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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기연 2012.10.12 09:30 글쓴이
     

    담임선생님 예수



    홍 정 수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쓰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쓰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방식은, 질문이 던져진 상황, 질문자의 욕구에 따라 그 대답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적이냐 동지냐를 묻는 질문일 수도 있고, 촌수를 따지는 질문일 수도 있고, 국적, 동창 등 집단 소속을 따져보자는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런 질문들은 어쩌면 대답하기가 그리 어려운 질문들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대답하면 그만이요, 그 대답들은 일정 기간 동안 늘 정답의 자리를 지킬 수가 있을 게다. 그러나 만일,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사람의 속알맹이, 정체성을 묻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사뭇 달라진다. 어쩜 정답이 없는 질문일지로 모른다. 특히 나 자신에 묻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곧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생의 가을을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이제껏 의지하고 살아온 그 이유를 마침내 잘 모르겠다는 서글픈 지점을 통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방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자주 생각해 본다: 출신? 업적? 수입 정도? 인종과 국적? 속한 단체(회원권), 즐기고 있는 놀이(골프 회원권)?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은 그 사람(나, 그리고 당신)의 속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연과 역사적 상황의 작용이, 그런 변수들에 대하여는, 아주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사람의 정체성은, 믿음, 희망,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혹은 희비(喜悲, 희로애락)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혹은 꿈/비전에서 드러난다고.

    그리고 나의 경우, “나의 예수”를 말하는 게 곧 그 대답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가? 그것을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에 대하여 말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2. 나는 종교적 배경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종교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 한편, 무당 문화에 대하여는 친숙하지만, 그것은 일상 외적 현상이었다. 오늘날의 연예 프로그램 같은 것이었다.

    종교가 만일, 신(하나님이든 한울님이든)과 관계되는 일, 성직자와 관계되는 일, 고정된 일정 가르침, 전통적인 집단 행위 등에 관계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종교에 흥미를 둔 적이 없다. 옛날, 어린 시절에도 그러하였고, 환갑이 넘은 지금, 목회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도 그러하다. 교회에 참여하고, 신도들을 돌보는 일은 나에게 종교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범주 하나를 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학교 놀이이다.

    인간의 유한성, 인간의 부단한 초월 갈망1)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특정 대상을 믿고, 의지하고, 받드는 행위는 인간 자존심에 대한 공격이라는 어린 시절의 생각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예배하는 신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누군가 나에게 성실히 들려준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인간 완성에 결정적 도움을 준다면, 물론 그런 신을 예배하는 일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테다.

    예를 들면, 무당(무속) 문화에 나는 익숙해 있다. 바닷가2)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 어린 시절에는 연예 활동이 전무한 탓으로, 교회의 부흥회와 떠돌이 약장수의 놀이마당을 제외하면 굿은 흥미진진한 마을잔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굿을 벌이고, 구경하는 것은, 나중에 접하게 된 기독교 문화와는 근본에 있어 다르다. 내가 개인적으로 직접 발을 들여 놓고 참여함이 기독교와 나의 관계 설정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나, 굿은 그냥 “구경”만 하면 되었다. 즉 내가 실존적인 관계를 설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굿에 대하여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자라났다. 친척 중에도 무당이 있었지만, 무속인들은 나를 자기네들의 집단행동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전도)을 하지 않았다. 결코. “구경”이 끝나면, 우리는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굿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곧 잃어버린 일상 속의 제 자리, 그 제 자리로의 복귀, 그것이 굿의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무당에게는 돈벌이가 목표이겠지만). 이 점에도 오늘날의 연예계 활동과 본질에 있어 닮았다. 그들의 일은 나의 일상 외곽 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나의 일상에 도움을 준다. 잘 굴러가도록. 그러나 기독교는 어떠한가? 예수를 만남은 어떠한가? 적어도 나의 경우, 그것은 일상 중앙의 일이었다. 이 점에서, 굿이나 연예물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리고 이 점이 나의 일생을 사로잡았다. 내 삶 속에도 일거리가 비로소 생긴 셈이다.


    3. 나의 어린 시절에는, 경제적 힘, 정치적 힘을 겪어보지 못하였다. 단지 담임선생님이 최고의 실력자였고, 나에게 예수는 담임선생님이셨다.

