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일러두기: "감리교
생태목회연구소"창립을 환영
축하합니다. 아래 논문은
장석근
목사님과
이광섭
목사님이
생태목회에
대한
성서신학적
접근과
토대를
주문하신
것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논문입니다. 구약에서 한
편, 신약에서 한
편을
골라
보았습니다. 이 두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구의
관점에서
성서읽기 The Earth Bible 시리즈
전 5권이 전면에
내세운 "생태 정의의 6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먼저
그 '생태정의의 6원칙"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최종수)
생태정의의
6 원칙(Six
Ecojustice Principles)
1. 본래 고유가치 원칙(The Principle of
Intrinsic Worth)
온 우주와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 안에 본래 정체성과 고유의 천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삶에 실리적인 유익을 주기 때문에, 또는 신(조물주)의 손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태계의 복합체인 전 지구와 그 지구를 구성하는 바위로부터 무지개에 이르기까지 생물 무생물을 막론하고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생태계의 구성체이기 때문에 그 천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상호연결 원칙(The
Principle of Interconnectedness)
지구는 생존을 위하여 상호의존하고 상호연결 된 생물체들의 공동체이다.
지구는 자연법칙에 따라 통제되는 독립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기계적 구조물이 아니다.
지구 안의 모든 생물종과 그 생물종의 구성원들은 상호관계의 복합적인 연결망 안에 상호연결 되어있다.
그러므로 인간도 단지 그 지구 공동체의 일원일 뿐이다.
3. 목소리 원칙(The
Principle of Voice)
지구는 경축할 때는 물론 불의에 대항할 때에도 그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주체이다.
지구는 생물학적으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주체 또는 실체(living
entity)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이자 주체이지 엄격한 법칙으로 다스림 받는 객체 또는 기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또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4. 목적 원칙(The
Principle of Purpose)
온 우주와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역동적인 우주적 설계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설계의 목적 가운데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지구는 상호작용하는 생태계의 복합체로 짜인 설계 또는 목적에 따라 기능한다.
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생물 무생물들은 우주사건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5. 상호 보호관리직 원칙(The
Principle of Mutual Custodianship)
지구는 지구공동체의 다양성과 조화균형을 지속하기 위하여 피차 동반자로서 상호 보호관리직 책임을 감당해야 할 영역이지 지배를 위한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호관리직은 상호 파트너십 안에서 지구 공동체의 다른 보호관리직 담당자들과 더불어 동반자임을 일러줄 뿐이다.
6. 거부저항 원칙(The
Principle of Resistance)
지구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손으로 말미암는 불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인간들의 불의에 적극 거부 저항하고 있다.
땅이 동물들이,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다.
이리와 어린 양과 어린 아이: 이사야서에 나타난 지구공동체의 다양한 변화(Transformation)
by John W. Olley(호주 Murdoch University 구약학 교수, Baptist Theological
College of Western Australia 학장, 이사야서의 신학에 대한 전문적 학자. 특히 70인 역 이사야서를 연구했고 최근에는 70인 역 에스겔서를 연구하고 있다.)
서론
이사야서는 이사야와 당시 왕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하고 이 왕들과 예언자는 이사야서 내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곧 이어서 동물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사 1:3의 소와 나귀가 그것이다. 이사야서를 계속 읽다 보면 이사야서에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사야서에는 동물들에 대한 언급이 적어도 160개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야생 동물들과 어린 아이들이 함께 노는 목가적 장면을 볼 수 있고(사 11:6-9) 이와 비슷한 장면이 이사야서 끝머리에도 등장한다(사 65:25). 현재와 미래의 비전을 서술하는 가운데 인간 이외의 지구 공동체 구성원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허지만 그들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이들은 장식용과 상징용인가? 아니면 인간 사회의 참여자로 또는 인간 사회의 부속물로서 문학적 비유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 자체의 자존적 존재인가? 이사야서에 나오는 동물들에 대한 언급을 탐구해 볼 때 지구의 관점에서 성서읽기 프로젝트(the Earth Bible Project)가 채택한 생태정의 원칙들 대부분이 밝혀질 것이다.
