의 신화적 글쓰기가 유행했던 시대는 오죽 했으랴. 그러나 문제는 우리말 성경에는 시가 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행 구분이 전혀 없이 산문체로 건조하게 번역되어 있다. 예언자들의 설교 대부분이 시라는 것을 아는가. 그래서 저자는 예언자들과 시인들이 “은유라는 피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33)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교회 설교자들 가운데 시인들이 좀 더 많다면 얼마나 좋으랴! 시인들은 본문의 행간을 읽는데, 의미의 정수는 바로 그 행간에 있다”(47)며 한탄과 자조 섞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2. ‘신뢰’ 받는 교회: 의심, 에큐메니즘, 윤리.

    “확실성보다는 신뢰에 기초를 둔 신앙을 지닌 사람은, 자기 혼자 중요하다고 믿는 난센스의 세상에서 눈에 띠기가 훨씬 쉽다. 첫째로, 그런 신앙을 지닌 사람은 겸손하다. 판단을 천천히 한다. 미심쩍은 것을 선의로 해석한다. 자신의 에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내기 위해 그들의 장점을 볼 줄 알며, 자신의 마음이 상처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타인들의 상처에 공감한다.”(194)

     

    언젠가부터 필자는 ‘유연성’에 대해 찬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연함은 곧 잠재력이자 생명력이라면서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도 사고도 경직되어 간다. 반면에 갓난 아가는 어떤 품에도 안길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 또한 유연성 혹은 탄력성을 거론한다. “신앙은 절대적인 확실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탄력성이 있는 신뢰에 관한 것이다.”(316)

    교회가 공신력을 잃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지나친 확실성, 시대착오적인 독단성을 꼽고 싶다. 배타적이란 태도는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악으로 치부당할 수밖에 없다.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여전히 경직되어 있으니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이런 연유에서일까? 저자는 신앙이라는 낱말보다는 신뢰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절대적 확실성보다 의심에 대한 여백을 남겨두는 거다. 그의 경험 역시 이를 뒷받침해준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 안에서도 나는 불신의 암과 더불어 의심스러운 점을 선의로 해석하는 것(benefit of the doubt)의 기적적 능력 모두를 보아왔다.”(198) 그렇다, 역설적이지만, 교회의 공신력 회복을 위해서는, 교회 내부 사람들의 의심을 북돋아 주는 게 아닐까. 레안더 켁(Leander Keck)은 “의심의 가능성이 사라질 때, 신앙의 가능성이 사라진다”라고까지 말했다고 하니 말이다.(128에서 재인용)

    게다가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 소통의 창구를 열게 한다. 에큐메니즘 운동의 시발점은 이 의심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태도 말이다. 장르 파괴를 겁내지 말자. 교리 자체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 “기독교인들의 일치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인 까닭이다.(241) 기독교 정체성이 흐려질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신이 된 사람인 예수만 잘 붙는다면 큰 혼란은 피할 수 있을 거다. “믿음의 통일성은 결코 이루어졌던 때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의 통일성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이며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들의 특징이다. 이것이 언더그라운드 교회의 희망이다.”(104)

     

     

    3.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비폭력과 누룩.

    “모든 예배는 경이감에서 시작해서 겸손함으로 끝나야 한다. 그러나 너무 자주 예배는 우상숭배로 시작해서 폭력으로 끝난다.”(164)

     

    예배는 일상을 구별하여 거룩한 시간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예배를 가리켜 저자는 “우상숭배로 시작해서 폭력으로 끝난다”고 한탄한다. 그만큼 인간은 연약한지라 절대적인 구원자를 열망하는 경향이 큰 것일까. 뿐만 아니라 성서 속 평소생활 상에서도 폭력을 통한 구원이 성경에도 연거푸 표현된다. 어쩌면 제국주의 시대 아래 살고 있는 신앙인들이 현실을 감내하기 위해서는 그런 문학적 카타르시스가 필수적이었던 걸까?

