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에는 모든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성서 연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결과 성서의 문자 배후에 있는 "역사적 진실"을 상당부분 밝혀낼 수 있었다. 단적으로 구약성서의 족장 이야기들, 출애굽, 가나안 정복, 영광스러운 통일왕국 건설 이야기 등은 오늘날 일반 역사학계(유대 민족 역사학이 아니라)에서 역사가 아니라, 유대 종족의 자기 정당화와 영토 확장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들로 간주한다. 그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정치신학적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 조상들이 이름도 없는 깡촌 출신이 아니라 고대세계의 파리나 뉴욕에 해당했던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다"는 뜻이다. 또는 "유대인들과 지금 원수처럼 지내는 이라크 사람들의 조상이 같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그런 이야기들을 실제 역사로 믿음으로써 오늘날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초자연주의적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주체적 책임과 이성적 판단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약 이야기들에서처럼 온갖 초자연적 기적들을 통해 구원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은 부재한다/사라졌다는 사실(홀로코스트와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보듯이)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우리의 신앙이 출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 민중들에게 자행하는 폭력과 착취를 뒷받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최근에 번역 출판된 슐로모 산드의 <만들어진 유대인> 참조하라).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가들, 예를 들어 존 도미닉 크로산,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월터 윙크, 존 쉘비 스퐁, 버나드 브랜든 스캇, 스티픈 패터슨 등을 통해서 예수의 삶과 사역, 비유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차이점들, 심지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를 왜곡한 점들은 무엇인지(특히 <비유의 위력>,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까지 상당부분 밝혀졌다. 존 쉘비 스퐁 주교와 같은 목회자들을 통해서 "예수에 관한 믿음"의 배후에 있었던 "예수의 믿음"은 무엇이었으며, 그 "예수의 믿음"은 어떻게 "예수에 관한 믿음"으로 발전/왜곡되었는지도 해명되기 시작했다(특히 <만들어진 예수, 참사람 예수>, <마태복음: 유대인 예배력에 따른 예수의 의미> ). 단적으로 예수에 관한 믿음의 대표적인 사례인 동정녀 탄생 고백이 생겨난 역사적 원인들도 밝혀졌다(<첫 번째 크리스마스>).
그러나 신약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에게는"예수의 믿음"과 "예수에 관한 믿음"의 연관성에서 아직 충분히 역사적으로 해명되지 못한 질문들이 몇 개 남아있다. 나의 공부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메시아/그리스도와 관련된 질문들이다.
첫째 질문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볼 때, 예수는 결코 왕적인 존재로 행세하지 않았지만 동방박사들을 통해 "유대인의 왕"으로 출생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또한 빌라도에 의해서도 그런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왜 그런가? 무슨 이유로 예수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는가?
둘째로, 예수가 부활, 승천해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는 믿음, 그리고 조만간 재림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절 체험에서 비롯되었지만, 승천과 재림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승천과 재림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 역사적 경험은 무엇이며, 히브리성서에서의 본문적인 원천은 무엇인가?
셋째로,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수없이 밝혔지만,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고, 당시의 자칭 메시아들(주로 무장투쟁을 촉구했던 이들)과 달리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되었다. 왜 그런가? 당시 로마황제에게 붙였던 칭호들(주님,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등)을 가져다 예수에게 붙인 정치적-선교적 이유가 전부였을까? 당시 지중해 지방에 유행했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베낀 것이라는 주장(<예수는 신화다>)이 과연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된 과정의 전부였을까?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divine-man 이미지를 부여한 것인가? 월터 윙크의 기념비적인 연구서 <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에서는 "사람의 아들" 기독론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치밀하게 밝혔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정은 해명이 미진한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갑작스런 십자가 처형 이후, 그런 외래적인 영향보다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메시아 기대, 특히 사해두루마리에 나타난 메시아상 가운데서 그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예수 자신은 어떻게 판단했을 것인가? 지그문트 모빙켈이 1955년에 발표한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예수는 메시아 사상을 "사탄의 유혹"으로 간주하여 배격했는가? 또한 로즈마리 류터는 예수가 "안티 메시아였다"고 주장한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메시아는 (십자가 처형을 비롯해서) "폭력이 구원한다"(redemptive violence)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예수는 리처드 로어 신부의 표현대로 "고난과 용서가 구원한다"(redemptive suffering/forgiveness)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평생 가르친 존 콜린스가 1995년에 발표한 책 The Scepter and the Star: Messianism in Light of the Dead Sea Scrolls 마지막 장에서, 기원후 1-2세기 유대인들 가운데 나타난 자칭 메시아들의 형태와 사해두루마리에 나타난 메시아상들의 연관성을 개괄적으로 살핀 후,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상들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지적한다. 조만간 그 마지막 장만 번역을 하든지, 아니면 소논문을 쓰든지 할 작정이다.
