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수잔나 헤셸 (2021)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가 경제적인 위기이든, 바이러스성 위기이든, 정치적 위기이든, 환경적 위기이든 간에 그 복합적 성격을 고려할 때, 절망하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상기시켜주시곤 했던 것처럼, 절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절망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들 가운데 극복할 자원들이 없이 주어진 도전들은 없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그런 자원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예언자 전통에서 희망에 대해 말한다. 예언자들은 우리가 타락, 비참함, 절망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제공하는 희망이 피상적인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침묵 가운데 고뇌하는 이들을 위해 외치고, 불의에 맞서 분노하고, 말 한 마디마다 열정이 넘쳐나는 예언자만이 “악은 결코 역사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다”라는 희망, 구원이 올 것이라는 참된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
나의 아버지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위기들은 종교적 문제이기도 하다. 즉 “하느님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민감성을 체계적으로 말살시킨다”는 점에서 종교적 문제이다. 그 말과 더불어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찾으셨다.
종교는 당혹스러움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누가 사람이냐>에서 말하셨다. “성격과 도전, 지각(知覺)과 현실, 지식과 이해, 신비와 인식 사이의 부조화를 깨달을 때 우리는 당황한다.”(이현주 역, 143쪽) 아버지는 “하느님은 말이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하곤 하셨다.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적인 삶을 순수하게 정련하고, 양심을 예리하게 만들고, “기도는 행동이며 사건이다”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에 대한 외경이다”라고 성서는 자주 말하는데, 나의 아버지는 이 말을 풀어서, 당황함, 체면이 깎이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당황하면 우리들 안에 여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종교인들은 결코 자기 확신을 갖거나 의기양양할 수 없다. 그들이 결코 “나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항상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쪼잔함, 편견, 시기심, 속임수, 비루함에 대해 한 번도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은 사람들이다.” 당혹스러움은 생산적이어야 한다. 당혹스러움의 종착역은 우리의 인간성을 위협할 무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당혹스러움에서 멈추지 않았으며, 종교를 자기비하의 한 형태로 생각하지도 않으셨다. 그와는 반대로 종교는 하느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사람을 찾는 하느님>에서 말씀하셨다. 자연을 명상하면서 하느님을 발견했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들도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성서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공부를 통해서 그럴 수 있는데 나의 아버지는 촌각을 아끼면서 공부에 전념하셨다. 그리고 성스러운 행동들도 있다. 무엇이 행동을 성스럽게 만드는가? 아버지는 <안식>에 나오는 놀라운 글귀에서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만든다고 지적하셨다. “안식일은 하느님이 세상에 현존하시면서 인간의 영혼에 자신을 열어놓으시는 것이다.”거룩한 행실은 토라의 미츠봇(mitzvot, 계명)으로서, 여기에는 기도도 포함된다. 아버지는 미츠봇이 행실 형태의 기도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1965년 셀마에서 민권 행진에 참여하신 후 돌아오셔서, “나는 내 다리가 기도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에게는 흑인들의 정의를 위한 행진이 거룩한 기도 행위였다.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하느님을 인식하면 우리의 삶이 단지 선물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느님에 대한 증언이 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명령이라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정말로 우리의 삶은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을 우리의 세상 속으로 모셔오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주 인용하신 오래된 하시디즘의 가르침은 언젠가 한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와 “하느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자, 그 랍비는 “시편 기자가 ‘온 세상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느님은 당신이 하느님을 들어오시게 하는 곳에 계신다”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땅은 주님의 것>(The Earth Is the Lord’s)에서 “모세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계시를 가졌다. 바알 셈(하시디즘의 창시자) 시대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계시를 가지셨다. 유대인들의 삶에서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거룩함이 갑자기 계시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된다는 것이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사람으로서 타인들을 섬기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면, 유대인들의 삶의 목적은 하느님에게 인간의 거룩함에 대한 계시를 제공해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이 세상에 들어오시게 할 수 있는가? 나의 아버지는 강연에서 청중들에게 이런 당혹스러운 질문을 하시곤 하셨다. “하느님이 언제 십계명을 깨뜨리셨는가요?” 청중들이 어리둥절해 할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십계명은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아버지의 요점은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유일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상기하게 되도록 산다는 뜻이다. 나의 아버지는 종종 옛 미드라쉬(랍비들의 주석)를 인용하셔서 “나는 하느님이고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다. 너희들이 나의 증인이 아니라면,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말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하느님의 증인으로 살라는 이 명령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으셨다. 특정 종교에 단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며, 유대인으로 사는 특수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Man Is Not Alone)에서 아버지는 오래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하느님의 계시는 각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하느님 경험이라고 말씀하셨다. 토라는 우리들 각자에게 오는 하느님의 계시로서 각자는 그 계시를 독특한 방식으로 받으며 매일 새롭게 받는다. 어느 하나의 길만이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종교는 우리들 각자에게 진정한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독특하기 때문에 각각의 표현도 독특하다. 우리들은 할아버지 세대의 방식으로 유대인일 수 없다. 그것은 영적인 표절이 될 것이다. 즉 “생동력이 넘치는 사회는 옛 사상과 관점의 그늘 속에 머물지 않는다. 영의 세계에서는 오직 개척자만이 참 상속인일 수 있다. 영적인 표절의 대가는 정직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과장하는 것은 자기를 배반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전통의 되울림 이상이다. 그것은 창조적인 상황이며 사건이다.”
우리의 종교성이 우리들 개인에게 진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코츠크의 랍비 므나헴 멘델의 오래된 가르침인데, 그 랍비에 관해 나의 아버지는 이디시 어로 두 권으로 된 책을 쓰셨다. 이 코츠커 랍비는 복잡하며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진실, 성실, 진정성을 주장했으며 거짓말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생애 말기에 그 책을 쓰셨는데, 당시에 아버지는 베트남전쟁에 적극 반대하셨다. 그 전쟁은 아버지를 병들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미국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무고한 시민들 수천 명을 죽이는 정부의 매정함에 분노하셨다. 그러나 왜 미국인들은 정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는가?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지긋지긋했지만, 미국인들의 멍청함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종교적 문제라고 나의 아버지는 느끼셨다.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기를 원할 수 있다. 속이지 말라고 코츠커의 랍비는 주장했다. 그것은 스스로 멍청하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