    역사적 예수 연구로 인해 신앙인들에게 명확해진 것은, 비폭력과 분배적 정의에 대한 갈망이다. 수직적인 것을 수평적인 것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책무이다. 매일의 삶을 성스럽게 길러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꾸만 배신당한다. “예수님의 목회 상당부분은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을 없애셨던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항상 그 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하려고 애쓴다.”(291) 이게 다가 아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얻을 때마다, 교회는 거의 언제나 교회가 향유하는 권력 자체에 대한 비판능력을 상실하게 된다.”(314) 물론 헌법은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이젠 다국적기업으로 인해 경제에도 영합하게 되어버렸다.

    로빈 마이어스는 언더그라운드 교회가 누룩의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직언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누룩이 들어가 발효가 일어나는 과정이 흔히 도덕적 타락의 은유로 사용”(256-7)되었는데, 카이사르의 제국을 멸망시키는 장본인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롭게 하나님의 제국을 신설하도록 말이다. “하나님의 제국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만, 그것이 누룩의 비유가 갖는 지렛대다. 카이사르의 제국이 하나님의 제국으로 대체되는 것이다.”(263)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드는 것일까? 양자택일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기독교인으로써 당위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빈 마이어스의 누룩 비유를 힘입어 인용해본다.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언더그라운드 교회 안에서 일종의 스스로 싹이 터서 제국을 부패시키는 거룩한 바보들(holy fools)의 집단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265)

     

     

    III. 결론: 꿈꾸는 개미.

    “우선 만일에 예수님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의 삶의 모델이라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투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사라질 것이다. ... 언더그라운드 교회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를 것이다.“(230)

     

    이 책은 고민하는 신앙인들을 위한 것이다. 생각하는 백성을 위해 유용한 정보와 지혜가 담겨져 있다. 일상 속에서 악을 제거하는 누룩이 되어야 함을, 윤리적으로 성서를 해석해야 함을 청명하게 일러준다. 21세기를 접어들어, 기독교의 대안적인 모습을 꿈꿔본다. 20세기의 대형교회 위주의 구조와는 달리, 21세기는 소규모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도처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하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미약하게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증명하기를, 항상 변방이 중앙을 침투했다. 작은 개미들의 반란이 몹시 반가워진다. 필자도 그 개미 중의 하나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분이 전해주신 ‘부활’ 메시지는 ‘평화’였다. 그러므로 부활을 통해 드러났으며 또한 확인된 하나님의 본성과 뜻은 비폭력적인 분배정의인 것이다. 부활절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계시다. 이 하나님께서는 희생제사나 공허한 제의를 원하지 않으신다. 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다.”(159)

     

    http://blog.naver.com/herdkmh/193490466

  • 한기연 2013.12.01 07:27 글쓴이

    언더그라운드 교회 (로빈 마이어스)

     

    미친 사랑법을 따르다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막 3:21)

    두 개의 참새 이야기
    최근에 발간한 내가 쓴 『처음 만나는 동양고전』에는 내가 직접 꿈을 꾸었던 참새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내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날아가는 참새에게 물었지요.
    “너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그러자 날아가던 참새가 깔깔대며 나에게 말했습니다.
    “바보야, 세상에는 하나님밖에 없어.”

    그게 제가 깨달은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은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읽게 된 『언더그라운드 교회』에서 또 다른 참새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며칠 전에 내가 집 앞에서 무게가 4kg 되는 참새 한 마리가 길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참새에게 “너 좀 너무 무거운 거 아니냐?”하고 물어보았지요.
    참새는 “네, 그래서 제가 살을 좀 빼려고 걷는 중이랍니다.”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왜 날지를 않니?”하고 물었지요.
    그 참새는 내가 마치 멍청이인 것처럼 바라보고는 “날아요? 나는 한 번도 날았던 적이 없어요. 다칠테니까요.”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네 이름이 무엇이니?”하고 물었지요.
    그 참새가 하는 말이 “교회랍니다.”