다양성과 개성(Diversity and Individuality)
이사야서를 주욱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내 매우 다양한 동물들의 상세한 이름들 보게된다: 야생 동물들--두더지mole, 타조 ostrich, 야생 염소wild goat, 이리(하니에나)hyena, 승냥이jackal, 네가지 다른 말을 사용한 사자 lion, 표범leopard, 이리wolf, 곰bear, 고슴도치hedgehog; 날아 다니는 동물들--박쥐 bat, 꿀벌bee, 파리fly, 독수리eagle, 올빼미owl, 사다새pelican, 까마귀raven, 말똥가리buzzard, 메뚜기locust, 두루미 왜가리 학crane, 비둘기dove, 제비swallow, 나방moth;
파충류reptiles--독사adder, (이집트) 독사asp, 독사viper, 사나운 뱀fiery serpent; 기타 다른 모충 송충이caterpillars, 메뚜기rasshoppers, 벌레worms, 생쥐mice, 거미spiders.
여기에 가축들과 개들도 추가할 수 있다.
일반적인 뜻으로 ‘야생’(ehayyah, wild) 동물이라는 말은 단지 다섯 절에서만 등장하고 이 가운데 오직 두 절만 난폭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사 35:9, “사나운 짐승”; 56:9, 게걸스럽게 “먹으라”). 이것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언어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에스겔서에서 ‘야생’(ehayyah, wild)이라는 말은 겔 31:6, 13을 제와하고 언제나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용어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는 다양성을 인정 공감하고 있다. 참으로 토라(Torah)의 식품법 조항 외에 히브리 성서 가운데 다른 어느 것 보다도 이사야서에는 다양한 동물들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인상이 짙다.
이사야서는 짐승(동물)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다양한 행동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성서의 다른 곳과 세계 도처에서도 동물의 행동은 비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동물은 긍정적 역활 본보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서 첫머리에 임자를 아는 소와 나귀를 언급한 것이다(사 1:3). (참 흥미롭게도 바로 이 구절이 초기 기독교 때로부터 예수탄생 장면에 소와 나귀를 등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동물들과 대조 비교한 것들이 있는데 겁먹어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마치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다”(사 13:14)든가, “모압의 딸들은 떠다니는 새 같다”(사 16:2)든지, 또는 ‘제비 같이, 학 같이, 비둘기 같이 슬피우는’ 새들 같다(사 38:14)고 한다든가 아니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사 53:7)고 한다. (여기서 다시금 인간들의 부정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에스겔서와 대조된다.)
놀랍게도 이사야서에서는 인간들에 대하여 말하는 가운데 난폭한 동물들이 등장하는 곳은 오직 몇군데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공격하는 앗수르 사람들은 사자같다고 하며(사 5:29-30), 고레스는 “사나운 날짐승”에 비교하고 있다(사 46:11).
허지만 똑같은 동물들이 보호해주는 동물들이 될 수도 있다! 야웨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일에 불요불굴 대담한 사자와 같고(사 31:4) 날개치며 맴도는 새와 같다고 한다(사 31:5).
그리고 단지 나머지 구절은 숲 가운데 모든 집승들(즉 다른 나라들)에게 와서 게걸스럽게 먹으라는 부름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파수군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모르는 몰지각한 자들이기 때문이다(사 56:9-11).
여기에는 가축과 야생 동물들이 섞여 있다. 뜻깊게도 야생동물 이미지 가운데 폭력성과 취약성이 둘 다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사자는 공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호하기도 한다. 다양한 종류로 이루어진 그림은 풍부한 어휘와 함께 이사야서 전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생태 정의 6원칙 가운데) 본래 타고난 가치의 원칙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동물들은 그 다양성 가운데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지구 공동체 안에서 인간들과 더불어 함께 완전한 참가자로 포용(包容)되고 있다.
