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민주주의의 영적 토대
크리스천 파시즘과 시민신학의 희망
조너선 라우치 지음, 강무천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145mm 215mm, 350페이지, 2026년 3월 23일, 값 18,000원.
ISBN 979-11-93786-15-4 03230
원서 Cross Purposes: Christianity’s Broken Bargain with Democracy
(Yale University Press, 2025)
1. 책소개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가 급격히 붕괴하고 극우화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실에서,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함께 구할 길을 제시한다. 한국의 무종교인 비율은 60%가 넘어(19〜29세는 78%), 공산국가들을 제외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미국은 29%). 예수 정신을 배반한 기독교의 붕괴는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보는 저자는 특히 복음주의가 과거에 노예제 철폐와 여성 권리 운동에 앞장섰던 사회변혁적 입장을 포기한 채, 더 이상 보편적 인권의 수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 된 이유를 세속화 영향보다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오늘날의 기독교를 “얄팍한 기독교”, “날카로운 기독교”, “두터운 기독교”로 구분하고, 시민신학에서 교회와 민주주의의 희망을 찾는다. 한국에서는 “뉴라이트”가 등장한 이후 최근 “내란”을 지지하거나 그에 침묵한 세력은 주로 미국 극우 복음주의 집단과 연결된 기독교인들이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에도 앞장서고 있다. 기독교가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실에서, 이 책은 조만간 AI 혁명과 기후 붕괴가 초래할 사회적 혼란과 개신교의 몰락에 대해 목회자들과 무종교인들이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를 크게 멀리 보도록 안내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라고 믿는 미국의 정치가들이 주도하는 전쟁과 혼란과 붕괴는 결국 그들을 선출한 시민의식의 문제이며 특히 그들을 절대적으로 뒷받침한 신학적 반동의 결과인 셈이다.
100년 전에 공산주의 혁명과 세속주의가 기독교 문명을 몰락시킬 거라고 믿은 독일의 대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나치의 폭력에 의존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파시즘이 기독교 신학의 뒤틀린 가지라고 주장했다. 군사적-정치적 승리는 파시즘을 이길 수 없고 신학적으로 패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오늘날에는 전쟁경제로 떼돈을 버는 재벌들과 에너지 재벌들, 그리고 극우 기독교인들과 우파 복음주의자들이 앞장서서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몰락뿐 아니라 문명의 붕괴를 재촉하는 시대이다.
미국 언론계에서 "분석의 천재"라고 불리는 유대인 무신론자인 저자는 왜 주류 기독교가 "얄팍한 기독교"가 되었고, 에반젤리칼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기독교도 "날카로운 기독교"가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기독교와 민주주의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두터운 기독교"의 길을 제시한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 자손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다.
2. 저자
조너선 라우치(1960- )는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현재 <브루킹스연구소> 수석 연구원이다. 자유민주주의, 시민사회, 지식 생태계의 위기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그는 공공정책과 문화에 관한 책을 일곱 권 발표했고, 많은 매체에 글을 썼다. 저자는 무신론자이지만, 종교의 상식적인 순기능을 존중하며, 미국 언론계에서 “분석의 천재”라고 불린다. 그의 주요 저술들은 2025년에 발표한 이 책 이외에 Demosclerosis: The Silent Killer of American Government (1994), Government’s End: Why Washington Stopped Working (1999), Gay Marriage: Why It Is Good for Gays, Good for Straights, and Good for America (2004), Political Realism: How Hacks, Machines, Big Money, and Back-Room Deals Can Strengthen American Democracy (2010, David A. Harris와 공저), Denial: My 25 Years Without a Soul (2015), 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A Defense of Truth (2021) 등이 있다.
3. 추천사
“언론인이며 특히 무신론자인 라우치는, 극우 복음주의 시대와 교회 출석률 감소의 상황 속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는 데는 건강한 종교 기관들이 필수적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 New York Times Book Review
“기독교를 세속 사회의 적이 아니라 동맹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설득력 있는 논증이다.”