    이 책의 지은이 로빈 마이어스가 크래독(Fred Craddock)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던 중 들었던 이야기랍니다. 어떠세요? 이 정도는 약과라고요? 요즘처럼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먹는 상황에 약과라면 약과겠네요.


    로빈 마이어스는 『언더그라운드 교회』라는 책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분석 비판함과 동시에, 그러한 문제들의 진정한 돌파구를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모색,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 표지 위에 적혀 있는 “당신이 용기가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이 운동에 참여하라”는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의 선동적인 문구가 그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책을 덮을 때쯤에는 반드시 하게 될 것입니다. 단, 끝까지 읽어내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할 용기가 전제되어야 하지만요. 참고로 이 책은 매우 위험한 책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미친 예수와 착한 기독교


    예수는 늘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것은 전 재산을 털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고, 가족을 버리는 것이었으며, 심지어는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가 늘어나자 그는 ‘귀신들린 자’, ‘미친 자’로 알려졌고, 예수의 가족들조차도 그를 붙잡으려고 나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유대종교권력과 로마정치권력의 합작으로 가장 극한적인 방법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물론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지요. 그만큼 예수운동은 반제국적이고 반체제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위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예절 바르고, 예측 가능한 착한 사람이지요. 기독교 안에서 “실제로 중요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일 아침마다 사람들의 기대는 낮고 또한 보상은 더욱 낮”게 되었고, “훌륭한 목사는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로하지만, 편안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거의 없”는 지루하고 안전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하나 둘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쩌면 우리의 행동들(deeds)을 원했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교리(creeds)만을 강요했는지도 모릅니다.

    믿음 vs 실천


    로빈 마이어스는 교회사를 통찰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천이지요.

    1세기의 급진적 윤리인 산상설교에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말들뿐인데, 4세기 니케아 신조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고, 오직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한 말들뿐이다.(43쪽)

    언제부터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로 구별되지 않고,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입장이 양분되었지요. 로빈 마이어스는 이 두 입장을 모두 비판합니다. “교회는 양분되어 있다. 즉 보수주의자들은 확실성을 신앙과 혼동하고 있는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지식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47쪽) 즉, 성서에 쓰여 있는 모든 것이 빠짐없이 사실이라 믿는 보수주의자들이나, 성서를 지식을 통해서 올바로 해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잊어버린 것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역사의 예수(Jesus of history)를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로부터 구별하려는 귀한 노력은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의 따르미들(followers of history)을 신앙을 믿는 사람들(believers of faith)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탐구이다.(50쪽)

    로빈 마이어스는 이전에 진보적 학자들이 탐구했던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긍정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긴요한 것은 ‘역사의 따르미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실천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실천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변질되었다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예수 따르미들(Jesus followers)은 점차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사람들(Christ worshipers)이 되었으며, 또한 기독교는 영원히 변질되었다.(108쪽)

    정행(orthopraxy)이 정교(orthodoxy)로 대체된 그 순간은 기독교인이라는 제품을 ‘표준화’하려는 욕망이 ‘그 길’(The Way)을 ‘믿음체계’(Belief System)로 둔갑시킨 순간이었다.(112쪽)

    길(The Way)은 믿거나 알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길은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가 걸어간 ‘미친’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바로 예수 따르미들입니다.

    예수의 미친 사랑법을 따르는 교회


    로빈 마이어스는 예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는 예수를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모델로 삼자고 제안합니다.

    우선 만일에 예수님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의 삶의 모델이라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투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사라질 것이다.(229쪽)
    그리고 교회가 가진 권위의 원천은 위계질서가 아니라 ‘관대함, 자비, 치유, 희망 그리고 철저히 환대하는 영’임을 선포합니다. 그에 따라 교회의 실천은 철저히 수평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합니다.