미래의 비전 가운데 야생 동물들의 적극적인 역할
야생 동물들이 야웨를 공경하다
특히 사 43:20을 강조하면서 Galambush는 제 2 이사야와 에스겔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유용한 것일 때 자연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따라 제2 이사야는 에스겔의 공리주의적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을 내고 광야가 못이 되게’(사 41:18-20) 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물이라는 선물은 놀라운 것이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 이사야에서는 물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한 축복인데 인간과 그들의 가축들에게뿐만 아니라 야생 동물들에게도 또한 축복이다. 야웨 하나님은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내어 마시게할 것’(사 43:20)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문제는 도대체 이들 동뭉들과 새들이 야웨 하나님을 존경한다(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러 주석가들이 위에 인용한 동물들도 물의 혜택을 공유한다는 Galambush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지만 야웨 하나님을 ‘존경한다’ 또는 ‘공경한다’는 것에 대해서 주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Bonnard라는 주석가는 산과 나무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제2 이사야 44:23, 49:13, 55:12)는 것과 비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야웨 존경(공경)의 내용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승냥이와 타조와 물을 연관시키고 있는 것은 사 34장-35장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장들은 이사야 나머지 둘째 부분으로 넘어가는 서론적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야 34장과 35장을 대조해 보면 메마르고 건조한 황무지(荒蕪地)와 풍부한 물
사이의 대조 그것이다. 황무지는
승냥이와 타조를 포함하여 여러 들짐승이 사는
곳이다. 풍부한 물 공급(사 35:6-7)과 함께 변화가 오고 있다: “승냥이의 눕던 곳이 곳이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다(사
35:7b). 이 구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승냥이에 대한 부정적 묘사라고 하기보다 이 구절은 단지 승냥이가 살던 곳은 흔히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의 반전과 안정된 상황에 대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동물들은 아직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 허지만 어떤 동물들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대로로 올라 가지 아니할 것”(사 35: 9)이다. 거기는 안전한 곳이다. 이것이 집승들이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을 해치지 아니함으로써 야웨 하나님을 ‘공경(존경)한다”’는 것일까?
야웨 공경(존경)이라는 말은 이사야서에 드물다. 공경 또는 존경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존경)하든 사람을 공경(존경)하든 반전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 한가지 예를 들면 사 43:20의 경우가 사 25:3의 하나님이 백성들을 압제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을 보게 될 때 “강한 민족”이 하나님을 공경(”주를 영화롭게”) 한다는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들도 땅의 반전을 인식하고 긍정함으로써 하나님을 공경(존졍)한다는 것인가? 이 점은 아시야 34장과 35장의 반전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사야서에서는 동물들이 단순이 물로 말미암아 혜택을 입는다는 것 이상으로 동물들도 하나님의 변화하게 하시는 활동을 긍정하고 있다.
옛날 주석가 두 분이 흥미로운 추가 설명과 함께 찬양의 원인이 되는 변화(transformation)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1892년 Delitzsch는 동물계의 이점을 넘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동물들의 즐거운 외침은 하나님에 대한 무의식적 찬양이다. 예언자는 피조물(창조)의 탄식에 귀를 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난의 끝은 또한 피조물의 고난의 끝이 될 것을 알고 있다.
여기 ‘무의식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수 있는 한편 비록 이사야서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고난에 대한 언급이 관심사이다.
1972년 Young은 이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동물들의 변화에 대한 생각이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가져오고 있다. 즉
사막과 광야는 어둠의 지역이고 거기 거하는 동물들은 어둠의 마력(魔力) 지배하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존경하고 있다. 하나님은 변화의 기적을 행하셨다.
이사야 43장 20절에는 축하하는 동물들의 놀라운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것은 생태정의 6원칙들 가운데 목소리 원칙에 해당한다.) 심지어 들짐승들 까지도 야웨 하나님 찬양에 활발한 참여자들이다. 동물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찬양을 공유하고 있다.
평화로운 왕국(The Peaceful Kingdom)
아마도 이사야서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 이미지는 아래 구절들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개역개정판)
중요한 변화는 있으나 비슷한 이야기가 ‘새 하늘과 새 땅’ 설명으로 이렇게 등장한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 65:25 개역개정판)
여기에 나타난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19세기 이전에는 단지 기독교 미술에서나 산발적으로 사용하였고,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문자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주장했던 저스틴 마터와 이레네우스 등 초기 기독교적 해석 외에 그 해석은 보통 우화적인(allegorical) 것이었다. 이사야의 이미지가 유명세를 탄 것은 주로 여러 다른 판본으로 그림을 그렸던 미국 퀘이커 교도 Edward Hicks(1780-1849) 때문이었다.
그는 본래 영국화가 Richard Westall이 그린 삽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Westall의 삽화는 “평화로운 왕국”이라는 제목으로 현대 성서 안에 들어 있다.
Westall은 어린 아이(이는 분명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에 초점을 두고 있으나 Hicks는 점차 인간 본성 가운데 호전적 요소의 상징으로 사자와 다른 동물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사야서의 이 부분 해석상의 문제는 세가지 측면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어린 아이의 역할; (2) 동물들의 중요성; (3) 사 11;6-9 말씀과 65: 25 말씀과의 관계 등이다.