    중3, 졸업반, 이른 봄날, 수요일 저녁, “놀러가자!” 하는 친구들 서너 명의 말을 듣고 따라 나선 것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넌 셈이 되었다. 강원도, 탄광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탄광촌이라는 말은, 죄송하지만, 인정을 주고받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을 뜻한다. 깜깜한 땅 밑에 들어가 가족을 위해 채광을 하는 광부들, 그들에게는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들, 그리고 생계 걱정, 그것이 전부였다. 돈이 조금만 모이면, 훌쩍,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어디론가로 떠나게 된다. 따라서 낯선 사람에 대한 감정, 그것도 긍정적 감정이라는 건 있을 필요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내가 친구들에게 끌려, “놀러간” 곳은 바로 철암장로교회였다. 문간에서부터 나를 웃음으로 맞이해주는 한 학생의 친절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학생은 나와 같은 성 씨(우리는 “종씨”라고 불렀다)였는데, 그 한 사람의 미소가 나의 생애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함정(혹은 구명정)일 줄은 당시엔 정말 몰랐다. 그날 교회라는 곳으로 “놀러나갔던” 친구들은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교회라는 곳이 사춘기 남학생들에게 “놀 만한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달랐다. 크게 달랐다. 원초적인 호기심이 발동하게 되었다. 이 색다른 한 사람의 친절, 미소, 그 배후에 도대체 뭐가 있을까? 무곡 찬송가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어느 날(찬송가책이란 게 본래, 다, 그런 줄 알았다), 성경책이라는 걸 사람들이 들고 다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교과서 외에는 돈을 주고 책을 사 본 경험이 나에겐 없었다. 살 필요도 없었고, 살 돈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성경책이라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책에 무슨 비밀스런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탄광촌 한가운데서도 색다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아직은 나쁜 기독교인들도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터였다). 수소문 하여 책방을 찾아냈다. 신약성서라는 책, 누런 종이 표지의 얇은 책, 20원이었다. 나에게는 10원밖에 없었다. 책방 주인에게 외상으로 책을 구입하였다. 얼마나 감격하였던지.

    그러나 집에서 와,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아뿔사 ...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낳고 ... 낳고 ... 낳고 .... 근데, 그 이름들이 도대체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왜 그때 누군가가 신약성경은 여러 권이 한데 묶여 있는 책이며, 둘째 권부터 읽어도 된다고 말을 해 주지 않았던고! 그러나 그 덕분에 일찍부터 성경은 거짓말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4대, 14대, 14대 ... 족보를 세어보았다. 순전히 읽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은 지금, 몰몬 경이나 코란을 읽을 때 똑같이 경험한다). 그리고는 알아냈다. 14대가 아닌 대목도 버젓이 들어 있다는 걸, 혼자서 알아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학생은 여전히 말 걸어 주고, 환대해 주는 유일한 학생이었으며, 나는 그 배후를 알고 싶었으니까.

    이렇게 하여 나는 예수를 믿는 매력적인 사람3)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 인연은 호기심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그 후 내가 거기에 계속하여 묶여 있게 된 건 “풀어야 할 숙제”를 그 안에서 발견한 덕이다. 한 사람을 저렇게 매력적으로 만든 힘, 그 힘의 비밀을 내가 알아내면, 천 사람, 만 사람도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들로 변화되게 하는 데 보탬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설레임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중학생 시절에 내가 만난 인생 숙제 1번이었다. 한 사람의 매력, 그 뒤에 숨어 있는 힘은 무엇인가?