    세상이 언제나 수직적으로 배열하는 것을 우리는 수평적으로 다시 배열한다.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나누기 위해 먼저 풍요에 대해 감사한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향유하려고 한다. 얻기 위해 애쓰는 대신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며, 공동체의 관심은 모두가 넉넉하게 갖는 것이다. 자신의 필요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생필품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307쪽)

    제도적인 교리나 믿음의 확실성에 대한 강요 대신,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호존중의 자세가 강조되고, 원죄보다는 원복(original blessing)을 강조하고, 영혼의 구원보다는 영혼의 회복을 위해 사랑의 능력을 더욱 신뢰합니다. 물론 이 모든 교회의 변화는, 예수가 그러했듯이 낯선 이들을 전폭적으로 환대하고, 체제전복적인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예수의 삶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따름이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게 됩니다. 이점에 관한 한 로빈 마이어스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언더그라운드 교회에서는 건물 바깥에 무슨 이름을 붙이건 간에, 신학적 전통과 예배 스타일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낯선 이들과 함께 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던져야만 한다.(244쪽)

    그저 낯선 이와 함께 하기 위한 교회개혁이라면 그것은 반쪽에 불과합니다. 그는 체제에서 소외된 자들을 온존(溫存)하게 하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체제전복적인 활동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예수가 행했던 미친 사랑법에 따라서! 그 영역은 평화와 비폭력, 철저한 환대와 경제정의의 문제들까지 포함하며, 그 방법은 시위나 연설, 단순한 저항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의로운 분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가 로마제국과 맞서 죽을 때까지 싸웠듯이, 우리도 자본의 제국에 맞서 죽을 때까지 싸울 각오를 해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래 인용구들이 단순한 수사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의로운 분노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윤리적인 기업들의 제품을 우리가 구매할 때 우리는 그들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보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역 농민들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의 텃밭에서 생산한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환경을 파괴하는 농업형태를 지속시키는 것이다.(307쪽)

    앞으로 언더그라운드 교회의 교인들은 더욱 높은 법을 따르기 위해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 언제가 도덕적인 때일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 특히 교회들이 면세 혜택을 받고 있으며 또한 소위 신앙에 입각한 활동을 위해 교회가 정부기금을 사용하는 것 때문에, 한때는 반제국주의적이었던 교회는 이제 제국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신세가 되었다. 오늘날 가장 급진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면세 혜택을 받지 말아야 하며, 또한 교회의 프로젝트와 선교활동이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허더라도 결코 정부기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 혜택을 받는 것은 제국에 대해 저항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타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면세는 정부 보조금의 한 형태이다. (247쪽)

    우리는 고작 교회가 세금을 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영세교회에 대한 지원이 더 필요한 것 아니냐 등으로 토론하고 있을 때 위 인용구를 읽는 나의 마음은 참담했습니다. 예수 따르미들은 제국과 맞서기 위해 제국이 주는 혜택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현실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언더그라운드 = 지하


    80년대 우리나라에서 민주화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일부 운동권에서는 운동을 전위적으로 할 것인가, 대중적으로 할 것인가로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한편 운동의 형식을 합법적으로 할 것인가, 비합법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있었지요. 이제는 그러한 논쟁조차 시들해져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이때 이 책이 느닷없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교회운동은 대부분 보수화되었고, 시민운동과 정당운동만이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예수운동을 이 책은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이름도 ‘언더그라운드’, 우리말로 ‘지하’입니다. 합법과 대중운동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전위와 지하를 꿈꾸는 이 책은 시대착오적인 책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읽는 내내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내 신앙생활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통렬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직면한 대부분의 난제들을 예수의 삶을 모델로 해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 로빈 마이어스의 두려움 없는 용기에 놀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경고했듯이 이 책은 무척 위험한 책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위험의 강도가 셀수록 성취와 깨달음도 강해지지 않을까요? “No pain, no gain!”

    이 책을 번역하신 김준우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 수 제대로 배웠습니다.

    김경윤 l 관장은 성균관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문학과 철학, 종교를 아우르는 인문학 강사와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기도 고양시의 <자유청소년도서관> 관장을 맡고 있다. 『철학사냥1』, 『영어 뇌를 키우는 그리스로마 신화』시리즈, 『한국 철학의 이 한 마디』, 『청소년 논어』, 『인문학 레시피』, 『처음 만나는 우리 인문학』, 『처음 만나는 동양고전』등이 있다.