1. 어린 아이의 역활
기독교 주석가들은 사 7:14의 임마누엘과 사 9:6의 아기에 대한 언급 및 이사야 11장 서두의 “이새의 뿌리”로 이어지는 것에서 흔히 기독론적 중요성을 보고 있다. 이러한 주석가들은 사 9:6 끝머리에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표준새번역)는 말 가운데 ‘이끌다’(lead) 또는 ‘끌린다’(leading)는 말은 ‘다스린다’(ruling)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Oswalt는 이사야 7-12장에 걸쳐 하나님은 거만한 군주가 아니라 ‘어린 아이’를 다스리는 자로 택하셨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이 경우는 가장 적절하지 않은 해석이다. 11장 이전의 ‘한 어린 아이’(yeled)에 대한 언급은 그 어린 아이가 성장했을 때 모든 미래의 소망에 대한 표징인 반면 여기 11장에서는 이제 성인이 된 다윗 왕가의 통치자와 함께 예상되는 향후 미래에 대한 그림으로 나오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추가로 부기할 것은 사 11:6-9에 나오는 ‘어린 아이’에 대한 히브리어 용어는 세개나 되는데, 하나는 11장 이전에 나오는 ‘어린 아이’ 구절들에서 사용한 비존재(none being)를 가리키는 것들로: 어린 사내아이(little lad) 를 뜻하는 na’ar
qaton과 젖먹이 어린이를 뜻하는 yoneq, 그리고 젖 뗀 아이를 뜻하는 gamul 뜽 세개다. 실제로 11장 이전에 사용한 낱말 yeled는 11장에서는 어린 암소와 곰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사 11:7).
그러나 “어린 아이가 그것들(동물들)을 이끌고 다닌다”(사 11:6 표준새번역)는 말은 동물계의 복종으로 말미암아 인정된 인류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즐겁고 기쁜 모습과 함께 어린이의 장난치는 행동에 이어 상함이나 지배함 없이 그저 즐거운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것일까? 어린 아이들의 탐색적 놀이를 바라보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이러한 어린 아이의 장난은 어린 암소와 곰이 ‘함께 엎드린다’(사 11:7)는 묘사와 어울리고 ‘어린이’에 대한 다른 용어는 이미 주목한 바 있다.
Brueggemann 또한 사 11:6-9을 사 11:1-5를 연결시킨다. 허지만 다윗 왕조 통치의 경제적인 차원과 창세기 3장과의 연결에 주목하면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즉
인간관계의 왜곡은 창조 안의 모든 왜곡의 뿌리이다. 창조 질서 안의 평화로움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인간 공동체 내의 화해가 무엇보다 먼서 이루어져야 함을 요구한다.
Tucker는 사 11:6-9와 사 11:1-5 두 신탁이 본래 연결된 것인지 불확실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사 11장 2절과 9절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두 번 반복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 11:6-9과 11:1-5을 분리하여 취급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 짓는다. 이러한 이유로 그 역시 정의의 확립과 공의 사이의, 그리고 인간 세계의 평화와 변화(transformation) 사이의 연결을 긍정하고 있다.
2. 동물들의 중요성
사 11:6-9에 나오는 여러 어린 아이에 대한 언급은 동물들에 대한 언급이 문자 그대로임을 보여준다. 여러 주석가들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 동물 언급이 나라들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사자로(사 5:29), 아람과 블레셋을 삼킨다(사 9:12)다는 말로 동물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Sawyer는 지혜문학에서 인간의 행동을 동물의 그것과 병행하여 비유한 것을 많이 끌어와 여기 이사야서에서 강자, 약자, 착취자; 궁핍한 자, 그리고 취약자에 대한 언급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과거 주석가들이 ‘인간의 여러 영적 상태’를 언급하면서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결론들은 에브라임(이스라엘)과 유다의 사이가 평화롭게 되었다는 설명(사 11:13, 사 9:19-21의 반전)으로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유적인 언어사용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Wildberger가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본문이 우화적으로 해석될 의도였다면 근본적으로 본래의 것과 다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동물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고 어린 아이에 대헤서
는 말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점에 더하여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된다. 즉
본문의 우화적 의도는 어린 동물들도 포함할 가능성이 있는가? Tucker는 그 반
대로 이사야 1장에서 39장에는
우화(allegory)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상징성이 있을 때, 그것은 뜻을 풀이하거나 분명히 밝히고 있다(예: 사 5:1-7).