목차
제2판 서문
초판 서문
1장. 메시아주의와 사해사본
2장. 다윗의 무너진 초막: 메시아주의와 히브리성서
3장.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
4장.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들
5장. 교사, 사제, 그리고 예언자
6장. 하늘의 보좌
7장.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
8장.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
9장. 행동으로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꿈










9장 행동으로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꿈
앞장들에서 우리는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뀔 즈음에 유대교 안에서의 메시아에 대한 네 가지 패러다임들, 즉 왕, 사제, 예언자, 그리고 천상에서 내려온 메시아 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네 가지 패러다임들에 대한 증거를 살펴보았다. 그 패러다임들이 항상 뚜렷하게 구별되지는 않았다. 사제 모티브와 예언자 모티브는 쿰란의 종말론적 선생에 대한 기대 속에서 합쳐지고 있다. 천상에서 내려온 메시아는 국가의 왕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필로는 모세를 왕, 사제, 예언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처럼 합성적인 인물은 예외적이다. 역사적으로 하스몬가 사람들은 사제직과 왕직을 결합시켰으며, 요한 힐카누스는 더 나아가 예언의 능력까지 있었던 것으로 말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처럼 직분들을 결합시킨 것은 기원전 2세기 말과 1세기 초반에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다시 유행하게 된 데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고, 이것은 그 직분들을 구별짓고 또한 메시아의 복수성을 주장하는 경향으로 이끌었다.
그 자료들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인물들을 가리켜 “메시아” 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현대 학문에서 혼란을 초래했는데, 마치 이런 다양한 인물들이란 메시아 개념 또는 메시아상(Messiahbild)에서 서로 바꿔가면서 사용할 수 있는 측면인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뀔 즈음에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총칭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다윗 가문의 왕적인 메시아, 또는 아론의 사제 메시아, 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였다. 그 직분의 결합과 변경은 가능했지만, 예언자적인 인물이 “메시아”라는 덕분에 왕이나 사제가 되지는 않았으며, 왕적인 인물이 자동적으로 사제나 예언자가 되지도 않았다. 서로 다른 메시아 패러다임이 있었던 것이지, 메시아라는 하나의 복합적 개념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사해두루마리와 위경에 나타난 메시아 본문들은 당연히 문헌자료들로서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서기관들 계급의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문들이 대중들의 희망/기대와 연관성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쿰란 문서나 솔로몬의 시편을 메시아와 연관시켜 주석한 것이 기원전 1세기에 어떤 대중적 메시아운동으로 이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서기관들과 일반 대중 사이의 격차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되풀이해서 보았던 것처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은 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들 성서의 내용은 고대 유대교의 구전문화의 한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관 문화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예언자적 운동
성서적 패러다임들의 영향이 가장 분명히 나타난 것은 기원후 1세기에 나타난 여러 예언자적 인물들에서다. 요세푸스는 파두스가 유다지역 총독이었을 때(45년경), 드다(Theudas)가 “일반 대중 대다수로 하여금 자신들의 소유물을 갖고 자기를 따라 요르단 강으로 가도록 설득했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이며 자신의 명령으로 강이 갈라져서 쉽게 건널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Antiquities 20.97-98)고 전해준다. 그의 이런 행동의 상징성은 명백히 여호수아를 상기시키는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호수아 앞에서 요르단 강이 갈라졌다고 전해졌다. 그것은 또한 출애굽 때 바다가 갈라진 것을 상기시켰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모두를 환기시켰을 수도 있다. 헹엘은 드다가 신명기 18장에 따라 자신을 되살아난 모세로 간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를 따른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요세푸스는 그가 “일반 대중 대다수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도록 설득했다고 말한다. 그 숫자가 사도행전 5:36에는 가말리엘의 말로 “약 400명”이었다고 한다. 가말리엘은 드다의 운동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비롯된 운동이라서 실패한 사례로 말한다.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모티브는 호세아 2장과 이사야 40장에 성서적 선례가 있으며, 기원후로 바뀔 무렵에 쿰란 공동체 규칙과 세례자 요한의 경력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박한 개입과 종말론적 시대의 시작을 암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드다의 추종자들이 출애굽에서처럼 무장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요세푸스는 이런 점을 시사하지 않았다. 드다의 운동은 파두스가 진압했는데, 그는 기병대를 보내 드다를 참수했고 그의 추종자들 여러 명을 처형했다.