    4. 고교시절, 오순절계통의 체험을 충분히 하였지만, 그것은 나에게 호기심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였다. 그 체험에 실생활에 주는 차이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숙제 2번은 고등학교 시절에 만났다. “예수님이 신이라는 걸 믿으셔요?” 세례문답 시간, 담임 목사님의 질문이었다.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는 질문, 잠시 망설이다 ... 눈치로 대답하였다. “예, 믿습니다.” 나는 교회라는 곳에서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걸 눈치로 때려 맞추려는 참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곧 이어, 목사님은 질문을 또 던졌다.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걸 믿으셔요?” 어~~엉! 나는 아연실색, 앞이 깜깜해졌다. 아, 교회라는 곳은 뭔가 세상과는 다른 어법을 사용하고 있구나! 참새면 참새, 할미꽃이면 할미꽃, 어찌 할미꽃이면서도 동시에 참새인 물건이 존재한단 말인가? 왜 교회는 그런 걸 믿으라 강요하는가? 나는 그냥 있었다.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목사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도 믿어야 합니다.” “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 도대체 그 매력적이던 인간성의 배후 세력이던 기독교, 이제는 간 곳 없고, 왜 기독교는 “말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가? 그 사연이 알고 싶어졌다. 그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교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들리는 많은 이야기를 가르쳤다. 예컨대, 곰의 후손인 나의 운명이 이스라엘 사람 아담 탓으로 오래 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둥 ... 사람은 나면서 죄인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둥 ...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둥 ....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둥 ... 참으로 기막힌 소리만 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기독교라는 것에서 느낀 매우 심각한 부정적인 경험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이런 이상한 말들에 대하여 불편하지 않을까? 내가 그 이유를 알아보리라. 닥치는 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뭔가를 알고 있을 법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내가 미친 듯이 부흥회를 쫓아다닌 것도 이 숙제를 풀기 위함이었다. 내노라는 부흥사들, 전국을 휩쓸고 있던 “유명한 사람들”을 시골, 동해에서도 고스란히 만나보았다. 그런데 그 부흥사들은 하나같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체험”을 강조하고 있었다. 당시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나에게는 어쩜 “종교적” 체험을 실제로 해 본다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이해하는 더 없이 좋은 지름길일지도 모른다는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방언, 치유, 입신(이것만은 내가 직접 한 건 아니다), 귀신 추방 등등을 체험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숙제 1번을 푸는 데도 2번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꺾일 수 없는 호기심 덩어리인 나는 “종교체험”을 “깊이”한 사람들의 실생활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작은 마을에서 형제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청년 회원들의 실생활을 시간을 두고 나 홀로 관찰하였다.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투시의 은사,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는 입신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 귀신들과 대화를 하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 그들의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하여 “아름답도록 큰 매혹”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내가 체험한 각종 신비체험에 대한 이해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관심의 뚜껑을 덮고,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종교 체험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데, 왜 부흥사들은 자꾸만 체험을 강조한단 말인가? 왜 기독교인들은 말 안 되는 소리와 행동을 서슴지 않는가? 그 깊은 비밀을 캐고 싶었다(목회자가 될 생각으로 신학교에 들어간 건 전혀 아니다. 그래야 한다는 걸 몰랐다.)


    5. 그러나 내가 신학교에서 만난 교수들은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만난, 성실하고 실력 있는 교사들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에서 어설프게 주어들은, 익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남은 길은 한 가지, 내 인생의 숙제를 풀기 위해 유학의 길을 택하는 수밖에.


    6. 유학 기간 4년 동안 내가 교수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 무엇이 기독교인들을 매혹적인 사람으로 만드는가? 말 되는 기독교 이야기는 없는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철저히 하나의 초점을 갖고 있었다. 즉 사람인 예수 이야기로부터!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그건 신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줄기차게 이 한 질문을 던졌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아니면, 안 되는 건 뭐란 말인가? 예수, 그는 무엇이 그리 유별난가(what's so special)?4) 어거스틴 세미나 시간을 마친 후, 말라드 교수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많은 걸 배웠다.” 즉 어거스틴을 평생 읽어온 교수였지만, 어거스틴의 글들 속에 타종교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계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7. 유학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대가들일수록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놀라운 사실, 그것은 배우고 익히고, 물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내가 신학의 거장이라 할 학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본 질문은, “왜 하필 예수를 믿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눈을 떠 보니, 나는 이미 기독교인이었다 하는 것이다: “It just happened to me.” 이것은 철저한 칸티안인 고든 카프만(Gordon Kaufman)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너의 문제이니, 네가 풀어야 한다.”5)


    8. 그러면 나의 대답은 무엇인가?

    예수는 신인가? 십자가 사건은 나에게 무엇인가? 부활은 또 무엇인가? 그의 한계는 무엇인가? “오직 예수!”는 버려야 하는가? 이런 통상적인 질문들을 간략히 다루면서, 나의 숙제에 대한 나의 해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8-1. 질문: 예수가 신인가?