그러나 사자들이 육식을 하지 않고 풀을 먹고 독사들이 독을 뿜지 않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Towner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종말 날에 우리가 알고 있는 먹이 사슬을 폐지(廢止) 하시고 우리 모두를 광합성
식단을 취하도록 하시기 까지 또는 그렇게 하시지 않는 한 동물들을 사냥하고 죽이고 먹는 일이 무한정 계속될 것이다. 달리 어떤 방도가 없는 것이다.
확실히 변화가 있을 것이다. Oswalt는 ‘다른 해석을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고 ‘비유적’ 의미(figurative
sense)를 제안
하고 있다. 그러나 광범위한 그림 때문에 Wildberger의 미래에 대한 신화적
묘
사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동물들의 관점에서 그 구절을 바라 볼 때 거기에는 한층 더 더욱 중요한 특징적
모습이 있다.
성서 기자는 동물의 생리 실태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고 대신 장차
이들 모든 동물들을 위한 장소를 보는 데 관심이 있다. 동물들을 제외하는 에스
겔과 달리(겔 34:25-27) 이사야의
비전은 어떻게든 모두가 제 몫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어린 아이들이 장차 미래의 왕국에 있는
것과 똑같이 전체 동물 가족들도 거기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동물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사 11:9).
어떤 주석가들은 이러한 개념 해석에 곤란을 겪었고 사 11:9 말씀
이전의 말씀
과 분리하여 해석하려 하였다. 혹은 다른 주석가는 ‘해하고 상하게한다’는
동사의
주어를 비인칭 존재로 보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중심적 전제
때문이 아닐
까? 그러나 ‘소도 제 임자를 알아본다’고 말할 수
있는 이사야라면 (동물들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어색한 일일까? 이사야서 전체를 읽어 볼 때 창세기
외에 오직 이사야만 대 홍수 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사 54:9,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의미
심장하게
도 이 약속은 모든 동물들과 함께 있었던 노아에게 주신 약속이었던 것이다.
3. 사 11:6-9과 65:25 사이의
관계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세가지
관점을
비교해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1) 사 11:6-9은 다윗 왕국의 회복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반면
사 65:25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사 65:17-25)이라는 것이다. 지상의 왕이 사 40-66장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오직 사 55:3의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뱆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는 말씀 외에 그 초점이 왕이신 야웨 하나님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장차 미래의 조화 화목 가운데 야생동물과 가축들이 함께 있다.
(2) 사 65:25에는 어린 아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그 앞 절인 사 65: 20, 23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사 65:25의 동물들은 (어린 아이와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3) 사 65:25의 특징적 모습은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라는
언급이다. ‘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분명 창 3장 이야기를
가리키고 있다. 뱀의 해함도 상함도 사라지고 없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이사야 11장에서 보는 것처럼 미래의 비전은 변화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변
화는 인간 사회의 변화 뿐만이 아니고 동물들이 차지할 곳이 없는 영적 영역의
변화뿐만도 아닌 전체 실제 현실 세계(세상)의 변화다.
사 11:6-9과 65:25 두
곳 모두 눈에 띠는 것은 다시금 에스겔서와 비교해 불 때(예: 겔 34:25, 28)’거룩
한 성산’ 지역에서 모든 동물들을 위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신성
한 장소는 모두 다 환영한다. 에스겔의 경계 설정과 비교해 보면 이사야는
공동
체 안의 경계설정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성전 안에서조차 외국인과
내시라도 동
등한 권리를 가지고 환영하고 있다(사 56:3-8). 이사야의 비전은 동물들도 포용하
고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인간의 동물들에 대한 태도 사이의
연관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이사야서 전체를 통하여 동물들은 지구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그 이상이다. 야생이든 가축이든 저들의 위신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장차
거룩한 성산의 예배하는 생활에 대한 비전은 동물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사야에
게 미래의 뚜렷한 핵심은 성전 에배가 아니라 지구공동체이다. 바로
그 지구 공
동체에서
모두가 상호의식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고 해됨
도 상함도 없는 그런 곳이다. ‘해하는’ 동물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동 물들은 인간들과 더불어 변화를 공유한 것이다. (이것은 생태정의 6원칙 가운
데 상호연결의 원칙과 목적의 원칙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것들은
성산에서 여
호와를 아는 지식에 동참하고 있다.