— Kirkus Review
“간결하고 우아하다. 라우치는 신중한 연구와 날카로운 문체를 통해, 현대 종교-정치 역학을 괴롭히는 병리들을 분석하고 진단하며, 그 처방을 제시한다.”
— Michael M. Rosen, Commentary
“세속화, 시민적 불화,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유익을 둘러싼 현대적 논의에 대한 균형 잡히고 정직한 기여이다. 라우치는 복잡한 질문들을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다루는 데서 보기 드문 능력을 지녔다.”
— Bonnie Kristian, Christianity Today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신앙에 대한 라우치의 정직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공개적으로 무신론자임을 밝힌 사람이 미국 민주주의에서 기독교의 중요성을 힘 있고 설득력 있게 옹호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라우치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미국이 필요로 하는 역할을 감당하라고 호소하는 이 메시지는 모든 신앙 지도자가 연구하고 귀 기울여야 할 내용이다.”
— 유타 주지사 Spencer J. Cox
“이 책은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기독교의 일부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통찰력 있게 설명한다. 그 변화는 그 영적 메시지를 보수 정치로 대체해 왔으며, 그것이 우리 민주주의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도 보여준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가치 있는 독서이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자유주의와 그 불만≫ 저자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우리 안의 더 나은 천사들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하면서, 조너선 라우치는 양극화된 수사학과 제로섬 정치에서 벗어나 관대한 다원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 분열된 국가를 위한 시의적절한 책이다.”
— Kristin Kobes Du Mez, Jesus and John Wayne 저자
라우치는 주류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지 못하는 "얄팍한 기독교"가 되었고, 우파 복음주의는 "두려움의 교회"가 되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시의적절한 비평에서 라우치는 기독교가 없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세속적 무종교인들과, 자신들의 불만을 세속 문화 탓으로 돌리는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말을 건다. 그는 현재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이 두 집단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민주주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는 신앙의 가르침에 다시 헌신할 것을 촉구하며, 자유민주주의가 억압적인 체제가 아니라 종교 자유를 독특하게 보호하는 체제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에게도 건강한 종교 제도가 자유주의 국가의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을 촉구한다.
— Yale University Press
4. 차례
감사의 글 / 11
서문 내가 쓴 글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글 / 13
1장 얄팍한 기독교: 신앙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험성 / 21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위험할 정도로 어긋나 있다
2장 날카로운 기독교: 두려움의 교회 / 63
“납치된 여객기” 복음주의는 교회와 헌법을 배신한다
3장 두터운 기독교: 타협의 복음 / 139
예수와 제임스 매디슨을 조화시키는 길은 많다
에필로그 작별의 메시지 / 199
출처에 관한 노트 / 203
부록 1 본회퍼의 경고와 복음주의의 도덕적 붕괴 — 트립 풀러 / 215
부록 2 복음주의자들의 양심의 스캔들 — 로널드 사이더 / 251
부록 3 우파 복음주의의 광기와 성경 왜곡 — 오베리 헨드릭스 / 267
부록 4 파시즘의 시대가 왔다 — 신진욱 / 295
부록 5 군국주의, 기후 붕괴, 새로운 파시즘 — 로버트 쉬어 / 301
부록 6 이란, 엡스타인, 그리고 인간 희생 — 데니스 쿠치니치 / 329
부록 7 ≪탈진실의 세계≫(2024) 서문 — 켄 윌버 / 333
부록 8 문명은 왜 죽는가? — 조너선 색스 / 345
5. 책 속으로