  • 한기연 2013.12.01 08:05 글쓴이
    
    '2013 생명 평화 교회론 심포지엄'이 생명평화마당 주최로 9월 24일 열렸습니다. 10월 19일 열리는 '2013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작은교회 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해 작은 교회들이 모였습니다. 홍인규·양현혜·이정배 교수의 발제문 전문을 하나씩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한국적 교회론이 가능할까. 하나의, 사도적, 보편적 그리스도 교회론을 말해 온 역사적 맥락을 생각할 때 한국적이란 수식어가 생뚱스럽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찍이 어느 신학자는 한국교회에게 복음적·생명적 그리고 한국적일 것을 주문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국적이란 것과 복음적 혹은 생명적이란 것이 상호 낯선 개념이 아닐 듯하다. 오늘 우리는 '작은교회가 희망이다'란 주제하에 그간 신학적 입장을 달리해 온 목회자, 신학자들이 모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며 대안을 모색 중이다. 이를 위해 탈(脫)성장, 탈(脫)성직, 탈(脫)성별 등 3개의 '탈(脫)'을 목적하고 있다. 이는 곧 다가올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2017년을 옳게 대면코자 함이다. 아마도 이런 과제를 이루는 것이 복음(생명)적인 동시에 한국적이라는 한정사가 품은 뜻일 것이다. 한국적 영성(문화)과의 제대로 된 만남을 통해 미완의 과제로 남은 종교개혁을 완성시킬 뿐 아니라 축(軸)의 시대에 걸맞은 두 번째 종교개혁 역시 염두에 두고 있다.

     

     

    1.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전과 이후 : 역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일반적으로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등가는 아니나 상응하는 가치와 권위를 지닌 세속 기관이라 불린다. 지나치게 '거룩'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탈이지만 오늘처럼 그 존재 양태가 자본주의를 닮아 있는 것도 우려가 아닐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될 필요는 있겠으나 방주와 같은 고립된 이미지를 벗겨내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그래서 혹자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일컬어 세상 안에 있되 세상 밖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땅에서 불가능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들 고유한 언어로 말하되 어느 때보다 그 속에 담긴 나눔, 공감(사랑)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가 선포되기를 열망한다. 인간 욕망을 자극하는 자본의 시대에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럴수록 신앙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과 다를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들만의 문법(언어)에 갇혀 혹은 믿음을 율법(신조)화하면서 정작 세상(속)적 가치를 선호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이다. 일찍이 본회퍼는 이런 삶을 살지 못하는 제자 없는 현실교회를 일컬어 기독교를 이념 혹은 신화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성이란 말이 회자되나 실상 그것 역시도 이런 체제 유지적인 담론을 보완 내지 강화시킬 목적에서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를 닮아 있는(유비적) 교회가 우리 주변에 없는 셈이다. 역설적으로 맘몬을 지향하는 교회들이 '거룩'을 빌미 삼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향후 10년 안에 개신교 인구가 지금의 절반 수준인 400만으로 줄 것이란 경고도 몇몇 대형 교회에겐 낯설게 들리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교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되 믿음과 은총의 '오직'(Sola)의 논리가 오히려 중세기의 면죄부보다 더 타락했다고 보는 까닭이다. 소위 목사의 크기를 교회의 크기에 견주는 것이야말로 교회 공동체를 모독하는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만으로 교회 공동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신앙의 눈(전승)이 있을 때 비로소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성립되는 까닭이다. 또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 삶의 구체적 형태를 발견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그렇기에 새 교회론을 위해 역사적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콘스탄티노플 이전 시대까지의 역사적 공동체로서 초대교회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초대교회에 대한 오해부터 종식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초대교회가 단일한 형태였다는 생각과 그것이 오늘 우리와 같은 믿음과 신조의 공동체라는 확신이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오늘 우리가 그렇듯 다양한 신학과 삶을 지닌 공동체였고 당시 가치관으로선 체제 전복적인 시도가 그들의 입장이었다. 당시 교회들도 무수히 달랐으나 전혀 다른 삶을 기획하였고 그에 헌신함에 있어 공통되었다. 오늘 우리도 서로 상이하나 이들처럼 뿌리정신(삶)에서 하나로 만날 생각이다. 앞서 말한 3개의 '탈(脫)'이 바로 이들과의 공시적 교감의 산물로서 복음적, 생명적 교회가 되는 관건일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적 가치란 실상 뿌리정신과 닮아 있다는 말이다.

