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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기연 2026.09.16 09:46 글쓴이

    『GUAPA』 2025년 영국판 서문

    2011년, 나는 모로코 지중해 연안의 어느 지방 소도시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친구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전의 나라면 이런 여행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한 해 전, 나는 직장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계약이 끝났고, 근무지를 옮기라는 고용주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런던에 온 지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도시에 남고 싶었다. 하나는 현실적인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은 이유였다. 첫 번째는 런던을 떠나면 비자를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통적인 경력의 길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서구 국가의 여권을 얻는 편이 내게 더 유리하리라고 계산했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런던이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졌고, 런던에 사는 한 남자와도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관계가 지금까지 닫혀 있던 내 안의 문들을 열어줄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평생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어느 곳에서도 완전히 내 자리를 찾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던 나는, 한곳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배워야 할 무언가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정은 나를 두려운 공백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실업자였고, 눈앞에 마땅한 일자리도 보이지 않았으며, 이제는 비자마저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공백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내게 가져다준 수많은 축복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나를 위해 미리 설계되어 있던 삶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정해진 선 밖으로 색칠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나자, 나는 이전에는 내게 닫혀 있다고 여겼던 가능성들을 탐색할 수 있는, 달콤하리만큼 짜릿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비록 조심스러웠고 이민 신분이라는 제약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 공백은 나를 소설로 이끌었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를 사랑했지만, 나 같은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제자리를 찾아 들어맞자, 마치 그 부름이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퀴어 작가 조너선 켐프(Jonathan Kemp)가 가르치는 6주짜리 글쓰기 강좌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배운 가장 값진 것 가운데 하나는 작가처럼 읽는 법이었다. 구직 신청서를 내고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는 틈틈이 나는 탐욕스럽게 책을 읽었다.

    모로코에서 친구와 나는 일주일 내내 소설을 읽고, 햇볕을 쬐고, 허름한 술집에서 구한 해시시를 피우며 지냈다. 때는 9월이었고, 뉴스는 9·11 테러 10주년과 계속되고 있던 리비아 전쟁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는 그 일주일의 많은 시간을 지난 10년이 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되돌아보며 보냈다. 9·11 이후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아랍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씨름하던 북미의 폐쇄적인 외국인 유학생이었던 내가, 어느새 이 지역 전체를 휩쓸고 있던 변화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그 변화는 우리 세대에게 목소리를 주고 있었다.

    나는 그 봉기들에 희망을 품었다. 그 희망은 내 글쓰기에도, 나 자신에 대한 감각에도 힘을 불어넣었다. 나는 혁명들이 단지 내 개인적인 이야기의 새 장을 펼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이야기와 이 지역의 역사에도 새로운 페이지를 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 페이지를 채울 힘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이야기가 과연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어느 오후, 나는 대마초 한 대를 피우고 혼자 바다를 향해 걸었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내려앉아 있었고, 바다는 거칠고 냉랭했다. 바람이 모래와 바닷물을 세차게 휘몰아쳐 안개 같은 물보라가 대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슬리퍼를 손에 들고 텅 빈 해변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해시시 때문에 생각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자욱한 물안개 때문에 시야마저 흐려지자, 그 오후가 문득 이상하리만큼 불확실하고 거의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뜻밖의 기묘한 우울이 나를 덮쳤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해방의 우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텅 비어 있다는 감각이었으며, 동시에 그 빈 공간을 내가 원하는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그 감정 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끈적하고 거의 중독적이기까지 한 그 슬픔을 음미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하나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도 선명한 이미지여서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두 남자가 내가 걷고 있는 바로 그 해변을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종말을 맞은 도시였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를 가로질러 새로운 지평을 향해 걸어갔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발걸음이었다.

    나는 그 두 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연인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있음으로써 어떤 종류의 자유에 대한 약속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설령 그들이 찾아 헤매던 자유가 처음부터 그들 자신의 내면에 존재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승리와 힘을 품은 이미지였다. 상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성장과, 투쟁 앞에서 끝내 굴복하지 않는 끈기를 함께 담고 있는 이미지였다.

    나는 그 두 남자의 모습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런던으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초고는 숨 가쁘게 써 내려갔다. 흔히 출근하기 전 이른 아침에 글을 썼다. 아랍의 봄 혁명이 진행되던 당시 나는 평화구축 기관에 채용되어 혁명 이후의 체제 전환 과정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런던에서 썼지만 암만에서도, 베이루트에서도, 이스탄불에서도, 카이로에서도, 튀니스에서도, 트리폴리에서도, 사나에서도 썼다.