           대답: “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도대체 왜 등장하는가?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사람들의 일상과 일상 언어를 들여다보면 이미, 그리고 아직도 그런 “탈선적” 어법이 사용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수호천사입니다.” “당신 없인 난 못살아요!” “내 목숨은 당신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사용하는 예수 신격에 대한 말들이 이렇듯 우리들의 일상 언어와 이어져 있고,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언어라면, 우리가 그런 고백(상징)을 수락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일상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러면 나는 왜 왜 예수에게 신격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마가 7:13)


    복음서의 많은 말들 중 이 구절이 나와 나의 예수의 접선장이다. 예수는 교사요, 혁명가이며, 열정의 사람이라는 점이 이 한 마디에 충분히 드러나 있으며, 예수의 짧은 생애는 이 한 마디 말로 충분히 해명된다. 즉 “기성 정답은 정답이 못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가르쳤고,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셨고, 그것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구원(완성)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방식이 나의 눈을 열어 주었고, 입을 열어 주었고, (시골, 고정관념에) 갇혀 살던 생명이 해방되어 꽃을 피우게(온 세상을 상대로 하는 삶을 구가하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올 “신”이란 존재가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 신이 이보다 더 큰일을 나에게 해 주랴! 그는 오후 4시의, 버려진, 남겨진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나에게 다가와, 필생의 숙제를 안겨 주셨다.


    8-2. 질문: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대답: 달리 죽었다 할지라도, 그는 나의 메시아!

    나는 사람의 피, 혹은 자기 자식의 피를 하늘에서 받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다음, “아들아, 네 이름을 부르는 죄인들의 죄악에 대하여는 내가 눈감아 주마!” 하고 조크를 하시는 신을 한 번도 예배해 본 적이 없다. 어떤 제사도 나는 거부하였으며, 특히 어떤 명분으로든 인간희생제를 요구한다면, 나는 그런 신을 단연코 “사탄”이라 이름 부를 것이다. 예수가 나의 메시아인 것은 그가 죽을 때 “피 흘림”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피 흘리고 죽는 죽음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많다. 예수의 “신”격이 인간의 시적, 상징적 언표이듯, “십자가” 역시 하나의 상징적 언표이다. 옥살이 끝에 자연사하였다면, 우리는 “옥살이”를 상징으로 내걸 것이며, (흑암이 사람을 벼랑으로 몰아붙여, 항복을 강요하고 있는 찰나에, 투항을 거부하고) “부엉 바위에서 투신자살”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예수의 일생을 “부엉바위 투신자살”로 상징할 것이다. 다른 방도가 있을까? 십자가, 그것은 그의 삶의 압축파일이요 정점이지만, 그 특정 형식은 부수적, 우연적 요소일 뿐이다. 결코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8-3. 질문: 예수 부활은 뭘 말해 주는가?

           대답: 그의 비전은 죽음 세력도 이긴다!

    모든 때 이른 죽음은 억울하다. 예수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죽었지만, 그의 삶과 죽음의 명분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채 당한 것이라는 점에서 “억울한 죽음”을 죽은 것이다. 그리고 훗날, 따르는 자들은 그의 죽음(삶의 압축파일)에서 들려오는 “살아 있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음성을 통하여 예수 추종자들은, 그의 사후, 예수를 계속하여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핵심은 예수의 말, 예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린 그림이 지금도 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느냐 않느냐 함이 중요할 따름이다.


    8-4. 질문: 역사 속에 살았다면, 예수의 가르침에도 한계가                 있을 것 아닌가?

           대답: 물론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 문서는 그 시대의 것이다. 이름하여 “조건적”이다. 예수의 삶은 종교-정치적 압제라는 특정 구조-문화 속에서 시달리는 짓눌린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산다는 게 이런 거야!” 하는 감격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큰 공헌이요, 독특한 가르침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당하고, 같은 희망을 가꾸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오늘날 무수한 목회자들이, 그리고 신도들이 역사 속에 살았던 구체적 인물 예수에게보다는 “신”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 속의 인물 예수는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결코 아니다.

    예컨대, 가정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자식의 육아와 진학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일에 쫒기고 있는 블루칼라들, 싫컷 살았으되 아직도 더 살아야 하는 치매 노인들, 정신적 장애인들 등등 많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줄 위로는 없다. 물론 사람들의 존재 조건이란 게 그 깊은 데서는 공통되기 때문에(예, 유한성, 개체성, 관계성 등등) “원론적” 영감을 줄 수 있다.


    8-5. 그렇다면 질문: “오직 예수!”는 버려야 하는가?

           대답: 그럴 필요는 없다.

    “오직 예수!”라는 구호를, 만일, 감격을 겪은 예수 추종자들이 실제로 내뱉은 말이라면, 나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며, 개인적으로, 지금도 옳은 혹은 유용한 단판이라고 믿는다. 내가 예수 안에서 얻는 놀라운 감격, 나의 숙제에 대한 애정이 그 어떤 스승의 영감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늘 재확인하는, 그런 자리라는 말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르침, 낯선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호기심을 가지고 달려들지만, 결과는 언제나, 아직도, “나에게는 역시 예수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이민을 왔듯이, 바울이 개종을 하였듯이, 어느 날 “아, 이것이었구나!” 하고 새로운 가르침 앞에 나를 바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진지하게 열려 있다. 재론의 여지가 필요 없는 당연한 이치이다.