     

     

    2. 역사적 공동체(교회)의 실상과 복음의 정치학

    한 신학자는 이런 공시적 현상을 언더그라운드 교회라 통칭한다. 오늘까지 지속되는 콘스탄티노플 이후의 기독교 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가 더 이상 예언자적 삶을 담지하지 못했듯 오늘 대다수 교회들 역시 세례받는 것이 노예를 거부하며 평화주의자가 되고 가난한 자들을 환대하는 삶을 사는 것과 무관하다. 그때처럼 현실의 교회에선 무수한 교리, 신조들만이 넘쳐날 뿐이다. 교회에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상상력) 때문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안정과 안전을 위해서인 까닭이다. 영육의 차원을 분리시켰고 정치를 교회로부터 추방시켜 버렸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 교회에서는 이와 달랐고 달라야 했다. 그곳에는 소위 복음의 정치학이란 것이 있었다. 부활 이후의 예수 공동체는 예수를 따름(행동)으로서만 그를 알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다. 성서 곳곳이 함께 떡을 나눌 때 눈이 밝아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전언하다. 바울 역시도 다메섹 체험 이후 종래의 이분법 구도를 버리고 모두를 가로지르는 보편성을 복음의 본질로 여기지 않았던가? 여하튼 초기 예수 공동체에선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말뿐이었고 그 기록이 바로 우리 앞의 복음서이다. 4세기 니케아 신조 이후의 기독교와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었다.

    보았듯이 복음의 정치학은 당시 체제를 불편하게 했고 그들의 존재를 위협했다. 되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하루 살 품삯을 주었으며 성전을 무너지라 했고 안식일 법을 무력화시킨 예수는 분명 체제가 요구하는(Status quo) 존재는 아니었다. 당시 종교 체제에 있어 예수는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을 뿐이다. 하지만 복음의 정치학은 주기도문이 말하듯 하늘의 정의를 이 땅에 심고자 했기에 때론 과격했다. 기독교 체제를 유지, 지탱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가 된 현실 교회의 예수상과 크게 달랐다.

    이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공동체로부터 다음 세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우선 앞서 말했듯 AD. 4세기 이전까지 로마 곳곳에 자리한 교회들은 하나로 획일한 표준 신조(성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예수의 삶을 근거로 다양하게 발전되었을 뿐이다. 역사적 형태는 다양(분열)하나 예수 삶에 중심을 둔 까닭에 언제든 지향점이 같았고 풍요로웠다. 다음으로 참된 신앙의 시대(H. 콕스)로 불리는 초대교회 시기 오늘날 통용되는 사도직이란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주어진 은사(카리스마)들만이 존재할 뿐 수직적 성직 제도는 아주 후대의 산물이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교회는 예수 운동으로 존재했기에 반제국주의적 색채가 짙었다는 사실이다.