    나는 그 이미지를 향해 글을 썼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바로 저 지평선 너머의 어느 장면에서 그 이미지와 마주하게 되리라고 확신하면서.

    전쟁의 여파와 경찰의 폭력, 허위정보 캠페인, 그리고 밀려드는 난민의 물결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썼다. 낮의 직업에서는 그러한 사건들이 초래하는 정치적 결과와 씨름했고, 글을 쓸 때면 그것들이 한 인간의 삶에 남기는 흔적을 들여다보았다. 활동가들과 혁명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경험은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을 빚어갔다.

    그 시절의 여행은 소설의 무대가 되는 이름 없는 도시를 만들어낼 기회도 내게 주었다. 이 지역 곳곳을 여행하면서 나는 여러 아랍 도시의 도시적 풍경에서 이런저런 조각들을 마치 중고품을 주워 모으듯 가져왔다. 베이루트의 어느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 하나, 다마스쿠스의 재스민 덩굴로 뒤덮인 담장 하나, 암만의 요란하고 번쩍이는 로터리 하나.

    내가 가장 자주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Guapa』의 배경을 이름 없는 아랍 국가로 설정했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 문제에 있어 내가 가진 선택권은 내 눈동자의 색깔을 선택할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소설의 배경을 획일적인 어떤 ‘아그라바(Agrabah)’ 같은 곳으로 설정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적 함의를 갖게 되지 않을까 깊이 우려했다. 하지만 실제 도시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려고 할 때마다—암만, 베이루트, 카이로, 다마스쿠스가 차례로 후보에 올랐다—문장은 어색하게 굳어버렸고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

    소설을 완성하고 난 뒤에야 나는 이 이름 없는 도시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는 비밀과 안전의 문제였다. 소설의 배경을 ‘실재하는’ 어느 한 나라로 정했다면, 그 나라의—대부분 지하에서 살아가는—퀴어 공동체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이는 그들의 동의도 없이 그들을 세상에 노출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나라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나는 원치 않는 노출의 위험을 줄이면서 이 지역의 퀴어 공동체들에 대해 좀 더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결정에는 단지 실용적인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니, 나는 그 선택이 지닌 미학적·문학적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름 없는 나라는 독자에게 방향감각을 잃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독자는 라사(Rasa)처럼 동시에 낯선 사람이면서 집에 돌아온 사람이 되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람이 된다.

    어느 순간 독자는 카이로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느낀다. 다음 순간에는 베이루트의 어느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갑자기 다마스쿠스의 감방 안에 들어가 있다.

    그 도시를 어떤 하나의 범주나 이름표 속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을 어떤 범주와 이름표로 규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투하는 라사의 어려움을 그대로 메아리친다.

    나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그 격동의 세월 동안 이 소설을 썼다. 이 지역의 사건들이 잇달아 펼쳐지고 나의 이상주의와 낙관주의가 시험받으면서, 처음 내게 찾아왔던 이미지—두 남자가 손을 잡고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는 더욱 깊어졌고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결국 라사와 타이무르(Taymour)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 장면 자체는 끝내 소설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품고 있던 에너지는 책의 모든 페이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금 나는 내 생애에 목격한 가장 잔혹한 절멸 행위 가운데 하나가 벌어지고 있는 한복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지난 76년 동안 서서히 진행되어온 과정이 이제 무서운 속도로 가속되고 있다.

    『Guapa』의 배경이 팔레스타인은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 지역 전체의 해방이 걸려 있는 중심축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도덕적 심장박동이기도 하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는 한 퀴어의 해방도 있을 수 없다. 그보다 못한 것에서 ‘프라이드(pride)’를 찾는 것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깊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불타는 도시 한가운데서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라사와 타이무르의 그 이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Guapa』의 씨앗이었다.

    그 이미지 속에는 하나의 믿음이 있다.

    불길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며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원이며, 자유이며, 그렇다, 심지어 사랑이기도 하다는 믿음.

    나는 이토록 어두운 시대를 지나면서도 그 이미지를 품고 간다.

    그것은 나를 지켜주는 부적이며, 하나의 약속이다.

    살림 하다드(Saleem Haddad)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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