너는 마음의 변화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어. 너를 통해 기독교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되자, 기독교는 나에게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어. 내가 더 많이 알아야만 했던 무엇 말이야. … 그 후에, 너의 모범을 보며 나는 가까운 기독교인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지. … 나는 내 젊은 시절의 무신론, 특히 대립적이고 경멸적 태도, 그리고 나중에 소위 “신무신론자들”(New Atheists)의 스타일이 거꾸로였다는 걸 깨달았어. 그렇다, 종교는 멍청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종교를 멍청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말이야. (서문에서)
오히려 우리는 지금 좌우 모두에서 종교적 열정을 세속 정치 속에 수입하고, 정치를 다시 종교 안으로 수출하여, 남북전쟁 이후 볼 수 없었던 정도의 당파적 양극화와 적대감을 불러온 사회에 살게 되었지. 그 위기가 바로 이 책이 다루는 주제인 셈이야. (서문에서)
이제 나는 더 강한 주장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내가 젊은 시절에는 격하게 거부했을 주장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종교계에 있는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깊이 교류한 덕분에 갖게 된 주장이다. 나의 주장은 세속적 자유주의와 종교적 신앙이 단지 도구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인식론적으로 온전하고 일관된 세계관을 세우기 위해 서로에게 본래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1장에서)
역자주: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2025년 종교인구 현황”(2025/12/3)에 따르면, 개신교 20%, 불교 16%, 천주교 11%, 종교없음 51%이지만, 종교없음이 18〜29세(남자 70%, 여자 74%)와 30대(남자 61%, 여자 68%) 연령층에서 매우 높게 나타나 종교인구의 고령화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2023년 한국인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가 10년(2012〜2023년) 사이에 22.5%에서 16.6%로 6%포인트 감소했으며, 10년 뒤에는 12.6%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한국기독일보, 2024/01/25). 특히 20대 청년 비율이 2017년에 비해 5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www.goodnews1.com.news/articleView.html?idxno =424400). 감리교회는 2019년에서 2023년까지 5년 동안 교인 숫자가 13%포인트 감소했다(웨슬리안타임즈, 2024/05/07). 한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2026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성인 1000명 대상)에 따르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가톨릭 25.3%, 불교, 24.4%, 개신교 13.6%이다. 또한 응답자의 47.1%는 한국 교회를 극우로 인식했다(뉴스앤조이, 2026년 2월 28일). (1장에서)
역자주: 스마트폰을 통한 소셜미디어가 일상화된 2007년 이후 청소년(연령대별) 불안, 자해와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단위는 모두 자살 사망률 = 인구 10만 명당). 연령대별 (2007년과 2021년의 연령대별 자살률은 10〜14세: 0.9 → 2.8 (약 3.1배 증가), 15〜19세: 6.7 → 10.9 (약 63% 증가), 20〜24세: 12.6 → 19.4 (약 54% 증가), 10〜24세 전체: 6.8 → 11.0 (약 62% 증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자료). 한국에서도 청소년들의 자살시도, 자해 학생이 크게 늘고 있다. “서울을 보면 자살시도 학생은 2021년 180명에서 2024년 677명으로 꾸준히 늘어나 3년 만에 3배 이상 늘었다. 경기의 자살시도 학생 수도 2021년 179명에서 2024년 646명으로 증가했다. 전남에선 자살시도 · 자해를 한 학생이 2021년 229명에서 지난해 564명까지 늘어났다.”(경향신문, 2025년 10월 20일). 참조, 조너선 하이트, 이충호 역, ≪불안세대≫(웅진씽크빅, 2024). (1장에서)
보수적 백인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은 수십 년에 걸친 흐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는가? 아니면 과거와의 단절이었는가? 답은 둘 다일 수밖에 없다. 많은 권위자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두 메즈(Du Mez)는 불량배 숭배(bully worship)가 교회 안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2장에서)
예수를 본받는 일은 많은 복음주의자—문화적 전사들(cultural warriors) 가운데 많은 사람을 포함해—가 친구, 가족, 교인, 지역 자원봉사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종종 훌륭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의 교인들이 전쟁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불평했던 서부 텍사스의 한 목사는, 그의 교인들이 보통은 자기 눈앞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복음 메시지의 상당 부분은 변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타국인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것은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2장에서)