    9. 예수, 아름다움의 사람

    내가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내가 내 방식으로 신약성서를 통하여 읽어낸 예수이다. 진짜 예수가 아닐 수도 있다. 진짜 예수라는 게 예수님 생전에 그가 그 자신을 이해한 방식의 예수를 가리킨다면 말이다.

    그는 진리나 정의를 넘어서 있는 지대에 이른 사람, 곧 아름다움의 맛을 안 사람이다. 고관대작들이라 하여 버리거나, 낮고 천한 서민이라 하여 그 자체로 우러러 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계급, 집단을 단위로 “편을 드는” 사람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개별자의 정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편을 들지만” 계급 자체 때문에 편을 들지는 않는다 말이다. 전라도 편을 들고, 북한 편을 들고 등등 ... 그런 조잡한 살구는 아니다. 사람은 집단 속에 살지만, 개체성이 있고 특수한 정황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내 맘대로 믿는다. 섬세한 감각의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이 말이 특정 집단의 공유성을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상한 말로 해석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진리라는 이름이, 정의라는 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던고! 그런 추상명사 하나를 굳이 사용하여, 예수의 길을 상징하고자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아름다움” 곧 “함께 어울리는, 고통스런 평화”를 들고 싶다. 그리고 최근의 과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예수의 이 비전은 곧 생명사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상생자가 상극자를 이기라는 꿈).

    이 질서에 참여하는 자는, 내가 희망하기는, 이 땅에서 능히 하늘의 기쁨을 누린다. 그는 혼자 남을 때 오히려 속으로 웃을 수 있다: 내가 참여한 길이 생명의 길이야!

        

