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육신, 악마
죄와 대속론 중심에서 사회악과 변혁 중심으로
the world, the flesh, and the devil
What do we do with evil?
목차
들어가는 말
세상, 육신, 악마
바울의 영적인 천재성
우리는 모두 악에 공모하여 이윤을 취한다
죽음이 숨어 있는 장소
탈출구
폭력의 악순환
죄의 체제에 대한 예수의 비판
어떻게 생존하고 심지어 번성할 것인가
사랑과 용서
바울의 변증법
긴장을 유지하기
요약
들어가는 말
먼저 우리는 추락(fall)해야 하고, 다음에는 그 추락으로부터 회복하는데, 그 둘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이다.
— 노르위치의 줄리안
노르위치의 줄리안(1342-1416)은 내가 좋아하는 여성 신비가로서 나를 해방시키는 많은 허용, 가능성, 도전을 주는데, 내가 그녀의 충격적인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그녀의 이 말이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 즉 죄(sin)라는 개념과 악(evil)이라는 섬뜩한 개념을 우리가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독자들이 곧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죄부터 시작하자. “죄”라는 말이 성서에서는 가장 흔한 개념일 테지만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많은 집단들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들 대부분이 악과 결점(명백한 것 이상이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죄”라는 말 자체가 대부분의 대화에서 옛날식 용어인 것처럼 보이며,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거나 명료하게 만들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죄라는 말은 대화의 본래 흐름을 벗어나게 만드는 곁길, 심판이라는 구덩이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나는 이런 사태를 전반적으로 보고 있는데, 진보적인 사람들은 죄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은 죄라는 말을 정의하지 않은 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죄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죄를 우리의 작은 문화적 범주들 속에 집어넣은 채 정말로 큰 의미에서 죄라는 것이 얼마나 파악하기 어렵고 깊고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의 문화와 종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죄를 정의해왔기 때문에, 죄라는 말 자체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금요일에 육류를 먹는 것은 실제 악(actual evil)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단지 교회의 오랜 규약과 실천과 모순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금요일에 육류를 먹는 것은 일요일에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16세기 이래로 “죽을”(mortal) 죄라고 불렸다(요한 1서 5:16-17에 근거한 것인데, 여기에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말한다). 정말 그런가? 이런 깨달음은 하느님을 “마음 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불신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실제로는 단지 크리스천 습관들을 거스르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죄와 진짜 악(true evil)이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발견했다. 진짜 악은 항상 치명적이다. 죄는 본래 흔히 필요한 경계선 표지였지만, 항상 객관적 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에 항상 치명적이거나 “죽을” 죄는 아니다. 심지어 가톨릭의 정의에서도 대부분의 죄는 “경미한” (venial) 것으로서 용서할 수 있거나 변명할 수 있는 것,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우리는 “죄”라는 말에 객관적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에 우리는 죄라는 말을 사용해서 대개 몸의 정결 규정과 관련된 다양한 금기들(taboos)과 문화적인 기대를 지칭했다. 일반 여성들이 긴 옷을 입고 두건을 두르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미덕으로 간주되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국가에서는 억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통파 유대인들에게는 금지되었지만, 서양의 대부분의 가족들에게는 아마도 한 주간에 가장 바쁜 날일 것이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주일날 춤을 추고 술을 마셨지만, 남침례교인들은 이런 행동을 매우 추잡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우들에서 객관적인 악과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실제로는 악의 개념 자체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면서 진짜 악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고 있는가? 기억하라. 히틀러의 제3제국은 공식적으로 국민 절반이 가톨릭이며 나머지 절반은 루터교 신자들인 국가에서 생겨났다.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이유는 독일의 그 모든 교회들과 신학교들을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과연 죄를 “올바로” 또는 “사실적으로” 정의하는가? 누가 과연 악을 “올바로” 이해하거나 유익하게 이해하는가? 나는 예수와 바울 모두 죄와 악을 올바로 이해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죄가 덜 유용한 개념이 된 이유는 우리가 진짜 악의 치명적인 성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다른 영역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악이 매우 실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파괴하는 진짜 악이라고 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라고 부르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처럼 보인다. 이제까지 죄는 대부분 개인적인 잘못이나 과실, 또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사적인 불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사실상 악의 끔찍한 성격을 전혀 묘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죄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흔히 죄라는 말을 들을 때 남을 심판하고 배제하며 통제하거나 아니면 우리들 자신에게 수치를 주거나 통제하는 말로 사용될 뿐이지, 인간의 상황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나 용서는 차치하고라도 그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나 분별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종교나 문화가 더욱 죄에 사로잡힐수록, 그 사람들은 더욱 사랑이 없거나 생각이 완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많은 동질적 이슬람 국가들의 수치에 근거한 문화들, 유대교의 부족적이며 문화적으로 무비판적인 형태들, 웃음기가 전혀 없던 칼빈주의자들의 제네바, 뉴잉글랜드의 잔혹한 청교도들, 많은 루터교인들의 은총이 없는 믿음, 스페인 사람들과 대부분의 종족 중심 가톨릭의 종교재판적인 사고구조(Inquisitional mindset)를 보라.