역자주: 복음주의자들의 국가주의의 “영적 전투”와 “문화전쟁”의 신학적 뿌리에 대해, Matthew Boedy는 1970년대에 십계명을 가족, 교육, 시장, 정부, 교육 영역에 적용할 것을 강조한 칼빈주의 신학자 R. J. Rushdoony, 캠퍼스 선교(CCC) 운동을 시작한 Bill Bright, “번영과 성공의 신학”을 주창한 Oral Roberts, Gordon Lindsay, Bruce Wilkinson, 복음은 개인적 선택이지만, 기독교는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문화 체제라고 주장하며 문화, 예술, 정치 영역에서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펼친 Francis Schaeffer, 80년대 신사도 운동과 교회성장 운동을 시작한 C. Peter Wagner, John Dawson, 그리고 2012년에 MAGA를 뒷받침하기 위한 Turning Point USA를 조직한 Charlie Kirk로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한다. 이들 복음주의 국가주의는 가족, 교육, 종교, 정부, 경제, 과학, 노동뿐 아니라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영역까지 지배하려 한다. Ibid. (2장에서)
역자주: 크레인 브린튼이 ≪혁명의 해부≫에서 밝힌 것처럼,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스트들이 온건파들을 이기고 성공한 것은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이룬 것이 아니다. 그 모두는 소수의 훈련받은 광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Crane Brinton, The Anatomy of Revolution (New York, NY: Random House, 1965), 154-155. Chris Hedges, American Fascists: The Christian Right and the War on America (New York, NY: Free Press, 2006), 19에서 재인용. (2장에서)
오크스는 연차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헌법 전체의 중대한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봅니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며, 우리의 충성은 어떤 공직자에게가 아니라, 헌법과 그 원칙 및 절차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게 됩니다.” (3장에서)
그것은 기독교의 부흥과 영적인 형성의 영역에 속한다. 한 사람 이상이 나에게 말했듯이, 정치적 행동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증상만 다룰 뿐이다. 정치적 역기능(dysfunction)은 시민적 제자훈련(civic discipleship)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징후다. 그것은 공적 영역에서 마음을 그리스도와 더 긴밀히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그 작업에는 최소 두 가지가 필요하다. 목회자들이 하는 교육과, 그들이 가르칠 수 있는 시민신학이다. (3장에서)
2017년 풀러신학교에서의 강연에서, 당시 신학교 총장이었던 마크 래버턴(Mark Labberton)은 기독교는 지배의 종교(religion of domination)가 아니라 유배의 종교(religion of exile)라고 설명했다. 기독교는 평범한 것이 아니라 특이해야(peculiar) 하며, 소비주의적이 아니라 반문화적이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약속의 땅에 살고 있지 않고, 유배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이해한다면, 교회는 더 충실하고 더 분명히 그리스도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3장에서)
너는 여러 질병을 조사해 보았고, 모든 병 가운데서 루게릭병이 가장 걸리고 싶지 않은 병이라고 결론지었다고 우리에게 말했지. 그러나 너의 어조는 일그러졌지만, 거칠지는 않았어. 극한의 상황에서도 너의 신앙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듯 보였어. 나는 그때 내 인생에서 가장 예리하게 나 자신의 피상성과 영적 빈곤을 느꼈어.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그분은 가장 헌신적인 종들에게 이토록 끔찍한 재앙을 내리시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러나 너에게 아무런 분노가 없음을 보며, 나는 나의 분노를 접으려 했어. 나는 하나님에 대한 너의 신뢰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너에게 용기와 은혜를 주고 있음을 목격했지. 그것은 나에게, 어떤 말이나 논증보다도 더 강력하게 기독교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었어. (에필로그에서)
역자주: 인터넷 교보문고와 알라딘에서 찾아보면, 존 맥아더의 책들 가운데 번역된 책은 141권에 달하며, 현재 66권 정도가 유통되고 있다.
