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십자가
<소설 예수>에서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 가로기둥을 짊어지고 처형장 언덕을 오르면서 예수는 마음 속으로 빌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해 빌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길 사거리나 성문 앞 언덕, 십자가를 지고 비틀비틀 걸어 오르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꿋꿋하게 십자가를 지면서 세상 폭력을 이기겠다고 애쓰지 마시오! 십자가는 기꺼이 짊어지고 극복해야 할 고난이 아닙니다. 막다른 길이오.”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세상 일에 개입해달라고 하느님에게 청원하는 몸부림입니다. 청원은 대답을 듣지 못하고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는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 대답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사실, 하느님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라고 예수는 믿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끝없이 반복하여 겪는 실망입니다.
<소설 예수> 마지막 7권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처형됩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면 그가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압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처형했다.’
기독교 문서를 제외한 다른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언급은 이처럼 간단합니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고 무슨 일을 했고, 왜 십자가 처형을 받았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Edvard Munch <Golgotha> 1900. 오슬로 뭉크뮤제움, 노르웨이.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고,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였다’는 고백을 바탕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시작됐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십자가의 승리’라고 불립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부활을 통한 의義의 최후 승리를 나타내는 기호가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형상을 장신구로 만들어 몸에 지닙니다.
<소설 예수>에서 십자가 처형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처형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처형인지 그려냈습니다. ‘부활’하기 위한 전단계로 겪는 의식이 아니라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십자가 처형’, 누구도 입에 올리기를 꺼려하는 사건을 눈 앞에 드러내려고 애썼습니다. 여러 자료 중, 특히 독일의 신학자 마틴 헹엘의 ‘십자가 처형’(Martin Hengel, ‘Crucifixion’)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예수야말로 한없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소설 예수>에서 히스기야와 바라바가 십자가에 매달린 이유를 사람들이 알았지만 예수가 지고 오른 십자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세상을 품으려고 애썼지만 세상은 끝끝내 그를 밀어냈습니다. 간혹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 자기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왕관과 옷을 예수에게 입혔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참혹해서 옷이라도 좀 입힐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을 남긴 부활이 있었기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는 누구일까요?
21세기에 우리가 만나는 예수는 ‘부활 승리를 한 그리스도인가,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사람 예수’인가 묻고 싶어서 쓴 소설입니다.
<끝>












5월 01, 2022
예수를 직접 만나다.
예수를 직접 만나다.
“바울로부터 시작하면 예수를 부정확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고, 예수에게서 시작하면 바울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 (‘기독교의 탄생’. 존 도미니크 크로산)
기독교 경전 ‘신약성서(New Testament)’ 27개의 문서 중에서 13 문서가 바울의 이름으로 작성된 서신(Letter)입니다. 학자들은 그중에서 7개 서신을 바울이 직접 썼거나 구술한 문서로 보는데 신약성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보다 25~30여 년 전에 쓴 서신(‘데살로니가 전서’)도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계획을 실현한 분”
헬레니즘 문화 속에 살았던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의 오랜 바램을 엮어 예수에 대한 믿음(Faith)을 처음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내용(Teaching of Jesus)’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가르침(Teaching about Jesus)’을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특별한 존재(Being)인 예수’의 의미를 밝힌 바울로부터 기독교라는 종교가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크로산의 언급이 정말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수가 샘이라면 그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아래로 아래로 흐르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질 것이고, 다른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합쳐져 각각 여러 개의 큰 냇물이 되고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틀을 잡은 기독교의 믿음대로 본다면 예수에게서 강이 시작되고 예수라는 바다에 이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가 시작이고 끝’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라고 고백되기 이전의 예수, 갈릴리의 가난한 목수 석수 집안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에 관한 얘기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이라는 볼록렌즈 안경’을 쓰고 바라보기 이전의 예수를 그렸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주인답게 세상을 사십시오. 하느님의 형상을 품은 사람, 가슴에 스며든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 사람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람을 사랑한단 말입니까?”
“사람이 자기 두발로 서서 스스로 걷지 않고 언제까지 하느님의 품 안에 안겨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소설 예수>에서 예수는 사람을 하느님에게 이끌지 않고, 하느님이 사람 속에 스며들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습니다. 세상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삶과 가르침의 결과였습니다. 가장 치욕스럽게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전합니다.
“십자가 아래 모여들지 말고, 각자 세상 속으로 흩어져 자기의 삶을 사시오!”
예수는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흩는 사람이었습니다. 흩으려면 단단하게 굳어진 것을 부숴야 합니다. 부드러워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뭉쳐서 차돌처럼 단단하지 말라고, 생명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설 예수>는 기독교에서 고백한 예수가 아니라, <사람 예수> 얘기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가 독점한 예수를 모든 사람의 예수로 돌려 드리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그의 따뜻한 음성을 직접 듣고, 아직 희망을 품고 21세기를 살아가도록 소개했습니다.
“심판 받아 멸망할 세상이 아니라, 아직 희망이 있는 세상을 살아 가십시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