이와 비슷한 예언자 운동은 이끈 또 다른 인물은 “이집트인”(the Egyptian)으로만 알려진 인물로서, 파두스가 행정장관이었을 때(52-60년)였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에 따르면, 이 “거짓 예언자”는 “자칭 예언자로서 약 3만 명의 얼간이들을 모아 광야를 지나 올리브 산까지 이끌었다. 거기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로마 수비대를 타도한 후, 특공대들을 이용해서 주민들의 지배자가 될 것을 도모했다”(Jewish War, 2.261-62). 그러나 <유대고대사>에서는 요세푸스가 올리브 산에 간 이유를 다르게 설명한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명령으로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질 것이며 그들이 그 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Antiquities 20.169-71). 여기서도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리고가 파괴된 경우처럼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위대한 패러다임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보게 된다.
<유대전쟁>에서 요세푸스는 그 이집트인이 무력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민들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유대고대사>에 나오는 예언자적 징표(prophetic sign)는 그가 오히려 하나님의 개입에 의존했음을 암시한다. 이집트인의 포부에 대한 이야기들은 의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에서의 혁명적인 선동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실제로 그 이집트인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으로 기대했다면, 그의 기대는 자신이 로마인들 대신에 통치하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런 기적은 분명히 구체적인 변혁의 서막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도망쳤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로마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밖에도 기원후 1세기에 운동을 이끌었던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요세푸스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한 사마리아인이 군중을 이끌고 그리심 산으로 가서 그들에게 “모세가 감추어두었던 곳에 묻혀 있는 거룩한 그릇들”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Antiquities 18.85-87). 모세가 왜 그 성스러운 그릇들을 감추었다고 생각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을 모세와 연관시킴으로써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종말론적 예언자로 내세우려 했을지 모르지만, 이 경우에는 그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 이번에도 로마 기병대는 그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막았다.
요세푸스는 행정장관 페스투스 시대에 시카리파(sicarii), 즉 “단검 소지자들”의 등장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들뿐 아니라 또 다른 악당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의 손은 더 깨끗했지만 그들의 의도는 더 불경한 자들로서 도시의 평화를 파괴한 암살자들보다 덜 하지 않았다.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라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구실로 혹세무민하는 그들은 많은 무리를 설득해서 미친놈들처럼 행동하게 만들었고, 또한 하느님이 광야에서 그들에게 구원의 징조를 보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을 광야로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펠릭스는 그들의 이런 행동이 반란의 초기라고 간주하여 기병대와 중무장한 보병대를 파견하여 많은 무리를 도살했다. (Jewish War 2.258-60)
이런 예언자들이 내세운 “표징들”은 드다와 그 이집트인의 행동들과는 다른 종류라는 주장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그 이집트인에 관한 에피소드를 “더욱 악한 광풍”이라고 묘사했다. Jewish War 2.261). 페스투스 시대의 이름 없는 예언자들의 표징들은 그들 자신의 진정성을 뒷받침해주는 기적들로 간주되었지만, 드다와 그 이집트인의 표징들은 하느님의 해방적 활동들이었다. 요세푸스는 그런 진정성을 뒷받침해주는 기적들을 표징들이라고 불렀지만, 바다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기적들을 신의 현현이라고 불렀다. 그런 구분은 모호하다. 드다와 그 이집트인의 행동들은 하느님의 구원 행동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예언자들의 신뢰성을 확증해주며 또한 구원의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표징들이었다. 요르단 강이 갈라질 것이라는 드다의 주장은 원래 여호수아가 강물을 갈랐던 것과는 다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패러다임을 재현하는 것은 그 원래의 기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표징”이다. 페스투스 치하의 예언자들이 의도했던 표징들이 어떤 종류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것들이 드다와 그 이집트인의 표징들과 다른 종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기원후 70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구원의 표징”을 약속했던 또 다른 예언자도 있었다(Jewish War 6.283-87).
요세푸스는 이런 예언자적 인물들이 대중을 선동했다고 비난하지만, 그들 자신이 폭력적인 혁명가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우리의 현재 목적을 위해 관심을 끄는 것은 성의 패러다임과 정치적 활동이 교차하는 부분이다. 요르단 강이 갈라지고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성서의 패러다임들에 덧붙여, 이런 예언자들이 전형적으로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광야로 이끌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게릴라 전술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런 예언자들의 경우에는 출애굽을 재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그 각각의 경우에 그런 선동으로 이끈 직접적인 사회역사적 상황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드다와 그 이집트인의 경우에는 성서가 그들의 행동의 모델을 제공했다. 예언과 성취의 패턴은 단지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서 서기관들만이 행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패턴은 로마 시대에 유대인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