6. 출판사 책소개
한국 사회는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또 다시 경험했다. 진영으로 갈라진 사회가 얼마나 적대적인지를 목격하고 있다. 또한 “지구 종말 시계”(The Doomsday Clock)는 작년보다 4초나 더 가까워진 “85초 전”으로 앞당겨졌다(2026년 1월 28일). 그러나 이스라엘과 미국은 국제법이나 교전규칙, 심지어 UN의 역할을 무시한 채 전쟁 개시 7일 동안 이란의 학교 20곳(UNICEF 보고), 병원 13곳(WHO 보고)을 폭격했다. 무고한 어린이들까지 대량학살하여 원한과 적개심과 복수심을 타오르게 만드는 중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본거지였던 미국이 인류 역사상 모든 제국처럼 광기에 사로잡혀 몰락해가는 모습이다.
인류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들에 대한 해결 가능성이 멀어질수록, 결국 인류의 미래는 그 복합적 위기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자유민주주의와 UN의 역할을 지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크리스천 파시즘과 시민신학의 희망을 다룬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단적인 예로,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최근 주식 시장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청소년들은 서울 지역에서 최근 3년 동안 “자살 시도와 자해 학생이 3배 이상 크게 늘었다”(경향신문, 2025/10/20). 밝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할 미래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많이 비극적인 결정을 하는 시절이 우리 민족의 역사상 과연 있었는가? 최근에 전 세계적인 십대 우울증이 2.5배 증가하고, 여자 청소년 자살률이 167% 증가한 현실을 분석한 베스트셀러에 대한 추천사에서 최재천 교수는 “스마트폰과 SNS로 아이들 뇌를 망가뜨린 어른들의 직무유기를 고발한다”고 썼다. 이 책은 전 세계 선진국들에서 급격하게 죽어가는 교회 현실과 우익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무너져내리는 현실에 대해, 단순히 “어른들의 직무유기를 고발하는” 책이라기보다 기독교인들과 무종교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이 책은 세계적으로 지난 50년 동안 무슬림 인구 비율은 크게 증가하고(15.5% -> 25.5%), 가톨릭(17.8% -> 15.5%)과 불교(6.3% -> 6.6%)는 큰 변화가 없지만, 유럽, 북미, 한국 등 선진국들에서는 기독교의 임종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외면하거나, “말세 현상”으로 체념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유대인 무신론자를 보내셔서 기독교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살아날 길을 보여주시는 것 같은 도전적인 책이다. 특히 청년층의 무종교인 비율이 거의 80%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는 한국의 현실은 과연 우리 사회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선진국들에서 기독교가 급속하게 몰락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진보적인 교회뿐 아니라 보수적인 교회도 10년 후, 또는 25년 후에도 존속할 수 있는가? 교회가 점차 노령화하고 몰락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교회를 “얄팍하게” 만들거나 “날카롭게” 만드는가? “두터운 기독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에큐메니칼 교회의 약점은 무엇이며, 에반젤리칼 교회의 결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
여전히 전쟁과 대량학살이 반복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답을 찾기가 어려워 종교가 올바른 답을 주어야만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는 답을 주는 삶의 근본적 문제들은 무엇인가? 종교는 본래 삶의 근본적 문제들에 답을 줌으로써 문명을 이끌어가는 창조적 기능을 수행했지만, 오늘날 인류가 환경 파괴와 핵 위기로 인해 “멸종 위기종”이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종교의 도움이 절실한 시기에, 환경 파괴와 전쟁의 책임이 큰 선진국들에서 “기독교 이후 시대”를 맞이한 것이 세속화 영향 때문인가, 아니면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인가?
“인류 역사는 자유 의식의 진보 과정”(헤겔)이라는 뜻은 “자유민주주주의 발전 과정”이며 또한 “시민의식의 성장 과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역사의 종말>(프랜시스 후쿠야마)로 결론지은 이런 낙관적 자유주의적 진보 역사관에 대한 비판으로, 인류 역사는 오히려 “새로운 통치 기술의 확대 과정”(푸코)이며 “전 지구적 경찰국가화”(윌리엄 로빈슨)로 보는 비판적 관점에서도 시민의 저항과 연대를 통해 정의를 이루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기독교는 이제까지 성경에 기초한 보편적 인권과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시민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불의와 학살에 맞서 정의와 모든 계급의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노예제 철폐와 시민권 운동 등 저항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기독교는 지난 50년 동안 혐오와 차별과 배제를 부추기는 지배주의, 우월주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로 퇴행했는가? 인류가 직면한 기후 붕괴와 문명 붕괴의 위기에 대처하기에도 시간이 매우 촉박한 현실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도대체 오늘날 사회적으로 무슨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에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13.6%에 불과하며, 또한 응답자의 47.1%는 한국 교회를 “극우”로 인식할 정도로 “반동적”이라고 비난을 받게 되었는가?