    예수 추종자들은 로마가 멸망할 것을 굳게 믿고 그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폭압에 대해 버티고 견디며 참는 것만이 자신들이 감내할 부분이었다. 이들을 지탱한 것은 일치된 신조가 아니라 예수를 추종하는 진정한 제자도였다. 그들에게 예수가 주님이란 것은 단순 신조(교리)적 차원의 지적 승인이 아니었고 제국(세상)의 주인 됨의 거부이자 의식적으로 그들 죽임의 방식에 맞서는 대안적 삶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3. 세 '脫'에 대한 역사적 공동체의 신학적 메시지

    바로 이런 역사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작은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이름하에 작은 교회 박람회가 근간으로 삼은 세 종류의 '脫'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교회의 실상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세 '脫'과 의미론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점에서 '脫'성장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과 유관하며 '믿기'가 아니라 '살기'의 차원을 중시한다. 또한 '脫'성장은 성숙을 이르는 바, 오늘과 같은 소수의 대형 교회가 아닌 다수의 다양한 카리스마 공동체를 지향한다. 초대 공동체 안에서부터 시작된 해석(공동체)의 다양성은 결코 부정될 것이 아니라 더욱 긍정되어야 할 사안이다. 언제든'하나'의 획일적 가치를 추동한 것은 제국주의적 기독교였다. 문제는 저마다 다른 해석 공동체 안에서 보편적 가치, 곧 예수 삶의 에토스를 실현시키는 일, 곧 '제자 되기'이다.

    따라서 카리스마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脫'성직으로 귀결된다. 종교개혁의 원리 중, 지나쳐서 문제가 된 것도 있지만 아직 시작도 해 보지 못한 '만인제사직론' 같은 것도 있다. 일찍이 함석헌은 이 땅에 들어온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종교로 변질된 것을 깊이 우려하였다. 오늘 우리 사회 속에 종교의 이름을 걸고 생활하는 성직자의 수가 실상 너무 많다. 야간에 대리 운전하며 생활을 연명하는 목회자들 숫자도 늘고 있다. 아픈 현실이나 그래도 이는 수용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저마다 경쟁이 되다 보니 스스로를 거룩타 하며 신비화하고 권위적으로 변질되는 양상이다. 그렇게 되어야 신도들을 권위에 종속시킬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하지만 정작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선포하였다. 심지어 종교(율법)가 인간에게 종의 멍에를 씌울 때도 그를 벗으라고 하신 것이다.

    세 번째의 '脫'성별 역시 기독교 성숙의 잣대이자 민주 사회의 역량을 반영한다. 우리는 지금 중세가 아닌 기독교 이후 시대를 살고 있다. 특정 종교인이기도 하나 뭇 타자를 존중하며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함을 배우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독교는 종종 여성을 자신들이 보유한 최후 식민지처럼 관계한다.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여성 비율이 현저하게 낮으며 여성 목회자(전도사)들에 대한 인식이 일천하며 교회 내 잡일은 여신도들의 몫인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에 의한 성폭력의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향후 교회가 양성평등의 가치에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여성들의 급격한 일탈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동역자들 중에서 과반수에 가까운 이들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깊이 숙고할 주제이다.

    결국 세 형태의 '脫'은 체제 변화를 위한 예수 제자들이 걸머져야 할 과제가 되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들 작은교회의 존재 이유가 된 것이다. 대형 교회는 脫지역화된 세몰이 '조직'으로 기능하나 작은교회는 지역 안에서 가치 지향적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당시 교회가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었듯이 오늘 우리 작은교회들도 스스로 대역전의 삶을 선포하고 준비해야 마땅하다. 평등적 질서로 세상을 위협했던 예수 운동이 어느덧 위계질서를 지닌 폐쇄적 조직, 신조를 강조하는 율법화된 공동체로 변질되어 세상(제국)에 길들여져 있는 것에 먼저 소스라치게 놀라야 가능한 일이다. 교회가 세상을 불편하게 하기는커녕 이 세상 저 세상을 두루 잘 살 수 있다는 종교적 탐욕을 전하고 있음을 깊이 반성할 일이다.

     

     

    4. 역사적 공동체의 한국적 실현 : 한국적 교회론?

    오늘의 교회상이 이렇듯 변질된 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잘못된 방식으로 정착된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이 땅의 종교 문화와 제대로 만났더라면 한국교회가 서구적 형태와 변별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리되지 못한 것이다. 어느 종교든 긍·부정적 측면이 있는 것인데 불행히도 제도화된 교회의 부정적 측면과 이 땅의 부정적 종교 현상이 접목되고 말았다. 주지하듯 한국교회 안에는 성서적 그리스도인 상보다는 제각기 무속적, 유교적 그리고 불교적 기독교인들이 많은 듯 보인다. 저마다 명시적 기독교들이긴 하지만 그들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부정적인 이 땅의 종교성들인 것이다.