  • 한기연 2013.02.18 06:46 글쓴이
  • 한기연 2013.05.25 20:32 글쓴이

    교회개혁은 신학교육 개혁에서부터 / 홍정수 교수 강의 동영상

    http://vimeo.com/37357704

  • 한기연 2013.12.21 07:32 글쓴이

    캐럴을 들으며, - 무신론의 의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6176.html?_fr=m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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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50년까지 2도 상승하면 기후난민 최대 10억 명, 3도 상승하면 40억 명 이상이 죽게 된다 file 1,352
공지 한반도의 킬링필드, 민간인 학살 : 피로 물든 죽음의 땅, 그리고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들 2 1,719
공지 인류종말시계와 세계 전쟁, 그리고 시장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경제학 1,313
공지 AI 혁명, 특히 자율무기의 약속과 위험성, 그리고 파시즘 1,221
공지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의 도전 강연 동영상 (보통 책에 나오지 않는 귀한 사진 자료들 포함) 1,286
공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일상화된 이후 청소년 자살 급증 1 1,746
공지 기독교의 쇠퇴와 민주주의 위기, 신앙발달단계와 미래의 교회를 위한 신학 file 1,232
공지 매일 히로시마 원폭 80만 개씩 폭발하는 열이 바다를 데운다 12 file 1,647
공지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 예수의 복음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1 file 1,794
공지 프로젝트 2050 AweDEI 24 file 2,333
공지 동성애와 성경, 그리고 중보 종교와 나치 이데올로기 35 file 2,344
공지 행성의 깊은 밤과 한생명 신학운동 / 김준우 39 file 2,352
공지 지구의 성스러운 생명을 지키는 생태계 전사들 27 file 2,303
공지 기후 시민운동 전략 - 투자철회운동 및 기후 소송 55 2,033
공지 한국의 파시즘 '윤 어게인'보다 불평등이 더 무섭다 25 2,132
공지 환경소식 지구적자와 퍼펙트 스톰, 젊은이들의 절망과 자본주의 이후의 신학 65 2,763
공지 현장신학 만들기 / 홍정수 교수 1,971
공지 <소설 예수>의 작가 윤석철 인터뷰 3 2,401
공지 성서심층연구 <성서심층연구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2,053
공지 역사적 예수 크로산, <역사적 바울의 도전>. 정원진 목사 강의 동영상 3,660
공지 환경소식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0.3도 상승에 달린 인류의 운명 120 file 5,120
공지 기독교연구소 갤럽조사 한국인의 종교 1984-2021, 종교 현황과 종교 인식 3 file 2,853
공지 조직신학 갈릴리신학대학원 홍정수 박사, 구원론-행복론 강의(10강) 2,547
공지 역사적 예수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의 도전>, 정원진 목사 강연 동영상 1 3,450
공지 목회정보 코로나 이후 시대의 세계와 기독교 65 file 3,181
공지 환경소식 기후비상사태 선포와 기후비상내각 설치를 위한 긴급보고서 47 file 4,497
공지 기독교윤리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한국 교회 30 2,545
공지 환경소식 점차 산소가 부족해져 숨 쉬기 어렵게 된다/ 화석연료산업 제어방법 14 2,577
공지 역사적 예수 예수의 파격적인 가르침들은 어떤 경험들에서 생겨났을까? 1 2,740
공지 조직신학 예수초청장/참새예수 - 홍정수 박사의 조직신학교실 (동영상) 6 2,533
공지 조직신학 홍정수 박사 신학특강(동영상) 1 2,374
공지 가정사회소식 식인사회의 킬링필드, 이주노동자들 착취, 중대재해기업처벌법 24 2,464
공지 기독교윤리 인류의 '마지막 싸움' / 배를 돌리자 24 2,040
공지 가정사회소식 남성, 여성 아닌 제3의 성(간성) 3 3,066
공지 교회사 웨슬리 [표준설교 정신] 이어 받은 기도문들 52개 pdf파일 file 3,488
공지 조직신학 아우슈비츠에서의 하느님의 여성적 얼굴 1 file 3,266
공지 기독교윤리 빨간 지구 - 온실가스 시한폭탄에 이미 불이 붙었다 36 file 2,404
공지 기독교윤리 벌레들의 나라,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기독교 파시즘의 망령 39 file 2,899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2010) pdf파일 9 file 13,461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붕괴의 현실과 전망 그리고 대책> (2012) pdf 파일 file 12,590
공지 기독교윤리 <생태계의 위기와 기독교의 대응>(2000) pdf 파일 file 13,655
공지 기독교윤리 기후변화와 생태신학의 과제 (2017) 30 file 15,523
공지 가정사회소식 노령화: 남은 시간 7-8년뿐, 그 뒤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 장덕진 11 file 21,657
공지 역사적 예수 기후변화와 대멸종 시대의 예수의 복음 5 file 21,970
공지 기독교윤리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신학적 의미와 사목 과제 15 file 2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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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독교윤리 세월호참사 - 앉아서 기다리면 또 다시 떼죽음뿐 133 file 40,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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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독교윤리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한국 교회의 평화운동 자료 33 59,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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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PBS Frontline: From Jesus to Christ _ The First Christians (1) 1 152,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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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실천신학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성만찬/ 혼인주례자 상담체크 리스트 1 file 31,572
1034 팔레스타인에서의 첫 번째 대림절 file 11
1033 최종수 지음, 나애시덕 선교사의 생애와 사역 (영문 pdf 파일 첨부) file 9
1032 성서신학 카렌 암스트롱, <잃어버린 경전의 예술> 강연 요약 299
1031 제단의 변장한 늑대들 (교황 레오 14세 메시지) 370
1030 한반도 군사적 긴장 고조, 전쟁이 멀리 있지 않다 5 262
1029 RE100 늦어지면 수출 경쟁력,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21 252
1028 리처드 로어, 이현주 역, 래디칼 은총 파일 3 file 416
1027 플라스틱 80억 톤 생산, 2060년까지 3배 증가 135
1026 10년 후 초등학생 수 절반으로 준다 / 홍인기 1 198
1025 언론과 진실: 조작의 역사 /시사기획 창 172
1024 마태 6:25-34: 인간의 염려와 자연계 244
1023 이리와 어린 양과 어린 아이: 이사야서에 나타난 지구공동체의 다양한 변화 318
1022 오늘날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665
1021 역사적 예수 늦깎이의 아둔한 질문들 2 399
1020 토머스 머튼, <나무들이 침묵할 때>(2003) 439
1019 리처드 로어, <세상, 육신, 악마>(2021) 346
1018 가정사회소식 자살 없는 대선 file 156
1017 가정사회소식 치매인 돌봄에 관한 짧은 생각 / 최종수 file 283
1016 기독교연구소 토머스 머튼과 함께 하는 대림절과 성탄절 묵상 file 422
1015 환경소식 기후위기 시민 의회 소집과 그린 뉴딜 2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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