왜 세계는 점차 혐오와 폭력의 야만의 시대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가?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전쟁은 모든 폭력적 제국의 어리석은 몰락을 반복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철저히 반복음적인 트럼프를 지지하는 대다수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는가? 경제적 안정과 이윤만 보장된다면 군국주의나 파시즘조차 환영하게 된 반복음적 현실의 신학적 뿌리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전쟁 없이 존속할 수 있는가? 탁월한 신학자들과 영성가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목회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서민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지고, 가치는 더욱 무너지고 있고, 문명이 붕괴하는 현실 앞에서, 교회는 인생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설득력 있는 답을 준비할 것이며, 무엇을 새롭게 반성하고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 가뭄과 산불, 기후 난민이 증가하고 식량난이 악화될수록, AI 로봇의 도입으로 실업자가 늘어날수록, 정부가 더 이상 불평등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해 불만이 쌓일수록 이미 서구에서도 극단주의 포퓰리스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현실에서, 날이 갈수록 민주주의는 더욱 취약하게 될 미래에 시민의식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주로 청년들이 중심이 된 촛불혁명과 응원봉의 외침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한 의견 불일치에 대한 타협을 통해 어떻게 적대감을 치유함으로써 한국의 미래에 기여할 것이며, 기독교는 이 사회적 분열과 아픔과 표징에 어떻게 응답하며 참여할 것인가? 내란을 막아낸 시민들의 촛불혁명과 응원봉의 외침을, 앞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만들기 위해 진보 세력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주식과 인공지능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는 시장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경제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인공지능이나 기후 재난이 초래할 양극화의 악화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정부에 대한 불만과 계급 갈등이 파시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큰데, 기독교는 어떻게 이런 문명 붕괴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가? 적대적 진영으로 분리된 날 선 사회에서, 심지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크리스천 파시스트들을 어떻게 우리의 형제자매로 사랑할 것인가? 의견 차이와 대립이 불가피한 민주주의에서 교회는 어떻게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한 마디로, 이 책은 서로 죽일 듯이 미워하며 진영으로 갈라져 싸우는 오늘의 세계 현실을 치유할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한다. 세계 곳곳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횡행하여 평화를 파괴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오늘날 인류의 미래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과 예수의 정신을 지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직한 대답에 목마른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인구의 절반이 넘는 무종교인들을 위해 무신론자의 관점에서 예수의 의미를 설명한 책이다. 특히 전통적인 교회를 떠나 무종교인이 된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게 도와주는 책이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촛불과 응원봉을 든 사람들의 외침을 제도화하는 데서 소위 “영성 없는 진보”를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기도 하다.

The Myth of Liberal Neutrality
Review: ‘Cross Purposes’ by Jonathan Rauch
February 4, 2025 | Bob Thune
어떤 이들은 우리 시대를 “후기 근대(late-modern)” 시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근대주의의 황혼 속에 살고 있다. 근대주의는 산업혁명, 과학혁명, 그리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거대한 문화적·정치적 운동이다.