    예컨대 무속적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기복적(현세 지향적) 특성을 지녔고 유교적 기독교들이 경우 기독교의 가부장적 가치를 강화시켰으며 그리고 불교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현실을 초연하고 부정하는 탈정치적 신앙 양식을 표출하고 있는 듯하다. 혹자는 이것을 한국적 기독교의 모습이라 폄하하고 제 종교들과의 단절 내지 투쟁을 기독교 본연의 과제라 인식하나 이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이런 부정성은 기독교에 앞서 이 땅의 주인이었던 종교들의 일면일 뿐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이들 종교들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가치를 강화시킬 수 있고 새 시대에 필요한 누룩과 같은 요소를 찾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가치 지향적 만남을 위해 그간 토착화 신학자들이 노력해 왔고 그 바탕에서 교회론의 '한국적' 의미를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익히 아는 대로 최근 한류 열풍이 도처에서 확인된다. 문화 근친성을 지닌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아랍권, 남미권을 비롯하여 영미권에서도 그 실상이 감지되며 심지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평화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전언이다. 한류가 단순히 서구 모방의 산물이라거나 자본주의 결과물이라는 지나친 폄하는 삼갈 때가 되었다. 한류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샤머니즘을 비롯한 유교, 불교의 통섭을 읽는 것이 옳다. 즉 한류란 서구와의 공간적 혼종성만이 아니라 우리이 과거와 현재 간의 시간적 혼종성의 실상이란 것이다. 이 땅의 미(철)학자들은 한류가 품은 가치를 興, 情 그리고 限(아우름, 혹은 넘어서기)이라 본다. 드라마, 춤과 노래(K-pop), 소설 속에서 한국 종교 문화의 원류가 흥(무속).정(유교) 한(불교)으로 녹아 있다는 것이다.

       
    ▲ 이정배 교수는 흥, 정, 한으로 재구성된 기독교, 즉 새로운 한국적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향후 기독교는 이런 한류의 바람을 받아 흥과 정 그리고 한의 가치를 복음과 접목시켜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과거 종교개혁이 독일 신비주의 풍토에서 비롯했듯 한류가 두 번째 종교개혁의 토양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한류와 기독교와의 접목은 險한류, 反한류의 기류를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문화 전략이라 봐도 좋을 듯싶다.

    그렇다면 흥. 정 그리고 한으로 재구성된 기독교 곧 새로운 공동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 것인가? 지면상 간략히 정리하면 興이란 '참 좋다'라는 하느님 환호의 표현이자 기쁜 소식(복음)의 실상이다. 이는 창조된 세상이 조화와 균형 속에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興의 공동체란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 대신 모두가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강조한다. 일(노동)이 있어야 안식이 유의미한 까닭이다. 情이란 어느 누구도 홀로 슬프거나 기쁘지 않음은 물론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감하는 공감의 상태이다. 따라서 情의 공동체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예수의 식탁 공동체와 유관할 수밖에 없다. 한이란 일체 갈등을 아우르며 경계를 넓힐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을 넘는 삶이 가능한 것도 한의 종교성이 주는 선물일 것이다.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한의 종교성은 성령의 역할과 닮아 있다.

    결국 하느님, 예수, 성령이 각기 흥·정 그리고 한과 만나 자신의 본뜻을 이룰 수 있는 한국적 교회 공동체로 재구성될(거듭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기독교(교회)는 자기 틀을 넘어 생명, 정의 그리고 평화라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배 / 감신대 교수·생명평화마당 공동대표

  • 한기연 2014.05.21 22:17 글쓴이

    강정 사랑이 죄인가? 자진 노역을 선택한 이유 / 임보라 목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7992.html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