현재를 위한 본문의 타당성
수세기에
걸쳐 주석가들은 이러한 이사야서의 구절들로부터 현재의 세상 자체가
좋은 것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흔히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 동산 묘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전 조화의 시기로 종말론적 회귀에 초점을 맞추었다. 쟁론, 설명의 상세함 및 그 뉘앙스는 달랐지만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가들이 원래 의도한 동물의 행동으로부터 모종의 왜곡을 보려한 것은 공통되고 있다. 심지어 평화롭고 자연 그대로 본래의 깨끗한 왕국의 실체가 논의되는 곳에서조차 미래에 대한 묘사는 상함이 없는 야생동물과 가축을 모두 포함한 조화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동물계의
다양성과 동물들이 여호와를 공경할 가능성에 대한 상세한 확언으로 뒷받침된 사 11:6-9과 65:25의 이미지와 함께 이사야서에 표현된 전체 설명으로 말미암아 고무된 것이 분명하다.
장차 미래에 대한 예언자들의 묘사는 단순한 예측 또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의도한 것이 아니고 현재의 합당한 행동적 응답을 고무하기 위한 방편들이라는 것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다. 이 점은 흔히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고 신뢰하며 올바르고 참된 것과 의로운 것을 행한다는 인간의 응답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주석가들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물계 내의 조화에 대한 묘사와 모든 동물들과 인간들 사이의 조화에 대한 묘사에 의하여 가상히 여김을 받을 수도 있는 태도나 행동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자연의 미래에 대한 성서적 묘사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라 도덕적 주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1996년 생태학적 관심사에 힘입어 동물들을 인간의 이익을 위한 존재라고 보는 대신 동물들을 존중하여 인간이 동물들과 맺는 상호관계의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논문 두 편이 발표되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겨우 광범위한 지구 공동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Webb은 생태계의 상호 연결은 개별 유기체의 운명이 어떻든 간에 본래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생태학자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디서나 그리고 동물들을 포함하여 각자 모두를 위하여 고난고통은 잘못된 것이라는 기독교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고 장차 닥아오는 세상에서 동물들과 인간들이 함께 묶여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이란 그 스스로 상당히 잘 작동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에 폭력을 부추기거나 장려하거나 강화해서는 안되고 해변으로 쓸려 온 고래와 같은 개별 동물들에 대하여 걱정해야 하며 농장에서 일하는 가축처럼 이미 우리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들 취급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한 학술지에 신학과 생태학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글을 쓰면서 Towner는 또한 위에서 언급한 오랜 전통을 유지하는 가운데
에덴 동산의 생명을 주는 호혜(互
惠) 관계는
종말에 되풀이될 것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먹이사슬에 가하는 폭력에 대한 신학적 근거의 일부를 비판하면서 그는 미래의
비전은 예기적(豫期的) 행동조치(proleptic
action)를 촉구한다고 한다.
즉
만일 평화가 신시대의 특징이라면(사 11:1-9) 이 고난의 시기에 우리의 일은 전쟁을 폐기하고 사람들
사이에, 또한 사람과 이리와 뱀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다,,,장차
미래에 대한 성서의 그림들은 현재의 전체 치유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베계층적인 윤리적 생활방식을 향한 조장(助長)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몸과 물질을
타락한 것이라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육식을 하지 않는 사자와 독을 내뿜지 않는 독사란 현재 자연 질서 안에서는 불가능하다(인간의 자존심이 존재하지 않도록 인간의 태도와 행동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러나 예언자적 비전은 그러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함께 다양성과 개성과 평화를 보는 예언자적 비전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지금 폭력을 최소화하고 조 화와 화해를 향상 진작(振作)하기 위한 도덕적 요구에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창세 이후 먼 뒷날 사도 바울의 권고를 확대 부연해 보자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사람들과 화목할 뿐만 아니라 지구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 모두와도 화목해야 할 것이다!
@
현재의
세상은
좋은
것에
미치지
못한다.
(참고:
Norman C. Habel,Reading from the Perspective of Earth, The Earth Bible
Volume One,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p. 24. 다소 의역 추가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