근대 시대의 정치철학은 자유주의(liberalism)다. 여기서 말하는 “리버럴”은 좌파 대 우파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liberty)”라는 의미다. 자유, 독립, 개인의 권리는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들이다. 칸트, 로크, 루소는 그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 매디슨, 제퍼슨, 해밀턴은 이러한 사상을 미국 건국 과정에서 실제 정치에 적용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자유주의가 죽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패트릭 드닌은 2018년 저서 Why Liberalism Failed에서 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한 결과 자유주의가 사회적 유대를 해체하고 문화적 연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이들도 많다. 포스트-리버럴 비평가들은 앞으로 무엇이 오든 간에 그것이 건국의 아버지들이 말하던 옛 자유주의로의 회귀는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배는 이미 물이 차오르고 있으며, 역사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조너선 라우치는 이러한 주장에 반박한다. 그는 이 배를 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새롭게 하고, 재건하며,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그의 책 Cross Purposes: Christianity’s Broken Bargain with Democracy에서 그는 자유주의가 세계에 가져온 긍정적 성과들을 강조한다. 개인 권리에 대한 강조, 종교 전쟁과 박해의 종식, 경제적 번영과 과학적 탐구의 발전 등이 그것이다.
그는 포스트-리버럴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자유주의가 스스로의 몰락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기독교가 문제라는 것이다.
라우치는 기독교가 자유민주주의와 맺은 “약속”을 깨뜨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기독교인들이 그 약속에 다시 헌신한다면—자유주의는 통치 원리를 제공하고, 기독교는 도덕적·영적 토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미국 민주주의는 다시 번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와 민주주의가 합리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두 체제는 서로 목적이 어긋난 상태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21쪽)
독자들이 “기독교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할 때, 라우치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기독교가 올바른 정렬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조건을 설정하고, 기독교가 이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우치의 주장뿐 아니라 자유주의 자체의 치명적 결함이다. 중립을 가장하지만, 자유주의는 사실상 자신의 도덕적 명령들을 몰래 끼워 넣는다. 그리고 미국 공화국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깨진 약속”이 아니라 바로 그 점이다.
자유주의의 숨겨진 가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종종 자유주의가 중립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선에 대한 확정적 비전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시민들이 서로의 차이를 조정하고 함께 공공선을 찾을 수 있도록 절차적 규범의 체계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라우치의 표현에 따르면,
“차이가 발생할 때 [자유주의 체제는] 공적 토론과 개방적이고 분권화된 규칙 기반 절차를 통해 그것을 해결한다.” (12쪽)
이것이 우리가 미국 민주주의에서 사랑하는 부분이다. 수정헌법 제1조, 권리장전, 권력 분립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을 위해 자유의 축복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그 자유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할 자유, 말할 자유, 살아갈 자유가 포함된다. 단,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다.
절차적 자유주의는 훌륭한 제도다.
“매우 서로 다른 3억5천만 명이 사는 현대 국가에서 정치적·도덕적 불일치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자유주의—우리의 경우 제임스 매디슨의 자유주의—만이 그것을 관리할 수 있음이 입증된 체제다.” (48쪽)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정치적·도덕적 불일치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강요하는 것이다.
라우치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주의가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법과 선거 같은 국가 절차에 대해서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핵심 원칙과 같은 가치들에 대해서는 ‘중립적’일 수 없다. 만약 그 원칙이 자유주의가 ‘은밀하게 세상을 다시 만드는’ 이미지라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48쪽)
결국 자유주의는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실질적인 선의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에 따라 세상을 재구성하려 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이 직면하는 딜레마가 드러난다. 우리가 자유주의를 말할 때 그것은 서로 다른 집단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도록 하는 중립적 민주 절차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특정한 선의 비전을 강요하는 도덕적 세계관을 의미하는가?
한 페이지에서는 라우치가 자유주의를 “모든 사람이 같은 규칙을 따르고 같은 권리를 누리는 체제”라고 칭찬한다(12쪽). 그러나 몇 페이지 뒤에서는 자유주의가 “계몽된 세속적 가치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말한다(15쪽).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은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자유주의가 중립적 체제라면 가치에 대해 불가지론적이어야 한다. 반대로 특정한 도덕적 가치를 주장한다면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이중 언어를 이해할 때, 왜 그것이 결국 신앙적 기독교와 충돌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기독교는 중립적이고 절차적인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양립 가능하다. 사실 그러한 정치 체제는 기독교 문명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가 담긴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양립하기 어렵다.