만일 우리가 정직하며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는 종종 실제 악(actual evil), 즉 “공중의 권세를 잡은”(에페소서 2:2) 것처럼 보이며, 또한 그것이 세상에서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규범(the norm)이라고 할 수 있는 실제 악을 분명히 본다. 사실상 악은 흔히 문화적으로 동의를 얻고 존중받으며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으로서, 국가가 전쟁에 참여할 때, 군사비 예산을 집행할 때, 필수품보다 사치품을 선호할 때, 오락물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를 때, 물과 공기를 오염시킬 때, 그런 것을 정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볼 수 있다. 악은 개인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이 되기 이전에 집단적이며 존중받으며 필요한 것처럼 간주된다. 사도 바울(또는 바울학파)이 에페소서 2:1-1에서 압축적으로 세 가지 점에서 매우 교육적으로 쓴 것처럼, “여러분도 전에는 여러분의 생활방식을 이루곤 했던 범죄와 죄로 인해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이 세상의 원리들에 따라 살고 있었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에게 복종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구절은 최소한 악의 세 가지 원천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1) “여러분의 생활방식을 이루곤 했던 범죄와 죄”(이미 범죄적이며 죄가 많은 문화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 (2) “이 세상의 원리들에 따라 살고 있는 것”(대부분의 문화가 가치, 위엄, 성공에 대해 잘못되거나 피상적인 합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3) 우리들 대부분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의식 세계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이런 망상들과 착각들이다. 이런 것들은 마치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우리를 “지배하여”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만든다. 이 원천들은 결국 육신, 세상, 악마라고 부르는 악의 세 가지 고전적 원천들인데, 이것들에 대해 곧 길게 설명할 것이다.
세상에서 (주로 지난 20세기에) 개인들의 모든 종교적 회심들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나 도덕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 죄와 악은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문제들 이상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다. 개인적인 과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미 이런 사실을 인식할 만큼 통찰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가 가르친 것은 내가 믿기에 죄와 구원 모두 첫째로 집단적이며 사회적 현실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이런 인식은 바울이 역사에 크게 공헌한 것 가운데 하나였어야만 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그 본질적 요점을 놓친 채 기독교 국가들에서 오늘날까지 괴물과 같은 사회악(social evils)에 붙들려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집단적 개념의 유익함도 잃어버렸는데, 구원이란 개인의 가치나 무가치함의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구원을 이처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기독교 활동의 전부가 되어버려, 우리를 쪼잔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바울의 편지들 속에 기술되어 있지만, 앞에서 에페소서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근대 이전의 어휘는 더 이상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면, 바울이 편지들 곳곳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거나 아니면 상정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마치 그의 암호를 푸는 것과 같다.
나는 <보편적 그리스도, The Universal Christ>에서 구원의 사회적 개념에 관해 말했다. 여기서는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악과 죄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해 유죄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 자신의 선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함으로 인해 선하다.
나의 삶은 ‘나’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신뢰할 수 있다면, 이것은 최고로 의미가 있기 시작할 것이다. 오늘날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것을 폭넓은 방식으로 인식할 사회적 도구들, 심리학, 어휘를 갖게 되었다. 집단심리학, 게놈, 가족체계 이론, 상호의존성 연구, 자녀양육 방식들, 중독의 부자유(AA), 성인 중독자 자녀들(Al-Anon)의 예측 가능한 행동들, 지라르(Girard)의 밈 이론, 뇌과학의 많은 증거, 트라우마와 전쟁이 다음 세대들에 끼치는 영향(PTSD), 개인적 그림자와 문화적 합의 대부분의 감추어진 성격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우리가 한때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의 실제 개인적 자유의 폭이 훨씬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자유는 크게 확장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심리학과 건강한 영성 모두의 중요한 목표일 것이다. 사실상 나는 이처럼 선을 행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것이 훌륭한 심리치료와 건강한 영성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 이상 상황, 문화, 종교적 신념, 가족, 기질, 젠더, DNA, 출생 순서, 문화 자체와 별도로 개인을 이해하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요인들은 완전히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완전히 “진정한” 개인이 있을 수 있는지 묻게 만든다. 때로 우리는 모두 반항아들로부터 순응주의자들까지의 계속 변하는 저울 위에 올라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행동하는 ‘나’는 심지어 우리들 자신에게도 결코 완전하게 명백하지 않다. 나의 어머니는 여전히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드는데,” 나는 (1) 어떤 상처를 치유받거나, (2) 어머니에 동의하는 것을 배우거나, (3) 어머니와 항상 자기 파괴적 전쟁을 하거나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쁜 소식이 있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객관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으로 창조되었다면(창세기 1:26-27), 우리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기 때문에, 그 관계적인 자기는 줄어드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고 훨씬 더 향상된 것이며 자유로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모두 함께 이런 인간 조건 속에 있다. 우리들은 보편적인 영광의 각자 몫과 집단적 죄라는 보편적 부담의 각자 몫을 지니고 살아간다. 진정한 영성은 항상 원주민 종교의 머리를 땅에 대고 노래하는 만트라를 어떤 방식으로든 반복하는데, 원주민 종교는 많은 예식이 끝날 때, “우리의 모든 관계들”이라는 말로 끝낸다. 여기서 강조는 모든에 있으며, 심지어 신과의 관계도 포함된다. 무신론자들보다 더 틀렸거나 나쁜 자들은 흔히 자기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들을 배제시키는 자들이다. 불가지론자들이나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물)는 흔히 자신들이 “관계 맺음 없이” 활동한다. 장 폴 사르트르에게 “지옥은 타인들”이며, 프리드리히 니체에게는 홀로 위에 서 있는 초인(übermensch)이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근대/탈근대 시대는 우리를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만들었고, 또한 우리의 독특함, 특수성에 거의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골로사이 3:3) 참 자기(the True Self)는 가장 근본적이며 우리가 다룰 수 있는 한 종류의 독특성이지만, 하느님의 무한한 마음 안에 닻을 내리고 있는 이 깊은 자기는 오늘날 탈근대적 서양인들에게 너무나 잘 감추어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