기독교가 민주주의와 맺은 “약속”을 깨뜨린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애초에 그런 약속을 맺은 적이 없다. 오히려 후기 단계의 자유주의가 스스로에게 기독교인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는지 규정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에서 실제로 깨진 것은 바로 그 권리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
지난 8년 동안 자유주의 가치에 대한 거부는 때로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다. 라우치에게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책 제2장은 “Sharp Christianity”에 대한 비판에 할애되어 있다. 이는 “MAGA 가치와 결합한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를 의미한다(73쪽).
라우치는 트럼프를 문화 전쟁의 보복과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신앙적 원칙을 포기한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후보로 본다. 그러나 2024년 선거 이후 이러한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트럼프를 다시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단지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후기 자유주의 사회의 핵심 요소들에 실망한 다문화적이고 다세대적인 유권자 연합이었다.
라우치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자유주의 사회는 서로 연결된 세 가지 사회 시스템에 의존한다. 정치적 선택을 위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 선택을 위한 시장 자본주의, 그리고 인식적 선택을 위한 과학이다.” (12쪽)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이 세 시스템 모두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가치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정치 지도자들은 시민들의 예배 모임을 금지하면서도 거리의 시위는 허용했다. 미국의 거대 기술 기업들은 “민주주의 보호”라는 명분 아래 정부 기관과 협력하여 “허위 정보”를 검열했다. 또한 과학의 권위는 봉쇄 정책을 강요하는 데 사용되었다.
라우치는 말한다.
“자유주의 사회 시스템의 특징은 동일한 규칙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12쪽)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동일한 규칙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진보적 정통성을 따르는 시민들은 우대받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배척된다.
결국 자유주의도 또 다른 형태의 종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미국 시민들이 그 종교를 거부하고 있다.
라우치가 자유주의의 교조적 성격을 보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Cross Purposes는 읽기 어렵다. 그의 기독교 비판 가운데 일부는 타당하고 통찰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종교를 더 잘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는 거의 자각이 없는 듯 보인다.
늘 등장하는 익숙한 적들이 있다. “백인 복음주의 미국”,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문화 전쟁의 전사들, 트럼프 지지자들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 정치신학에 대한 진지한 논의나 왜 일부 미국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성실한 탐구는 부족하다.
후기 자유주의에 대한 비전
마지막 장에서 라우치는 미국 기독교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모르몬교(LDS 교회)를 사례로 든다.
그는 모르몬교가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해 교리 차원에서는 유지하면서도 사회 정책 차원에서는 타협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추측한다.
“왜 어떤 사람이 동성애 행위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다고 믿으면서도 LGBT 권리에 대해 타협할 수 있을까? 왜 LDS 교회가 유타 타협안과 Respect for Marriage Act를 지지했을까? 그것은 그러한 조치들이 교회가 자신의 제도 안에서 결혼과 성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할 자유를 보호하는 동시에, 더 넓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결혼 선택을 할 자유도 보호하기 때문이다.” (116–117쪽)
결국 이것이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유일한 “거래”다. 종교적 가치는 종교 기관 내부에서는 허용되지만, 더 넓은 사회에서는 자유주의의 가치—즉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을 할 자유—가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미국인들이 이러한 거래를 점점 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약 기독교와 자유주의가 서로 목적이 충돌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비자유주의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주의가 하나의 종교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핵심 교리들이 이제 도전을 받고 있다.
라우치는 기독교인들에게 종교를 더 잘 실천하는 방법을 강의하지만, 자신이 따르는 종교에는 거의 자각이 없는 듯하다.
이 책은 문제를 거의 정확히 진단할 뻔했다. 거의 후기 근대 민주주의의 병을 이해할 뻔했다. 거의 미국 복음주의의 분열을 설명할 뻔했다. 거의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변호를 제시할 뻔했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왜 부활할 수 없는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Cross Purposes는 팟캐스트 인터뷰 몇 건과 뉴욕 타임스의 호의적인 서평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새로운 지지자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